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과 관련된 설화가 있는 동네는 무지하게 많다고 합니다.^^
평원태왕의 딸
평강공주가
두 번 결혼하지 않았다면
고구려의 귀족 고승이
온달 설화로
되었을 겁니다.
영양태왕(평강공주 동생)은 온달의 처남이고.
영양태왕 시절
고승 장군이 전사했고..
활동 시기도 비슷하고
등등 따져 보면
인 것 같습니다.
^^
관련 글 :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6/01/200406010500006/200406010500006_1.html
고구려 연대표 :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goguryeo.htm
고승 (高勝 ;?~?)
고구려의 장군이다. 603년(영양왕14) 8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략하다가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이 친히 군사 1만명을 이끌고 나와 대항하자, 중과부적으로 격퇴당하였다. 북한산성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세 나라가 서로 노리던 전략 요충지로, 당시 신라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빼앗고자 고구려에서는 고승을 출전시켰으나 실패하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온달 (溫達 ; ?~590)
《삼국사기》 <열전(列傳)> 온달조(溫達條)에 따르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얼굴이 우습게 생겨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평원왕은 어린 공주가 울기를 잘하여 놀리느라고 ‘네가 울기를 잘하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겠다’고 항상 말하였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고씨(高氏)에게로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임금은 식언(食言)할 수 없다’고 궁중을 나와 온달을 찾아 부부가 되었다.
공주는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집과 밭을 마련하고 말을 사서 준마로 키웠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이 되면 왕이 신하 및 병사들과 더불어 사냥을 하였는데 온달의 말타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서고 잡는 짐승도 많아서 왕이 불러 그 이름을 묻고 놀랐다. 그 때 중국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큰 공을 세우니 왕이 기뻐하여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의 벼슬을 내렸다. 590년(영양왕 1)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땅을 회복하겠다고 출정을 자원하여 신라군과 아차산성(阿且山城: 서울 광나루 북쪽 峨嵯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평원태왕의 딸
평강공주가
두 번 결혼하지 않았다면
고구려의 귀족 고승이
온달 설화로
되었을 겁니다.
영양태왕(평강공주 동생)은 온달의 처남이고.
영양태왕 시절
고승 장군이 전사했고..
활동 시기도 비슷하고
등등 따져 보면
인 것 같습니다.
^^
관련 글 :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6/01/200406010500006/200406010500006_1.html
고구려 연대표 :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goguryeo.htm
고승 (高勝 ;?~?)
고구려의 장군이다. 603년(영양왕14) 8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략하다가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이 친히 군사 1만명을 이끌고 나와 대항하자, 중과부적으로 격퇴당하였다. 북한산성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세 나라가 서로 노리던 전략 요충지로, 당시 신라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빼앗고자 고구려에서는 고승을 출전시켰으나 실패하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온달 (溫達 ; ?~590)
《삼국사기》 <열전(列傳)> 온달조(溫達條)에 따르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얼굴이 우습게 생겨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평원왕은 어린 공주가 울기를 잘하여 놀리느라고 ‘네가 울기를 잘하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겠다’고 항상 말하였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고씨(高氏)에게로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임금은 식언(食言)할 수 없다’고 궁중을 나와 온달을 찾아 부부가 되었다.
공주는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집과 밭을 마련하고 말을 사서 준마로 키웠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이 되면 왕이 신하 및 병사들과 더불어 사냥을 하였는데 온달의 말타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서고 잡는 짐승도 많아서 왕이 불러 그 이름을 묻고 놀랐다. 그 때 중국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큰 공을 세우니 왕이 기뻐하여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의 벼슬을 내렸다. 590년(영양왕 1)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땅을 회복하겠다고 출정을 자원하여 신라군과 아차산성(阿且山城: 서울 광나루 북쪽 峨嵯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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