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잡한 마음으로
오마이뉴스 푸른검객님의 댓글을 퍼다가 나릅니다.
> 푸른검객(redclip), 2004/08/05 오후 12:20:08
..정은임 아나운서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서..
한 사람으로 태어나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이리도 속절없을까..라는 얄궂은 안타까움이 괜시리 눈시울을 흐리게 한다.
얼마 전, 정은임 아나운서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설마 큰 사고는 아니겠지'라는 나름의 위안을 하며, 사고에 관한 소식을 인터넷의 여기저기를 뒤지며 탐문하던 중, 과거 주간한국에 자유기고가 유혜성씨가 기고한 글과 그녀가 다시 정음영에 복귀하던 즈음의 인터뷰 기사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한 세상의 삶을 이 몇줄의 글로 대신할 수야 없겠지만, 치열했던 나의 30대의 한 모퉁이에 아름답게 자리했던, 정은임 아나운서의 평화로운 안식을 기원하며, 그녀가 떠남을 가슴아파하는 '그녀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남겨진 글을 회고함으로써 정은임 아나운서를 떠나보내는 이별의 송가를 대신하고자 한다.
..................................................................(자유기고가 유혜성)
[감성 25시] 정은임
자신만의 언어로 띄우는 감성의 세상편지
내면의 소리를 찾아 떠났던 터키로의 여행
낯선 이국 땅에서 만난 순수의 보물, 시청자에게 선물
그녀는 왜 터키에 간다는 것일까? 그녀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곳이지만 동양도 서양도 아닌 곳이죠. 어디에도 속하고, 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라, 생의 비밀이란 보물이 찬란하게 빛날 것 같은 나라. 그래선지 호기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나라죠. 저, 터키에서 살 거예요.”
이 때 정은임 아나운서는 정의할 수 없는 나라 ‘터키’ 같았다. 꿈꾸는 듯한 눈, 살포시 들어간 보조개, 기다란 목선과 너무 여려 보여 금세 날아갈 것만 같은,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 오규원님의 ‘한 잎의 여자’라는 시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여자.
정은임을 기억하는가? MBC 5시30분 ‘우리말 나들이’란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표준어를 소개하는 아나운서를 최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칫 잘못 쓰게 되는 언어를 교정해 주는 프로그램인지라 그녀가 나오면 화면에 몰두하게 된다. 사실, 이유는 그뿐 만이 아닐 게다. 솔직히 그녀는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 예쁜 아나운서니까.
- 젊음과 열정으로 기억되는 아나운서
정은임을 이야기 하려면, 라디오 프로그램을 빼놓을 수 없다. 라디오를 말하지 않으면 ‘정은임이 아닌 것’이다. MBC FM4U(91.9MHZ)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의 주인으로 92년 11월 2일 첫 방송을 시작해 95년 4월 1일 마지막 방송을 한 뒤, 다시 옛자리로 돌아온 아나운서.(그 사이는 미국 노스트웨스턴 대학에서 ‘한국의 영화 마니아’라는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결혼과 출산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녀가 없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자체 활동을 해왔던, ‘정영음’(정은임의 영화 음악)동호회 회원들의 마음속에선 정은임은 아직도 영화음악을 진행 중인 아나운서였다. 볼셰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가가 영화 음악으로 소개되었을 때 마음속에서 ‘혁명’이란 단어를 은연중에 떠올리게 했던 그녀다.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말라는 말이 있던가. 그녀는 영화 음악을 통해 숨겨진 감성을 하나씩 꺼내놓고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꾸준히 그녀의 방송을 듣는 사람들은 각자가 세상의 ‘투사’가 되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녀는 젊음과 열정의 코드였다. 92년 입사한 정은임이 처음 맡게 된 프로그램이 바로 MBC FM 영화음악이다. 젊은 정은임은 그곳에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감성과 이성은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수습사원 시절 노조 가입 포기 각서를 거절한 이력도 갖고 있다. 옳지 않은 길은 가지 않는 것이 정은임이고, 옳지 않음에도 가야 한다면, 그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95년 4월 1일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 드릴게요”라는 눈물겨운 인사를 마지막으로 잠시 떠나게 된다.
그녀의 떠남은, 많은 소문들을 안겨주었다. 울먹이던 마지막 멘트가 MP3 파일로 저장되어 인터넷에 떠돌았고, 그녀의 떠남이 ‘강제 퇴출’이란 흉흉한 소문도 있었다. 그 당시 PC통신 정영음 동호회는 ‘정은임 복귀 추진 위원회’를 구성해 서명운동에 들어갔고, 일간지에서는 그들의 움직임을 뉴스거리화 했다. 혹자는 그녀를 ‘실패한 혁명가’라고 거창하게 말하기도 했다. 어찌됐든 그것은 사건이었다.
“예전에는 재기발랄한 영화를 좋아했어요. 이젠 영화를 만들든, 책을 쓰든, 방송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지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문화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에게 못할 짓 하면서 얻어내는 특종 같은 거, 누군가?상처 입히는 거, 위험한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예요.”
정은임은 세상의 움직임에 예민하다. 후배 아나운서 김태희의 죽음과 추문에 휩싸인 선배 홍은철 아나운서의 일로 그녀는 충격을 받았고,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한다. “사람의 본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 계기죠. 또한 대중의 속성은 무엇인지, 사람이 뭉쳤을 때 과연 어떤 효과가 일어나는지, 그때 대중은 본질을 잃고 얼마나 잔인하게 변해가는지. 탄핵안이 가결된 사건과 그 후 대중들의 움직임이 모두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니 너무 힘들었어요. 어찌해야 하나, 이 움직임을 도대체 어찌해야 하나
(2003.10.31 / 김세윤 기자 )
"과연 축하할 일일까요?"
복귀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여의도 MBC 본사 7층 라디오 스튜디오 앞에서 만난 정은임은 지나는 사람들이 건네는 축하 인사에 꼬박꼬박 그렇게 되묻고 있었다. "당연히 부담되죠. 복귀라면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건데. 지금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때'라면 1992년 11월 2일에 첫 방송을 시작해 1995년 4월 1일 정영음의 마지막 전파를 쏘아올리던 때를 말한다. 소녀 취향의 닭살 멘트가 난무하는 심야 방송에서 4.3 제주 항쟁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강제 철거의 부당함에 격분하는 오프닝 멘트가 화제를 모은 건 당연했다. 볼세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가'와 시위 현장에서 대학생들이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영화음악이라며 틀어주던 이 프로그램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듣게 해준 방송이었다.
2년 반 만에 맞이한 드라마틱한 마지막 방송. 이 때부터 독실한 애청자들이 정영음을 실패한 혁명으로, 정은임을 요절한 게릴라로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라고 눈물의 작별 인사를 고하던 마지막 방송은 MP3 파일로 저장되어 지금도 인터넷을 떠돈다.
"안 그래도 내가 그랬지. 정은임은 전설로 남겨두고 차라리 다른 사람을 섭외해야 한다고.” 정은임의 복귀를 축하하는 점심을 함께하며 홍동식 편성부장(당시 정영음 PD)은 끝내 자신의 충고를 새겨 듣지 않은 담당 PD를 은근히 대견해 했다. 그러면서 오는 2005년 정영음 종영 10주년을 맞아 화려하게 복귀시키려던 자기 복안이 틀어졌다며 정은임의 때이른(?) 복귀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당시 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 평론가 정성일은 "지금도 마치 커밍아웃하듯이 '저도 한때 정영음의 청취자였습니다'라며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만난다"고 말한다. 정은임은 그렇게 청취자들 사이에 은밀한 연대의식을 고취시키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설익은 대학생의 세계관으로 방송하고"도 박수받던 호시절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제 마이크 너머엔 영화에 담긴 진심을 믿는 충성스런 관객들 대신 박스오피스 성적을 더 믿는 변덕쟁이 관객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페널티 킥을 맞이하는 골기퍼처럼, 지금 정은임은 11년 전 입사 4개월 만에 덜컥 영화음악 진행을 맡던 그 때처럼 불안하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엔 너무 몰라서 불안했고 지금은 너무 잘 알아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모두들 군대 가 있는 어느 선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뭐, 완전히 신화적 인물이더라고요. 짱돌의 달인에, 강철 같은 사상. 제가 4학년 때 그 선배가 복학하는데 아, 그 신화가 산산히 깨졌다는거 아닙니까. 모든 신화의 속성이란 다 그런 거예요."
92년 11월 2일 첫 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 정은임은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해, 방송국이라는 직장에 대해 내심 실망하고 있었다. MBC 파업에 즈음해 입사한 이 수습 사원은 파업에 참여한 선배들을 대신해 일기 예보에 투입됐다. 찌푸린 날씨를 예보할 때면 잔뜩 먹구름이 끼여 있는 자신의 미래도 함께 예보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의 중심에서 호흡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 방송은 자본의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그저 순진한 대학생 마인드였음이 속속 드러나는 순간, 87학번 아나운서의 가슴속에 회의가 밀려들었다. 특히 '앵무새'라고 지탄받던 아나운서의 한계가 뼈아팠다. 못다 이룬 기자의 꿈을 실현할 대안이라고 믿었던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머지 않아 '아나운서' 정은임은 기자가 되었다면 절대 누리지 못했을 꿈같은 시절을 만끽하게 된다.
종영 전까지 매주 한 통씩 꼬박꼬박, 70여 통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내 제작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대구의 서영무(38)씨와 숙직하는 ‘은임이 누나’와 밤새 수화기를 붙들고 영화를 논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던 민철호(33)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혈 청취자 중 빨리 기억나는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직관으로 청소년의 가슴을 할퀴던 정은임을 모두가 예뻐한 건 아니었다. 95년 4월 1일, 정영음은 봄 개편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정은임의 인생에도 개편의 계절이 도래했다.
영화음악 종영 후 몇몇 프로그램을 오가며 영화 코너에 얼굴을 비추던 정은임은 98년, 결혼과 동시에 유학길에 올랐다. 이미 정영음의 마지막 방송에서 영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던 속내를 털어놓은 터였다. 항간에는 영화 연출을 공부하러 간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로부터 2년 뒤. 가슴속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안고 팔에는 아이를 안고, 정은임이 돌아왔다.
"사람이 보수화되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이 생기는 거예요. 특히 2세가 생기면 생각이 달라지죠. 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건 할 수 있겠는데 결코 우리 아이에게는 나의 신념을 관철시키지 못할 것 같거든요. <허공에의 질주>를 떠올리며 생각해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요즘은 그게 가장 큰 화두예요."
"그게요, 아이 참. 그러니까 막상 가보니까 영화학과가 아닌거예요. 미디어학과인 거 있죠? 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거야" 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일을 시작하는 건 정은임의 특기다.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때도 그랬고, 정영음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그는 그럴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나름의 돌파구를 찾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팔자에도 없는 경영학 수업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비로소 영화라는 텍스트 바깥을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세계관을 정리하고 돌아왔다"는 거창한 자평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2년이나 유학하고 돌아온 사원에게 1년 내내 이렇다 할 프로그램 하나 맡기지 않았다. 시간은 많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영화 볼 시간은 자꾸 줄어들었다.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남편을 남겨두고 먼저 들어와 혼자 아이를 키우니까 그럴 수밖에.
"영화를 보지 못하는 환경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밤 12시까지 아이 뒤치다꺼리 하더라도 꼭 새벽 3시까지 영화 1~2편씩 보고 나서 잤어요" 연애 시절 유학중인 남편과 6개월에 한번씩 만날 때도 그럭저럭 버틸 만했건만, 영화는 아니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지 못하며 사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정은임은 지금도 점심시간에 회사를 빠져나가 가까운 극장으로 간다. 보고 싶은 영화를 빨리 보지 못하면 목에 가시가 돋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이 불치병은 정은임의 아버지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다. 부친은 어린 정은임의 손을 잡고 극장 나들이를 일삼았다. 고등학교 때 정은임의 증세가 더 심해졌다. TV 영화를 빼놓지 않고 보고 난 후 영화 제목, 제작 연도, 제작사, 남녀 주인공, 영화 줄거리, 그리고 나름의 감상을 공책에 빼곡히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의 영향을 받아(?) 들어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학부 시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앞에 잠시 흥미를 잃기 전까지 그의 이런 식의 영화 보기는 계속됐다.
정은임을 열혈 영화광의 세계로 최초로 인도한 안내자는 사실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약사 엄마를 대신해 집안 일을 돌봐주던 가정부 언니였다. 장롱 가득 영화 잡지를 쌓아놓고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는 가정부 언니를 보고 어린 정은임은 생각했다. "가정부가 되면 참 좋은 거구나, 영화도 많이 보고 과자도 마음대로 먹고, 참 좋은 직업이구나.” 가정부가 되고 싶다는 장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정은임은 그 때부터 영화 사랑의 한 길을 걷게 된다.
"연변에서 오신 아줌마가 먹고 자면서 애를 봐주세요. 근데, 웃긴 게 제가 난생처음 사용자가 된 거잖아요. 그 미묘한 갈등, 임금 인상을 둘러싼 대립을 겪어요. 근데 저도 별 수 없이 기만적인 기업들이 쓰는 ‘패밀리’ 논리를 내세우게 되더라고요. 우린 한 가족이다, 이러면서 인간적 정을 내세워 무마하는 거예요"
입사 11년 차 정은임의 나이도 벌써 서른여섯이다. 일전에 <일요일 일요일 밤에> '브레인 서바이버' 아나운서 특집에 출연했더라면 입사 동기 김지은 아나운서와 함께 가운뎃줄, 일명 낙엽줄에 앉을 나이다. 이제 그는 정영음을 진행하던 시절 ‘내 인생의 영화’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던 <로저와 나>를 얼마 전 슬그머니 목록에서 빼버렸다. 그때는 거대 자본가에게 끊임없이 문전박대당하는 감독(마이클 무어)이 존경스러웠지만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까 재기발랄함과 무모함,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정은임은 신입 아나운서 시절 한 인터뷰에서 어느 간부가 "정은임은 동그라미와 가위표밖에 없다"고 말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었다. 당시 한 선배가 그 간부를 지칭해 “그 인간은 세모와 네모밖에 없다"고 말한 것에 용기를 얻기도 했다. 정은임에게 여전히 당신에겐 동그라미와 가위표밖에 없느냐고 물었다. 정은임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 날카로운 것 못지않게 사람에 대한 연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남편이 돈 많이 벌어서 재단이나 하나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란다.
잃어버린 줄 알고 새로 신청하고 또 잃어버린 줄 알고 신청해 현재 주민등록증만 4장을 갖고 있을 만큼 제 물건을 간수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정은임은 입사 당시 품은 초심만큼은 아직 잘 간직하고 있다. 그는 올해 MBC노조 여성부장직을 맡았다. 직장내 탁아소 설립이 당면 과제다. 또한 여전히 노조 노래패 소속이기도 하다. 최근 노조내 그룹 사운드의 공연을 보고 의기소침해 있긴 하지만.
그가 복귀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다음 카페 '정은임을 사랑하는 사람들'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한때 정은임 복귀 추진 모임(이하 정추임)이 결성될 만큼 열성 청취자를 거느린 프로그램의 종영 이후 8년. 사실상 복귀 운동을 포기하고 간간이 서로의 안부나 묻던 회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제 살을 꼬집어 보겠다는 글이 올랐고 벌써 꼬집어 봤는데 꿈은 아니라는 리플이 달렸다. 복귀 후 첫 방송 전날인 10월 19일 저녁 '정영음 부활 전야 정모'를 열기로 하면서 카페의 축제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이 카페 회원이면서 그 옛날 숙직하는 정은임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주던 애청자 민철호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는 정은임 개인의 복귀가 고마운 게 아니라 진지하게 영화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부활하는 게 고마운 것"이라고 말했다. 편지 70통의 주인공 대구의 서영무(38)씨는 "그동안 정은임씨도 변했겠지만 듣는 우리도 많이 변했다"면서 그냥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해달라"고 주문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투사(鬪士) 정은임이 아니라 삶을 투사(透寫)하는 영화 이야기를 들려줄 인간 정은임일 뿐이다.
정영음이 막을 내린 지 3,119일째 되는 지난 10월 15일. 게시판에 오른 한 청취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어린 감수성을 자극하고, 때로는 쓰다듬어주던 그 라디오, 지금은 낡은 옷가지들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낡은 라디오를 창고에서 꺼내 깨끗이 사과하고는 탁탁, 경쾌하게 먼지를 털어내야겠습니다." 부디 그래주기를. 뿌옇게 내려앉은 먼지와 함께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탁탁, 경쾌하게 털어내주길, 정은임은 바라고 있다.
..부디 평안히 떠나시기를...
당신이 꿈꾸던, 또 다른 세상에서 평화의 안식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아래는 원문입니다.>
http://www.ohmynews.com/reader_opinion/opinion_view.asp?menu=s10200&no=180708&rel_no=1&code=332424&page=1&sort_name=date
오마이뉴스 푸른검객님의 댓글을 퍼다가 나릅니다.
> 푸른검객(redclip), 2004/08/05 오후 12:20:08
..정은임 아나운서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서..
한 사람으로 태어나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이리도 속절없을까..라는 얄궂은 안타까움이 괜시리 눈시울을 흐리게 한다.
얼마 전, 정은임 아나운서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설마 큰 사고는 아니겠지'라는 나름의 위안을 하며, 사고에 관한 소식을 인터넷의 여기저기를 뒤지며 탐문하던 중, 과거 주간한국에 자유기고가 유혜성씨가 기고한 글과 그녀가 다시 정음영에 복귀하던 즈음의 인터뷰 기사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한 세상의 삶을 이 몇줄의 글로 대신할 수야 없겠지만, 치열했던 나의 30대의 한 모퉁이에 아름답게 자리했던, 정은임 아나운서의 평화로운 안식을 기원하며, 그녀가 떠남을 가슴아파하는 '그녀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남겨진 글을 회고함으로써 정은임 아나운서를 떠나보내는 이별의 송가를 대신하고자 한다.
..................................................................(자유기고가 유혜성)
[감성 25시] 정은임
자신만의 언어로 띄우는 감성의 세상편지
내면의 소리를 찾아 떠났던 터키로의 여행
낯선 이국 땅에서 만난 순수의 보물, 시청자에게 선물
그녀는 왜 터키에 간다는 것일까? 그녀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곳이지만 동양도 서양도 아닌 곳이죠. 어디에도 속하고, 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라, 생의 비밀이란 보물이 찬란하게 빛날 것 같은 나라. 그래선지 호기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나라죠. 저, 터키에서 살 거예요.”
이 때 정은임 아나운서는 정의할 수 없는 나라 ‘터키’ 같았다. 꿈꾸는 듯한 눈, 살포시 들어간 보조개, 기다란 목선과 너무 여려 보여 금세 날아갈 것만 같은,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 오규원님의 ‘한 잎의 여자’라는 시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여자.
정은임을 기억하는가? MBC 5시30분 ‘우리말 나들이’란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표준어를 소개하는 아나운서를 최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칫 잘못 쓰게 되는 언어를 교정해 주는 프로그램인지라 그녀가 나오면 화면에 몰두하게 된다. 사실, 이유는 그뿐 만이 아닐 게다. 솔직히 그녀는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 예쁜 아나운서니까.
- 젊음과 열정으로 기억되는 아나운서
정은임을 이야기 하려면, 라디오 프로그램을 빼놓을 수 없다. 라디오를 말하지 않으면 ‘정은임이 아닌 것’이다. MBC FM4U(91.9MHZ)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의 주인으로 92년 11월 2일 첫 방송을 시작해 95년 4월 1일 마지막 방송을 한 뒤, 다시 옛자리로 돌아온 아나운서.(그 사이는 미국 노스트웨스턴 대학에서 ‘한국의 영화 마니아’라는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결혼과 출산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녀가 없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자체 활동을 해왔던, ‘정영음’(정은임의 영화 음악)동호회 회원들의 마음속에선 정은임은 아직도 영화음악을 진행 중인 아나운서였다. 볼셰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가가 영화 음악으로 소개되었을 때 마음속에서 ‘혁명’이란 단어를 은연중에 떠올리게 했던 그녀다.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말라는 말이 있던가. 그녀는 영화 음악을 통해 숨겨진 감성을 하나씩 꺼내놓고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꾸준히 그녀의 방송을 듣는 사람들은 각자가 세상의 ‘투사’가 되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녀는 젊음과 열정의 코드였다. 92년 입사한 정은임이 처음 맡게 된 프로그램이 바로 MBC FM 영화음악이다. 젊은 정은임은 그곳에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감성과 이성은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수습사원 시절 노조 가입 포기 각서를 거절한 이력도 갖고 있다. 옳지 않은 길은 가지 않는 것이 정은임이고, 옳지 않음에도 가야 한다면, 그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95년 4월 1일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 드릴게요”라는 눈물겨운 인사를 마지막으로 잠시 떠나게 된다.
그녀의 떠남은, 많은 소문들을 안겨주었다. 울먹이던 마지막 멘트가 MP3 파일로 저장되어 인터넷에 떠돌았고, 그녀의 떠남이 ‘강제 퇴출’이란 흉흉한 소문도 있었다. 그 당시 PC통신 정영음 동호회는 ‘정은임 복귀 추진 위원회’를 구성해 서명운동에 들어갔고, 일간지에서는 그들의 움직임을 뉴스거리화 했다. 혹자는 그녀를 ‘실패한 혁명가’라고 거창하게 말하기도 했다. 어찌됐든 그것은 사건이었다.
“예전에는 재기발랄한 영화를 좋아했어요. 이젠 영화를 만들든, 책을 쓰든, 방송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지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문화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에게 못할 짓 하면서 얻어내는 특종 같은 거, 누군가?상처 입히는 거, 위험한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예요.”
정은임은 세상의 움직임에 예민하다. 후배 아나운서 김태희의 죽음과 추문에 휩싸인 선배 홍은철 아나운서의 일로 그녀는 충격을 받았고,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한다. “사람의 본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 계기죠. 또한 대중의 속성은 무엇인지, 사람이 뭉쳤을 때 과연 어떤 효과가 일어나는지, 그때 대중은 본질을 잃고 얼마나 잔인하게 변해가는지. 탄핵안이 가결된 사건과 그 후 대중들의 움직임이 모두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니 너무 힘들었어요. 어찌해야 하나, 이 움직임을 도대체 어찌해야 하나
(2003.10.31 / 김세윤 기자 )
"과연 축하할 일일까요?"
복귀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여의도 MBC 본사 7층 라디오 스튜디오 앞에서 만난 정은임은 지나는 사람들이 건네는 축하 인사에 꼬박꼬박 그렇게 되묻고 있었다. "당연히 부담되죠. 복귀라면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건데. 지금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때'라면 1992년 11월 2일에 첫 방송을 시작해 1995년 4월 1일 정영음의 마지막 전파를 쏘아올리던 때를 말한다. 소녀 취향의 닭살 멘트가 난무하는 심야 방송에서 4.3 제주 항쟁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강제 철거의 부당함에 격분하는 오프닝 멘트가 화제를 모은 건 당연했다. 볼세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가'와 시위 현장에서 대학생들이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영화음악이라며 틀어주던 이 프로그램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듣게 해준 방송이었다.
2년 반 만에 맞이한 드라마틱한 마지막 방송. 이 때부터 독실한 애청자들이 정영음을 실패한 혁명으로, 정은임을 요절한 게릴라로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라고 눈물의 작별 인사를 고하던 마지막 방송은 MP3 파일로 저장되어 지금도 인터넷을 떠돈다.
"안 그래도 내가 그랬지. 정은임은 전설로 남겨두고 차라리 다른 사람을 섭외해야 한다고.” 정은임의 복귀를 축하하는 점심을 함께하며 홍동식 편성부장(당시 정영음 PD)은 끝내 자신의 충고를 새겨 듣지 않은 담당 PD를 은근히 대견해 했다. 그러면서 오는 2005년 정영음 종영 10주년을 맞아 화려하게 복귀시키려던 자기 복안이 틀어졌다며 정은임의 때이른(?) 복귀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당시 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 평론가 정성일은 "지금도 마치 커밍아웃하듯이 '저도 한때 정영음의 청취자였습니다'라며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만난다"고 말한다. 정은임은 그렇게 청취자들 사이에 은밀한 연대의식을 고취시키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설익은 대학생의 세계관으로 방송하고"도 박수받던 호시절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제 마이크 너머엔 영화에 담긴 진심을 믿는 충성스런 관객들 대신 박스오피스 성적을 더 믿는 변덕쟁이 관객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페널티 킥을 맞이하는 골기퍼처럼, 지금 정은임은 11년 전 입사 4개월 만에 덜컥 영화음악 진행을 맡던 그 때처럼 불안하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엔 너무 몰라서 불안했고 지금은 너무 잘 알아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모두들 군대 가 있는 어느 선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뭐, 완전히 신화적 인물이더라고요. 짱돌의 달인에, 강철 같은 사상. 제가 4학년 때 그 선배가 복학하는데 아, 그 신화가 산산히 깨졌다는거 아닙니까. 모든 신화의 속성이란 다 그런 거예요."
92년 11월 2일 첫 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 정은임은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해, 방송국이라는 직장에 대해 내심 실망하고 있었다. MBC 파업에 즈음해 입사한 이 수습 사원은 파업에 참여한 선배들을 대신해 일기 예보에 투입됐다. 찌푸린 날씨를 예보할 때면 잔뜩 먹구름이 끼여 있는 자신의 미래도 함께 예보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의 중심에서 호흡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 방송은 자본의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그저 순진한 대학생 마인드였음이 속속 드러나는 순간, 87학번 아나운서의 가슴속에 회의가 밀려들었다. 특히 '앵무새'라고 지탄받던 아나운서의 한계가 뼈아팠다. 못다 이룬 기자의 꿈을 실현할 대안이라고 믿었던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머지 않아 '아나운서' 정은임은 기자가 되었다면 절대 누리지 못했을 꿈같은 시절을 만끽하게 된다.
종영 전까지 매주 한 통씩 꼬박꼬박, 70여 통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내 제작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대구의 서영무(38)씨와 숙직하는 ‘은임이 누나’와 밤새 수화기를 붙들고 영화를 논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던 민철호(33)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혈 청취자 중 빨리 기억나는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직관으로 청소년의 가슴을 할퀴던 정은임을 모두가 예뻐한 건 아니었다. 95년 4월 1일, 정영음은 봄 개편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정은임의 인생에도 개편의 계절이 도래했다.
영화음악 종영 후 몇몇 프로그램을 오가며 영화 코너에 얼굴을 비추던 정은임은 98년, 결혼과 동시에 유학길에 올랐다. 이미 정영음의 마지막 방송에서 영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던 속내를 털어놓은 터였다. 항간에는 영화 연출을 공부하러 간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로부터 2년 뒤. 가슴속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안고 팔에는 아이를 안고, 정은임이 돌아왔다.
"사람이 보수화되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이 생기는 거예요. 특히 2세가 생기면 생각이 달라지죠. 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건 할 수 있겠는데 결코 우리 아이에게는 나의 신념을 관철시키지 못할 것 같거든요. <허공에의 질주>를 떠올리며 생각해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요즘은 그게 가장 큰 화두예요."
"그게요, 아이 참. 그러니까 막상 가보니까 영화학과가 아닌거예요. 미디어학과인 거 있죠? 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거야" 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일을 시작하는 건 정은임의 특기다.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때도 그랬고, 정영음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그는 그럴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나름의 돌파구를 찾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팔자에도 없는 경영학 수업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비로소 영화라는 텍스트 바깥을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세계관을 정리하고 돌아왔다"는 거창한 자평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2년이나 유학하고 돌아온 사원에게 1년 내내 이렇다 할 프로그램 하나 맡기지 않았다. 시간은 많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영화 볼 시간은 자꾸 줄어들었다.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남편을 남겨두고 먼저 들어와 혼자 아이를 키우니까 그럴 수밖에.
"영화를 보지 못하는 환경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밤 12시까지 아이 뒤치다꺼리 하더라도 꼭 새벽 3시까지 영화 1~2편씩 보고 나서 잤어요" 연애 시절 유학중인 남편과 6개월에 한번씩 만날 때도 그럭저럭 버틸 만했건만, 영화는 아니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지 못하며 사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정은임은 지금도 점심시간에 회사를 빠져나가 가까운 극장으로 간다. 보고 싶은 영화를 빨리 보지 못하면 목에 가시가 돋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이 불치병은 정은임의 아버지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다. 부친은 어린 정은임의 손을 잡고 극장 나들이를 일삼았다. 고등학교 때 정은임의 증세가 더 심해졌다. TV 영화를 빼놓지 않고 보고 난 후 영화 제목, 제작 연도, 제작사, 남녀 주인공, 영화 줄거리, 그리고 나름의 감상을 공책에 빼곡히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의 영향을 받아(?) 들어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학부 시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앞에 잠시 흥미를 잃기 전까지 그의 이런 식의 영화 보기는 계속됐다.
정은임을 열혈 영화광의 세계로 최초로 인도한 안내자는 사실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약사 엄마를 대신해 집안 일을 돌봐주던 가정부 언니였다. 장롱 가득 영화 잡지를 쌓아놓고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는 가정부 언니를 보고 어린 정은임은 생각했다. "가정부가 되면 참 좋은 거구나, 영화도 많이 보고 과자도 마음대로 먹고, 참 좋은 직업이구나.” 가정부가 되고 싶다는 장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정은임은 그 때부터 영화 사랑의 한 길을 걷게 된다.
"연변에서 오신 아줌마가 먹고 자면서 애를 봐주세요. 근데, 웃긴 게 제가 난생처음 사용자가 된 거잖아요. 그 미묘한 갈등, 임금 인상을 둘러싼 대립을 겪어요. 근데 저도 별 수 없이 기만적인 기업들이 쓰는 ‘패밀리’ 논리를 내세우게 되더라고요. 우린 한 가족이다, 이러면서 인간적 정을 내세워 무마하는 거예요"
입사 11년 차 정은임의 나이도 벌써 서른여섯이다. 일전에 <일요일 일요일 밤에> '브레인 서바이버' 아나운서 특집에 출연했더라면 입사 동기 김지은 아나운서와 함께 가운뎃줄, 일명 낙엽줄에 앉을 나이다. 이제 그는 정영음을 진행하던 시절 ‘내 인생의 영화’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던 <로저와 나>를 얼마 전 슬그머니 목록에서 빼버렸다. 그때는 거대 자본가에게 끊임없이 문전박대당하는 감독(마이클 무어)이 존경스러웠지만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까 재기발랄함과 무모함,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정은임은 신입 아나운서 시절 한 인터뷰에서 어느 간부가 "정은임은 동그라미와 가위표밖에 없다"고 말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었다. 당시 한 선배가 그 간부를 지칭해 “그 인간은 세모와 네모밖에 없다"고 말한 것에 용기를 얻기도 했다. 정은임에게 여전히 당신에겐 동그라미와 가위표밖에 없느냐고 물었다. 정은임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 날카로운 것 못지않게 사람에 대한 연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남편이 돈 많이 벌어서 재단이나 하나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란다.
잃어버린 줄 알고 새로 신청하고 또 잃어버린 줄 알고 신청해 현재 주민등록증만 4장을 갖고 있을 만큼 제 물건을 간수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정은임은 입사 당시 품은 초심만큼은 아직 잘 간직하고 있다. 그는 올해 MBC노조 여성부장직을 맡았다. 직장내 탁아소 설립이 당면 과제다. 또한 여전히 노조 노래패 소속이기도 하다. 최근 노조내 그룹 사운드의 공연을 보고 의기소침해 있긴 하지만.
그가 복귀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다음 카페 '정은임을 사랑하는 사람들'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한때 정은임 복귀 추진 모임(이하 정추임)이 결성될 만큼 열성 청취자를 거느린 프로그램의 종영 이후 8년. 사실상 복귀 운동을 포기하고 간간이 서로의 안부나 묻던 회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제 살을 꼬집어 보겠다는 글이 올랐고 벌써 꼬집어 봤는데 꿈은 아니라는 리플이 달렸다. 복귀 후 첫 방송 전날인 10월 19일 저녁 '정영음 부활 전야 정모'를 열기로 하면서 카페의 축제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이 카페 회원이면서 그 옛날 숙직하는 정은임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주던 애청자 민철호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는 정은임 개인의 복귀가 고마운 게 아니라 진지하게 영화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부활하는 게 고마운 것"이라고 말했다. 편지 70통의 주인공 대구의 서영무(38)씨는 "그동안 정은임씨도 변했겠지만 듣는 우리도 많이 변했다"면서 그냥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해달라"고 주문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투사(鬪士) 정은임이 아니라 삶을 투사(透寫)하는 영화 이야기를 들려줄 인간 정은임일 뿐이다.
정영음이 막을 내린 지 3,119일째 되는 지난 10월 15일. 게시판에 오른 한 청취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어린 감수성을 자극하고, 때로는 쓰다듬어주던 그 라디오, 지금은 낡은 옷가지들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낡은 라디오를 창고에서 꺼내 깨끗이 사과하고는 탁탁, 경쾌하게 먼지를 털어내야겠습니다." 부디 그래주기를. 뿌옇게 내려앉은 먼지와 함께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탁탁, 경쾌하게 털어내주길, 정은임은 바라고 있다.
..부디 평안히 떠나시기를...
당신이 꿈꾸던, 또 다른 세상에서 평화의 안식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아래는 원문입니다.>
http://www.ohmynews.com/reader_opinion/opinion_view.asp?menu=s10200&no=180708&rel_no=1&code=332424&page=1&sort_name=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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