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고향에 계신 어머니 댁에 다녀왔습니다.
2남 4녀중에 장남이지만 어머니는 고향(고향이래야 서울에서 백리 정도,
제가 사는 곳에서는 30 몇 킬로미터 정도)에 혼자 계시고
저는 내 식솔들과 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농촌에는 젊은이들이라곤 없습니다. 그래도 저의 고향은
나은 편이라 제 또래나 저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도 간혹 있기는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청천벽력이었던 어머니는 강해지셨습니다.
아버지 그늘에서 기 한번 펴보지 못한 어머니였지만
당장 장성한 저와 동생들에게 기대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리고 저와 2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막내동생을 키우기 위해서는
그게 당연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혼자 사시니 옛날에 얼마 안되는 농토였지만
그걸 혼자 농사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큰 덩어리 농토는
다른 사람에게 짓게 하고 집터 주변의 밭 한 뙈기를
저와 동생들을 위해 고집스럽게 가꾸고 계십니다.
저는 애써 모르는척 하지만 마누라는 의무감이랄까
자주 전화를 하고 어머니와 말벗을 할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어제도 전화 통화하는 것을 들으니 어디서 넘어지셨는지
허리가 아프다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괜시리 화가 나는 것은 저만 그럴까요?
어쨌든 어머니께 가서도 될 수 있으면 어머니와 눈을 맞추지 않을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어머니와 마누라는 밭으로 콩을 베러 갔습니다.
식사후에 잠시 누워 있다가 어머니와 마누라가 같이 일하는 밭으로 향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콩이란 식물은 땅이 걸지 않아도 잘 자라고
나빠진 땅에 콩을 심으면 지력이 높아져서 땅이 회복됩니다.
우리 땅을 하는 이웃의 동생뻘 되는 친구가 자기의 목장에서 퇴비를 가져다
얼마나 많이 뿌려 놓았는지 밭이 너무 걸어져서 지금은 객토를 하였습니다.
일년 내내 고생하셨지만 소출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식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기 위해 지으신 농사지만 아픈 몸으로 그걸 걷워 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슬렁 어슬렁 밭으로 들어가니 지게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무심코 지게를 들어 보았더니 크기가 작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내 지게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지게로
가끔씩은 꼴도 베고, 산에 해 놓은 나무를 져 오기도 하였고
이렇게 가을철이면 농작물을 져 나른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공부를 못 하신 분이라 자식은
최대한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저에게 농삿일을 강요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바쁜 철이거나 방학 때는 조금씩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보리 이삭을 져 옮기는 것인데
보리깔치라는 것이 방향성이 있어서 목 뒤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 따가운 기분, 안 해 본 사람은 모를 겁니다.
저는 미리 뽑아 놓은 팥을 거둬서 집 마당으로 옮기고자
지게를 집어 든 것입니다. 지게는 보기에도 허접하여 삐걱거리고
멜빵이나 등에 닿는 부분은 거의 망가져 있고 크기도 작습니다.
팥 이삭들을 조심스럽게 지게에 올립니다. 그래도 옛 기억이 있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어머니는 일하러 온 아들 내외가 고맙고 지게를 지는 제가
대견한 모양입니다. "애비는 지게질 할 수 없어. 그걸 아무나 하는 줄 알아?"
하고 말씀하시다가 제가 지게를 지고 일어나니까 신기한 것을 본 것처럼
좋아 하십니다. "아버지가 지던 지게라 작구나" 하고 말씀하시는데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가 됩니다.
학교 다닐 때는 아버지가 꽤 크게 느껴졌고 지게도 컸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월이 흘러서 모든 것을 잊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직 아버지의 지게를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남편의 체취가 있는 물건이라 버리지 못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순간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해 인가 흉년이 들었던 해에 주변에서 장사를 하던 어머니 친척이
우리 집을 찾아왔었습니다. 그 집은 우리집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잘 사는 것으로 나는 기억합니다. 급한 일이 있으니 돈을 좀 빌려 달랍니다.
농촌에서 빌려 줄 돈이 있을리가 없죠. 아버지는 이웃집을 돌아다니면
변리 돈을 얻어서 그 집에 주었는데 그게 요즘 말로 부도가 난 것입니다.
어렵사리 소를 사서 키워 서울로 이사를 갈려던 아버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전 재산이었던 소 몇 마리와 땅 까지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말하셨습니다.
"나도 이젠 어쩌는 수 없다" 그 때의 물기어린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 본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후 농사철은 품앗이 외에 날품팔이도 하셨고
겨울이면 숯 가마에 가서 일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때의 아버지의 깡마른 손, 건조한 아버지의 손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로 세월이 좋아져
이제 먹고 사는 일로 걱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억울하게 눈을 감으신 아버지 생각을 하면 홀로 계신 어머니께는
효도를 하여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고
그저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작은 일에 감동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의 문제가 곧 내 문제가 될텐데
아직 이렇다할 효도를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습니다.
아버지의 초라한 지게를 처마 밑에 세워 두면서
아버지 생각을 다시 한 번 합니다.
2남 4녀중에 장남이지만 어머니는 고향(고향이래야 서울에서 백리 정도,
제가 사는 곳에서는 30 몇 킬로미터 정도)에 혼자 계시고
저는 내 식솔들과 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농촌에는 젊은이들이라곤 없습니다. 그래도 저의 고향은
나은 편이라 제 또래나 저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도 간혹 있기는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청천벽력이었던 어머니는 강해지셨습니다.
아버지 그늘에서 기 한번 펴보지 못한 어머니였지만
당장 장성한 저와 동생들에게 기대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리고 저와 2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막내동생을 키우기 위해서는
그게 당연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혼자 사시니 옛날에 얼마 안되는 농토였지만
그걸 혼자 농사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큰 덩어리 농토는
다른 사람에게 짓게 하고 집터 주변의 밭 한 뙈기를
저와 동생들을 위해 고집스럽게 가꾸고 계십니다.
저는 애써 모르는척 하지만 마누라는 의무감이랄까
자주 전화를 하고 어머니와 말벗을 할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어제도 전화 통화하는 것을 들으니 어디서 넘어지셨는지
허리가 아프다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괜시리 화가 나는 것은 저만 그럴까요?
어쨌든 어머니께 가서도 될 수 있으면 어머니와 눈을 맞추지 않을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어머니와 마누라는 밭으로 콩을 베러 갔습니다.
식사후에 잠시 누워 있다가 어머니와 마누라가 같이 일하는 밭으로 향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콩이란 식물은 땅이 걸지 않아도 잘 자라고
나빠진 땅에 콩을 심으면 지력이 높아져서 땅이 회복됩니다.
우리 땅을 하는 이웃의 동생뻘 되는 친구가 자기의 목장에서 퇴비를 가져다
얼마나 많이 뿌려 놓았는지 밭이 너무 걸어져서 지금은 객토를 하였습니다.
일년 내내 고생하셨지만 소출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식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기 위해 지으신 농사지만 아픈 몸으로 그걸 걷워 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슬렁 어슬렁 밭으로 들어가니 지게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무심코 지게를 들어 보았더니 크기가 작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내 지게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지게로
가끔씩은 꼴도 베고, 산에 해 놓은 나무를 져 오기도 하였고
이렇게 가을철이면 농작물을 져 나른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공부를 못 하신 분이라 자식은
최대한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저에게 농삿일을 강요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바쁜 철이거나 방학 때는 조금씩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보리 이삭을 져 옮기는 것인데
보리깔치라는 것이 방향성이 있어서 목 뒤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 따가운 기분, 안 해 본 사람은 모를 겁니다.
저는 미리 뽑아 놓은 팥을 거둬서 집 마당으로 옮기고자
지게를 집어 든 것입니다. 지게는 보기에도 허접하여 삐걱거리고
멜빵이나 등에 닿는 부분은 거의 망가져 있고 크기도 작습니다.
팥 이삭들을 조심스럽게 지게에 올립니다. 그래도 옛 기억이 있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어머니는 일하러 온 아들 내외가 고맙고 지게를 지는 제가
대견한 모양입니다. "애비는 지게질 할 수 없어. 그걸 아무나 하는 줄 알아?"
하고 말씀하시다가 제가 지게를 지고 일어나니까 신기한 것을 본 것처럼
좋아 하십니다. "아버지가 지던 지게라 작구나" 하고 말씀하시는데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가 됩니다.
학교 다닐 때는 아버지가 꽤 크게 느껴졌고 지게도 컸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월이 흘러서 모든 것을 잊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직 아버지의 지게를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남편의 체취가 있는 물건이라 버리지 못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순간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해 인가 흉년이 들었던 해에 주변에서 장사를 하던 어머니 친척이
우리 집을 찾아왔었습니다. 그 집은 우리집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잘 사는 것으로 나는 기억합니다. 급한 일이 있으니 돈을 좀 빌려 달랍니다.
농촌에서 빌려 줄 돈이 있을리가 없죠. 아버지는 이웃집을 돌아다니면
변리 돈을 얻어서 그 집에 주었는데 그게 요즘 말로 부도가 난 것입니다.
어렵사리 소를 사서 키워 서울로 이사를 갈려던 아버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전 재산이었던 소 몇 마리와 땅 까지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말하셨습니다.
"나도 이젠 어쩌는 수 없다" 그 때의 물기어린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 본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후 농사철은 품앗이 외에 날품팔이도 하셨고
겨울이면 숯 가마에 가서 일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때의 아버지의 깡마른 손, 건조한 아버지의 손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로 세월이 좋아져
이제 먹고 사는 일로 걱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억울하게 눈을 감으신 아버지 생각을 하면 홀로 계신 어머니께는
효도를 하여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고
그저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작은 일에 감동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의 문제가 곧 내 문제가 될텐데
아직 이렇다할 효도를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습니다.
아버지의 초라한 지게를 처마 밑에 세워 두면서
아버지 생각을 다시 한 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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