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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DE FRANCE 2(펀글)-초보분들 참조^^

2004.07.06 10:56조회 수 360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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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DE FRANCE

매년 7월 프랑스 전역은 스포츠 행사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수백만 명이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스포츠 중계에 열광하고, 1000만여 명의 사람들이 도로 변을 가득 메운다. 이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뚜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이다.



프랑스를 일주하는 이 도로 사이클 경주를 지켜보며, 프랑스인들은 출전 선수들과 함께 자신의 땅을 순례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잊고 있던 혹은 알지 못했던 프랑스를 다시 발견한다. 뚜르 드 프랑스가 프랑스와 함께 한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관중들은 프랑스 땅의 아름다움을 확인해 왔던 것이다. 지난 대회의 여정을 좇아가며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대회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스포츠에서 가장 힘든 일은 어떤 것일까? 야구에서 시속 15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날아오는 투수의 공 배팅하기, 피겨스케이팅에서 공중 4회전하기, 그리고 마라톤에서 42.195킬로미터 완주하기. 얼마 전 미국 일간지 《USA 투데이》가 스포츠에서 가장 어려운 10가지 일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 프랑스에서 열리는 사이클 경기인 투르 드 프랑스도 포함돼 있었다.

약 3주일간 프랑스를 일주하는 이 대회에서 참가 선수들이 달리는 거리는 3000여 킬로미터. 서울과 부산을 4회 정도 왕복하는 것과 맞먹는 거리를 사이클 하나에 몸을 싣고 달리는 셈이다. 하지만 이 경기가 힘든 까닭은 비단 장거리 주행 탓만이 아니다. 경주 코스는 평지 도로뿐만 아니라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의 가파른 산악 도로까지 포함하고 있다. 경사진 도로 위에서 선수들은 쉴 새 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탄한 곳에서도 시속 50킬로미터라는 엄청난 속도로 5~6시간씩 달리는 극한 체험을 하게 된다. 대회에 따라다니는 ‘지옥의 레이스’라는 별명이 그저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장시간 동안 험난한 길을 달려야 하기에 출전자 중 상당수는 과도한 체력 소모와 크고 작은 부상과 사고, 컨디션 난조 등으로 중도하차하고 만다. 매년 200명 가량의 도전자 중 완주에 성공하는 사람은 고작 100명에 못미치니, 우승은 둘째치고 결승점을 밟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 셈이다. 그만큼 이 경주는 선수들에게 강한 체력과 고난도의 기술을 모두 요구하고 있다.

매년 7월 뚜르 드 프랑스가 개최될 때면, 프랑스는 거대한 사이클 경기장으로 변하고 도로는 선수들이 달리는 경주로가 된다. 이 대회는 단순한 연례 행사의 의미를 넘어서 있다. 올림픽이나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과 함께 가장 권위 있는 스포츠 행사로 평가될 정도고, 전세계는 아닐지라도 유럽에서만큼은 월드컵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회가 열리는 동안 1000만 명이 넘는 팬들이 도로 변에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수천만의 시청자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열광한다. 수천 명의 사람들은 경기를 관람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해, 아예 사이클이나 자동차를 타고 레이스 전구간을 직접 뒤쫓는 열성을 보이기도 한다. 뚜르 드 프랑스가 열릴 때면 사람들이 선수들에게 보내는 성원으로 유럽 전역이 들끓어 오르곤 한다.

프랑스를 일주하는 사이클 대회가 시작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03년의 일이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행사가 취소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회는 어김없이 개최돼, 올해로 90회를 맞이하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프랑스 사이클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뚜르 드 프랑스는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해왔다. 하지만 어떻게 스포츠 행사 하나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일까?

60명의 지원자로 시작 >> 이 대회는 애당초 라이벌 의식과 상업적인 목적에서 비롯됐다. 1892년, 피에르 지파르라는 사람이 프랑스 최초의 스포츠 전문 일간지인 《르벨로(Le V?lo)》를 창간했다. 그런데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의 여파가 스포츠 신문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진보주의적 성향의 피에르 지파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드디옹 남작과 반 드레퓌스적 입장이었던 그의 친구들이 자신들 성향에 맞는 스포츠 신문을 새로 만들기로 결정 내린 것이다. 그래서 1900년 10월 16일부터 《로토벨로(L‘Auto-V?lo)》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신문의 운영은 앙리 데그랑주와 빅토르 고데가 맡았다. 이때부터 지파르와 데그랑주의 경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그들은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사이클 경기 유치라는 방법을 택했다.

이미 1891년 파리와 프랑스 서북부에 위치한 브레스트를 왕복하는 사이클 경주를 개최한 바 있는 지파르에 맞서, 데그랑주는 1901년에 같은 구간에서 사이클 대회를 열었다. 또 그 다음 해에 《르벨로》가 보르도와 파리 구간 사이클경주를 개최하자 몇주 지나지 않아 《로토벨로》 역시 동일한 구간에서 경기를 실시했다. 그러는 사이 상황은 역전돼, 후발주자인 《로토벨로》가 판매 부수 2만 5000부로,《르벨로》를 3000부라는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앞서 나가게 됐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두 신문에 확실하게 결정타를 날리는 사건의 발단은 1902년에 일어났다. 그해 11월, 데그랑주는 신문 칼럼을 맡고 있던 제오 르페브르와 함께 식사를 하다가, “며칠간의 휴식이 포함된 구간별 레이스대회로 ‘뚜르 드 프랑스’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한다. 그러고는 곧 구상을 실현시켜, 이듬해 1월 신문 1면에 “지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이클대회인 뚜르 드 프랑스”의 탄생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얼마 후 상호 분쟁에서 패배해 제호를 《로토벨로》에서 《로토(L’Auto)》로 바꾸는 일까지 겪지만, 르페브르는 “프랑스 국토 전체를 사이클 경기장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참가자의 숫자였다. 그해 4월까지 지원한 선수는 15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대회 개최 기간을 7월로 늦추고, 상금을 대폭 인상한 후에야 겨우 60명의 참가자를 모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03년 7월 1일 오후 3시 16분, 마침내 최초의 뚜르 드 프랑스가 시작됐다.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대회 덕분에 《로토》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 행사는 곧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름 행사로 정착됐다.

첫 대회의 경주 코스는 파리에서 시작해 파리에서 끝났다. 경기는 프랑스의 주요 대도시인 파리와 리옹, 마르세유, 툴루즈, 보르도, 낭트 그리고 빌다브레를 잇는 6개 구간으로 구성됐고, 주행 거리는 2428킬로미터였다. 첫 회 이후 뚜르 드 프랑스에서 선수들이 달리는 거리는 점점 늘어나 1910년~1930년 사이에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주행 거리의 두 배에 해당하는 5000킬로미터를 넘어섰다. 그러다 다시 주행 거리가 차츰 줄어들어 근래 들어서는 3000킬로미터대로 자리잡게 됐다.

하지만 주행 거리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선수들의 속도는 꾸준히 빨라져 왔다. 때로는 더위와 싸우고, 때로는 가파른 고개에서 냉혹한 전쟁을 치르면서, 그들은 자신의 한계선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북부의 안개와 남부의 태양 >> 분과 초를 다투는 현대인들에게 한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프랑스 전역을 훑는 이 행사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대, 인간의 의식이 기계 기술로 대치되어 가고 있는 시대, 속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 시대에, 몸 하나, 도구 하나만으로 승부하는 대회가 어떻게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도보로 프랑스 전역을 일주하는 행사는 이미 중세 때부터 존재해 왔다. 19세기 말에는 프랑스 공교육을 확립한 쥘 페리 장관이 《두 어린이의 프랑스 일주(Le Tour de France de Deux En-fants)》라는 책을 공립학교 필독서로 정했을 만큼 프랑스 국토 순례는 이미 오랜 전통을 이어 오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뚜르 드 프랑스는 자전거라는 도구의 도움을 받았을 뿐, 프랑스인들의 오랜 국토 발견과 국토 사랑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본질에 있어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 행사는 전통적인 프랑스와 분리해 생각될 수 없다. 절망과 열악한 조건에서 노동이 희망과 여가로 대치됐던 시절부터 유럽을 초토화시킨 전쟁의 아픔을 모르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시대까지의 변화를 이 행사는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어떤 매체를 통해 이 스포츠 제전을 만끽할까 몰두하는 점, 구간별로 어떤 방식의 레이스가 가장 전략적일까를 따져 보는 소소한 즐김이 과거와의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전세계로부터 매년 75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세계 최고의 관광대국 프랑스. 바로 그 프랑스의 자연을 헤집고 다니는 뚜르 드 프랑스는 참가자와 관중들에게 더없는 기쁨을 제공한다. 뚜르 드 프랑스 공식 홈페이지가 지도와 함께 각 경유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보를 소상하게 제공하고 있음은 곧 이 행사가 여름철 프랑스 전역을 채우는 수많은 축제와 문화 행사의 일환임을 보여 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대회 경유지로 택하는 일도 빈번한데, 이런 경우 뚜르 드 프랑스는그 지역을 소개하고 그곳의 축제를 알리는 역할까지 맡게 된다. 국토를 순례하는 대회를 통해 프랑스가 숨겨진 아름다움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나라 안팎의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모습은 사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목가적인 프랑스, 그러니까 라이프스타일을 중시하고 식도락에 몰두하는 전원적인 프랑스 모습과 일치하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뚜르 드 프랑스는 북부 지방의 안개부터 작열하는 남불의 태양, 그리고 대서양의 바닷바람부터 지중해의 해안에 이르는 자연을 두루 담고 있다. 대회는 산과 들, 바다와 실개천이 공존하는 프랑스식 ‘바리에테(vari?t?’, 즉 다양성을 골고루 맛볼 수 있게 해 주는 한편의 파노라마를 펼쳐놓는다. 사이클 선수들이 프랑스의 방방곡곡을 누비는 동안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궤적을 뒤따르며 눈앞에 주마등처럼 펼쳐지는 과거를 회상하고, 전쟁을 기억하며, 어린 시절 시골에서 겪었던 일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마르셀 파뇰의 작품을 영화화한 《마르셀의 추억》이나 《마르셀의 여름》 같은 영화들이 프랑스의 기성 세대를 열광시킨 것처럼, 그들은 이 경기를 지켜보며 흑백사진 속의 빛바랜 과거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단 8초라는 시간차로 >> 뚜르 드 프랑스의 경주 코스는 해마다 달라진다. 평균 주행 거리 역시 20~21개의 구간으로 구성된 경주 코스가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이 대회에서 선수들은 하루에 한 구간씩을 달리며 서로 순위를 다투게 된다.

매년 20여 개의 팀이 대회에 출전하고, 각 팀은 다시 9명의 선수로 구성돼 있다. 선수 수로 따지자면 200명 정도가 참가하는 셈이다. 대회 규모에 비해 참가 선수의 수가 많지 않은 이유는 바로 까다로운 출전 조건에 있다. 국제사이클연맹(UCI) 규정에 따라 상위 10개 팀과 이탈리아투어와 프랑스투어, 스페인투어 등 3개의 메이저 사이클대회 우승팀, 그리고 전년도 뚜르 드 프랑스 개인 종합 우승자 소속팀과 전년도 도로 월드컵 우승자 소속팀 등만이 출전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대회 첫날 출발 지점에서는 본격적인 레이스에 앞서 ‘프롤로그’가 치러진다. 프롤로그는 선수들이 달리는 순서를 정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서 좋은 기록을 낸 선수일수록 다음 경기에서 출발선 앞쪽에서 달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선수들은 매 구간의 출발지에서 도착지를 향해 달리며 속도를 겨루게 된다.

전체 구간 중 3구간에서는 2번의 개인 기록 경기와 1번의 팀 기록 경기가 치러지도록 돼 있다. 개인 기록 경기는 전날 구간에서 가장 늦게 도착한 선수가 가장 먼저 출발해, 그 후 1~3분 간격으로 선수들이 차례로 출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단독 주행을 통해 선수들은 자신의 최고 속도를 겨루는 것이다. 반면 팀 기록 경기는 한 팀이 5분 간격으로 출발해 팀별 기록을 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팀에서 5위를 한 선수의 기록이 곧 팀의 기록이 되고, 그 팀에 소속된 다른 선수들에게도 똑같은 시간 기록이 주어진다.

올해 대회에서 주행 코스는 개인과 팀의 기록 경기를 치르는 3개 구간을 제외하고, 10개의 평지 구간, 7개의 산악 구간으로 구성되어있다.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을 끼고 있는 이 산악 구간은 선수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코스다. 그리고 선수들의 기량에 따라 경사길에서 주행 속도가 크게 차이 나기 때문에 우승이 판가름나는 중요한 코스이기도 하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인해 선수들의 체력은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대회 운영진 측에서는 이런 점을 고려해 선수들이 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경기 도중 휴식 기간을 따로 마련해 두고 있다. 대회 일정 도중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컨디션을 조절하게 하는 것이다. 또 일부 거리는 사이클 대신 비행기나 자동차, 고속열차 등의 다른 교통 수단으로 이동하면서 다음 구간의 경기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개인 종합 순위는 프롤로그, 모든 스테이지 누적, 보너스와 페널티 시간을 가감해 결정한다. 뚜르 드 프랑스에는 구간별 우승자와 대회 마지막 날 최종 우승자에게 ‘노란 사이클복’을 입혀 주는 전통이 있다. 1919년 이 의식이 처음 도입됐을 당시 우승자는 경쟁자의 표적이 된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지만, 노란 사이클복은 이제 이 대회에서 우승의 상징물로 자리잡았다.

뚜르 드 프랑스의 출발지는 매년 조금씩 달라진다. 2002년에는 룩셈부르크에서 출발해 총 3462킬로미터의 거리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 반면, 2003년에는 파리 북쪽의 생드니를 출발 지점으로 잡고 있다. 7월 5일 생드니에 위치한 스타드드프랑스(Stade de France)를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프랑스 전역을 일주한 후 7월 27일 파리의 샹젤리제에 입성하는 것으로 여정이 짜여져 있다. 작년 코스가 다른 해와 차이점이 있다면 대회 100주년을 기념해, 1903년 제1회 대회 코스에 포함되어 있던 6개의 주요 도시를 모두 경유한다는 사실이다.

첫 대회 이후 파리에서 출발해 파리로 돌아오는 방식이 줄곧 유지됐다. 하지만 1926년 프랑스 동남쪽 알프스 지역에 위치한 에비앙을 출발지로 택하면서 대회 시작 지점은 파리에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 전역의 도시로 확장됐다. 그리고 1954년부터는 국경을 벗어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했다. 최근 들어서는 점점 가속화되는 유럽 통합에 발맞추어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프랑스와 인접한 국가의 도시를 출발지로 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사이클은 무엇보다도 기록의 경기이기에, 100년을 맞이하는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속도를 다투는 경쟁에서 단 몇초 차이로도 순위가 달라졌다. 1952년에는 28분 27초라는 최대 시간차를 기록하며 1, 2위가 갈렸지만, 1989년에는 단 8초라는 가장 적은 시간차가 수립된 것.

또 체력 조건이 관건인 만큼 우승자의 나이는 당연히 20대 후반이 많았다. 간간이 30대 우승자가 탄생하기도 하지만, 첫 우승은 아니고 이미 20대에 우승한 후 또다시 우승을 거머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우승 횟수만으로 따져 볼 때 5번 우승한 선수가 4명이나 되고, 대회가 90회 치러지는 동안 우승자는 총 53명일 정도로 기존 우승자가 재우승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회가 해를 거듭해 갈수록 출전 선수들은 ‘보다 더 빨리’라는 구호를 충실히 실현해 왔다. 초창기 우승자들이 시속 24킬로미터 대로 달렸던 것에 비해, 지난해 대회에서 세워진 시속 42.174킬로미터라는 속도는 과거와의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향상된 기록이다. 연패를 기록한 랜스 암스트롱의 2001년과 2002년 기록을 비교해 봐도 주행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라졌다. 재작년의 경우 3462킬로미터를 86시간만에 돌파했는데, 이 기록을 1년 사이에 4시간이나 단축시켜 놓은 것이다. 물론 코스의 난이도를 고려하지 않은 산술적인 수치이긴 하지만 말이다.

생존률 50퍼센트에서 >> 뚜르 드 프랑스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많은 감동적인 드라마와 놀라운 일화를 탄생시켰다. 1913년 대회에 참가했던 선수 유진 크리스토퍼의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당시 부실했던 자전거 바퀴가 레이스 도중 부러지자 그는 자전거를 둘러메고 눈 덮인 피레네 산맥을 혼자서 걸어 넘었다. 그런데 숲을 지나던 중 거대한 곰과 마주치고 말았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기지를 발휘해 혼자 힘으로 곰을 쫓아냈고, 앞서 떠났던 동료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또 1993년 대회의 개인전 경기 때는 갑자기 우박에 떨어지는 기상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팔에 우박을 맞은 자국이 깊게 파일 정도로 그 강도는 대단했다.

때로 대회를 장식했던 주인공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기도 했다. 2001년 뚜르 드 프랑스에서 4위를 차지했던 카자흐스탄의 안드레이 키빌레프는 2003년 3월 12일 열린 파리-니스 도로 사이클대회에서 다른 선수들과 충돌해 사이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머리를 땅에 부딪쳐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3일 사망했다. 보호 헬멧을 쓰지 않아 변을 당한 경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뚜르 드 프랑스에 얽힌 이야기들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위기를 딛고 일어선 선수들에 관한 것이었다. 1983년 파스칼 시몽이라는 선수는 대회 도중 추락 사고로 어깨가 골절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쉽게 물러서지 않고 경기 막바지까지 달리는 투혼을 발휘했다.

또 1986년 비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뚜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한 미국의 그레그 레먼드는 대회가 끝난 뒤 사냥을 나갔다가 오발 사고로 산탄 총알이 온몸에 박혀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 기관이 크게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모두들 그의 선수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레먼드는 재기에 성공해 1989년과 1990년 연승을 거두었다. 또 이탈리아의 마르코 판타니는 교통 사고로 한쪽 다리가 3센티미터나 짧아진 상태였다. 일상 생활을 하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사이클 선수로서는 제대로 활동할 수 없는 치명적인 장애였다. 하지만 그런 조건에서도 판타니는 1998년 우승을 거머쥐었다.

특히 1999년 암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한 랜스 암스트롱의 이야기는 ‘인간 승리’라는 말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한다. 1995년 뚜르 드 프랑스에서 36위에 오르며 서서히 실력을 키워가던 암스트롱은 그 다음 해 10월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 한쪽 고환을 떼어 내고 암세포가 뇌까지 퍼져 뇌의 일부도 도려내야 하는 대수술을 여러 차례 받아야 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가 살아남을 확률은 단 50퍼센트였다. 하지만 그는 항암치료와 재활 훈련 등의 힘겨운 투병 생활을 통해 병을 이겨냈다. 암스트롱은 복귀에 성공해 다시 페달을 밟을 수 있었고, 1999년 이후 뚜르 드 프랑스 4연속 우승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그의 끈질긴 생명력과 불굴의 투지에 세계인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그는 살아 있는 전설로 남게 됐다. 암스트롱은 1999년 뚜르 드 프랑스 대회 직후 자신의 이름을 딴 암스트롱 암 연구재단을 설립해, 현재까지 암환자들을 위해 많은 봉사 활동을 하며 또 다른 감동 드라마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400억 원이 넘는 운영비 >> 프랑스 대중들이 험난한 과정을 이기고 승리를 거둔 선수들에게 보내는 애정은 남다르다. 실례로 로랑 잘라베르, 뤽 르블랑, 로랑 피뇽, 여성 주자 자니 롱고 등의 대표적인 선수들은 대중 스타들 못지않은 유명세를 얻었다. 또 뚜르 드 프랑스는 프랑스 밖에서도 숱한 스타들을 배출했다. 5연패를 달성한 후 1997년 1월에 은퇴를 선언한 스페인의 미구엘 인두라인은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보다도 더 높은 인기를 누릴 정도였다.

냉정하게 평가할 때 이 행사는 프랑스의 스포츠 국력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프랑스가 역대 최고 성적을 올린 이유 중 하나로 뚜르 드 프랑스를 통한 경기력 향상과 두터운 선수층 양성을 거론할 정도로, 프랑스는 이 대회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되고 연륜이 쌓일수록, 뚜르 드 프랑스 역시 돈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경주 참가자들은 후원자의 들러리가 되고, 시상대도 온통 광고로 도배되기 일쑤다. 비록 포뮬러1에서의 최첨단 기술이나 막대한 자금, 축구에서의 천문학적인 중계료 수입에는 못 미칠지라도, 2002년의 경우 대회 운영비만 400억 원이 넘었다.

또 유명 기업들이 후원을 자처하면서 상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대회 총상금은 약 25억 원을 기록하게 됐다. 상금은 개인 부문의 우승자와 준우승자, 그리고 단체 부문의 우승팀과 준우승팀에게 돌아간다. 뿐만 아니라 구간 난이도에 따라 구간별 우승자에게도 일정액이 주어진다. 개인 우승자가 받는 상금은 무려 3억 5000만 원대. 구간에서 우승해서 받은 상금까지 합한다면 종합 우승자가 받는 액수는 더욱 많아진다.

하지만 승리를 통해 주어지는 부와 명예가 커질수록 선수들이 승리에 대해 느끼는 부담감 역시 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힘겨운 경기에서 선수들은 약물의 유혹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약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경주에서 완주하는 선수로 남기를, 그리고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 약물 복용이 처음으로 문제가 됐던 건 약 40년 전이었다. 그 당시 선수들의 약물 복용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달리면서 견뎌야 할 고통이 너무나도 컸던 탓에 선수들은 기록 향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통증을 줄이기 위한 용도로 약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1967년 약물 부작용으로 선수 한 명이 대회 도중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 일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그 다음 해부터 약물 검사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해가 갈수록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되고 주행 속도도 점점 더 빨라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기가 쉬워진 것은 아니다. 뚜르 드 프랑스는 지금도 여전히 중도 포기자가 속출하는 험난한 경기인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줄이고 보다 나은 성적을 얻기 위해 선수들은 약물 복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뚜르 드 프랑스의 상위권에 올라 있는 선수들마저 약에 손을 대,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5년 전 대회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프랑스 팀의 이동 차량에서 근육강화제가 다량으로 발견돼, 그 팀의 선수 전원이 출전 금지당하고 단장과 주치의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뚜르 드 프랑스는 불신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그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해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거둔 우승 열기마저도 식어 버리고 말았다. 또 프랑스의 사이클 스타 리샤르 비렝크는 1998년 대회에서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시인해, 2000년에 9개월간의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영웅 마르코 판타니도 1999년 이탈리아투어 우승 직전에 헤모글로빈과 적혈구를 증가시키는 약물을 규정 이상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출전을 취소당했다.

게다가 선수들끼리 구간 우승을 놓고 금품 거래가 있었다는 설 또한 뚜르 드 프랑스의 명예를 훼손했다. 프랑스 페스티나 팀의 전 감독 브루노 러셀은 2001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부도덕한 투어》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비리를 폭로하고 있다. 1997년, 한 선수가 그해 우승자에게 10만 프랑의 돈을 주고 구간 우승을 샀다는 것이다. 러셀의 주장에 따르면 그 선수는 다른 주요 선수들에게도 1만 프랑씩 뇌물을 주었다고 한다.

다시 대중에게로 >> 참가 선수들의 약물 복용과 금품 거래설 등으로 한 세기 동안 쌓아 온 권위에 상처를 입은 뚜르 드 프랑스는 ‘대회를 대중에게 되돌려 줄 때’라는 기치 아래 과거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각오로 규정을 한층 더 강화시키고 있다.

그런 노력의 하나로 약물 검사가 철저하게 실시되고 있는 상태다. 2001년 4월 이후 모든 출전 선수는 조직위원회가 실시하는 10가지 도핑 검사를 거쳐야만 한다. 특히 사이클 선수들 사이에 만연된 금지 약물인 EPO에 대한 검사를 1구간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받아야 한다. 또 구간 우승자와 종합 합계 순위 1~3위 선수와 다른 6명의 선수가 무작위로 선택돼 매일 약물 검사에 응하도록 돼 있다.

그리고 대회를 지켜봐 온 이들은 상업주의로 퇴색된 뚜르 드 프랑스의 스포츠 정신이 되살아나길 바라고 있다.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리 기술문명에 대한 맹목적인‘신앙’이 커졌다 해도 뚜르 드 프랑스에선 인간의 한계와 불가능을 향한 도전, 혹은 초월을 통해 힘겨운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왜 사람들이 이 행사에 그토록 열광하는지에 대한 질문의 해답과도 연결된다. 선수들의 모습은 인생이라는 노정에 선 인간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고통이 따르는 인생을 살아가는,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 성숙해져 가는 인간의 모습과 말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와 싸우며 페달을 밟는 선수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품고, 그들의 우승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앙드레 말로의 표현대로 비록 우리네 삶이 ‘보잘 것 없는 비밀들의 집적(集積)’에 불과할지라도, 아직도 우리의 뺨을 스치는 산들바람이 있는 한 그 삶이 충분히 살아 봄 직하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지난해 뚜르 드 프랑스 5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후 암스트롱은 사이클 경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전했다. “사이클은 연극이 아닌 스포츠이지만 레이스는 언제나 연극 이상의 극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말처럼 뚜르 드 프랑스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변함없이 관중들에게 극적인 감동을 전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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