너무 아름다운곳을 다녀 왔습니다.
이 교수님의 안내로 시작된 이날 라이딩은 너무 더운 날이라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 보다 밥사먹을 곳도 없고 더욱이 물도 중간에 공급 받을수 없다는 말씀에 상당히 많은 짐을 메고 출발을 했습니다.
가는 길목에 만나는 나비들 그히고 개울을 건너가는 순간마다 잊혀진 옛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질만큼 아름다운 게곡속으로 우리 모두는 빠져 들었습니다.
인적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산길을 지나자 나무 한그루 없는 초지가 나타나고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오르는 업힐은 숨이 막힐듯 했지만 멀리 보이는 임도를 들어서면 나아지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속에 열심히 패달을 밟았습니다.
멀리 보이는 그 임도는 눈으로는 금방인데 내려가는 가파른 길목의 끝은 정말 이름그대로 길이 사라진 곳이 었습니다.
그 가파른 길은 다시; 타고 올라 오는 고통, 나무 한그루 없는 그 넓은 초지를 이리 저리 돌아 다니다가 결국 다시 온길로 되돌아 가는 길을 택 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무장사지 터 길에 들엉 서는 길목에 있는 계곡에 자리를 펴고 가져온 음식을 꺼내기 시작 했습니다.
하루 자고 와도 될만한 양의 음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밥을 먹으며 가져온 물이 바닥 나고 이제는 흐르는 계곡물을 마실수 밖에 없었습니다.
배탈이 겁이 났지만 마시는 계곡물을 너무나 시원하고 단맛 이었습니다.
그리고 올라간 무장사지터에서 사라진 신라 천년의 흔적을 만났습니다.
무장사지 소개 입니다
삼국유사에서
무장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인 효양 대아간으로 추봉된 명덕대왕이 그의 숙부되는 파진찬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절의 위쪽에는 미타를 모신 전각이 있는데 이는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왕후가 왕이 세상을 뜨자 지극히 슬퍼하면서 왕이 살았을 때의 아름다운 행적을 죽어서도 드날리고 그의 명복을 빛나게 하고자 생각하였다. 이 때 서방에 미타라고 부르는 큰 성인이 있어 지성으로 그를 믿고 받들면 구원하여 준다는 소문을 듣고 왕비는 "이말이 참말일진대 어찌 나를 속이리요!"하고는 즉시 자기가 입은 화려한 의복을 희사하고 궁중의 재물을 털어 이름난 재인바치(匠人)들을 소집하여 미타상 하나와 아울러 따르는 귀신무리들을 조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보다 앞서 이 절에는 늙은 중이 한 명 있었는데 문득 꿈에 신선같은 사람 하나가 석탑의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서 서편을 향하고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보고 이곳이 필시 부처님이 머물던 곳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를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곳은 바윗돌이 우뚝 솟아 있고 개울물이 빠르게 부딪쳐 흐르는 곳이므로 목수는 돌아보지도 않았고 다들 좋은 터가 못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터를 개척하자 평탄한 곳을 얻어서 큰 집을 세울 만 하고 아주 신령스러운 터나 다름 없으므로 그 터를 보는 자들은 깜짝 놀라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래에 와서는 불전은 무너졌으나 절만은 남아 있으니 세간에 전하기로는 태종이 삼한을 통일한 후 병기와 갑옷을 이 골짜기 속에 간직해 두었다 하여 이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지었다
무장사지 삼층석탑
이 탑은 원래 넘어져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63년에 탑재(塔材) 일부를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세웠다.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상층 기단부에 탱주를 두지 않고 면석 3면에 2개의 안상(眼象)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이와 유사하게 상층기단부에 안상을 새긴 탑으로는 경주남산 남산리 계곡의 한 지류인 승소곡(僧燒谷)에서 경주박물관내(박물관 들어서면서 왼편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로 옮겨온 승소곡 3층석탑이 있는데 승소곡 3층 석탑에는 상층기단 뿐만 아니라 1층 옥신에도 안상을 새기고 특히 1층 옥신의 안상 안에 사천왕상을 새긴 점이 무장사지 삼층석탑과 다르다(사진 참조).
무장사지 삼층석탑의 1층 옥신(탑신)은 가장 높고 큰 편인데 그에 비하여 2층과 3층은 급격히 작아졌다. 그 때문에 1층 옥개석이 2, 3층의 옥개석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커서 이 탑은 지대가 높은, 안내판이 있는 동쪽이나 2층 옥개석이 많이 손상된 쪽인 남쪽 보다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 서쪽에서 바라 볼 때 훨씬 아름다워 보인다. 옥신의 각 면 귀퉁이에는 층마다 우주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옥개받침은 각층이 5단이다. 1층 옥신 윗면 중앙에 네모난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현재 상륜부는 모두 없어져 복원당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을 새로 만들어 보충하였다. 무장사의 건립연대에 비추어 볼 때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탑의 높이는 4.95m이다. 보물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동댐을 타고 달리는 길은 한폭의 그림입니다.
늘 같이 다니던 다른 라이더분들이 함께 하지 못해서 많이 섭섭했습니다.
다음 기회에 같이 달려 보길 기대합니다.
돌아 오는 길에 젊은 분들의 남은 힘을 조금 빼야겠다는 생각으로 남산을 오랐습니다.
젊은 초보 근육뿐인 체육과 졸업생은 두번째 라이딩에서 엉덩이의 압박을 극복치 못해 빠지고 다시 남산을 올랐습니다.
지남해 매미의 상처로 온통길은 자갈로 덥혀서 자전거 타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kohosis.june7 젊음이 넘치는 두분만이 정상에 오르고 너무 더운 날에 나머지 모두는 길가 평상에 앉아서 그늘을 즐겼습니다.
살아 있슴이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kohosis 님은 이날 두마리의 산토끼를 만났고 커다란 독수리와 조우했습니다.
저는 이날 혼자서 산딸기를 많이 따서 먹었습니다.
덕동댐의 뒤가 어떤지 늘궁금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때묻지 않은 신랑의 천년이 아직 그대로 숨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진 찍느라 수고 했습니다.kohosis님, 길을 인도해 주신 이교수님,삼손님의 재치넘치는 말쏨씨가 더욱 분위기를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처음 장거리 라이딩을 하신 나 선배님, 업힐만 나타나면 나르는 허사장님,
초보아닌 초보 체육과 출신님,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고 글을 올려주신 모든 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글 보시고 다음에는 다같이 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교수님의 안내로 시작된 이날 라이딩은 너무 더운 날이라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 보다 밥사먹을 곳도 없고 더욱이 물도 중간에 공급 받을수 없다는 말씀에 상당히 많은 짐을 메고 출발을 했습니다.
가는 길목에 만나는 나비들 그히고 개울을 건너가는 순간마다 잊혀진 옛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질만큼 아름다운 게곡속으로 우리 모두는 빠져 들었습니다.
인적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산길을 지나자 나무 한그루 없는 초지가 나타나고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오르는 업힐은 숨이 막힐듯 했지만 멀리 보이는 임도를 들어서면 나아지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속에 열심히 패달을 밟았습니다.
멀리 보이는 그 임도는 눈으로는 금방인데 내려가는 가파른 길목의 끝은 정말 이름그대로 길이 사라진 곳이 었습니다.
그 가파른 길은 다시; 타고 올라 오는 고통, 나무 한그루 없는 그 넓은 초지를 이리 저리 돌아 다니다가 결국 다시 온길로 되돌아 가는 길을 택 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무장사지 터 길에 들엉 서는 길목에 있는 계곡에 자리를 펴고 가져온 음식을 꺼내기 시작 했습니다.
하루 자고 와도 될만한 양의 음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밥을 먹으며 가져온 물이 바닥 나고 이제는 흐르는 계곡물을 마실수 밖에 없었습니다.
배탈이 겁이 났지만 마시는 계곡물을 너무나 시원하고 단맛 이었습니다.
그리고 올라간 무장사지터에서 사라진 신라 천년의 흔적을 만났습니다.
무장사지 소개 입니다
삼국유사에서
무장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인 효양 대아간으로 추봉된 명덕대왕이 그의 숙부되는 파진찬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절의 위쪽에는 미타를 모신 전각이 있는데 이는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왕후가 왕이 세상을 뜨자 지극히 슬퍼하면서 왕이 살았을 때의 아름다운 행적을 죽어서도 드날리고 그의 명복을 빛나게 하고자 생각하였다. 이 때 서방에 미타라고 부르는 큰 성인이 있어 지성으로 그를 믿고 받들면 구원하여 준다는 소문을 듣고 왕비는 "이말이 참말일진대 어찌 나를 속이리요!"하고는 즉시 자기가 입은 화려한 의복을 희사하고 궁중의 재물을 털어 이름난 재인바치(匠人)들을 소집하여 미타상 하나와 아울러 따르는 귀신무리들을 조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보다 앞서 이 절에는 늙은 중이 한 명 있었는데 문득 꿈에 신선같은 사람 하나가 석탑의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서 서편을 향하고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보고 이곳이 필시 부처님이 머물던 곳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를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곳은 바윗돌이 우뚝 솟아 있고 개울물이 빠르게 부딪쳐 흐르는 곳이므로 목수는 돌아보지도 않았고 다들 좋은 터가 못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터를 개척하자 평탄한 곳을 얻어서 큰 집을 세울 만 하고 아주 신령스러운 터나 다름 없으므로 그 터를 보는 자들은 깜짝 놀라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래에 와서는 불전은 무너졌으나 절만은 남아 있으니 세간에 전하기로는 태종이 삼한을 통일한 후 병기와 갑옷을 이 골짜기 속에 간직해 두었다 하여 이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지었다
무장사지 삼층석탑
이 탑은 원래 넘어져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63년에 탑재(塔材) 일부를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세웠다.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상층 기단부에 탱주를 두지 않고 면석 3면에 2개의 안상(眼象)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이와 유사하게 상층기단부에 안상을 새긴 탑으로는 경주남산 남산리 계곡의 한 지류인 승소곡(僧燒谷)에서 경주박물관내(박물관 들어서면서 왼편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로 옮겨온 승소곡 3층석탑이 있는데 승소곡 3층 석탑에는 상층기단 뿐만 아니라 1층 옥신에도 안상을 새기고 특히 1층 옥신의 안상 안에 사천왕상을 새긴 점이 무장사지 삼층석탑과 다르다(사진 참조).
무장사지 삼층석탑의 1층 옥신(탑신)은 가장 높고 큰 편인데 그에 비하여 2층과 3층은 급격히 작아졌다. 그 때문에 1층 옥개석이 2, 3층의 옥개석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커서 이 탑은 지대가 높은, 안내판이 있는 동쪽이나 2층 옥개석이 많이 손상된 쪽인 남쪽 보다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 서쪽에서 바라 볼 때 훨씬 아름다워 보인다. 옥신의 각 면 귀퉁이에는 층마다 우주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옥개받침은 각층이 5단이다. 1층 옥신 윗면 중앙에 네모난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현재 상륜부는 모두 없어져 복원당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을 새로 만들어 보충하였다. 무장사의 건립연대에 비추어 볼 때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탑의 높이는 4.95m이다. 보물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동댐을 타고 달리는 길은 한폭의 그림입니다.
늘 같이 다니던 다른 라이더분들이 함께 하지 못해서 많이 섭섭했습니다.
다음 기회에 같이 달려 보길 기대합니다.
돌아 오는 길에 젊은 분들의 남은 힘을 조금 빼야겠다는 생각으로 남산을 오랐습니다.
젊은 초보 근육뿐인 체육과 졸업생은 두번째 라이딩에서 엉덩이의 압박을 극복치 못해 빠지고 다시 남산을 올랐습니다.
지남해 매미의 상처로 온통길은 자갈로 덥혀서 자전거 타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kohosis.june7 젊음이 넘치는 두분만이 정상에 오르고 너무 더운 날에 나머지 모두는 길가 평상에 앉아서 그늘을 즐겼습니다.
살아 있슴이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kohosis 님은 이날 두마리의 산토끼를 만났고 커다란 독수리와 조우했습니다.
저는 이날 혼자서 산딸기를 많이 따서 먹었습니다.
덕동댐의 뒤가 어떤지 늘궁금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때묻지 않은 신랑의 천년이 아직 그대로 숨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진 찍느라 수고 했습니다.kohosis님, 길을 인도해 주신 이교수님,삼손님의 재치넘치는 말쏨씨가 더욱 분위기를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처음 장거리 라이딩을 하신 나 선배님, 업힐만 나타나면 나르는 허사장님,
초보아닌 초보 체육과 출신님,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고 글을 올려주신 모든 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글 보시고 다음에는 다같이 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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