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80년초에 군생활했었읍니다 3사단 백골부대 물론 gp,gop,dmz 수색매복등 고생 x나게 했지요 맞는것은 거의 일상사! 저 역시 당시 누가괴롭히거나하면 확 그냥 xx버릴까하는 생각 많이 하곤 했지요(아마 이런 생각 안해보신 분은 거의 없을듯) 하지만 잘 참았지요 내 인생이 있고 내가족이 있고... (상대방의 생각에 까지는 미치지 못했지만요) 뭐 나만 맞고 괴롭힘당하는건 아니니까요 으례 그렬려니하며 지내다보니 고참되고...당시엔 사회문화적으로 "참는 것"은 하나의 미덕이었던 탓도 있었지만요 그리고 당시의 gp,gop근무는 참 편안편에 속했었지요(참고로) 여하튼 피가 펄펄 하는 나이에 군대가서 그런 일을 당하니 참 그렇네요 이제와서 어떡하겠읍니까 명복이라도 빌어줘야죠 그리고 당시에는 군내부에서의 총기사고등의 사건에 대해서는 철저히 통제되어 있었을겁니다 세상이 좋아지다보니 이젠 일간지에도 실리긴하지만요 당시에도 이런일이 없진 않았지요 부디 좋은 곳에 가소서 젊은 영혼들이여!!!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요즘 전방 부대에 총기사건 때문에 시끌시끌하죠.
>김일병을 생각하니 자꾸 제 군생활때의 악몽이 막 떠오르는것 같습니다.
>저는 28사 태풍부대 이웃 부대의 헌병대에서 이등병 생활을
>했드랬지요.
>
>참. 그리 빠른지도 않은 나이에 (23셋 9월군번입니다.) 군대가서 어찌나 두들겨
>맞았는지 ㅎㅎ. 정말 잘해볼려고 이를 악물고 생활했습니다.
>
>쌍팔년도 아닌 90년대 후반의 군대가 그리도 폭력이 난무하는지 꿈에도 몰랐지요.
>정말 거짓말 안하고 밥만 먹으면 맞았던거 같습니다. 내무실이든 취사장이든 화장실이든
>시도때도 없이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이 다없더군요,
>
>절대 말은 못하며 늘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하고 꼭 정해진 자리에만 늘 대기해야했습니다.
>담배까지 못피게하니 사람 미치겠더군요. 야간 근무는 영창 근무를 나가야했는데
>10시에 시작하는 첫근무와 4시에 시작하는 마지막 근무늘 꼭 저희 동기 3명이서
>서야했습니다.
>
>잠은 거의 3시간도 못잔거 같습니다. 그 수많은 깜지를 외워야했으면 고참 불침번들은
>저와 저의 동기들이 잠이라도 들라치면 머리를 툭툭~ 치고 지나갔지요.
>한 내무반의 백명이 넘는 고참들의 눈빛이 어찌나 무섭던지 ㅎㅎ
>
>정말 날이 밝는게 너무 두려웠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게 동기들의 풀린 눈하며 도대체
>뭐가 뭔지 어떤 정상적인 사고를 우리 모두는 할수가 없었지요.
>정말 그렇게 갈구면서도 조금이라도 인간대접해주고 조금이라도 후임대접해주길
>바랬지만 그런것 없었지요. 감기가 걸려 폐렴이 걸려도 의무대 가보지도 못하고
>기침이 너무 나와 잠을 잘수가 없었을 정도입니다.담배는 물론 뭐가 나오던지 우리에게 돌아오는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개다 이런 말을 늘 외치며 살았습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이 개세끼들 우리 동기 3을 사람 취급을 안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좋으니 인간대접을 받고 싶었습니다. 전우애라는걸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
>정말 한 두달을 그리 생활하니 정말 악이 생기더군요. 내무실 끝 한편에는
>미싱이나 이발도구 여타 작업에 필요한 낫이나 삽 호미 등등을 보관하는데가 있었습니다.
>
>정말 영참 근무를 다녀오면 불침번이 병장이면 주로 잠을 잤습니다. 정말 그쪽으로 막 몸이 갈려고 하는데 미치겠더군요. 낫이라도 하나들고 목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었습니다.
>
>간부한테 말 한다는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니 아에 거의 내무실에 간부들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병장들이 근무까지 짰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다.
>
>동기 한명은 행정병으로 가버리고 둘만 남던날 한명이 갔으니 니들이라도 잘하는 말과
>개같이 뚜드러 맞던날 하필 마지막 동기 하나 마저 장이 꼬여서 새벽에 의무대 실려가버리고
>저 혼자 남으니 미칠것 같더군요 ㅎㅎ.
>
>그날 새벽에 침낭에서 많이 울었던것 같습니다. 혼자 버틸려니 너무 두렵더군요.
>정말 그뒤로 혼자 생활하면서 죽이자 죽여버리자 이생각이 어찌나 들던지 지금 생각해도
>제가 너무 무섭습니다.
>
>하지만 저는 그네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제 창창한 젊은날이 너무 아까웠으며 제가 헌병이기에 누구보다 군법을 조금이나마 더 알고 있었기에 그랬던거 같습니다.
>
>끝내는 불명예스럽고 참이나 부끄럽지만 휴가 미복귀를 택했습니다. 정말 다시 들어가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몰라서였습니다.
>
>그뒤로 화학대란 곳을 가서 생활했습니다. 거기가서 아버지 군번이 무엇이고 군생활이 이렇게도 좋을수가 있다는걸 알았습니다. 화장실 변기를 헌병대에서 했던것처럼 딱아 놓으니
>청소당번 상병들이 놀랬던 기억이 나네요. 적응 아주 잘해서 잘 제대했습니다.
>
>이글을 적는것은 김일병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입니다.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적응이
>안됐다면 그냥 나와버리지 왜 아까운 사람들을 죽여야합니다.
>정말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것보다는 좋치 않습니까. 저희 동생둘이 있습니다만 늘 말합니다.
>
>정말 힘들고 정말 죽고 싶을만큼 못하겠으면 학교든 직장이든 그 무엇이든 하지마라
>그 무엇이든지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아까운 목숨 절대 죽지는 마라 이렇게 늘 말해줍니다.
>
>이 자리를 빌어 만중이한테 너무 미안합니다. 몇달후에 자대에 오니 제가 없어서 그렇게
>보고싶고 원망스럽다고 했습니다. 특경대까지 혼자 다녀오고 아무튼 너무 미안했다 만중아
>혹시 왈바에 있냐? ^^;; ㅎㅎㅎ
>
>저보다 훨씬 고생하고 더 많은 일들을 겪었을 선배님들에게 송구스럽 글이나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
>명복을 빌어봅니다.
>
>
>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요즘 전방 부대에 총기사건 때문에 시끌시끌하죠.
>김일병을 생각하니 자꾸 제 군생활때의 악몽이 막 떠오르는것 같습니다.
>저는 28사 태풍부대 이웃 부대의 헌병대에서 이등병 생활을
>했드랬지요.
>
>참. 그리 빠른지도 않은 나이에 (23셋 9월군번입니다.) 군대가서 어찌나 두들겨
>맞았는지 ㅎㅎ. 정말 잘해볼려고 이를 악물고 생활했습니다.
>
>쌍팔년도 아닌 90년대 후반의 군대가 그리도 폭력이 난무하는지 꿈에도 몰랐지요.
>정말 거짓말 안하고 밥만 먹으면 맞았던거 같습니다. 내무실이든 취사장이든 화장실이든
>시도때도 없이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이 다없더군요,
>
>절대 말은 못하며 늘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하고 꼭 정해진 자리에만 늘 대기해야했습니다.
>담배까지 못피게하니 사람 미치겠더군요. 야간 근무는 영창 근무를 나가야했는데
>10시에 시작하는 첫근무와 4시에 시작하는 마지막 근무늘 꼭 저희 동기 3명이서
>서야했습니다.
>
>잠은 거의 3시간도 못잔거 같습니다. 그 수많은 깜지를 외워야했으면 고참 불침번들은
>저와 저의 동기들이 잠이라도 들라치면 머리를 툭툭~ 치고 지나갔지요.
>한 내무반의 백명이 넘는 고참들의 눈빛이 어찌나 무섭던지 ㅎㅎ
>
>정말 날이 밝는게 너무 두려웠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게 동기들의 풀린 눈하며 도대체
>뭐가 뭔지 어떤 정상적인 사고를 우리 모두는 할수가 없었지요.
>정말 그렇게 갈구면서도 조금이라도 인간대접해주고 조금이라도 후임대접해주길
>바랬지만 그런것 없었지요. 감기가 걸려 폐렴이 걸려도 의무대 가보지도 못하고
>기침이 너무 나와 잠을 잘수가 없었을 정도입니다.담배는 물론 뭐가 나오던지 우리에게 돌아오는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개다 이런 말을 늘 외치며 살았습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이 개세끼들 우리 동기 3을 사람 취급을 안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좋으니 인간대접을 받고 싶었습니다. 전우애라는걸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
>정말 한 두달을 그리 생활하니 정말 악이 생기더군요. 내무실 끝 한편에는
>미싱이나 이발도구 여타 작업에 필요한 낫이나 삽 호미 등등을 보관하는데가 있었습니다.
>
>정말 영참 근무를 다녀오면 불침번이 병장이면 주로 잠을 잤습니다. 정말 그쪽으로 막 몸이 갈려고 하는데 미치겠더군요. 낫이라도 하나들고 목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었습니다.
>
>간부한테 말 한다는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니 아에 거의 내무실에 간부들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병장들이 근무까지 짰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다.
>
>동기 한명은 행정병으로 가버리고 둘만 남던날 한명이 갔으니 니들이라도 잘하는 말과
>개같이 뚜드러 맞던날 하필 마지막 동기 하나 마저 장이 꼬여서 새벽에 의무대 실려가버리고
>저 혼자 남으니 미칠것 같더군요 ㅎㅎ.
>
>그날 새벽에 침낭에서 많이 울었던것 같습니다. 혼자 버틸려니 너무 두렵더군요.
>정말 그뒤로 혼자 생활하면서 죽이자 죽여버리자 이생각이 어찌나 들던지 지금 생각해도
>제가 너무 무섭습니다.
>
>하지만 저는 그네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제 창창한 젊은날이 너무 아까웠으며 제가 헌병이기에 누구보다 군법을 조금이나마 더 알고 있었기에 그랬던거 같습니다.
>
>끝내는 불명예스럽고 참이나 부끄럽지만 휴가 미복귀를 택했습니다. 정말 다시 들어가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몰라서였습니다.
>
>그뒤로 화학대란 곳을 가서 생활했습니다. 거기가서 아버지 군번이 무엇이고 군생활이 이렇게도 좋을수가 있다는걸 알았습니다. 화장실 변기를 헌병대에서 했던것처럼 딱아 놓으니
>청소당번 상병들이 놀랬던 기억이 나네요. 적응 아주 잘해서 잘 제대했습니다.
>
>이글을 적는것은 김일병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입니다.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적응이
>안됐다면 그냥 나와버리지 왜 아까운 사람들을 죽여야합니다.
>정말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것보다는 좋치 않습니까. 저희 동생둘이 있습니다만 늘 말합니다.
>
>정말 힘들고 정말 죽고 싶을만큼 못하겠으면 학교든 직장이든 그 무엇이든 하지마라
>그 무엇이든지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아까운 목숨 절대 죽지는 마라 이렇게 늘 말해줍니다.
>
>이 자리를 빌어 만중이한테 너무 미안합니다. 몇달후에 자대에 오니 제가 없어서 그렇게
>보고싶고 원망스럽다고 했습니다. 특경대까지 혼자 다녀오고 아무튼 너무 미안했다 만중아
>혹시 왈바에 있냐? ^^;; ㅎㅎㅎ
>
>저보다 훨씬 고생하고 더 많은 일들을 겪었을 선배님들에게 송구스럽 글이나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
>명복을 빌어봅니다.
>
>
>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