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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들

AstroBike2005.02.20 09:56조회 수 316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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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topgun-76"님이 쓰신 "전 '장애우'라는 말을 좋아합니다"라는 글과
"날초~"님이 쓰신 "장애우라는말 듣기 싫어합니다"라는 글, 잘 읽었습니다.

"날초~"님이 쓰신 말씀은 어느 정도의 반어적인 표현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일찌기 "언어의 한계"에 대해 설파했던 "언어철학"의 대가 "비트겐쉬타인(Wittgenstein; 1889-1951)"의 사상이 어느 정도 담겨 있는 듯 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더 그럴 듯 한가요 ~~~(^_^).

비트겐쉬타인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명제를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명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다. 그밖에도 '말해질 수' 없는 것으로 실재의 단순 요소들의 필연적 존재, 사고하고 의지하는 자아의 존재, 절대적 가치의 존재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사고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언어의 한계가 사고(思考)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실로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쉽게 풀어 얘기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할 수도 있으며, 언어 사용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고 사유하는 영역(思考영역)을 한계지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정상적인 사람 (정상인)'에 대한 정의를, '정신과 신체의 활동과 능력이 평균적인 범위 (이 평균적인 범위라는 것도 분명한 개념은 아닙니다) 내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장애가 있는 사람 (장애인)'에 대한 정의는, 평균적인 범위를 벗어나는 모든 사람들, 특히 제한이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용어의 시작은, "sdjdm"님의 말씀처럼, '구분을 짓기 위해' 였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차별을 나타내는 부작용으로서의 의미가 나타나는 듯 합니다. 바로 우리의 언어 사용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된 것이지요.

불편하신 분들을 대할 때, 아무런 동정이나 차별없이 있는 그대로 대한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몸이 불편하면 사회에 대해 당연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며, 모두 함께 어울려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과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장애인과 정상인의 구분없이 우리 모두가 해야할 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제가 무단전재(?)한 글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들이 나타내는 외견상의 의미와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속뜻(아래의 글을 쓰신 분은 "정서적 의미"라고 표현하십니다)에 대해 필명 "바이브 (vibraphone)"님께서 논하고자 쓰신 글입니다.

이 글 (언어의 정서적 의미와 "튀기") 은 인터넷 한겨레 신문한민족 공동체를 위한 Korean Network 이라는 사이트에 있는 Women's Forum에 지난 2005년 1월 26일에 실렸습니다. 위의 파란색 단어를 누르시면 해당 사이트로 이동합니다.

이 글과 이 글에 달린 여러 답글들이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하는 좋은 글들이라고 여겨져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이곳에 싣습니다.

글을 쓰신 "바이브 (vibraphone)"님과 한겨레 신문사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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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정서적 의미와 "튀기"

글이 좀 길어서 숫자를 붙여서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미 다른 분들이 하신 이야기와 중복되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글의 흐름을 위해서 그냥 중복되는 이야기도 빼지 않았습니다.


1.

언어의 가장 기본적 기능은 생각의 전달이겠지만, 때로는 언어가 이런 기본적 기능 외의 부수적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부수적 기능 중 대표적인 것으로 정서의 전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단어의 사용과 어떤 정서의 전달이 일반적으로 결합되어서 사용되면, 그 단어가 (내용상의 의미와 구별되는) "정서적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언어를 배우면서 내용상의 의미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의미도 함께 배우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모국어 사용자는 어떤 단어의 내용상의 의미를 거의 자동적으로 파악하듯이, 어떤 단어의 정서적인 의미도 거의 자동적으로 파악합니다. (외국어 사용자의 경우에는 외국어가 상당한 수준이어도 어떤 단어의 정서적인 의미까지를 모국어 사용자가 느끼는 것만큼 느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내용상의 의미를 교육받을 교본은 있지만, 정서적인 의미를 교육받을 교본은 거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단어에서 내용상의 의미가 아니라 정서적 의미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욕이지요. 대개의 욕들은 독립적인 내용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욕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정서적 의미이지 내용상의 의미가 아니죠.

예를 들어, "성관계를 가질"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욕의 경우, 이 욕을 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당신은 성관계를 가질 사람이다"라는 뜻을 (혹은 어떤 상황에 대해서 그 상황이 성관계를 가질 상황이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니죠. 아마도 이 말이 처음 욕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성관계를 가질"이라는 말에 이미 경멸적인 정서가 함께 전달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욕으로 사용되었겠지요.) 하지만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더 이상 경멸적인 정서와 굳이 연결될 필요가 없게 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 욕은 경멸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사실, 욕의 내용상의 의미는 욕을 연구하는 국어학자를 제외한 일반 대중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욕을 하면서 그 욕의 내용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단어의 내용상의 의미와 정서적 의미가 서로 독립적이다 보니 내용상으로는 훨씬 더 나쁜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정서적으로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계속 욕의 예를 들자면, “제기랄”이라는 단어는 어원적으로 “자기 어머니와 성관계를 가질”이라는 매우 나쁜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합니다만, 정서적으로는 위에서 예를 든 “성관계를 가질”이란 뜻을 가진 “xx”이라는 욕보다 오히려 덜 나쁜 의미만을 가집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내용상으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혹은 전혀 나쁘지 않은 의미만을 가지는 단어가 정서적으로는 나쁜 의미를 가지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2.

게시판에서 논의되고 있는 “튀기”라는 단어의 경우, “튀는 사람” 혹은 “튀는 것”이라는 어원상의 내용상 의미가 부정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와 상관없이, 이 단어는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몇몇 욕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어의 정서적 의미는 사전에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사전과 같은 권위에 호소해서 어떤 단어가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어떤 단어가 어떤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여부는 어려서부터의 교육을 통해서 얻은 우리의 언어적 직관에 의존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어쨌거나 “튀기”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에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게시판에서 논의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요.

게시판에서 논의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것은, “튀기”라는 말이 갖는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가 이 단어가 지칭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적 정서와 무관하지 않고, 그러한 차별적 정서는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차별적인 정서가 해소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문제 해결도 있을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논의될 것은, 그리고 실제로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은, 차별적 정서를 해소하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목적이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 목적을 이룰 방법만이 논의대상이라면, 문제는 어떤 방법이 더 좋은 방법인가 뿐이겠지요. 저는 언어가 정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튀기”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를 배제하고 사용하는 것보다 (가능하다면)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

언어의 내용상의 의미가 시대가 변하면 바뀌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 언어의 내용상의 의미를 바꾸는 것도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주로 학문적인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 어떤 단어가 이미 가지고 있는 내용상의 의미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어떤 사태가 기존의 단어로 충분히 표현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기존의 단어의 (내용상) 의미를 변경하기 보다는 새로운 단어를 도입하는 것이 더 일반적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오늘날에도 새로운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언어의 정서적 의미도 시대가 변하면 바뀌기도 할 것입니다. 정서적 의미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 있기 어려워서 그 증거를 찾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만, 앞에서 예를 든 “제기랄” 같은 것이 그 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 이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는 매우 강한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졌을 것이 틀림없으니 말이죠. 아마도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 언어의 정서적 의미를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의식적 노력에 의해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정서가 기존의 단어로 충분히 표현되지 못할 때, 기존의 단어의 정서적 의미를 변경하기 보다는 새로운 단어를 도입하는 예는 이미 다른 글들에서 언급되었지요. “장애인”, “매매춘여성” 따위 말이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어떤 단어의 정서적 의미를 의식적으로 바꾸는 것이 어떤 단어의 내용상의 의미를 의식적으로 바꾸는 것보다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정서적 의미라는 것이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영역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정서적 의미를 바꾸는 것이 내용상의 의미를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내용상의 의미는 보다 의식의 영역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단어는 이런 의미로 쓰자고 하고서 사전의 내용을 바꾸고 무슨 계몽 운동 같은 것을 하고 뭐 그런 식이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앞으로 “별”이란 단어는 “붙박이별(항성)”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자고 결의하고, 화성 같은 것을 “별”이라고 부르면 잘못된 표현이라고 지적해 주고 뭐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별”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실제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천문학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요.)


4.

물론 어려워도 꼭 필요하다면 해야 되겠지요. 실제로 언어의 정서적 의미를 바꾸고자 하는 노력의 예들이 이 게시판에서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아줌마”의 경우와 “black”의 경우죠. 특히 “black”의 경우는 새 단어를 도입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예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들은 “튀기”의 경우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아줌마”의 경우, 이 단어가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문방구에 가서 “아줌마, 공책 한 권 주세요”라고 이야기할 때, 이 단어는 어떤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도 갖지 않는 단어였습니다. 지금도 이 단어가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는 것은 특정한 맥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뿐이라고 생각됩니다. 여전히 (방금 예로 든 문방구에서 물건 사는 맥락같은) 다른 맥락에서는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지 않고 사용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아줌마”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지 않고 사용하자는 운동은, 사실은 이 단어가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게 되어 가는 사회현상을 차단하고자 하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원래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지 않는 단어를 그런 의미를 갖는 것처럼 사용하는 언어의 오용을 막자는 운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black”이라는 단어는 인종을 나타내는 말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죠. 당연히 이 단어가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는 것은 어떤 특정한 맥락, 즉 흑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는 맥락에서만입니다. “black horse”라든지 “black mahogany” 같은 쓰임에서는 오히려 어느 정도 긍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비해 “튀기”라는 단어는 애초부터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던 단어인 것처럼 보입니다. “byungsin”이나 “negro”라는 단어가 그러하듯이 말이죠.

이와 관련해서, “Black is beautiful”이라는 주장은 있어도 “Negro is beautiful”이라는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플레인님의 표현을 빌어 “블랙 당당 운동”(제임스 브라운의 노래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는 그야말로 블랙 당당 운동의 직접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라고 이름붙여도 좋을 만한 움직임이 나름대로 대중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negro”와 달리 “black”은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고 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5.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balck”의 예는 이 게시판에서 새 단어의 도입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오히려 이것이 거꾸로 새 단어의 도입은 효과가 있고 “튀기 당당 운동”은 효과가 별로 없을 것을 시사해 주는 예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욕에도 더 심한 욕과 덜 심한 욕이 있듯이 어떤 단어가 가지는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도 보다 부정적인 것과 덜 부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장애자”라는 말이 설혹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byungsin”이라는 말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심한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나병”은 “문둥병”보다 그 정서적 의미가 덜 부정적입니다.

어떤 운동이 완벽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 그 운동을 실패로 간주하고, 또 완벽한 결과를 얻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방법은 애초에 배제시키는 것을 운동에서의 순수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순수주의는 사회운동가들이 범하는 흔한 실수 중에 하나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대중과 괴리된 운동은 열이면 여덟은 운동가들의 순수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둥병” 대신에 “나병”을, “byungsin” 대신에 “장애자”를 도입한 것은 완벽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단어들 사이의 상대적인 부정적 뉘앙스의 차이에 비추어 볼 때, 나병환자와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기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black”이 “negro”보다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가 약하다는 점에서 “negro” 대신 “black”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상당히 성공적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남북전쟁을 통한 노예 해방이 흑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데 상당히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요.

하지만, “black” 역시 어느 정도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블랙 당당 운동도 생겼겠지요. 그런데 이 블랙 당당 운동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완전한 성공이 아니라고 이 운동이 실패였다고 이야기하면 안 되겠지요. 어쩌면 이 운동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기여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언어의 내용상의 의미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전 따위의 경우처럼) 언어의 정서적 의미가 어떤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공식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블랙 당당 운동을 통해서 “black”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영어를 잘 못하는 저 같은 사람이 영어 단어의 정서적 의미가 어떤지 까지를 파악하기는 어렵죠.) 하지만, 여하간 “negro”를 “black”으로 교체한 것과 비견할 만한 가시적인 효과를 얻지는 못한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블랙 당당 운동이 벌어진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 단어는 언어적으로 매우 불리한 단어인 “African American”으로 상당히 대체되었지요. (“black”은 한 음절이지만, “African American”은 8 음절, 약한 음절을 빼고도 4 음절이나 되지요.) 저는 흑인이 아닌 사람이 흑인을 “black”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애초부터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black”이라는 단어와 관련한 당당 운동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면, 애초부터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던 것이 분명한 “튀기”라는 단어와 관련한 당당 운동이 성공하기란 그만큼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6.

튀기 당당 운동이든, 새 단어 운동이든, 그 성공의 열쇠는 대중, 혹은 (언어사용과 관련한 대중이라는 뜻의) 언중이 가지고 있겠지요. 제게는 이 사실이 또한 새 단어 운동의 성공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무식대중” 당당 운동을 하고 계신 것으로 짐작되는) 플레인님은 일반 대중은 새로운 단어가 생기는 것을 머리 아파한다고 주장하십니다만, 저는 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일반 대중은 새로운 단어가 제안되었을 때, 그 단어가 좋지 않으면 고민하지 않고 그냥 폐기처분하고, 그 단어가 좋으면 역시 고민하지 않고 그냥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동아리”라는 말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내) 서클”이라는 말을 완벽하게 대체했지요. “xx를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뜻의 “x사모”는 아직 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앞으로 사전에 등재될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순식간에 일상 용어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일반 대중이 머리 아프게 고민했다는 증거를 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장애우”라는 단어는 모르긴 해도 폐기처분될 것처럼 보입니다. “장애우”를 쓰자거나 말자는 논쟁이 인터넷에서 한동안 있었지만, 머리 아프게 그 논쟁에 참여했거나 혹은 그런 논쟁을 읽으면서 고민하느라 머리 아파한 사람들은 소위 “무식대중”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일반 대중은 “장애우”라는 단어를 쓰자는 주장을 접하고서는, 별다른 고민하지 않고 그냥 무시해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디로 이 단어는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지요.

새 단어 운동의 문제는 과연 좋은 단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데 있지, 이런 저런 단어들을 실험해서 골치 아프게 여러 단어를 만들어 내게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게시판에서라도 좋은 단어를 누군가가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면, 일년이 지나지 않아서 일반 사람들이 그 단어를 사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일반 대중이 골치 아플 일은 없을 것이라는 데 붕어빵 두 개를 겁니다.


7.

이에 비해, 튀기 당당 운동은 성공적인 경우에 조차도 언중 일반에게 호응을 얻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거의 대부분의 무슨무슨 당당 운동이 다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대중은 골치 아픈 것을 싫어합니다. 대중은 가시적이고 단순명료한 것을 좋아합니다. 대중은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대중은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글과 같은 글은 몇 줄 읽어보고서 “스크롤의 압박이 아주 심하군”하고서 더 이상 읽지 않습니다.)

이 단어가 나쁘니 앞으로는 저 단어를 쓰자는 주장은 단순명료합니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새로운 단어도 있습니다. 옛날의 단어가 별로 좋지 않다는 대중적 공감대가 있다면, 새로 쓰자는 단어가 예쁘고 편한 경우, 대중은 별다른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도 그냥 새 단어를 쓸 것입니다. 새로 쓰자는 단어가 어색하고 불편하면 별다른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사용하지 않을 테고요.

이에 비해, 이 단어가 나쁘게 사용되고 있지만, 잘 살펴보면 그렇게 나쁜 말도 아닌데 잘못해서 나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니까, 앞으로는 이 단어를 나쁜 뉘앙스 없이 당당하게 사용하자는 주장은 복잡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반응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안 나쁘긴 왜 안 나뻐, 내가 듣기 거북한데.” “나쁘면 그냥 안 쓰면 되지, 뭣하러 그걸 쓰자는 거야.”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당당 운동에 동참하지 않겠지요. 간혹 가다가 “뭐, 잘 모르겠지만, xx가 쓰자니 그냥 쓰자. 어련히 알아서 고민 많이하고 한 소리겠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고, 이 사람들은 이 주장의 정당성에 대한 스스로의 고민없이 그냥 당당 운동에 동참할 수도 있겠으나 그 가능성을 높게 잡긴 힘들 것 같습니다. 세 번째로 그 단어와 관련한 사안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람들은 (그리고 자신의 삶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문제들에도 이런 저런 관심이 많은, “무식대중” 당당 운동을 하고 계신 분의 표현을 빌어, “인텔리”들은) 그 주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에 동의하는 경우 당당 운동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무슨무슨 당당 운동이 성공적인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그 단어에 관련한 사안이 삶에서 중요한 사람들로부터만 (그리고 “인텔리”들로부터만) 이 운동이 일차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언중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요.

물론 일차적인 호응이 광범위한 이차적, 삼차적 호응을 불러 일으키고, 결국 언중 일반이 당당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쉽지 않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슨무슨 당당 운동의 결과는, 그 단어가 사용되는 어떤 특수한 맥락에 국한해서 그런 맥락에서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벗어난 상태로 사용될 수 있게 되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실 새 단어 운동에 의해 제시된 단어가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한 경우도 같은 결과를 나을 것 같고요. (전자의 예가 흑인들이 “black”을 사용하는 경우, 후자의 예가 동성애 인권 운동 진영에서 “이반”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8.

글이 많이 길어졌습니다만, 여기에 자주 오지 못하는 관계로, 온 김에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더 써 볼까 합니다.

지금까지는 새 단어 운동이 더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새 단어 운동이 갖는 긍정적인 부수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말은 영어를 비롯한 주요 언어들에 비해서 어휘수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새로운 단어들을 자꾸 만들어내는 실험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우리말에 어휘수가 적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말에 조어법이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조어법은 한자어를 이용하는 것이 거의 유일했던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대체할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 때 한자어를 사용했던 것은 굳이 한자어를 더 우대해서라기 보다 달리 새로운 단어를 만들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한자문화권에 강력하게 종속되어 있던 경우에는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한자문화권에 종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어떤 새로운 단어를 단지 한자어의 뜻에 맞추어서 만드는 경우 매우 어색합니다. 어색하다는 것은, 언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폐기처분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제가 학교 다닐 때 들은 어떤 교양 수업에서 어떤 선생님이 학문적인 이유로 고민고민해서 만든 풍려風麗라는 단어를 소개했었습니다. 대양이나 태산처럼 어떤 장대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말이었지요. 저는 그 수업 이후에 이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중국뿐 아니라 일본의 경우도 한자어에 의한 조어법에 의해 많은 단어를 새로 만들어 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이것이 쉽지 않았고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우리는 한글을 포함한 새로운 조어법을 개발해야 합니다. 새로운 조어법의 개발이란 굉장히 막연한 일처럼 생각됩니다만,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고 그 중에 어떤 것을 언중이 받아들이면, 그 말을 만든 조어법도 덩달아 언중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방식의 조어법으로 만들어진 몇 단어가 언중에게 계속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런 조어법이 개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테고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x사모”와 같은 표현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은 것이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글을 가지고도 acronym을 통한 조어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례가 되는 것이니까요. 또 이번에 정부 주도 하에 만들어진 “새터민”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 자체가 살아남을지 그렇지 않을지의 문제를 떠나서, 한글과 한자어의 조합이라는 새로운 조어법을 선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성공하든 그렇지 않든 일단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시도를 하는 것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겠지요. 하지만 한 번의 실패는, 단순한 헛수고가 아니라, 한 번의 실패만큼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 실패가 그런 방식의 조어법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다음 번 시도를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거꾸로 그런 실패들이 쌓이면서 새로운 조어법을 만드는 것 자체에 대한 언중의 문턱을 낮추는 역할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한 것도 자꾸보면 어색함이 덜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죠.)


9.

끝으로 지엽적인 몇 가지 이야기들을 하겠습니다.

“장애자”와 “장애인”의 경우, 저는 “장애인”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라는 말이 --놈이라는 뉘앙스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죠. 우리말에서 “--자”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예, 학자, 연구자, 수상자, 선구자, 수행자 등). 즉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졌을 때 “--자”라는 접미어가 붙는다는 것이죠. “--인”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상대적으로 행위보다는 상태에 초점이 맞추어졌을 때 붙은 접미어인 것 같습니다 (예, 자연인 - 자연적인 사람, 법인 - 법적으로 사람을 역할을 하는 것, 한국인 -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 죄인 - 죄가 있는 사람, 도인 - 도를 깨달은 사람, 초인 - 대단한 사람 등)

뭐, 이것은 주먹구구식 법칙이니 예외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법칙에 따르면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장애인”이라는 표현으로 지칭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또 만약 정말로 “장애자”라는 표현이 장애를 가진 것을 어떤 행위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하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별로 좋지 않은 뉘앙스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장애를 무슨 잘못인 것처럼 보았던 사회적 편견과 연결되기 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장애인”이라는 표현은 어색하지도 않고, 이 표현을 도입하는 데 무슨 특별히 큰 사회적 비용이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플레인님이 퍼 오신 이복남씨의 글에 나오는 사회적 비용의 예는 과장이죠. 공공문서는 어차피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하다못해 “장애자”라는 표현이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문제제기에 대해서 이런 식의 대응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비용이 크지 않다면) 이미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센병”의 경우는 외국어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좀 부담이 있는 표현같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일지는 언중이 결정하게 되겠지요.)

“운전사”의 경우, 오랫동안 한국어를 사용해온 제 언어적 직관에 따르면 이 단어는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단어를 듣고서 기분이 나빴다고 해서 이 단어가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죠. 이것은 단지 그 사람이 “운전사”라는 단어에 혼자서 특수한 정서적 의미를 부여한 것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동차”라는 단어를 중형차 이상의 차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로 사용한다고 해서 “자동차”의 내용상의 의미가 중형차 이상의 차가 되는 것은 아니죠. 언어의 내용상의 의미가 사회적인 것이듯, 언어의 정서적인 의미도 사회적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게시판에서 논의하고 계신 분들은 “혼혈”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어서 사용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데 대충 동의들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사실 “혼혈”이라는 말이 그렇게 나쁜 말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말이 특별히 좋은 말도 아니어서 새로운 좋은 단어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겠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만, 만약 “혼혈”과 “튀기” 중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저는 오히려 “혼혈”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혈”이라는 단어가 나쁜 이유로 이 단어가 순수혈통주의의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 제시된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혐의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언중 일반이 “혼혈”이라는 단어에서 그런 뉘앙스를 파악하고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습니다. “혈”이라는 표현은 “혼혈”이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말에서도 단순히 “민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혈”이라는 표현으로 “민족”을 의미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고, 저도 여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이것이라면, 이것은 튀기 당당 운동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죠. “혈”로 “민족”을 나타내는 모든 말을 거부하는 운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혈통주의”라는 말 자체도 국어사전에서는 사람이 어디서나 본국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속인주의와 동의어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설사 “혈”이란 표현으로 “민족”이란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들은 모두 웬만하면 거부하자는 운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혼혈”과 “튀기”의 양자택일에서는 “튀기”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이 경우 “혈통주의” 같은 말은 “속인주의”라는 적절한 대체어가 있으니 별 문제없이 용도폐기될 수 있겠지만, “튀기”는 “혼혈”의 적절한 대체어가 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예를 들어보지요. “새끼”라는 말은 사람의 자식에게 사용될 때는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죠. 그런데 “자식”이라는 말은 사실 남성우월주의의 잔재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말로 생각됩니다. 언중 일반이 그런 뉘앙스를 파악하고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말입니다. (무협지 같은 데에서는 “여식”이라는 말도 사용됩니다만, 일상적으로는 “자식”이라는 말이 아들과 딸을 함께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죠.) “튀기” 당당 운동의 정신을 여기에 적용시키면, 우리는 “새끼” 당당 운동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경우에도 만약 “자식”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문제가 있다면, 새로운 좋은 단어를 만들어야지 “새끼” 당당 운동으로 해결하는 것은 좋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새끼가 몇이나 있으신가요?”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십시오!)

다시 반복합니다만, 언어는 내용상의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내용상의 의미 변화가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처럼 정서적인 의미의 변화도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물론 강신주님이나 그와 비슷한 분들이 자신의 자식을 “튀기”라고 부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제 어머니가 제가 어렸을 때 저를 “아이구, 내 새끼”라고 부른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듯이 말이죠. 또 흑인들이 서로를 “nigger”라고 부를 때, 아무런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갖지 않은 단어로 사용하듯이 말이죠. 하지만 이런 단어들이 언중 일반에 의해서 부정적인 정서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 단어로 재생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고 그것이 꼭 해야할 일인가도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끝>


[게시일 : 2005-01-26 오후 3:3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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