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강국인 우리나라도 이창호가 나오기 전에는 일본과 중국에게 왕따를 당했었다.
근대 바둑을 꽃피운 일본... 그리고 바둑 후진국이던 한국...
일본은 70년대에 처음으로 한국과 교류전을 갖는다.
결과는 8-2, 9-1... 한국의 2년 연속 대참패였다. -_-;;
바둑 선진국으로 자부하던 일본은 한국과 교류전을 해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여 3년째에는 일방적으로 한국에 오지 않는다.
한국은 그렇게 일본에게 가볍게 따 당한 것이다. -_-;;
일본은 80년대 들어 국가 대항전을 만든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을 끼워주지 않는다.
이름하여 중일슈퍼대항전!
이번엔 중국과 합세하여 한국을 왕따 시킨 것이다. -_-;;
한국은 중일슈퍼대항전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일본과 중국이 우리나라를 따 시키더니 이번엔 대만이 가만 있지 않았다.
88년... 대만의 갑부 응창기 씨가 응창기배라는 우승 상금만
4억인 초 슈퍼 울트라 바둑 대회를 만든다.
응창기 배의 주최국인 대만은 각국에 출전권을 부여했다.
일본과 중국에는 각각 6,7명의 출전권을 준다.
그리고 한국에는... 1명씩이나~ 되는 엄청난 출전권을 준다. -_-;;
바둑 실력이 개뿔도 없는 대만에게
마저 따를 당한 것이다.
응창기 배에는 아마추어 수준인 미국, 유럽, 남미에도
각각 한 장씩의 출전권이 주어 졌다.
결국 한국은 아마추어 취급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 였다.
쨌든 갖은 설움을 뒤로 하고
한국의 간판스타 조훈현이 응창기배에 홀홀단신으로 참가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서러움...철저한 무관심...
훈현은 중국과 일본의 고수들 사이에서 그런 왕따를 다해야 했다.
하지만 조훈현은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
왕명완을 가볍게 물리치더니 일본의 최고수 고바야시 마저 이기고 4강에 안착했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벅찬 상대 임해봉을 이겨서
중국의 섭위평과 꿈에도 그리던 결승 5번기를 두게 되었다.
철의 수문장인 초일류의 고수 섭위평...
그는 선천적으로 심장에 천공이 뚫려 있어 바둑 두는 도중에
휴대용 산소 호흡기로 산소를 마셔 가면서 바둑을 둬야 했다.
그리고 섭위평은 문화 대혁명 당시 유한 계급으로 분류되어
하루 아침에 흑룡강 돼지우리 반장으로 신분이 하락되기도 한
특이한 이력의 사나이다.
어찌보면 불쌍하기도 한 섭위평...
하지만 한국이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꼭 섭위평을 이겨야 했다.
심장에 천공이 뚫렸다해서 조훈현이 져줘야 할 이유는 없다.
허파에 왕따시 만한 구멍이 뚫렸건 뇌에 똥파리가 살건
그건 개인 사정이지 져줘야 할 이유는 못 된다. -_-;;
둘은 치열하게 승부를 주고 받았다.
2-2 타이 스코어에 운명의 마지막 대국...
마지막 5국은 싱가폴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그걸 두고 싱가폴 대첩이라 표현했다.
조훈현의 어깨는 무거웠다.
응창기배를 우승함으로써 그동안 한국이 당했던 왕따의 수모를
벗겨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조훈현은 강했다.
한 판에 4억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자기 만의 바둑을 뒀다.
산소 공급이 안 되어서인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얼굴이 부은 섭위평은
중간에 돌을 거뒀고, 옆에서 지켜보던
섭위평의 부인 공상명 9단은 얼굴을 감싸 안고 대성 통곡을 했다.
섭위평과 부인 공상명은 그 후 갈등이 심해져 이혼까지 하게 된다.
만일, 섭위평이 응창기배를 우승했으면
부인과 이혼까지 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생일대의 승부에서 진 후유증은 그렇게 큰 것이다.
감격의 응창기배 우승!!
단장으로 간 김수영 7단은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TV로 공개 해설하던 노영하 8단은
조훈현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만세 삼창을 했다.
차갑고 이지적인 해설자 노영하 8단. 평소에 별명도 선비다.
난 그가 그렇게 이성을 잃고 배가 튀어 나올 정도로
만세 삼창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선비가 저렇게 망가져도 되나 괜히 나혼자 걱정 했다. -_-;;
조훈현은 공항에서 내리자 마자 바둑 기사로는 처음으로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조훈현은 한국 바둑을 왕따의 수렁에서 구해낸 용사였던 거였다.
응창기배 우승 이후 상황은 급반전 했다.
한국 바둑을 대하는 눈을 달라졌다.
이제 어느 나라가 한국 대신 왕따를 당하느냐만 남은 상황이었다.
키는 한국이 쥐고 있었다.
응창기배 우승에 고무된 한국은 90년대 들어 진로배 국가 대항전을 개최한다.
국가 대항전인 만큼 바둑을 둘 줄 아는 아시아의 네 나라가 모두 붙어야 하건만...
거기엔 대만이빠져 있었다.
그렇게 한국은 가볍게 대만을 따 시켰다. -_-;;
대만측에서 불만을 토로했지만
일본과 중국도 은근히 대만이 빠진 거에 대해 찬성했다.
대만이 참가하면 대회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대만... 그러게 왜 응창기배 출전권을 한국에는 달랑
한 명만 주었니... 세 명만 줬어도 따 당하지 않았을 것을...
한국의 자랑 이창호, 초슈퍼울트라메가캡숑을 자랑하는 바둑 신 이창호...
이창호는 90년대 중반 국내 도전기 전념을 위해 일본의 후지쯔배에 불참을 선언한다.
후지쯔로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후지쯔 측에선
그야말로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이미 세계 기류는 이창호의 참가 여부에 따라서
일류와 이류 대회로 분류되는 시대인 것이었다.
골프에서 타이거 우즈가 참여하면 그 대회가
더욱 빛이 나듯이 이창호의 참여 만으로도 그 대회의 격이 상승된다.
후지쯔 측에선 이창호를 참가 시키기 위해 별의별 짓거리를 다했다.
(원본에 충실하다보니... 그냥 틀린글자만 고쳐올렸습니다. ^^;)
빌고 또 빌어도 안 되니 나중엔 협박까지? 했다 한다. -_-;;
갖은 연줄을 다 대고 한국의 고위층에까지? 이창호를 설득해 달라고
연줄을 대 보지만 이창호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창호는 개인적으로 가볍게 일본의 거대 기업 후지쯔를 왕따 시킨 것이었다.
아, 우승 상금이 일억 오천인 대회를 불참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모두들 참가하지 못해 안달인 것이다.
그런 대회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왕따 시키는 이창호의 마음 속이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이창호도 후지쯔 측이 불쌍했던지 다음해에는 기꺼이 참가를 해준다.
그리고 결승에서 창호는 그의 영원한 밥, 아니 운명적으로
밥일 수밖에 없는 중국의 마효춘을 가볍게 누르고 우승한다.
중일슈퍼대항전... 한국을 왕따시키고 자기들끼리 꿍짝이 맞아서
신나게 대회를 열어 나가더니 90년대 들어 소리 소문 없이 그 대회는 사라진다.
중일슈퍼대항전 주최측은 거기에 대해 이런 이유를 댄다.
' 한국이 참가하지 않는 대회는...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둬요.. T_T '
그렇다.
이제 한국이 출전하지 않는 대회는 의미가 상실되는 시대다.
그렇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던 한국 바둑... 이젠 왕따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세계의 중심에 선 것이다.
중국의 '중국식 포석'과 일본의 우주류 다께미야의 '3연성 포석'이
80년대를 주름잡을 때 우리나라 기사들은
그들이 창안한 걸 따라하며 기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연 90년대도 그럴까?
정동진에 가면 '고현정 순대'니 '이정재 김밥' 있듯이
요즘 세계 바둑계에는 '이창호 정석' 이란 게 판을 친다.
덩달아 '조훈현 정석'도 난리가 아니다.
이미 다께미야의 '3연성 포석'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일본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기성전에서 마저
'이창호 정석'이 난무하여 따로 저작료라도 받아야할 지경이었다.
왕따... 한국 바둑은 이창호가 있었기에 완전히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이창호 같은 천재도 노력을 할까?
이창호는 새벽 2,3시까지 바둑돌을 놓지 않는다.
천재도 노력 해야 한다는 걸 이창호는 몸소 보여준다. (부단히 노력합시다... ^^;)
다시 뛰는 한국인... 한국은 다시 뛰어야 한다.
이창호처럼 쉬지 않고 뛰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은 사실 정말 뛰어난 민족이다.
그걸 이창호가 확인해 줬다.
일본과 중국의 날고 뛰는 기사들이 이창호 앞에 두손두발 다 들었다.
노력하는 한국인의 모습이 그의 모습 속에 투영돼 있다.
자충수와 패착으로 일관하는 부패한 인간들만 없으면
우리의 앞날은 밝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왕따는 없다...
출처:도깨비신문
근대 바둑을 꽃피운 일본... 그리고 바둑 후진국이던 한국...
일본은 70년대에 처음으로 한국과 교류전을 갖는다.
결과는 8-2, 9-1... 한국의 2년 연속 대참패였다. -_-;;
바둑 선진국으로 자부하던 일본은 한국과 교류전을 해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여 3년째에는 일방적으로 한국에 오지 않는다.
한국은 그렇게 일본에게 가볍게 따 당한 것이다. -_-;;
일본은 80년대 들어 국가 대항전을 만든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을 끼워주지 않는다.
이름하여 중일슈퍼대항전!
이번엔 중국과 합세하여 한국을 왕따 시킨 것이다. -_-;;
한국은 중일슈퍼대항전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일본과 중국이 우리나라를 따 시키더니 이번엔 대만이 가만 있지 않았다.
88년... 대만의 갑부 응창기 씨가 응창기배라는 우승 상금만
4억인 초 슈퍼 울트라 바둑 대회를 만든다.
응창기 배의 주최국인 대만은 각국에 출전권을 부여했다.
일본과 중국에는 각각 6,7명의 출전권을 준다.
그리고 한국에는... 1명씩이나~ 되는 엄청난 출전권을 준다. -_-;;
바둑 실력이 개뿔도 없는 대만에게
마저 따를 당한 것이다.
응창기 배에는 아마추어 수준인 미국, 유럽, 남미에도
각각 한 장씩의 출전권이 주어 졌다.
결국 한국은 아마추어 취급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 였다.
쨌든 갖은 설움을 뒤로 하고
한국의 간판스타 조훈현이 응창기배에 홀홀단신으로 참가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서러움...철저한 무관심...
훈현은 중국과 일본의 고수들 사이에서 그런 왕따를 다해야 했다.
하지만 조훈현은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
왕명완을 가볍게 물리치더니 일본의 최고수 고바야시 마저 이기고 4강에 안착했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벅찬 상대 임해봉을 이겨서
중국의 섭위평과 꿈에도 그리던 결승 5번기를 두게 되었다.
철의 수문장인 초일류의 고수 섭위평...
그는 선천적으로 심장에 천공이 뚫려 있어 바둑 두는 도중에
휴대용 산소 호흡기로 산소를 마셔 가면서 바둑을 둬야 했다.
그리고 섭위평은 문화 대혁명 당시 유한 계급으로 분류되어
하루 아침에 흑룡강 돼지우리 반장으로 신분이 하락되기도 한
특이한 이력의 사나이다.
어찌보면 불쌍하기도 한 섭위평...
하지만 한국이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꼭 섭위평을 이겨야 했다.
심장에 천공이 뚫렸다해서 조훈현이 져줘야 할 이유는 없다.
허파에 왕따시 만한 구멍이 뚫렸건 뇌에 똥파리가 살건
그건 개인 사정이지 져줘야 할 이유는 못 된다. -_-;;
둘은 치열하게 승부를 주고 받았다.
2-2 타이 스코어에 운명의 마지막 대국...
마지막 5국은 싱가폴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그걸 두고 싱가폴 대첩이라 표현했다.
조훈현의 어깨는 무거웠다.
응창기배를 우승함으로써 그동안 한국이 당했던 왕따의 수모를
벗겨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조훈현은 강했다.
한 판에 4억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자기 만의 바둑을 뒀다.
산소 공급이 안 되어서인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얼굴이 부은 섭위평은
중간에 돌을 거뒀고, 옆에서 지켜보던
섭위평의 부인 공상명 9단은 얼굴을 감싸 안고 대성 통곡을 했다.
섭위평과 부인 공상명은 그 후 갈등이 심해져 이혼까지 하게 된다.
만일, 섭위평이 응창기배를 우승했으면
부인과 이혼까지 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생일대의 승부에서 진 후유증은 그렇게 큰 것이다.
감격의 응창기배 우승!!
단장으로 간 김수영 7단은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TV로 공개 해설하던 노영하 8단은
조훈현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만세 삼창을 했다.
차갑고 이지적인 해설자 노영하 8단. 평소에 별명도 선비다.
난 그가 그렇게 이성을 잃고 배가 튀어 나올 정도로
만세 삼창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선비가 저렇게 망가져도 되나 괜히 나혼자 걱정 했다. -_-;;
조훈현은 공항에서 내리자 마자 바둑 기사로는 처음으로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조훈현은 한국 바둑을 왕따의 수렁에서 구해낸 용사였던 거였다.
응창기배 우승 이후 상황은 급반전 했다.
한국 바둑을 대하는 눈을 달라졌다.
이제 어느 나라가 한국 대신 왕따를 당하느냐만 남은 상황이었다.
키는 한국이 쥐고 있었다.
응창기배 우승에 고무된 한국은 90년대 들어 진로배 국가 대항전을 개최한다.
국가 대항전인 만큼 바둑을 둘 줄 아는 아시아의 네 나라가 모두 붙어야 하건만...
거기엔 대만이빠져 있었다.
그렇게 한국은 가볍게 대만을 따 시켰다. -_-;;
대만측에서 불만을 토로했지만
일본과 중국도 은근히 대만이 빠진 거에 대해 찬성했다.
대만이 참가하면 대회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대만... 그러게 왜 응창기배 출전권을 한국에는 달랑
한 명만 주었니... 세 명만 줬어도 따 당하지 않았을 것을...
한국의 자랑 이창호, 초슈퍼울트라메가캡숑을 자랑하는 바둑 신 이창호...
이창호는 90년대 중반 국내 도전기 전념을 위해 일본의 후지쯔배에 불참을 선언한다.
후지쯔로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후지쯔 측에선
그야말로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이미 세계 기류는 이창호의 참가 여부에 따라서
일류와 이류 대회로 분류되는 시대인 것이었다.
골프에서 타이거 우즈가 참여하면 그 대회가
더욱 빛이 나듯이 이창호의 참여 만으로도 그 대회의 격이 상승된다.
후지쯔 측에선 이창호를 참가 시키기 위해 별의별 짓거리를 다했다.
(원본에 충실하다보니... 그냥 틀린글자만 고쳐올렸습니다. ^^;)
빌고 또 빌어도 안 되니 나중엔 협박까지? 했다 한다. -_-;;
갖은 연줄을 다 대고 한국의 고위층에까지? 이창호를 설득해 달라고
연줄을 대 보지만 이창호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창호는 개인적으로 가볍게 일본의 거대 기업 후지쯔를 왕따 시킨 것이었다.
아, 우승 상금이 일억 오천인 대회를 불참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모두들 참가하지 못해 안달인 것이다.
그런 대회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왕따 시키는 이창호의 마음 속이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이창호도 후지쯔 측이 불쌍했던지 다음해에는 기꺼이 참가를 해준다.
그리고 결승에서 창호는 그의 영원한 밥, 아니 운명적으로
밥일 수밖에 없는 중국의 마효춘을 가볍게 누르고 우승한다.
중일슈퍼대항전... 한국을 왕따시키고 자기들끼리 꿍짝이 맞아서
신나게 대회를 열어 나가더니 90년대 들어 소리 소문 없이 그 대회는 사라진다.
중일슈퍼대항전 주최측은 거기에 대해 이런 이유를 댄다.
' 한국이 참가하지 않는 대회는...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둬요.. T_T '
그렇다.
이제 한국이 출전하지 않는 대회는 의미가 상실되는 시대다.
그렇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던 한국 바둑... 이젠 왕따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세계의 중심에 선 것이다.
중국의 '중국식 포석'과 일본의 우주류 다께미야의 '3연성 포석'이
80년대를 주름잡을 때 우리나라 기사들은
그들이 창안한 걸 따라하며 기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연 90년대도 그럴까?
정동진에 가면 '고현정 순대'니 '이정재 김밥' 있듯이
요즘 세계 바둑계에는 '이창호 정석' 이란 게 판을 친다.
덩달아 '조훈현 정석'도 난리가 아니다.
이미 다께미야의 '3연성 포석'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일본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기성전에서 마저
'이창호 정석'이 난무하여 따로 저작료라도 받아야할 지경이었다.
왕따... 한국 바둑은 이창호가 있었기에 완전히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이창호 같은 천재도 노력을 할까?
이창호는 새벽 2,3시까지 바둑돌을 놓지 않는다.
천재도 노력 해야 한다는 걸 이창호는 몸소 보여준다. (부단히 노력합시다... ^^;)
다시 뛰는 한국인... 한국은 다시 뛰어야 한다.
이창호처럼 쉬지 않고 뛰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은 사실 정말 뛰어난 민족이다.
그걸 이창호가 확인해 줬다.
일본과 중국의 날고 뛰는 기사들이 이창호 앞에 두손두발 다 들었다.
노력하는 한국인의 모습이 그의 모습 속에 투영돼 있다.
자충수와 패착으로 일관하는 부패한 인간들만 없으면
우리의 앞날은 밝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왕따는 없다...
출처:도깨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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