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이나 추운 날씨였다. 하늘은 어두컴컴하게 찌푸린 채 눈이 올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은 외투를 입고 목도리로 얼굴을 감싼 한 사나이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런던의 컬버가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74번지에 다다르자, 그는 현관 계단을 올라가서 초인종을 누르며 집안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때 주방에서 바쁘게 설겆이를 하고 있던 케이시
부인은 계속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들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휴, 시끄러워! 도대체 쉴 사이가 없다니까."
그녀는 물묻은 손을 닦고 숨을 가쁘게 쉬며 아래층 계단을 힘겹게 내려가서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낮게 드리운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케이시 부인에게 쉰 듯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라이언 부인이십니까? "
"아니에요. 라이언 부인은 3층에 살아요. 올라가 보세요. 그런데, 오신다는
연락을 미리 하셨나요? " 하고 케이시 부인이 묻자,
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러세요? 하지만 괜찮아요. 올라가서 노크해 보세요."
케이시 부인은 그 남자가 낡아빠진 카페트가 깔린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바라
보았다. 나중에 그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 때는 그 남자가 심한 감기에 걸려서, 그렇게 속삭이듯 작고 쉰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날씨가 추웠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계단이 꺾여지는 곳에 이르자 부드러운 소리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 마리의 눈먼 쥐'라는 노래의 멜로디였다.
몰리 데이비스는 길 쪽으로 몇 걸음 물러서서 출입문 옆에 걸린 새로 칠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고급 하숙집
몽스웰 여관
몰리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판은 전문가의 솜씨 못지않게 훌륭했다.
'하숙집'이란 글씨의 뒷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갔고, '여관'이란 글자가 조금 작게
쓰여진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가일즈는 훌륭한 간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몰리의 남편인 가일즈는 정말 솜씨가 좋았고, 못 하는 일이 없었다.
몰리는 남편이 새로운 솜씨를 발휘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남편은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리는 남편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재능을 하나씩 알 때마다 놀랍기만 했다.
사람들이 해군 출신을 '솜씨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편이 지닌 재능은 이제부터 그들 부부가 시작할 새로운 사업에 꼭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몰리와 가일즈 부부는 하숙집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해볼 만한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하숙집을 경영하게 되면
그들이 살 집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었다.
하숙집을 경영하자는 것은 몰리의 생각이었다. 어느 날, 캐서린 아주머니가
몰리에게 몽스웰 저택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는 사실을 변호사가 알려 주었다.
그래서 젊은 부부인 몰리와 가일즈는 당연히 그 저택을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저택이지?" 하고 가일즈가 물었을 때 몰리가 대답했다.
"크고 넓고 오래 된 집이에요. 집안에는 빅토리아풍의 구식 가구들로 가득차
있어요. 정원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전쟁(제2차 대전)이후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답니다. 정원사라고는 늙은 노인 한 사람밖에 없었거든요."
그들은 저택을 팔려고 내놓았다. 그 대신 그들 두 사람에게 알맞은 작은 집이나
아파트에 필요한 가구만 갖기로 했다. 그런데 두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첫째는 작은 집이나 아파트를 구할 수 없었고, 둘째는 저택에 있는 가구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도저히 다 처치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구까지 전부 팔아 버리면 되죠. 팔 수 있을거예요." 몰리가 말했다.
변호사도 요즘에는 무엇이든지 팔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아마 누군가가 호텔이나 고급 하숙집으로 쓰려고 그 저택을 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집안의 가구도 전부 사게 될겁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저택은 손질이 잘 되어
있거든요. 돌아가신 에모리 양께서 전쟁이 나기 직전에 대대적인 집수리를 해서
현대적으로 만들어 놓으셨지요. 손볼 데가 거의 없읍니다. 전쟁 뒤에도 아주
훌륭하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몰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여보, 우리가 하숙집을 경영하면 어떨까요?"
처음에 남편은 몰리의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몰리는 남편을 계속
설득했다.
v"처음부터 손님을 많이 받을 필요는 없어요. 그 저택은 하숙집으로 쓰기에는
안성마춤이에요. 목욕탕에는 찬물과 더운 물이 나오고, 중앙난방시설도 되어
있어요. 또, 가스 조리대도 있고요. 그리고 우리가 닭과 오리를 기르면 달걀도
구할수 있고, 채소를 직접 재배하면 반찬값도 많이 절약할 수 있거든요."
"그런 일들을 전부 누가 하지? 일하는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운데."
"우리가 해야죠. 어디에 살더라도 그런 일은 우리가 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숙집을
시작할 때쯤이면 일하는 여자를 한 명 정도 구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일할 사람을
많이 둘 필요는 없어요. 손님을 다섯 명만 받으면 한 사람이 1주일에 7기니를낼
테고...."
이렇게 말하며 몰리는 희망에 찬 설계를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해보세요, 여보. 그 저택은 우리집이예요. 그 집에 있는
물건도 전부 우리 것이고요. 우리힘으로 우리 집을 마련하자면 앞으로 몇 년이나
걸리지 않겠어요? "
그것은 사실이었다. 가일즈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 두 사람은 서둘러서 결혼을
한 뒤 지금까지 일 때문에 함께 지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만의 집을
가지고 정착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숙집을 경영하는
큰일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방 신문과 '타임즈'지에 하숙집 광고를 냈더니,
손님들로부터 많은 문의 편지가 왔다.
그리고 오늘, 첫번째 손님이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가일즈는 철망을 싸게 판다는
광고를 보고서, 그것을 사기 위해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반대편 지역으로 떠났다.
몰리는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사야 하기 때문에 시내로 나갔다 와야겠다고
남편에게 말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갔는데, 단 한 가지 문제는 날씨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날씨가 무척 추워지더니 급기야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몰리는 서둘러서 집으로 향했다.휘날리느 눈송이가 방수옷을
입은 몰리의 어깨와 윤기 있는 고수머리에 내려와 앉았다.
일기예보는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많은 눈이 내릴 것이 라는 내용이었다.
몰리는 수도관이나 하수도가 얼어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숙집을 시작하자마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정말 큰일이다. 몰리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차마시는 시간이
벌써 지나 있었다. 남편이 돌아왔을까? 내가 어디에 간 걸까 하며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잊은 물건이 있어서 시내에 다시 갔었어요." 라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남편은 웃으며이렇게말할 것이다.
"통조림을 더 사러 갔었나?"
통조림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에 통하는 농담이었다. 가난했을 때
그들은 통조림 식량이 바닥이 나지 않도록 항상 조심했었다. 지금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식료품 저장소에다 통조림 식량을 가득 채워 두고 있었다.
몰리는 얼굴을 찡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이제 곧 그 만일의 경우가 닥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몰리가 집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남편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몰리는 우선 부엌에 갔다가 위층으로 올라가서, 손님을 맞기 위해 준비해
놓은 방들을둘러보았다.
기둥이 네 개인 큰 침대와 마호가니(열대 식물의 일종) 가구로 장식된 남쪽 방은
보일 부인에게 주고, 떡갈나무 가구가 있는 푸른 벽지의 방은 메트카프 소령에게 줄
것이며, 밖으로 튀어나온 창이 달린 동쪽 방은 렌 씨에게 줄 것이다.
방들은 훌륭해 보였다. 캐서린 아주머니가 그렇게 많은 린넨 천을 남겨 준 것은
정말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몰리는 제자리에 놓인 이불을 한번 톡톡 두드려
보고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밖은 거의 어두워지고 있었다. 집이 너무나
조용하고 텅빈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집은 마을에서 3km나 떨어져 있는
외딴집이었다. 몰리가 말하듯 세상으로부터 3km 나 떨어져 있었다.
몰리는 전에도 집에 혼자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절실하게 혼자뿐이라는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밖에서는 눈송이가 바람에 날리며 창틀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속삭이는 듯 하면서도 불안하게 들려 왔다. 만일 남편이
오늘밤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떡하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자동차가 다닐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만일 이 집에서 며칠 동안 혼자 지내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몰리는 주방ㅇ르둘러보았다. 넓고 편안한 주방이었다. 덩치가 크고 마음씨
좋은 주방장이 요리를 하고, 몰리가 딱딱한 케이크와 차를 마시며 턱을 움직이고
있을 때 키가 크고 나이든 가정부가 식탁 한쪽에 서서 식사 시중을 들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하녀들의 눈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식모와, 통통하고 얼굴이
발그레한 하녀가 식탁의 다른 한쪽에 서 있다면 참 잘 어울릴 그런 그런
주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 시작한 일을 서툴게 하고 있는 몰리 데이비스
혼자였다. 이 순간, 몰리는 자신의 인생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의 존재도 비현실적으로 생각되었다. 몰리는 자신이 마치 연극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때 어떤 그림자가 창 밖을 스치고 지나갔다. 몰리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낯선 남자가 눈 속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옆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 다음, 그 낯선 남자가 문간에 서서 눈을 털어내고는 몰리가 혼자 있는
집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때 갑자기 몰리의 착각이 사라졌다.
"어머, 당신이였군요!" 몰리가 소리쳤다.
"당신이 돌아와서 정말 기뻐요!"
"이제야 돌아왔어. 지독한 날씨군. 내 몸이 꽁꽁 얼었어."
가일즈는 발을 구르며 손가락에다 입김을 호호 불었다. 가일즈가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외투를 벗어 떡갈나무 옷장에 휙 내던지자, 몰리도 습관적으로 그것을
집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외투 주머니에서 목도리와 신문, 둥글게 감은
끈뭉치를 꺼내고, 아침에 서둘러 집어넣었던 우편물들도 꺼냈다. 몰리는 주방으로
가서 쇼핑한 물건을 찬장과 조리대 위에 놓고 가스 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철망을 샀어요? 당신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물건 말이에요." 몰리가 물었다.
"내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었어. 우리에게 소용없는 것이었으니까. 싸게파는 다른
곳에도 가봤지만 그것도 좋은 물건이 아니었어. 당신은 오늘 하루 종일 뭘 하며
지냈지? 아직 손님이 아무도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보일 부인은 내일 도착하다고 연락이 왔어요."
"메트카프 소령과 렌 씨는 오늘 도착한다고 했지?"
"메트카프 소령도 내일 온다는 엽서를 보냈더군요."
"그렇다면 렌 씨와 우리 두 사람이 저녁을 먹게 되겠군. 렌 씨는 어떤 사람일 것
같아? 내 생각에 그는 퇴직한 공무원일 것 같은데."
"나는 그가 예술가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가 예술가라면 만일의 경우에대비해서 1주일치 하숙비를 미리 받아야겠는걸"
"그럴 필요는 없어요. 손님들은 짐을 가지고 올 테니까, 만일 하숙비를 내지 않으면
하숙비 대신 그 짐을 우리가 맡으면 될 거예요."
"하지만, 짐 가방 속에 신문지로 싼 돌멩이만 가득차 있으면 어쩌지? 여보, 우린
사실 이런 일을 처음 하기 때문에 모르는 게 많아. 손님들이 우리가 하숙집을 처음
시작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보일 부인은 눈치를 챌 거예요. 그 여자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거든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그 여자를 본 적도 없쟎아? "
몰리는 몸을 돌리고신문지를 신탁에 깔았다. 그리고 치즈를 가지고 와서 썰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치즈 토스트를 만드는 거예요." 몰리가 대답했다.
"빵가루와 으깬 감자를 섞어서 만드는 건데, 치즈를 아주 조금만 넣으면 치즈
토스트가 되는 거예요."
"당신은 정말 똑똑한 요리사인걸." 가일즈가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난 걱정이 돼요. 한번에 한 가지 요리느 만들 수 있지만,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자면 연습을 많이 해야 되거든요.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제일
어려워요."
"왜 그렇지?"
"왜냐하면 한꺼번에 준비해야하니까요. 달걀, 베이컨, 뜨거운 우유, 커피, 그리고
토스트를 한번에 식탁에 올려야 하거든요. 잘못하면 우유가 끓어 넘치거나
토스트가 다 굳어 버리거든요. 불에 덴 고양이처럼 바쁘게 뛰어다니며 한꺼번에
전부 살펴봐야 해요."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는 주방에 살금살금 내려와서 팔짝팔짝 뛰는 고양이 같은
당신의 모습을 지켜봐야겠는걸."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어요. 찻쟁반을 서재로 가지고 가서 라디오를 들을까요?
뉴스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우리가 앞으로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주방에도 라디오가
있어야겠군."
"그래요. 참 좋은 주방이에요. 난 이 주방이 마음에 들어요. 이집에서 제일 좋은
곳 이라고 생각해요. 조리대와 그릇도 좋고, 저 커다란 요리용 스토브도 마음에
들어요. 저 스토브를 쓸 만큼 많은 요리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요."
"그 스토브를 쓰려면 1년치의 연료가 하루 만에 바닥이나고 말거야."
"그렇긴 하지만, 그 안에서 구워지는 큰 고깃덩어리를 상상해 봐요. 소의
안심고기와 양의 등심고기를 말이에요. 구리로 만든 커다란 남비에도 설탕을 잔뜩
넣고 딸기잼을 만든다고 생각해 봐요. 빅토리아 시대는 정말 좋았을 거예요.
위층에 있는 가구들도 약간 화려하긴 해도 얼마나 크고 튼튼해요. 사용하기
편리하고 옷도 많이 넣을 수 있어요. 서랍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열리고
닫히거든요. 전에 우리가 전세로 빌려서 살던 아파트 생각나세요? 겉모양은 그럴
듯 했지만,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죠. 서랍은 잘 열리지 않았고, 문도 한번
열리면 닫히질 않고, 또 닫히면 열리지 않았죠."
"맞아, 정말 엉터리로 만든 집이었어. 서랍이나 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면 당신은
절망에 빠져 주저앉곤 했지."
"자, 우리 이제 뉴스를 들어요."
뉴스의 내용은 주로 날씨에 관한 것으로, 눈이 많이 올 예정이므로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 흔히 있는 외국과의 분쟁에서 생긴 교착 상태, 의회에서의 열띤
논쟁, 그리고 런던 패딩턴 구의 컬버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관해 보도하고
있었다.
"아─" 몰리가 라디오를 끄며 말했다.
"좋지 않은 내용들뿐이군요. 연료 절약을 강조하는 내용은 또다시 듣고 싶지
않아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어요. 가만히 앉아서 얼어 죽으라는
말인지 원? 하숙집을 이런 겨울에 시작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봄까지 기다렸어야
하는 건데."
몰리는 약간 다른 말투로 계속했다.
"살해된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라이언 부인 말이야?"
"그 여자 이름이 라이언이에요? 누가 무슨 이유로 그 여자를 죽였는지 궁금하군요."
"아마 마룻바닥에 보물을 감추어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경찰이 찾고 있는. '사건이 일어난 현장 부근에 있었다'는 남자가 살인범일까요?"
"그렇겠지. 언제나 그런 사람이 범인이니까. 경찰에서 그냥 찾고 있다고 점잖게
표현했을 뿐이지."
그 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몰리와 가일즈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현관 문이군. 아마 살인범이 등장하려나 본데." 가일즈가 익살맞게 말했다.
"연극이라면 그럴 거예요. 어서 나가 봐요. 렌 씨일거예요.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드디어 알 수 있겠네요."
문을 열자 렌 씨와 눈보라가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서재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검은 윤곽만 뚜렷이 보였다. 검은 외투에 회색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그
남자의 모습은 다른 남자들과도 똑같아 보였다.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막으며 가일즈가 문을 닫자, 렌 씨는 가방을 내려놓고서
목도리를 풀며 모자를 벗어 던지는 동시에 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성급하게
들렸다. 홀의 불빛 아래에는, 검고 윤기 있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흐릿한 눈동자의 젊은이가 서 있었다.
"정말 지독한 날씨군요." 그가 말했다.
"디킨즈(1812~1870, 영국의 소설가, 「크리스마스 캐롤」「올리버 트위스트」「두
도시 이야기」등을 썼다)의 소설에 등장하는 스크루지와 티니 팀이 살았던 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한 최악의 영국 겨울 날씨예요. 여간 튼튼하지 않고서는 이런
날씨를 견디어 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웨일스 지방(영국의 서부
지방.참고로, 영국은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로 나뉘어 있다)에서
이곳까지 들판을 가로질러 왔는데, 무척 힘들었어요. 데이비스 부인이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뼈가 앙상한 손으로 재빨리 몰리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내가 상상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군요. 나는 부인이 인도에 주둔했던 육군
장성의 미망인일 거라고 생각했어죠. 지독하게 엄격한 마님 같은 분― 베나레스
(동부 인도에 있는 힌두교의 옛 성도) 영주의 마님 같고, 진짜 빅토리아 시대의
근엄한 체하는 마님 같은 여주인 말입니다. 혹시 밀립(꿀을 짜낸 찌끼를 끓여 만든
기름)으로 만든 꽃이 있읍니까? 아니면, 극락조를 갖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 하지만 나는 이곳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난 이곳이 혹시 아주 오래 되고
낡은 하숙집이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했었어요. 베나레스의 냄새가 나는
케케묵은 집이 아닐까 하고요. 그런데 이 집은 정말 훌륭하군요. 빅토리아 시대의
고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요. 아름다운 장식장도 있겠죠? 과일 무늬가 조각된
고운 자줏빛 마호가니 식기장말입니다."
"예, 사실은―" 몰리는 그 젊은이가 쉴 새 없이 애기해 나가자 정신이 얼떨떨해져서
더듬거리며, "갖고 있어요."하고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구경할 수 있겠읍니까? 지금 당장에요. 저 방에 있읍니까?"
그가 너무도 성급하게 구는 바람에 옆에 있는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그는 식당문의 손잡이르 돌려 문을 열고는 불을 켰다. 몰리는 남편이 언짧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느끼며 그 젊은이를 따라 식당을 들어갔다.
그는 표면이 전부 조각으로 장식된 육중한 식기장을 긴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돌아서더니 나무라는듯한 눈초리로 몰리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마호가니 식탁은 없읍니까? 이 작은 테이블 몇개가 전부란 말입니까?"
"손님들이 그런 개인용 식탁을 더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몰리가
대답했다.
"아, 물론 그 말씀도 옳아요. 내가 너무 내 기분에만 빠져 있었군요. 그런 커다란
마호가니 식탁이라면 그 식탁에 어울리는 가족도 있어야겠죠. 콧수염을 기른
엄격하고도 멋있는 아버지와, 아이를 많이 낳아서 허약해진 엄마, 그리고
열한명의 아이들과 엄한 가정교사, 또 '불쌍한 해리엣'이라 불리는 가난한 친척
아줌마도 있어야겠죠. 집안일을 도와 주며, 자신이 화목한 가정에 속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가난한 친척 아주머니죠. 그 불쌍한 해리엣 아주머니의
등뒤에서는 벽난로의 불꽃이 타오르며 온 가족을 따뜻하게 해주겠죠. 한번 상상해
보세요."
"당신의 가방을 2층으로 옮겨야겠군요." 가일즈가 말했다.
"동쪽 방이지?"
"예." 몰리가 대답했다.
가일즈가 2층으로 올라갈 때 그 젊은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다시 홀로 나왔다.
"내가 머물게 되는 동쪽 방에는, 작은 장미꽃 무늬가 수 놓아진 사라사 무명천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네 기둥의 큰 침대가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뇨. 없읍니다." 하고 대답하며 가일즈는 계단이 꺾이는 곳을 돌아 2층으로
사라졌다.
"부인의 남편께선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군요." 젊은이가 말했다.
"어디에서 근무했읍니까? 해군이었나요?"
"예, 맞아요."
"그럴 줄 알았어요. 해군은 육군이나 공군보다 참을성이 없거든요. 결혼하신 지
얼마나 되셨읍니까? 남편을 무척 사랑하시겠죠?"
몰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2층에 올라가서 지내실 방에 둘러보시죠."하고 물었다.
"물론, 내가 무례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정말알고 싶군요. 사람들에 관해서
알게 된다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직업과
이름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느지를 알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렌 씨가 맞죠?" 몰리는 약간 새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젊은이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난 항상 먼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이런답니다. 맞습니다.
내 이름은 크리스토퍼 렌 입니다. 웃지는 마세요. 우리 부모님은 아주 낭만적인
분들이셨어요. 내가 건축가가 되기를 바라셨죠. 그래서 유명한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1632~1723, 영국의 건축가. 세인트 폴(성 바울) 성당 외에 많은 교회
와 병원, 학교 건물들을 건축했다)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어 주셨죠.
말하자면 부모님의 요망 사항인 셈이죠."
"그래서 당신은 건축가가 되었나요?" 몰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예, 되었죠." 렌 씨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직 완전한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이제 곧 유명한 건축가가 될 겁니다.
누구나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바라는 것 중에서 단 한 가지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사실 내 이름이 오히려
방해가 될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렌과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못 될테니까요. 하지만, 조립식 간이 주택 같은 것을
만들어서 유명해질 수는 있을 겁니다."
가일즈가 계단을 내려왔다.
"렌 씨, 당신이 지낼 방을 보여 드리겠어요." 몰리가 말했다.
몇 분 뒤에 몰리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가일즈가 물었다.
"그 떡갈나무로 된 아름다운 가구가 마음에 든다고 하던가?"
"렌씨는 네 기둥이 세워진 큰 침대를 무척 원했대요. 그래서 동쪽 방 대신
장미방에 묵도록 했어요."
가일즈가 뭐라고 중얼중얼거리더니,
".....버릇없는 젊은 녀석 같으니라고."하고 말을 끝냈다.
"여보―" 몰리는 약간 냉정한 태도로 가일즈에게 말했다.
"우린 지금 즐거운 파티를 열고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게 아니예요. 이건
어디까지나 사업이에요. 당신이 크리스토퍼 렌을 좋아하건 안 하건―"
"난 그녀석을 좋아하지 않아." 가일즈가 몰리의 가로채며 말했다.
".....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우리에겐 그가 1주일에 7기니를 지불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예요."
"지불하기만 한다면 괜찮겠지."
"지불하겠다고 했어요. 그가 편지에 그렇게 썼으니까."
"당신이 그 사람의 짐가방을 장미방으로 옮겼나?"
"아뇨. 그가 직접 옮겼어요."
"꽤나 친철하군. 당신이 그 가방을 옮겼더라도 힘들지는 않았을 거야. 가방 속엔
신문지로 싼 돌멩이만 들어 있는 게 분명해. 가방이 어찌나 가벼운지 속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어."
"쉬―잇. 그가 와요." 몰리가 주의를 하라는 듯 말했다.
몰리는 널따란 의자와, 통나무를 지피는 벽난로로 장식된 훌륭한 서제로
크리스토퍼를 안내했다. 그리고 30분 뒤에 저녁식사가 준비된다는 것과, 다른
손님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크리스토퍼는 자기도
주방에 가서 저녁식사 준비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내가 오믈렛을 만들어 들릴 수도 있어요."
렌 씨가 애교스럽게 말했다.
결국 그는 주방에서 몰리를 도와 식사 준비를 했고, 나중엔 설겆이하는 일까지
거들었다. 몰리는 하숙집을 시작한 첫날치고는 어쩐지 평범한 시작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가일즈도 뭔가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날 밤 몰리는,
'하지만괜찮아지겠지. 내일 다른 손님들이 도착하면 오늘과는 다른 분위기가 될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잿빛 하늘에서 계속 눈이 내리는 가운데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가일즈는
근심스러운 얼굴이었고, 몰리도 마음이 무거웠다. 날씨 때문에 모든 일이 힘들어질
것 같았다. 자동차 바퀴에 쇠사슬을 감은 택시를 타고 보일 부인이 도착했다.
운전사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사람도 차도 다니기 어렵다는 우울한 말을 전하며,
"저녁 무렵이면 눈이 많이 쌓일 겁니다." 하고 예측했다.
보일 부인이 도착했어도 집안의 우울한 분위기는 밝아지지 않았다. 보일 부인은
몸집이 크고, 울리는 목소리에 거만한 태도를 지닌 까다로운 여자였다. 원래부터
타고난 공격적인 성격은 오랫동안 군대에서 있었던 경험으로 인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처음 시작하는 하숙집인 줄 알았더라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이곳이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시설로 운영되고 있는 하숙집이라고 생각했지 뭡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저희 집에 머물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일즈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요. 나도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러시다면 전화로 택시를 부르시죠. 아직은 길이 막히지 않았으니까요. 뭔가 잘못
생각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다른 하숙집으로 옮기는 게 나을 겁니다."
가일즈는 다시 덧붙여 말했다.
"우리집에 오시겠다는 손님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나가셔도 우리는
쉽게 다른 손님을 모실 수 있읍니다. 또, 앞으로는 하숙비도 올려 받을
예정입니다."
보일 부인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가일즈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하숙집이 어떤 곳인지 지내 보지도 않고 떠날 생각은 없어요. 데이비스 부인,
큰 목욕 수건을 빌려 줄 수 있겠죠? 나는 손수건만한 타월로 몸을 닦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거든요."
보일 부인이 말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가일즈는 몰리에게 싱긋
웃었다.
"여보, 당신 정말 잘했어요. 참 용감하게 해냈어요." 몰리가 말했다.
"저런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야만 꼼짝 못하는 법이거든."
"그런데, 여보, 저 여자가 크리스토퍼 렌과 잘 지낼지 모르겠어요."
"잘 지내지 못할 거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바로 그날 오후, 보일 부인이 몰리에게 말했다.
"크리스토퍼라는 사람은 정말 이상한 젊은이더군요."하고 말하는 보일 부인의
목소리에는분명히 렌 씨를 싫어하는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빵가게 배달원이 북극 탐험 대원 같은 차림으로 빵을 가지고 왔다. 그는 이틀에
한번씩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날씨 때문에 다음번에는 못 올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길이 전부 막혔어요." 그가 말했다. "식량은 충분히 준비해 두셨겠죠?"
"예, 통조림 식량을 많이 저장해 두었어요." 몰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밀가루를 조금 더 준비해 두는 게 좋을것 같아요."
몰리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만들어 먹는 소다 빵을 생각하며, 만일 식량이 부족한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소다빵이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작정했다.
빵 배달원은 신문도 가지도 왔다. 몰리는 홀의 테이블에 신문을 펼쳐 놓고 기사를
훑어보았다. 외교 문제는 잘 해결되고 있었고, 날씨와 라이언 부인 살해사건에 관한
기사가 신문의 제 1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몰리가 신문에 실린 살해된 여자의 흐릿한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크리스토퍼
렌이 몰리의 어깨 너머로 이렇게 말했다.
"더러운 살인사건이에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 지저분한 곳에 사는 행실이 나쁜
여자를 죽였으니 말입니다. 별다른 사연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고 그런 여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 뿐이예요."
보일 부인도 경멸하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 렌 씨는 보일 부인의 말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그러니까 부인은 그 살인사건이 이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시는군요?"하고
말했다.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렌 씨."
"그렇지만 그 여자는 목이 졸려 죽었다지 않습니까?"
렌 씨는 하얗고 긴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사람의 목을 조르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군요."
"아니, 렌 씨!"
크리스토퍼는 보일 부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일 부인? 목이 졸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그만해요, 렌 씨!"
보일부인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몰리는 급히 소리내어 신문을 읽었다.
" '경찰이 찾고 있는 남자는 검은 외투에 밝은 색 홈버그 모자(챙이 좁고 가운데가
들어간 중절모자의 일종)를 썼으며, 중간 정도의 키에 모직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
그런 남자라면 우리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죠."
크리스토퍼 렌이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몰리가 말했다. "흔히 볼 수 있죠."
한편, 런던 경시청의 파민터 경감은 자기 사무실에서 부장형사인 케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두 노동자를 지금 만나 봐야겠네."
"예, 알겠읍니다. 경감님."
"어떤 사람들인가?"
"괜찮은 부류의 노동자들입니다. 반응이 다소 느리긴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좋아." 파민터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은 두
남자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사무실에 들어왔다. 파민터 경감은 재빨리
그들을 훑어보았다. 파민터 경감은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데에는 숙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두 분이 라이언 부인 살해사건의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자, 앉으시죠. 담배를
피우시겠읍니까?"
파민터 경감은 그들이 담배를 받아서 불을 붙이는 동안 기다렸다.
"바깥 날씨가 무척 춥죠?"
"예, 그렇습니다, 경감님."
"자,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시죠."
두 남자는 말을 시작하기가 어려운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머뭇거렸다.
"자네가 말씀드리게, 조."
두 사람 중에서 덩치가 큰 사람이 말했다. 그러자 조라는 사람이 말을 시작했다.
"일은 이렇게 된 겁니다. 그 때 우린 담배를 피우려고 했는데 마침 성냥이
없었읍니다."
"그곳이 어디였읍니까?"
"자먼가였읍니다. 그 곳 보도에서 가스관 공사를 하고 있었지요."
파민터 경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확한 시간과 장소는 조금 뒤에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먼가라면 살인사건이 일어난 컬버가와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계속하시죠. 성냥이 없었다고요?" 파민터 경감은 그들을 격려했다.
"예, 제가 가진 성냥은 다 써버렸고, 이 친구 빌이 가진 라이터는 고장이 나서 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성냥 좀 빌려 주시겠읍니까?' 하고
물었죠. 그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점은 없었어요.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요. 그 사람이 마침 우리 곁을 지나 가고 있었기에 -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 제가 우연히 그에게 말을 걸었던 것뿐이었으니까요."
파민터 경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성냥을 빌려 주더군요. 아무 말도 없었어요. 그 때
빌이,'지독하게 춥군요.'하고 말하니까 그 남자가 쉰 목소리로, '예,그렇군요.'하고
대답했읍니다. 저는 그 남자가 감기에 걸려서 목소리가 변했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 남자는 외투와 목도리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읍니다. 제가,'고맙습니다.'하면서
그에게 성냥을 돌려주었더니 그는 다시 재빨리 걸어가더군요.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그가 뭔가를 떨어뜨리고 갔기에 그를 불러 세우려고 했을
때는 이미 저만큼 멀어져간 다음이었어요. 그가 떨어뜨린 것은 작은 수첩이었는데,
아마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낼 때 딸려 나온 것 같았어요. 저는, '이봐요, 뭘
떨어뜨렸어요!'하고 그를 소리쳐 불렀죠. 그렇지만 그 남자는 제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계속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모퉁이를 돌아가 버리더군요. 그렇지,
빌?"
"맞아." 빌이라는 옆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마침 허둥지둥 도망치는 토끼 같았지!"
"그는 해로가 쪽으로 돌아갔는데,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그를 불러 세울 수가
없었어요. 그가 길모퉁이를 들어갔기 때문에 쫓아갈 수도 없었죠. 그리고, 그
남자가 떨어뜨린 것은 지갑이나 뭐 값비싼 물건이 아니라 작은 수첩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마 별로 중요한 것두 아닌 것 같았어요. 저는 빌에게 이렇게
말했죠. '웃기는 사람이군. 모자를 눈 위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외투 단추는 목까지
잠갔어. 마치 영화에 나오는 악한 같은 모습이군.'안그런가, 빌?"
"그렇지. 자네가 그렇게 말했지."
"그 때 내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렇게만 말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하지. 그 남자가 돌아보지 않은 것도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읍니다. 그 땐 날씨가 지독하게도 추웠으니까요."
"굉장히 추웠지." 빌이 또 맞장구를 쳤다.
"저는 빌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죠. '이 수첩을 살펴보세.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니까.'하고 제가 말했죠. 컬버가 74번지와 무슨 하숙집 주소였읍니다."
"고급 하숙집 주소였어." 빌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는 이제 어색함이 사라진 듯이 몸짓까지 섞어가며 신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 '컬버가 74번지라면 여기서 가까운 곳이군. 저 모퉁이만 돌면 되니까 일을 끝내고
그곳으로 가보세.' 하고 제가 빌에게 말했죠. 그리고 수첩에 적힌 주소 위에 뭔가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띄기에, '이건 뭐지?' 하니까, 이 친구가 수첩을 받아들고
그걸 소리내어 읽었어요. '세 마리의 눈먼 쥐 - 이건 분명 누군가를 놀리는
밀이야.'하고 빌이 말하느 순간 - 예, 바로 그 순간이었어요. 어떤 여자가
'살인이야!'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 왔어요!"
조는 마지막 말을 좀더 의미 있게 끝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 '이봐, 자네가 얼른 가보게.' 하고 제가 빌에게 말했죠. 그리고 잠시 뒤에 빌이
돌아와서, 어떤 여자가 목에 칼에 찔렸거나 아니면 목이 졸려 죽어서 사람들이
잔뜩 몰려왔고, 경찰도 도착했다는 것과, 아까 그 소리는 그 집 여주인이 경찰을
부르려고 소리를 친 거라고 하더군요. '어디야?' 내가 물었더니 빌이,'칼버가야.'
하고 대답했죠. '몇 번지인데?' 하고 다시 물으니까 빌은 자세 살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말했읍니다."
빌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헛기침을 하며 발을 이리저리 움직였댜.
조가 이야기는 계속했다.
"그래서 제가, '어디 우리 둘이 가서 자세히 알아보세.'하고 말하며 그곳으로
가보았죠. 살인사건이 일어난 집이 74번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린 이런 말을
주고받았읍니다. 빌은, '그 사건과 수첩에 적힌 주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몰라.'하고 말했고, 저는 어쩌면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읍니다.
어쨌든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경찰이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그 집에서
나온 남자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그 사건을
담당하고 계신 분을 만나고 싶다고 한겁니다. 우리가 말씀드린 것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잘 와주셨읍니다." 파민터 경감이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 수첩은 가지고 오셨읍니까? 아, 고맙습니다."
그 다음에 파민터 경감은 좀 더 적극적이고 직업적인 질문을 했다. 그들로부터
정확한 장소와 날짜, 시간는 알아 낼 수 있었지만, 범인으로 생각되는 그남자의
정확한 인상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신경질적인 하숙집 여주인이 말한 범인의
인상 - 눈 위까지 모자를 눌러쓰고, 외투 단추를 전부 채우고, 얼굴 아랫 부분을
목도리로 감쌌으며, 쉰 듯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 라는
것이 전부였다.
두 남자가 나가자 파민터 경감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서 책상 위에 펼쳐진 작은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 수첩은 감식반으로 보내져서 지문을 채취하고 철저히
조사하면, 혹시 어떤 단서라도 찾아낼 수 있으리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경감의
주위를 끄는 것은 수첩에 적힌 두 군데 주소와 위쪽에 쓰여진 작은 글씨였다.
그 때 케인 부장형사가 들어왔다.
"케인, 이리 와서 이것 좀 보게."
케인은 경감 뒤에 서서 수첩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 마리의 눈먼 쥐! 놀랍군요!"
"그렇지." 파민터 경감은 서랍을 열고 공책에서 찢은 반쪽짜리 종이를 꺼내어, 책상
위에 놓인 수첩 옆에 올려 놓았다. 그 종이는 살해된 여인의 옷에 핀으로
조심스럽게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 종이에는 '이것이 첫번째'라고 쓰여 있었다.
글씨 아래에는 어린애가 그런 것 같은 세 마리의 쥐그림과 한 소절의 악보가
그려져 있었다.
"세 마리의 눈먼 쥐, 그들이 달려가는 것을 보세요 ─"
"맞아, 그거야. 그게 바로 주제 음악이야."
"미친 짓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경감님?"
"그렇네." 파민터 경감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죽은 여자의 신원은 확인되었나?"
"예, 여기 감식반에서 보내온 보고서가 있읍니다. 살해된 라이언 부인의 본명은
모린 그레그였읍니다. 두 달 전에 형기를 마치고 홀로웨이 형무소에서
나왔읍니다."
파민터 경감이 신중하게 말했다.
"그 여자는 모린 라이언이란 이름으로 칼버가 74번지에 하숙을 정했네. 이따금 술을
마셨고, 한두 번 남자를 데리고 하숙집으로 온 적도 있었다고 하네, 하지만,
무엇인가에 겁을 먹거나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
그녀가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도 전혀 없어. 그녀를 찾아 왔던 그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고 그녀의 방을 물은 다음, 여주인이 3층이라고 대답하자
계단을 올라갔다는군. 하숙집 여주인은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네.
단지 중간 정도의 키에, 목소리로 보아서 심한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고만 했지.
여주인은 다시 아래층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그 뒤에는 수상한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했네. 그 남자가 집을 나가는 소리도 못 들었다네. 그리고 여주인은
10여분 뒤에 차를 타 가지고 라이언의 방에 올라갔는데, 그 때 그 여자가 목이
졸린 채로 살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일세. 이 사건은 흔한 살인사건이 아니야.
케인. 신중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이란 말일세."
파민터 경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우리 나라에 '몽스웰'이란 이름의 여관이 몇 군데나 있는지 알고 있나?"
"아마 한 군데뿐일 겁니다. 경감님."
"그렇다면 천만다행이군. 우린 운이 좋은 걸세. 자세히 조사해 보게. 시간이 없네."
케인은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칼버가 74번지'와 '몽스웰 여관'이란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경감님 생각은─"
"그렇다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파민터 경감이 재빨리 말했다.
"가능한 일입니다. 몽스웰 여관이라── 그게 어디였더라? 이 이름은 제가 어디선가
최근에 본 적이 있읍니다. 경감님."
"어디서 보았나?"
"글쎄요. 기억이 날 듯 말듯 합니다만. 아! 신문에서 봤읍니다. '타임즈'지의 뒷면,
그러니까 호텔과 하숙집을소개하는 광고란이었읍니다. 며칠 전 신문이었는데,
저는 그 신문에 실린 낱말 퀴즈를 풀고 있었읍니다."
이렇게 말하며 케인 형사는 얼른 사무실을 나갔다가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여기 있읍니다. 이걸 보십시오. 경감님."
파민터 경감은 케인 형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 '버크셔 군(런던의 서쪽의 군) 하펠든 시이 몽스웰 여관.'"
경감이 전화를 끌어당겼다.
"버크셔 군 경찰을 불러 주게."
메트카프 소령이 도착하자, 몽스웰 여과은 바야흐로 여관다운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메트카프 소령은 보일 부인처럼 까다롭게 굴지도 않았고, 크리스토퍼
렌처럼 엉뚱하지도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군복무를 인도에서 한 퇴역장교였는데,
군인다운 깔끔함과 엄격함이 엿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지내게 될 방과 가구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 메트카프 소령과
보일 부인은 직접적으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였지만, 메트카프 소령은 푸타라는
곳에서 '요크셔 은행 지점'에 근무한 보일 부인의 사촌 형제들을 알고 있었다.
메트카프 소령이 들고 온 돼지가죽으로 만든 두 개의 가방은 가일즈의 의심을 풀어
주기에 족할 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몰리와 가일즈는 자기들이 맞이한 하숙인들에 관해 알아 볼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그들 부부는 식사를 준비하고 식탁을 차리고 설겆이를 하는 일 등을
해내기에 바빴다. 메트카프 소령은 커피 맛이 좋다는 찬사를 했다. 그 말을 들은
가일즈와 몰리는 잠자리에 들 때에 무척 피곤했지만 아주 흐뭇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잠든 새벽 2시경에 느닷없이 초인종이 계속 울렸다.
"이런, 젠장." 가일즈가 잠이 깨어 투덜거렸다.
"현관문에서 들리는군, 도대체 이런 시각에 누가─"
"얼른 일어나서 가보세요." 몰리가 재촉했다.
가일즈는 몰리에게 귀찮다는 눈짓을 하며 가운을 걸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와 함께 홀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몰리에게 들려 왔다.
그녀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나 계단 위에서 홀을 살짝 내려다 보았다.
아래층 홀에서는 가일즈가 턱수염을 기른 어떤 낯선 남자의 외투 벗는 것을 도와
주고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낯선 남자는 말투로 보아 외국 사람인 것 같았다.
"손가락이 얼어서 감각이 없어요. 그리고 발도─"라고 말하며 그는 발을 굴렀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가일즈가 서재 문을 열며 말했다.
"이 안은 따뜻합니다. 제가 침대에 잠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이곳에서 기다리시죠."
"아!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 낯선 남자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몰리는 호기심이 생겨 난간의 작은 기둥 사이로 그를 살펴보았다. 그는 턱수염을
기르고 메피스토펠레스(독일 작가 괴테의 작품「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처럼
음흉한 눈썹의 늙은 남자였다. 관자놀이께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데도 불구하고,
마치 젊은 사람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로 들어갔다.
가일즈는 서재 문을 닫고 급히 위층으로 올라왔다.
몰리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누구예요?"
가일즈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집에 온 또 한 사람의 손님이야. 저 사람이 자동차가 눈더미에 미끄러져서
뒤집히고 말았다는군. 그래서, 뒤집힌 차에서 빠져 나와 눈속을 헤메다가 겨우
우리집까지 왔다지 뭐야. 밖에는 아직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어. 그는 길을 따라
걷다가 우리 집 간판을 발견한 거야.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 것 같다고
말하더군."
"그사람─ 괜찮을까요?"
"여보,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돌아다니지는 못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 남자는 외국인인것 같던데요?"
"맞아. 이름이 파라비치니라고 했어. 그 사람의 지갑을 봤는데 - 아마 내가
의심할까 봐 일부로 보여주는 것 같았어 - 돈이 가득 들어 있었어. 그 사람에게
어느 방을 줄까?"
"녹색 방을 주세요.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이불만 가져다 주면 될
거예요.
"그 사람에게 잠옷을 빌려 주어야겠더군. 짐은 전부 차안에 두고 왔다니까.
자동차 문을 통해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지 뭐야."
몰리는 이불과 베개의 타월을 꺼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잠자리를 준비했다.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어." 가일즈가 말했다. "눈이 많이 쌓여서
바깥 세상과 완전히 두절될 것 같아, 몰리.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하겠지?"
"글쎄요." 몰리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여보, 내가 소다빵을 만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당신은 뭐든지 만들 수 있어."
가일즈가 진심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난 아직 빵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걸요. 그렇더라도 빵 만드는
일쯤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갓 구운 것이건 오래 되어
딱딱한 것이건 빵가게에서 배달해 주었는데, 눈 때문에 길이 막히면 빵
배달원이 못 올 거예요."
"정육점에서도 못 오고, 우편 배달부나 신문 배달부들도 오지 못하겠지.
그리고 아마 전화선도 끊어지고 말거야."
"그렇게 되면 라디오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겠군요."
"어쨌든 전기는 자가 발전을 할 수 있으니까."
"당신, 내일 아침에 엔진을 다시 한 번 가동시켜야겠어요. 중앙난방에도 계속 불을
지피도록 하세요."
"그런데, 다음번 코크스가 배달되지 못할 것 같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머 큰일이네요. 우린 이제 어려운 때를 만난 것 같아요. 당신은 빨리 가서 파라
뭔가 하는 손님을 데려오세요. 난 침대로 돌아가겠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가일즈의 예측은 현실로 나타났다. 모든 출입무고 창문은
1.5m 나 쌓인 눈으로 가려졌는데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고, 고요한 적막감은 어떤 위기를 몰고올 것만 같았다.
보일 부인은 식탁에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그녀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옆에 있는 메트카프 소령의 식탁은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렌씨의 식탁에는 아직도 아침식사가 놓여져 있었다. 메트카프 소령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사람인 것 같았고, 렌 씨는 늦잠꾸러기가 분명했다.
보일부인은 아침 식사 시간을 9시로 정해 놓고 있었다. 보일 부인은 훌륭하게
요리된 오믈렛을 먹고 나서, 하얗고 튼튼한 치아로 토스트를 씹어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뭔가 불만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몽스웰 여관은 그녀가
생각한 곳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이곳에서 나이든 노처녀들과 브리지 게임을
즐기며, 자신의 시회적 경험과 훌륭한 친척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고, 전쟁시에
자기가 얼마나 중대한 비밀업무를 수행했던가를 슬쩍 귀뜸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전쟁이 끝나자, 보일 부인은 무인도에 버림 받은 사람처럼 혼자 남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능률과 조직에 관해 열변을 토하며 바쁘게 지내왔었다.
그녀의 불 같은 열성과 박력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정말 유능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생각할 여유조차 가질 수 가 없었다. 전쟁때의 활동은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일들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못 살게 굴며 으스대고, 때로는
웃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기도 했지만, 맡은 일에는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녀의 여자 부하들은 그녀에게 쩔쩔매면서, 그녀가 약간만 얼굴을
찡그려도 겁을 먹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토록 의욕적이고 활기찬 생활이 끝난
것이다. 그녀는 다시 자신만의 생활로 돌아왔지만 전쟁 전의 생활과 같을 수는
없었다. 군대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징발 되었던 그녀의 집은 많은 수리와 단장을
해야만 했고, 집안 일을 해줄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찾을 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적당히 지낼 곳을 마련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잠시 지낼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호텔이나 하숙집이 좋을 것 같았기에 이곳 몽스웰 여관을 선택했던 것이다.
보일 부인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거짓말을 하다니.'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내게 하숙집을 새로 시작한다는 말을
미리 하지도 않고.'
그녀는 접시를 되도록 멀리 밀어 놓았다. 아침식사는 훌륭한 것이었고, 커피와
집에서 만든 잼도 맛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평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잠자리도 아주 편안했다. 자수로 장식된 이불과 폭신한 베개도 마음에 들었다.
보일 부인은 마음이 편안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흠잡는 것을 좋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일 부인은 당당한 태도로 일어나서 식당 문을 나설 때
문간에서 바로 그 이상한 붉은 머리의 젊은이를 만났다. 이날 아침 그는 진한 녹색
줄무늬이 모직 넥타이를 메고 있었다.
'자연스럽지 못하군.' 보일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우수꽝스러운차림새야.' 보일 부인은 그가 불안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뭔가 비웃는 듯한 그
눈초리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이야. 틀림없어.' 보일 부인은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렌 씨가 허리를 잔뜩 굽히며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를 하자, 보일 부인은
거만하게 고개만 까딱하고는 넓은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거실에는 안락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특히 장미꽃 무늬로 장신된 큰 의자가
보일 부인의 눈에 띄였다. 그녀는 그 의자를 자기 자리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앉지 못하도록 뜨개질감을 그 위자 위에 내려
놓고 난방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예상했던대로 난방기는 미지근하기만
했다. 이제야 불평거리를 찾았냈다는 듯 보일 부인의 눈이 예리하게 번득였다.
이제 난방기를 구실로 뭔가 할 말이 생긴 것이다. 보일 부인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지독한 날씨였다. 그녀는 이 하숙집에 손님들이 더 많이 와서 즐길 만한 곳이 되지
않는다면, 이 집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붕 위에 쌓인 눈이 미끄러져 내리며 부드럽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보일 부인은
갑자기 펄쩍 뛰며, "싫어!"하고 소리쳤다.
"이런 곳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어."
그 때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낄낄거리며 소리죽여 웃고 있었다.
보일 부인은 고개를 홱 돌렸다. 렌 씨가 문간에 서서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시겠죠." 그가 말했다.
"나도 부인이 이곳에 오래 머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메트카프 소령은 가일즈를 도와 뒷문 앞에 쌓인눈을 치우고 있었다. 그가 눈치우는
일을 열심히 해주고 있었으므로 가일즈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좋은 운동이 된다오." 메트카프 소령이 말했다. "운동을 매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메트카프 소령은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가일즈는 그것이 오히려
걱정거리였다. 왜냐하면, 아침식사를 7시 반에 준비해 달라고 말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일즈의 마음을 알아채기라고 한 듯 소령이 이렇게 말했다.
"부인이 내 아침식사를 일찍 준비해 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읍니다. 갓 낳은 달걀도
함께 말입니다."
가일즈는 하숙집을 시작한 이후로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야 했다. 몰리와 함께 달걀을 삶고 차를 끓이고 거실을 정돈했다. 모든
일들이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가일즈는 자신이 만일 손님이였다면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 없이 마음껏 늑장을 부리며 잠자리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손님인 메트카프 소령은 저렇듯 일찍 일어나서,
아침식사까지 끝내고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할 일거리를 찾아 집 안팎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잘 됐지.' 가일즈가 속으로 생각했다.
'치울 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일즈는 곁눈질로 소령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 같지 않아. 중년은 넘은
듯한데, 눈초리에는 어딘가 날카로운 면이 엿보이는군. 만만한 사람은 아니야.
어떤일이라도 허술하게 처리할 것 같지도 않군. 그런데 저 사람은 왜 하필 이
몽스웰 여관으로 왔을까? 아마 군대에서 제대를 한 다음 적당한 직업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파라비치니 씨는 뒤늦게 자기 방에서 내려왔다. 그는 간소한 유럽식 아침식사로
커피와 토스트 한 조각을 먹었다. 몰리가 그에게 아침식사를 가져갔을 때, 그는
발꿈치를들고 야단스럽게 과장된 태도로 인사를 하며,
"매력적인 부인이시군요. 이집의 안 주인이시죠?" 라고 말는 바람에 약간
당황했었다.
몰리는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찬사의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도대체─" 몰리는 접시를 개수대에 마구 쌓아놓으며 말했다. "왜 손님들은 같은
시간에 아침식사를 하지 못할까? 정말 힘들어 죽겠어."
그녀는 접시를 닦아서 천장에 넣고 침대를 정리하기 위해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늘 아침에는 가일즈가 그녀를 도와 줄 수 없었다. 가일즈는 보일러실과 닭장에
이르는 길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몰리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각 방의 침대를 정리했다.
그녀가 목욕탕을 청소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몰리는 일에 방해가 되자 처음에는 신경질이 났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전화가
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며 좋아졌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재로 뛰어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약간의 사투리가 섞인 밝고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몽스웰 여관입니까?"
"예, 몽스웰 여관입니다."
"주인이신 데이비스 씨를 부탁합니다."
"죄송하지만, 그이는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어요." 몰리가 말했다. "저는 이집
안주인인데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버크셔 군 경찰의 호그벤 총경입니다."
몰리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그─그러세요?"
"데이비스 부인, 급한 일이 생겼읍니다. 전화로는 길게 말씀드릴 수가 없읍니다.
그래서 부장형사인 토로터를 그곳 몽스웰 여관으로 파견했읍니다. 얼마 뒤에
도착할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지 못하실 거예요. 우린 눈에 파묻혀 있거든요. 완전히 파묻혀
있어요. 다닐 수 있는 길이 없는 상태예요.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몰리의 말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트로터 형사는 꼭 도착할 겁니다. 문제 없어요. 그리고, 데이비스 부인, 남편께
트로터 형사의 지시를 잘 듣고, 그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라고 말씀 전해
주십시오. 아셨죠? 이상입니다."
"그런데 호그벤 총경님, 무슨 일이─"
찰칵 하며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그벤 총경은 할 말만 간단히 하고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몰리는 전화기를 한두 번 두드려 보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때 서재 문이 열렸다. 몰리는 얼른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 당신이군요."
가일즈의 머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얼굴에는 석탄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불을 지피고 왔는지 더워 보였다.
"무슨 일이지? 난 석탄통을 가득 채워 놓고 장작을 날라다 놓았어. 이제부터 닭장을
청소하고 보일러실을 살펴봐야겠어. 아니, 당신 괜찮아? 무슨 일이 생겼어?
당신,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데?"
"여보, 경찰에서 전화가 왔어요."
"경찰?" 가일즈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경찰에서 형사인지 부장인지를 우리 집으로 파견했대요."
"왜? 무슨 일로? 우리가 뭘 잘못했지?"
"모르겠어요. 아일랜드에서 사온 그 버터 2파운드 때문이 아닐까요?"
가일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라디오 수신 허가증을 받았던가?"
"예, 그건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어요. 비드록 부인이 낡은 트위드 코트를 구할 수
있는 자기의 구매표를 내게 주었는데, 그게 문제가 된 건 아닐까요? 설마 그런게
다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코트가 한벌도 없는 사람이 옷 구매표를
가진게 무슨 잘못이겠어요? 여보, 그 밖에 우리가 뭐라도 잘못한 일이 있었나요?"
"며칠 전에 자동차 접촉 사고가 생길 뻔했어. 하지만 그건 저쪽 차의 운전사가
잘못했기 때문이었어. 분명해."
"그래도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확실해요."
몰리는 울상이 되어 흐느끼듯 말했다.
"문제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거의 다 위법이라는 거야."
가일즈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 거야. 내 생각에는 이 하숙집을
경영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이런 일에는 우리가 들어 본 적도 없고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들이 가로 막혀 있는 법이야."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술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우린 아직 손님에게 술을 팔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도대체 왜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숙집을
경영하지 못하고 되어 있는지 모르겠어요."
"글쎄 말이야. 당신 말이 옳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법으로 급지된 일이 하도
많아서."
"여보, 하숙집을 시작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몰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 며칠 동안 우린 눈에 갇혀 있게 될 거예요. 그러면 손님들은 불평을
늘어놓을 테고, 저장해 둔 식량은 전부 바닥이 날 것이고....."
"여보, 힘을 내요.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좋아질 거야."
가일즈는 몰리의 이마에 건성으로 키스를 하고 나서 약간 심각하게 말했다.
"여보, 생각해 보니까 일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 경찰이 이런 날씨를 무릅쓰고
우리 집에 형사를 보냈다면, 그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분명해."
가일즈는 창문 밖에 쌓인 눈을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틀림없이 위급한 일이 생긴 거야....."
몰리와 가일즈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앉아 있을 때, 서재 문이 열리며 보일
부인이 들어왔다.
"아, 여기 있었군요. 데이비드 씨. 거실이 지금 얼마나 추운지 알고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보일 부인. 코크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ㅡ"
보일 부인은 가일즈의 말을 냉정하게 가로채며 따지듯 말했다.
"나는 일주일에 7기니를 지불하고 있어요 - 7기니를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얼어
죽을 정도로 춥게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가일즈는 얼굴이 싱기되어 짧게 대꾸했다.
"제가 가서 연료를 더 넣겠읍니다."
가일즈가 방을 나가자, 보일 부인은 몰리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여기 손님 중에 정말 이상한 젊은이가 한 사람
있더군요. 그 사람이 태도와 그 넥타이하며, 머리는 빗질조차 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그 분은 아주 똑똑한 젊은 건축가예요." 몰리가 말했다.
"뭐라고요?"
"크리스토퍼 렌 씨는 건축가란 말입니다. 그리고ㅡ"
"아니, 이봐요, 젊은 부인." 보일 부인이 달려들듯이 말했다. "내가 그 유명한
크리스토러 렌 경을 모르는 줄 알아요? 물론 그 분은 건축가였죠. 세인트 성당을
세운 분이죠. 당신 같은 젊은 사람들은 이 나라에 교육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교육도 받지 못한 줄 알고 있더군요."
"저는 그 젊은 렌 씨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젊은이의 이름도 크리스토퍼
렌이에요. 그 사람의 부모님은 그가 건축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름을
그렇게 지어 주셨다는군요. 그래서 그 젊은이는 이제 머지않아 유능한 건축가가 될
거라고 했어요."
"흥!" 보일 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믿어지지가 않는군. 내가 당신이었다면 그 젊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좀더 자세히
알아보았을 거예요. 그에 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있죠?"
"부인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 만큼은 알고 있어요. 말하자면, 부인과 그 젊은이가
우리집에 머물면서 일주일에 7기니씩 하숙비를 지불한다는 사실이죠. 제가 그 이상
뭔가를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 사실밖에
없어요. 손님이 제 마음에 들거나ㅡ"
몰리는 보일 부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건 아무 상관 없어요."하고 말을 마쳤다.
보일 부인은 몰리의 말을 듣자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신처럼 젊고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자기보다 경험이 많고 나이가 든 사람의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거예요. 그리고, 그 수상한 외국인은 또 누구죠?
도대체 언제 이 집에 도착했죠?"
"어젯밤 늦게 왔어요."
"정말 이상한 일이군. 그런 시간에 사람ㅇ르 집안에 들어오게 하다니."
"진실해 보이는 외국인 여행자를 쫓아낸다면, 그건 법에 어긋나는 일일 거예요."
몰리가 상냥하게 덧붙였다.
"아마 그걸 모르셨나 보군요. 그건 아셔아죠."
"그 파라비치닌가 뭔가 하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ㅡ"
"그걸 아셔야죠. 아셔야 하고말고요. 부인께선 지금 악마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
같군요. 그리고...."
보일 부인은 정말 악마가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깜작 놀라며 펄쩍 뛰었다.
서재에는 파라비치니 씨가 보일 부인과 몰리가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로 살며시
들어와서 두 손을 비비며 늙은 악마같이 웃고 서 있었다.
"깜짝 놀랐쟎아요." 보일 부인이 말했다.
"아니, 소리도 없이 들어 왔군요."
"발꿈치를 들고 들어왔으니까요, 부인." 파라비치니 씨가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걸어다니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한답니다. 살금살금 걸어다니면
아주 재미있읍니다. 이따금 듣지 않아야 될 말도 듣는 적이 있지만, 그것 또한
재미있죠. 그리고 나는 한번 들은 말은 절대로 잊지 않는답니다."
보일 부인은 겸연쩍은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아, 난 뜨개질감을 가지러 가야겠군요ㅡ 거실에 두고 왔거든요."
보일 부인은 황급히 방을 나갔다. 몰리는 당황한 채 파라비치니 씨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는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의 매력적인 안주인께서 기분이 안 좋은신 것 같군요." 하고 말하며 그는
몰리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몰리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했다.
"무슨 일입니까, 부인?"
몰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이 사람에게 좋게 대해야 할지 불쾌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하고 생각했다.
파라비치니 씨는 늙은 사티로스(사람의 몸뚱이에 염소의 귀.뿔.다리.꼬리를 가진
괴물로,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함)처럼 몰리를 곁눈질해 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모리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전부 눈 때문이에요."
"그렇습니다." 파라비치니 씨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눈 때문에 일이 어렵게 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쉬워지기도 했읍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그러시겠죠." 파라비치니 씨가 심각하게 말했다. "부인은 아직 모르는게 많을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부인은 하숙집 경영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러자 몰리는 턱을 앞으로 내밀여 단호하게 말했다.
"예,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리 부부는 최선을 다할 작정이에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어쨌든─" 몰리는 딱딱한 태도를 약간 누그러뜨리며, "제 요리 솜씨는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부인의 요리 솜씨는 아주 훌륭합니다."
몰리는, '정말 불쾌한 외국인이군.'하고 생각했다.
파라비치니 씨는 몰리의 생각을 눈치챈 듯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심각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두 마디 조언을 해도 괜찮겠읍니까, 데이비스 부인? 부인과 부인의 남편은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집에 온 손님들에
관해서 잘 알아보셨읍니까?"
"그러게 해야 되나요?" 몰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숙집이란 누구나 쉽게
드나드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부인은 이 집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 대해 약간은 알아두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파라비치니 씨는 몰리에게 몸을 굽히며 위협을 하듯이 몰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나를 예로 들어 보죠. 나는 한밤중에 이 집에 왔어요. 내 자동차가 눈길에
미끄러져서 뒤집혔다고 말한 것밖에 부인이 나에 관해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전혀 모르고 계신 겁니다. 아마도 부인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죠."
"보일 부인은─" 하고 뭔가 말하려다가 몰리는 보일 부인이 뜨개질감을 손에 들고
다시 서재로 들어오자 말을 멈추었다.
"거실은 너무 춥군요. 여기 앉아 있어야겠어요." 보일 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벽난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파라비치니 씨는 발끝으로 한 바퀴 뱅글 돌고 나서 보일 부인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제가 부인을위해 불꽃을 돋우어 드리겠읍니다."
어제밤에 몰리는 파라비치니 씨가 젊은 사람처럼 활기차게 걷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었다. 그리고, 그는 불빛을 정면으로 받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무릎을 굽히고 벽난로의 불꽃을 돋우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확실하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파라비치니 씨는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 늙은 남자는 젊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구나.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어. 지금 저 얼굴은 오히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니까 말이야. 젊은이 같은
걸음걸이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아마 사람들을 속이려고 꽤나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겠지.' 몰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때 메트카프 소령이 뛰어 들어오는 바람에 몰리의 생각은 다시 불쾌한 현실로
돌아왔다.
"데이비스 부인, 아무래도 화장실의 수도관이─저─" 하고 큰소리로 말하던 소령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래층 화장실의 수도관이 언 것 같습니다."
"어머, 큰일났네!" 몰리는 신음하듯 말했다. "오늘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조금
전에는 경찰이더니 이번에는 수도관이라니."
몰리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파라비치니 씨는 '쨍그랑'소리를 내며 부지깽이를 떨어
뜨렸고, 보일 부인은 뜨개질하던 손을 갑자기 멈추었다.
몰리는 메트카프 소령도 몸이 굳어지며 얼굴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소령의 표정은 전혀 딴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나무로
깎은 목각 인형처럼 모든 감정이 사라진 것 같았다.
˙˙˙˙˙ ˙˙˙˙
"경찰이라고 했읍니까? " 메트카프 소령이 스타카토처럼 한 마디씩 짧게 끊어
말했다.
몰리는 소령의 굳어진 태도 뒤에는 어떤 격한 감저이 불타 오르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나 경계심, 또는 흥분된 감정이 분명했다.
'이 사람은 뭔가 숨기고 있어. 위험한 사람이 틀림없어.' 몰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메트카프 소령이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호기심을 나타내는 듯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경찰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조금 전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몰리가 말했다.
"우리 하숙집에 형사를 파견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날씨에는 형사가 이곳에
오기가 어려울 거예요."
몰리는 창 밖을 쳐다보며 희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왜 형사를 보냈다고 하던가요?" 메트카프 소령은 모리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며
물었다. 몰리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가일즈가 들어왔다.
"이 형편없는 코크스는 반 이상이 돌멩이야." 가일즈는 화가 난 듯 말하다가,
"무슨일이 있었읍니까?"라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메트카프 소령이 가일즈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찰이 온다고 하던데, 무슨 일입니까?"
"아,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일즈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런 날씨에는 아무도 못 올 겁니다. 눈이 1.5m 나 쌓여서 길이 전부 막혔거든요.
아무도 오지 못할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세 번 들려 왔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잠시 동안은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 소리는 마치 유령의 경고처럼 크고 기분 나쁘게 들려 왔다.
갑자기 몰리가 비명을 지르며 프랑스식으로 된, 바닥까지 내려온 창문을 가리켰다.
그곳에 어떤 남자가 창문을 두드리며 서 있었다. 그는 아무도 오지 못할 것 같은
이곳까지 스키를 타고 온 것이다. 가일즈는 소리를 지르며 방을 가로질러 가서,
손잡이를 더듬어 창문을 밀어 젖혔다.
"고맙습니다." 스키를 타고 온 남자가 말했다. 그는 흔히 들을 수 있는 평범하고도
활기찬 목소리에다, 햇볕에 검게 탄 얼굴의 사나이였다.
"나는 부장형사인 트로터입니다."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보일 부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르 가만히 쳐다보더니, "당신처럼 젊은 사람이
부장형사라니 좀 이상하군요?" 라고 믿을 수 없다는 말했다.
정말 무척 젊어 보이는 그 남자는 모욕을 느낀 듯, "나는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젊지는 않습니다, 부인." 하고 약간 화가 난 투로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가일즈에게 말을 했다.
"당신이 데이비스 씨죠? 이 이 스키를 어디엔가 넣어두어야겠는데, 좀 도와
주시겠읍니까?"
"예, 그러죠. 절 따라오시죠."
그 남자가 홀 안쪽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보일 부인이 언짢다는 투로
말했다.
"경찰관들이 스키를 타고 돌아다니며 겨울 스포츠나 즐기게 하려고 우리가
세금을 내고 있군요."
파라비치니 씨는 몰리에게 다가와서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고 재빠르게 말했다.
"왜 경찰을 불렀읍니까, 부인?"
몰리는 원망이 담긴 것 같은 파라비치니 씨의 눈초리를 보자,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예기치 못했던 파라비치니 씨의 새로운 일면이었다.
몰리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느 그의 눈초리에서 잠시 두려움을 느꼈다.
"제가 부른 것이 아니에요. 전 경찰을 부르지 않았어요."
몰리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 때 크리스토퍼 렌이 흥분한 모습으로 들어오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홀에 있는 그 남자는 누굽니까? 어디서 왔죠?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서도 기운이 넘쳐 보이던데요."
보일 부인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안 믿을지 모르지만, 그 남자는
경찰이에요. 스키를 타고 온 형사라는 군요!"
이렇게 말하는 보일 부인의 태도에는 마침내 하층계급 사람들의 잘난 체하는 면모가
드러났다.
메트카프 소령이 몰리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데이비스 부인, 미안하지만 전화를
써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소령님"
메트카프 소령이 전화기 곁으로 다가설 때, 크리스토퍼 렌이 째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지 잘생겼더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난 항상 경찰관들은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메트카프 소령은 조바심을 내며 전화기를 두드렸다.
그러다가 몰리를 바라보며, "데이비스 부인, 전화가 통하지 않는군요. 완전히
먹통이에요." 라고 말했다.
"조금 전까지도 통화가 되었었는데요. 왜―"
몰리의 말을 가로채며 크리스토퍼 렌이 큰소리로 웃었다. 쉿소리를 내며 거의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웃음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제 우린 바깥 세상하고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군요. 완전히
단절되었어요. 우습지 않습니까?"
"웃을 일이 아닙니다." 메트카프 소령이 굳어진 목소리로 나무라듯 말했다.
"맞아요. 웃을 일이 아니에요." 보일 부인이 말했다.
크리스토퍼 렌은 그래도계속 웃었다. 그리고, "이건 나만 알고 있는 농담 입니다."
라고 말하더니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쉿, 형사가 들어오는군요."
가일즈가 트로터 부장형사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트로터 형사는 스키를 벗고
눈을 털어낸 모습으로 큰 노트와 연필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냉정하고
침착한 재판관 같았다.
"여보―" 가일즈가 말했다. "트로터 형사님이 우리게 할 말이 있다고 하시는군."
몰리는 그들을 따라 방을 나갔다.
"독서실로 가시죠." 가일즈가 트로터 형사에게 말했다. 그들 세 사람은 홀 뒤쪽에
있는 바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작기는 했지만, 독서실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품위 있게 꾸며진 방이었다. 트로터 형사는 방으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몰리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잘못이냐구요?" 라고 말하며 트로터 형사는 물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 일이 아닙니다, 부인. 오해를 하셨다면 내가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데이비스 부인, 그런 문제와는 전혀 다른 일 때문에 온 겁니다. 경찰의 보호나
필요한 문제가 생겼읍니다. 내 말이 이해하시겠읍니까?"
몰리와 가일즈는 트로터 형사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묻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트로터 형사가 유창하게 말을 계속했다.
"이 문제는 라이언 부인, 즉 모린 라이언 부인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그 부인은 이틀 전에 런던에서 살해당했읍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셨읍니까?"
"예." 몰리가 대답했다.
"우선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두 분이 그 라이언 부인을 알고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전혀 모르는 여자입니다." 가일즈가 이렇게 대답하자, 몰리도 작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군요. 우리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읍니다. 그런데, 사실 라이언이란 이름은
살해된 여자의 진짜 이름이 아니었읍니다. 그 여자는 죄를 짓고 형무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 그 여자의 지문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여자의 진짜 신원을 쉽게 알 수 있었죠. 그 여자의 진짜 이름은 그레그, 모린
그레그였읍니다. 전남편인 존 그레그는 이곳에서 멀지 않는 롱리지 농장에서 살던
농부였읍니다. 두 분도 롱리지 농장 사건에 관해서 들어 본 적이 있겠죠?"
방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지붕에쌓였던 눈이 미끄러지며
땅에 떨어져 부드럽게 부서지는 소리뿐이었다. 침묵을 깨는 그 소리는 은밀하고도
불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트로터 형사는 말을 계속했다.
"1940년에 세 명의 전쟁 고아가 롱리지 농장의 그레그 부부에게 입양되었읍니다.
v 그런데, 얼마 뒤 그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가 그레그 부부의 범죄에 가까운
냉혹한
학대와 무관심 때문에 죽고 말았읍니다. 그 사건이 보도되자 세상은 떠들석했고
그레그 부부는 감옥에 보내졌읍니다. 그러나, 그레그는 붙잡혀서 감옥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을 쳤읍니다. 그는 자동차를 한 대 훔쳐 타고 달리다가 경찰이 추격해
오자, 정신없이 차를 몰았죠. 그러다가 결국 사고를 당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읍니다. 한편, 그레그 부인은 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두 달 전에
석방되었읍니다."
"그리고 살해당했군요." 가일즈가 말했다. "누가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트로터 형사는 가일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하고
천천히 물었다. 가일즈는 고개를 저었다.
"1940년에 저는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지중해에서 복무하고 있었읍니다."
그러자 트로터 형사는 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저는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 몰리는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하지만 왜 우리에게 오셨죠? 그사건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죠?"
"당신들이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스 부인!"
가라앉아 있었다. 검은 외투를 입고 목도리로 얼굴을 감싼 한 사나이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런던의 컬버가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74번지에 다다르자, 그는 현관 계단을 올라가서 초인종을 누르며 집안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때 주방에서 바쁘게 설겆이를 하고 있던 케이시
부인은 계속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들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휴, 시끄러워! 도대체 쉴 사이가 없다니까."
그녀는 물묻은 손을 닦고 숨을 가쁘게 쉬며 아래층 계단을 힘겹게 내려가서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낮게 드리운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케이시 부인에게 쉰 듯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라이언 부인이십니까? "
"아니에요. 라이언 부인은 3층에 살아요. 올라가 보세요. 그런데, 오신다는
연락을 미리 하셨나요? " 하고 케이시 부인이 묻자,
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러세요? 하지만 괜찮아요. 올라가서 노크해 보세요."
케이시 부인은 그 남자가 낡아빠진 카페트가 깔린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바라
보았다. 나중에 그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 때는 그 남자가 심한 감기에 걸려서, 그렇게 속삭이듯 작고 쉰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날씨가 추웠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계단이 꺾여지는 곳에 이르자 부드러운 소리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 마리의 눈먼 쥐'라는 노래의 멜로디였다.
몰리 데이비스는 길 쪽으로 몇 걸음 물러서서 출입문 옆에 걸린 새로 칠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고급 하숙집
몽스웰 여관
몰리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간판은 전문가의 솜씨 못지않게 훌륭했다.
'하숙집'이란 글씨의 뒷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갔고, '여관'이란 글자가 조금 작게
쓰여진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가일즈는 훌륭한 간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몰리의 남편인 가일즈는 정말 솜씨가 좋았고, 못 하는 일이 없었다.
몰리는 남편이 새로운 솜씨를 발휘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남편은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리는 남편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재능을 하나씩 알 때마다 놀랍기만 했다.
사람들이 해군 출신을 '솜씨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편이 지닌 재능은 이제부터 그들 부부가 시작할 새로운 사업에 꼭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몰리와 가일즈 부부는 하숙집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해볼 만한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하숙집을 경영하게 되면
그들이 살 집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었다.
하숙집을 경영하자는 것은 몰리의 생각이었다. 어느 날, 캐서린 아주머니가
몰리에게 몽스웰 저택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는 사실을 변호사가 알려 주었다.
그래서 젊은 부부인 몰리와 가일즈는 당연히 그 저택을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저택이지?" 하고 가일즈가 물었을 때 몰리가 대답했다.
"크고 넓고 오래 된 집이에요. 집안에는 빅토리아풍의 구식 가구들로 가득차
있어요. 정원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전쟁(제2차 대전)이후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답니다. 정원사라고는 늙은 노인 한 사람밖에 없었거든요."
그들은 저택을 팔려고 내놓았다. 그 대신 그들 두 사람에게 알맞은 작은 집이나
아파트에 필요한 가구만 갖기로 했다. 그런데 두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첫째는 작은 집이나 아파트를 구할 수 없었고, 둘째는 저택에 있는 가구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도저히 다 처치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구까지 전부 팔아 버리면 되죠. 팔 수 있을거예요." 몰리가 말했다.
변호사도 요즘에는 무엇이든지 팔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아마 누군가가 호텔이나 고급 하숙집으로 쓰려고 그 저택을 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집안의 가구도 전부 사게 될겁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저택은 손질이 잘 되어
있거든요. 돌아가신 에모리 양께서 전쟁이 나기 직전에 대대적인 집수리를 해서
현대적으로 만들어 놓으셨지요. 손볼 데가 거의 없읍니다. 전쟁 뒤에도 아주
훌륭하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몰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여보, 우리가 하숙집을 경영하면 어떨까요?"
처음에 남편은 몰리의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몰리는 남편을 계속
설득했다.
v"처음부터 손님을 많이 받을 필요는 없어요. 그 저택은 하숙집으로 쓰기에는
안성마춤이에요. 목욕탕에는 찬물과 더운 물이 나오고, 중앙난방시설도 되어
있어요. 또, 가스 조리대도 있고요. 그리고 우리가 닭과 오리를 기르면 달걀도
구할수 있고, 채소를 직접 재배하면 반찬값도 많이 절약할 수 있거든요."
"그런 일들을 전부 누가 하지? 일하는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운데."
"우리가 해야죠. 어디에 살더라도 그런 일은 우리가 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숙집을
시작할 때쯤이면 일하는 여자를 한 명 정도 구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일할 사람을
많이 둘 필요는 없어요. 손님을 다섯 명만 받으면 한 사람이 1주일에 7기니를낼
테고...."
이렇게 말하며 몰리는 희망에 찬 설계를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해보세요, 여보. 그 저택은 우리집이예요. 그 집에 있는
물건도 전부 우리 것이고요. 우리힘으로 우리 집을 마련하자면 앞으로 몇 년이나
걸리지 않겠어요? "
그것은 사실이었다. 가일즈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 두 사람은 서둘러서 결혼을
한 뒤 지금까지 일 때문에 함께 지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만의 집을
가지고 정착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숙집을 경영하는
큰일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방 신문과 '타임즈'지에 하숙집 광고를 냈더니,
손님들로부터 많은 문의 편지가 왔다.
그리고 오늘, 첫번째 손님이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가일즈는 철망을 싸게 판다는
광고를 보고서, 그것을 사기 위해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반대편 지역으로 떠났다.
몰리는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사야 하기 때문에 시내로 나갔다 와야겠다고
남편에게 말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갔는데, 단 한 가지 문제는 날씨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날씨가 무척 추워지더니 급기야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몰리는 서둘러서 집으로 향했다.휘날리느 눈송이가 방수옷을
입은 몰리의 어깨와 윤기 있는 고수머리에 내려와 앉았다.
일기예보는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많은 눈이 내릴 것이 라는 내용이었다.
몰리는 수도관이나 하수도가 얼어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숙집을 시작하자마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정말 큰일이다. 몰리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차마시는 시간이
벌써 지나 있었다. 남편이 돌아왔을까? 내가 어디에 간 걸까 하며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잊은 물건이 있어서 시내에 다시 갔었어요." 라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남편은 웃으며이렇게말할 것이다.
"통조림을 더 사러 갔었나?"
통조림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에 통하는 농담이었다. 가난했을 때
그들은 통조림 식량이 바닥이 나지 않도록 항상 조심했었다. 지금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식료품 저장소에다 통조림 식량을 가득 채워 두고 있었다.
몰리는 얼굴을 찡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이제 곧 그 만일의 경우가 닥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몰리가 집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남편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몰리는 우선 부엌에 갔다가 위층으로 올라가서, 손님을 맞기 위해 준비해
놓은 방들을둘러보았다.
기둥이 네 개인 큰 침대와 마호가니(열대 식물의 일종) 가구로 장식된 남쪽 방은
보일 부인에게 주고, 떡갈나무 가구가 있는 푸른 벽지의 방은 메트카프 소령에게 줄
것이며, 밖으로 튀어나온 창이 달린 동쪽 방은 렌 씨에게 줄 것이다.
방들은 훌륭해 보였다. 캐서린 아주머니가 그렇게 많은 린넨 천을 남겨 준 것은
정말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몰리는 제자리에 놓인 이불을 한번 톡톡 두드려
보고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밖은 거의 어두워지고 있었다. 집이 너무나
조용하고 텅빈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집은 마을에서 3km나 떨어져 있는
외딴집이었다. 몰리가 말하듯 세상으로부터 3km 나 떨어져 있었다.
몰리는 전에도 집에 혼자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절실하게 혼자뿐이라는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밖에서는 눈송이가 바람에 날리며 창틀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속삭이는 듯 하면서도 불안하게 들려 왔다. 만일 남편이
오늘밤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떡하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자동차가 다닐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만일 이 집에서 며칠 동안 혼자 지내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몰리는 주방ㅇ르둘러보았다. 넓고 편안한 주방이었다. 덩치가 크고 마음씨
좋은 주방장이 요리를 하고, 몰리가 딱딱한 케이크와 차를 마시며 턱을 움직이고
있을 때 키가 크고 나이든 가정부가 식탁 한쪽에 서서 식사 시중을 들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하녀들의 눈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식모와, 통통하고 얼굴이
발그레한 하녀가 식탁의 다른 한쪽에 서 있다면 참 잘 어울릴 그런 그런
주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 시작한 일을 서툴게 하고 있는 몰리 데이비스
혼자였다. 이 순간, 몰리는 자신의 인생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의 존재도 비현실적으로 생각되었다. 몰리는 자신이 마치 연극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때 어떤 그림자가 창 밖을 스치고 지나갔다. 몰리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낯선 남자가 눈 속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옆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 다음, 그 낯선 남자가 문간에 서서 눈을 털어내고는 몰리가 혼자 있는
집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때 갑자기 몰리의 착각이 사라졌다.
"어머, 당신이였군요!" 몰리가 소리쳤다.
"당신이 돌아와서 정말 기뻐요!"
"이제야 돌아왔어. 지독한 날씨군. 내 몸이 꽁꽁 얼었어."
가일즈는 발을 구르며 손가락에다 입김을 호호 불었다. 가일즈가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외투를 벗어 떡갈나무 옷장에 휙 내던지자, 몰리도 습관적으로 그것을
집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외투 주머니에서 목도리와 신문, 둥글게 감은
끈뭉치를 꺼내고, 아침에 서둘러 집어넣었던 우편물들도 꺼냈다. 몰리는 주방으로
가서 쇼핑한 물건을 찬장과 조리대 위에 놓고 가스 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철망을 샀어요? 당신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물건 말이에요." 몰리가 물었다.
"내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었어. 우리에게 소용없는 것이었으니까. 싸게파는 다른
곳에도 가봤지만 그것도 좋은 물건이 아니었어. 당신은 오늘 하루 종일 뭘 하며
지냈지? 아직 손님이 아무도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보일 부인은 내일 도착하다고 연락이 왔어요."
"메트카프 소령과 렌 씨는 오늘 도착한다고 했지?"
"메트카프 소령도 내일 온다는 엽서를 보냈더군요."
"그렇다면 렌 씨와 우리 두 사람이 저녁을 먹게 되겠군. 렌 씨는 어떤 사람일 것
같아? 내 생각에 그는 퇴직한 공무원일 것 같은데."
"나는 그가 예술가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가 예술가라면 만일의 경우에대비해서 1주일치 하숙비를 미리 받아야겠는걸"
"그럴 필요는 없어요. 손님들은 짐을 가지고 올 테니까, 만일 하숙비를 내지 않으면
하숙비 대신 그 짐을 우리가 맡으면 될 거예요."
"하지만, 짐 가방 속에 신문지로 싼 돌멩이만 가득차 있으면 어쩌지? 여보, 우린
사실 이런 일을 처음 하기 때문에 모르는 게 많아. 손님들이 우리가 하숙집을 처음
시작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보일 부인은 눈치를 챌 거예요. 그 여자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거든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그 여자를 본 적도 없쟎아? "
몰리는 몸을 돌리고신문지를 신탁에 깔았다. 그리고 치즈를 가지고 와서 썰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치즈 토스트를 만드는 거예요." 몰리가 대답했다.
"빵가루와 으깬 감자를 섞어서 만드는 건데, 치즈를 아주 조금만 넣으면 치즈
토스트가 되는 거예요."
"당신은 정말 똑똑한 요리사인걸." 가일즈가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난 걱정이 돼요. 한번에 한 가지 요리느 만들 수 있지만,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자면 연습을 많이 해야 되거든요.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제일
어려워요."
"왜 그렇지?"
"왜냐하면 한꺼번에 준비해야하니까요. 달걀, 베이컨, 뜨거운 우유, 커피, 그리고
토스트를 한번에 식탁에 올려야 하거든요. 잘못하면 우유가 끓어 넘치거나
토스트가 다 굳어 버리거든요. 불에 덴 고양이처럼 바쁘게 뛰어다니며 한꺼번에
전부 살펴봐야 해요."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는 주방에 살금살금 내려와서 팔짝팔짝 뛰는 고양이 같은
당신의 모습을 지켜봐야겠는걸."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어요. 찻쟁반을 서재로 가지고 가서 라디오를 들을까요?
뉴스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우리가 앞으로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주방에도 라디오가
있어야겠군."
"그래요. 참 좋은 주방이에요. 난 이 주방이 마음에 들어요. 이집에서 제일 좋은
곳 이라고 생각해요. 조리대와 그릇도 좋고, 저 커다란 요리용 스토브도 마음에
들어요. 저 스토브를 쓸 만큼 많은 요리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요."
"그 스토브를 쓰려면 1년치의 연료가 하루 만에 바닥이나고 말거야."
"그렇긴 하지만, 그 안에서 구워지는 큰 고깃덩어리를 상상해 봐요. 소의
안심고기와 양의 등심고기를 말이에요. 구리로 만든 커다란 남비에도 설탕을 잔뜩
넣고 딸기잼을 만든다고 생각해 봐요. 빅토리아 시대는 정말 좋았을 거예요.
위층에 있는 가구들도 약간 화려하긴 해도 얼마나 크고 튼튼해요. 사용하기
편리하고 옷도 많이 넣을 수 있어요. 서랍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열리고
닫히거든요. 전에 우리가 전세로 빌려서 살던 아파트 생각나세요? 겉모양은 그럴
듯 했지만,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죠. 서랍은 잘 열리지 않았고, 문도 한번
열리면 닫히질 않고, 또 닫히면 열리지 않았죠."
"맞아, 정말 엉터리로 만든 집이었어. 서랍이나 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면 당신은
절망에 빠져 주저앉곤 했지."
"자, 우리 이제 뉴스를 들어요."
뉴스의 내용은 주로 날씨에 관한 것으로, 눈이 많이 올 예정이므로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 흔히 있는 외국과의 분쟁에서 생긴 교착 상태, 의회에서의 열띤
논쟁, 그리고 런던 패딩턴 구의 컬버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관해 보도하고
있었다.
"아─" 몰리가 라디오를 끄며 말했다.
"좋지 않은 내용들뿐이군요. 연료 절약을 강조하는 내용은 또다시 듣고 싶지
않아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어요. 가만히 앉아서 얼어 죽으라는
말인지 원? 하숙집을 이런 겨울에 시작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봄까지 기다렸어야
하는 건데."
몰리는 약간 다른 말투로 계속했다.
"살해된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라이언 부인 말이야?"
"그 여자 이름이 라이언이에요? 누가 무슨 이유로 그 여자를 죽였는지 궁금하군요."
"아마 마룻바닥에 보물을 감추어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경찰이 찾고 있는. '사건이 일어난 현장 부근에 있었다'는 남자가 살인범일까요?"
"그렇겠지. 언제나 그런 사람이 범인이니까. 경찰에서 그냥 찾고 있다고 점잖게
표현했을 뿐이지."
그 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몰리와 가일즈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현관 문이군. 아마 살인범이 등장하려나 본데." 가일즈가 익살맞게 말했다.
"연극이라면 그럴 거예요. 어서 나가 봐요. 렌 씨일거예요.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드디어 알 수 있겠네요."
문을 열자 렌 씨와 눈보라가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서재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검은 윤곽만 뚜렷이 보였다. 검은 외투에 회색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그
남자의 모습은 다른 남자들과도 똑같아 보였다.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막으며 가일즈가 문을 닫자, 렌 씨는 가방을 내려놓고서
목도리를 풀며 모자를 벗어 던지는 동시에 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성급하게
들렸다. 홀의 불빛 아래에는, 검고 윤기 있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흐릿한 눈동자의 젊은이가 서 있었다.
"정말 지독한 날씨군요." 그가 말했다.
"디킨즈(1812~1870, 영국의 소설가, 「크리스마스 캐롤」「올리버 트위스트」「두
도시 이야기」등을 썼다)의 소설에 등장하는 스크루지와 티니 팀이 살았던 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한 최악의 영국 겨울 날씨예요. 여간 튼튼하지 않고서는 이런
날씨를 견디어 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웨일스 지방(영국의 서부
지방.참고로, 영국은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로 나뉘어 있다)에서
이곳까지 들판을 가로질러 왔는데, 무척 힘들었어요. 데이비스 부인이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뼈가 앙상한 손으로 재빨리 몰리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내가 상상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군요. 나는 부인이 인도에 주둔했던 육군
장성의 미망인일 거라고 생각했어죠. 지독하게 엄격한 마님 같은 분― 베나레스
(동부 인도에 있는 힌두교의 옛 성도) 영주의 마님 같고, 진짜 빅토리아 시대의
근엄한 체하는 마님 같은 여주인 말입니다. 혹시 밀립(꿀을 짜낸 찌끼를 끓여 만든
기름)으로 만든 꽃이 있읍니까? 아니면, 극락조를 갖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 하지만 나는 이곳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난 이곳이 혹시 아주 오래 되고
낡은 하숙집이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했었어요. 베나레스의 냄새가 나는
케케묵은 집이 아닐까 하고요. 그런데 이 집은 정말 훌륭하군요. 빅토리아 시대의
고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요. 아름다운 장식장도 있겠죠? 과일 무늬가 조각된
고운 자줏빛 마호가니 식기장말입니다."
"예, 사실은―" 몰리는 그 젊은이가 쉴 새 없이 애기해 나가자 정신이 얼떨떨해져서
더듬거리며, "갖고 있어요."하고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구경할 수 있겠읍니까? 지금 당장에요. 저 방에 있읍니까?"
그가 너무도 성급하게 구는 바람에 옆에 있는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그는 식당문의 손잡이르 돌려 문을 열고는 불을 켰다. 몰리는 남편이 언짧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느끼며 그 젊은이를 따라 식당을 들어갔다.
그는 표면이 전부 조각으로 장식된 육중한 식기장을 긴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돌아서더니 나무라는듯한 눈초리로 몰리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마호가니 식탁은 없읍니까? 이 작은 테이블 몇개가 전부란 말입니까?"
"손님들이 그런 개인용 식탁을 더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몰리가
대답했다.
"아, 물론 그 말씀도 옳아요. 내가 너무 내 기분에만 빠져 있었군요. 그런 커다란
마호가니 식탁이라면 그 식탁에 어울리는 가족도 있어야겠죠. 콧수염을 기른
엄격하고도 멋있는 아버지와, 아이를 많이 낳아서 허약해진 엄마, 그리고
열한명의 아이들과 엄한 가정교사, 또 '불쌍한 해리엣'이라 불리는 가난한 친척
아줌마도 있어야겠죠. 집안일을 도와 주며, 자신이 화목한 가정에 속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가난한 친척 아주머니죠. 그 불쌍한 해리엣 아주머니의
등뒤에서는 벽난로의 불꽃이 타오르며 온 가족을 따뜻하게 해주겠죠. 한번 상상해
보세요."
"당신의 가방을 2층으로 옮겨야겠군요." 가일즈가 말했다.
"동쪽 방이지?"
"예." 몰리가 대답했다.
가일즈가 2층으로 올라갈 때 그 젊은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다시 홀로 나왔다.
"내가 머물게 되는 동쪽 방에는, 작은 장미꽃 무늬가 수 놓아진 사라사 무명천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네 기둥의 큰 침대가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뇨. 없읍니다." 하고 대답하며 가일즈는 계단이 꺾이는 곳을 돌아 2층으로
사라졌다.
"부인의 남편께선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군요." 젊은이가 말했다.
"어디에서 근무했읍니까? 해군이었나요?"
"예, 맞아요."
"그럴 줄 알았어요. 해군은 육군이나 공군보다 참을성이 없거든요. 결혼하신 지
얼마나 되셨읍니까? 남편을 무척 사랑하시겠죠?"
몰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2층에 올라가서 지내실 방에 둘러보시죠."하고 물었다.
"물론, 내가 무례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정말알고 싶군요. 사람들에 관해서
알게 된다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직업과
이름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느지를 알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렌 씨가 맞죠?" 몰리는 약간 새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젊은이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난 항상 먼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이런답니다. 맞습니다.
내 이름은 크리스토퍼 렌 입니다. 웃지는 마세요. 우리 부모님은 아주 낭만적인
분들이셨어요. 내가 건축가가 되기를 바라셨죠. 그래서 유명한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1632~1723, 영국의 건축가. 세인트 폴(성 바울) 성당 외에 많은 교회
와 병원, 학교 건물들을 건축했다)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어 주셨죠.
말하자면 부모님의 요망 사항인 셈이죠."
"그래서 당신은 건축가가 되었나요?" 몰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예, 되었죠." 렌 씨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직 완전한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이제 곧 유명한 건축가가 될 겁니다.
누구나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바라는 것 중에서 단 한 가지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사실 내 이름이 오히려
방해가 될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렌과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못 될테니까요. 하지만, 조립식 간이 주택 같은 것을
만들어서 유명해질 수는 있을 겁니다."
가일즈가 계단을 내려왔다.
"렌 씨, 당신이 지낼 방을 보여 드리겠어요." 몰리가 말했다.
몇 분 뒤에 몰리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가일즈가 물었다.
"그 떡갈나무로 된 아름다운 가구가 마음에 든다고 하던가?"
"렌씨는 네 기둥이 세워진 큰 침대를 무척 원했대요. 그래서 동쪽 방 대신
장미방에 묵도록 했어요."
가일즈가 뭐라고 중얼중얼거리더니,
".....버릇없는 젊은 녀석 같으니라고."하고 말을 끝냈다.
"여보―" 몰리는 약간 냉정한 태도로 가일즈에게 말했다.
"우린 지금 즐거운 파티를 열고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게 아니예요. 이건
어디까지나 사업이에요. 당신이 크리스토퍼 렌을 좋아하건 안 하건―"
"난 그녀석을 좋아하지 않아." 가일즈가 몰리의 가로채며 말했다.
".....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우리에겐 그가 1주일에 7기니를 지불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예요."
"지불하기만 한다면 괜찮겠지."
"지불하겠다고 했어요. 그가 편지에 그렇게 썼으니까."
"당신이 그 사람의 짐가방을 장미방으로 옮겼나?"
"아뇨. 그가 직접 옮겼어요."
"꽤나 친철하군. 당신이 그 가방을 옮겼더라도 힘들지는 않았을 거야. 가방 속엔
신문지로 싼 돌멩이만 들어 있는 게 분명해. 가방이 어찌나 가벼운지 속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어."
"쉬―잇. 그가 와요." 몰리가 주의를 하라는 듯 말했다.
몰리는 널따란 의자와, 통나무를 지피는 벽난로로 장식된 훌륭한 서제로
크리스토퍼를 안내했다. 그리고 30분 뒤에 저녁식사가 준비된다는 것과, 다른
손님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크리스토퍼는 자기도
주방에 가서 저녁식사 준비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내가 오믈렛을 만들어 들릴 수도 있어요."
렌 씨가 애교스럽게 말했다.
결국 그는 주방에서 몰리를 도와 식사 준비를 했고, 나중엔 설겆이하는 일까지
거들었다. 몰리는 하숙집을 시작한 첫날치고는 어쩐지 평범한 시작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가일즈도 뭔가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날 밤 몰리는,
'하지만괜찮아지겠지. 내일 다른 손님들이 도착하면 오늘과는 다른 분위기가 될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잿빛 하늘에서 계속 눈이 내리는 가운데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가일즈는
근심스러운 얼굴이었고, 몰리도 마음이 무거웠다. 날씨 때문에 모든 일이 힘들어질
것 같았다. 자동차 바퀴에 쇠사슬을 감은 택시를 타고 보일 부인이 도착했다.
운전사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사람도 차도 다니기 어렵다는 우울한 말을 전하며,
"저녁 무렵이면 눈이 많이 쌓일 겁니다." 하고 예측했다.
보일 부인이 도착했어도 집안의 우울한 분위기는 밝아지지 않았다. 보일 부인은
몸집이 크고, 울리는 목소리에 거만한 태도를 지닌 까다로운 여자였다. 원래부터
타고난 공격적인 성격은 오랫동안 군대에서 있었던 경험으로 인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처음 시작하는 하숙집인 줄 알았더라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이곳이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시설로 운영되고 있는 하숙집이라고 생각했지 뭡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저희 집에 머물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일즈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요. 나도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러시다면 전화로 택시를 부르시죠. 아직은 길이 막히지 않았으니까요. 뭔가 잘못
생각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다른 하숙집으로 옮기는 게 나을 겁니다."
가일즈는 다시 덧붙여 말했다.
"우리집에 오시겠다는 손님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나가셔도 우리는
쉽게 다른 손님을 모실 수 있읍니다. 또, 앞으로는 하숙비도 올려 받을
예정입니다."
보일 부인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가일즈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하숙집이 어떤 곳인지 지내 보지도 않고 떠날 생각은 없어요. 데이비스 부인,
큰 목욕 수건을 빌려 줄 수 있겠죠? 나는 손수건만한 타월로 몸을 닦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거든요."
보일 부인이 말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가일즈는 몰리에게 싱긋
웃었다.
"여보, 당신 정말 잘했어요. 참 용감하게 해냈어요." 몰리가 말했다.
"저런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야만 꼼짝 못하는 법이거든."
"그런데, 여보, 저 여자가 크리스토퍼 렌과 잘 지낼지 모르겠어요."
"잘 지내지 못할 거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바로 그날 오후, 보일 부인이 몰리에게 말했다.
"크리스토퍼라는 사람은 정말 이상한 젊은이더군요."하고 말하는 보일 부인의
목소리에는분명히 렌 씨를 싫어하는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빵가게 배달원이 북극 탐험 대원 같은 차림으로 빵을 가지고 왔다. 그는 이틀에
한번씩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날씨 때문에 다음번에는 못 올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길이 전부 막혔어요." 그가 말했다. "식량은 충분히 준비해 두셨겠죠?"
"예, 통조림 식량을 많이 저장해 두었어요." 몰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밀가루를 조금 더 준비해 두는 게 좋을것 같아요."
몰리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만들어 먹는 소다 빵을 생각하며, 만일 식량이 부족한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소다빵이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작정했다.
빵 배달원은 신문도 가지도 왔다. 몰리는 홀의 테이블에 신문을 펼쳐 놓고 기사를
훑어보았다. 외교 문제는 잘 해결되고 있었고, 날씨와 라이언 부인 살해사건에 관한
기사가 신문의 제 1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몰리가 신문에 실린 살해된 여자의 흐릿한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크리스토퍼
렌이 몰리의 어깨 너머로 이렇게 말했다.
"더러운 살인사건이에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 지저분한 곳에 사는 행실이 나쁜
여자를 죽였으니 말입니다. 별다른 사연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고 그런 여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 뿐이예요."
보일 부인도 경멸하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 렌 씨는 보일 부인의 말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그러니까 부인은 그 살인사건이 이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시는군요?"하고
말했다.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렌 씨."
"그렇지만 그 여자는 목이 졸려 죽었다지 않습니까?"
렌 씨는 하얗고 긴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사람의 목을 조르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군요."
"아니, 렌 씨!"
크리스토퍼는 보일 부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일 부인? 목이 졸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그만해요, 렌 씨!"
보일부인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몰리는 급히 소리내어 신문을 읽었다.
" '경찰이 찾고 있는 남자는 검은 외투에 밝은 색 홈버그 모자(챙이 좁고 가운데가
들어간 중절모자의 일종)를 썼으며, 중간 정도의 키에 모직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
그런 남자라면 우리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죠."
크리스토퍼 렌이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몰리가 말했다. "흔히 볼 수 있죠."
한편, 런던 경시청의 파민터 경감은 자기 사무실에서 부장형사인 케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두 노동자를 지금 만나 봐야겠네."
"예, 알겠읍니다. 경감님."
"어떤 사람들인가?"
"괜찮은 부류의 노동자들입니다. 반응이 다소 느리긴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좋아." 파민터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은 두
남자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사무실에 들어왔다. 파민터 경감은 재빨리
그들을 훑어보았다. 파민터 경감은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데에는 숙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두 분이 라이언 부인 살해사건의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자, 앉으시죠. 담배를
피우시겠읍니까?"
파민터 경감은 그들이 담배를 받아서 불을 붙이는 동안 기다렸다.
"바깥 날씨가 무척 춥죠?"
"예, 그렇습니다, 경감님."
"자,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시죠."
두 남자는 말을 시작하기가 어려운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머뭇거렸다.
"자네가 말씀드리게, 조."
두 사람 중에서 덩치가 큰 사람이 말했다. 그러자 조라는 사람이 말을 시작했다.
"일은 이렇게 된 겁니다. 그 때 우린 담배를 피우려고 했는데 마침 성냥이
없었읍니다."
"그곳이 어디였읍니까?"
"자먼가였읍니다. 그 곳 보도에서 가스관 공사를 하고 있었지요."
파민터 경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확한 시간과 장소는 조금 뒤에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먼가라면 살인사건이 일어난 컬버가와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계속하시죠. 성냥이 없었다고요?" 파민터 경감은 그들을 격려했다.
"예, 제가 가진 성냥은 다 써버렸고, 이 친구 빌이 가진 라이터는 고장이 나서 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성냥 좀 빌려 주시겠읍니까?' 하고
물었죠. 그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점은 없었어요.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요. 그 사람이 마침 우리 곁을 지나 가고 있었기에 -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 제가 우연히 그에게 말을 걸었던 것뿐이었으니까요."
파민터 경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성냥을 빌려 주더군요. 아무 말도 없었어요. 그 때
빌이,'지독하게 춥군요.'하고 말하니까 그 남자가 쉰 목소리로, '예,그렇군요.'하고
대답했읍니다. 저는 그 남자가 감기에 걸려서 목소리가 변했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 남자는 외투와 목도리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읍니다. 제가,'고맙습니다.'하면서
그에게 성냥을 돌려주었더니 그는 다시 재빨리 걸어가더군요.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그가 뭔가를 떨어뜨리고 갔기에 그를 불러 세우려고 했을
때는 이미 저만큼 멀어져간 다음이었어요. 그가 떨어뜨린 것은 작은 수첩이었는데,
아마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낼 때 딸려 나온 것 같았어요. 저는, '이봐요, 뭘
떨어뜨렸어요!'하고 그를 소리쳐 불렀죠. 그렇지만 그 남자는 제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계속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모퉁이를 돌아가 버리더군요. 그렇지,
빌?"
"맞아." 빌이라는 옆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마침 허둥지둥 도망치는 토끼 같았지!"
"그는 해로가 쪽으로 돌아갔는데,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그를 불러 세울 수가
없었어요. 그가 길모퉁이를 들어갔기 때문에 쫓아갈 수도 없었죠. 그리고, 그
남자가 떨어뜨린 것은 지갑이나 뭐 값비싼 물건이 아니라 작은 수첩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마 별로 중요한 것두 아닌 것 같았어요. 저는 빌에게 이렇게
말했죠. '웃기는 사람이군. 모자를 눈 위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외투 단추는 목까지
잠갔어. 마치 영화에 나오는 악한 같은 모습이군.'안그런가, 빌?"
"그렇지. 자네가 그렇게 말했지."
"그 때 내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렇게만 말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하지. 그 남자가 돌아보지 않은 것도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읍니다. 그 땐 날씨가 지독하게도 추웠으니까요."
"굉장히 추웠지." 빌이 또 맞장구를 쳤다.
"저는 빌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죠. '이 수첩을 살펴보세.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니까.'하고 제가 말했죠. 컬버가 74번지와 무슨 하숙집 주소였읍니다."
"고급 하숙집 주소였어." 빌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는 이제 어색함이 사라진 듯이 몸짓까지 섞어가며 신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 '컬버가 74번지라면 여기서 가까운 곳이군. 저 모퉁이만 돌면 되니까 일을 끝내고
그곳으로 가보세.' 하고 제가 빌에게 말했죠. 그리고 수첩에 적힌 주소 위에 뭔가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띄기에, '이건 뭐지?' 하니까, 이 친구가 수첩을 받아들고
그걸 소리내어 읽었어요. '세 마리의 눈먼 쥐 - 이건 분명 누군가를 놀리는
밀이야.'하고 빌이 말하느 순간 - 예, 바로 그 순간이었어요. 어떤 여자가
'살인이야!'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 왔어요!"
조는 마지막 말을 좀더 의미 있게 끝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 '이봐, 자네가 얼른 가보게.' 하고 제가 빌에게 말했죠. 그리고 잠시 뒤에 빌이
돌아와서, 어떤 여자가 목에 칼에 찔렸거나 아니면 목이 졸려 죽어서 사람들이
잔뜩 몰려왔고, 경찰도 도착했다는 것과, 아까 그 소리는 그 집 여주인이 경찰을
부르려고 소리를 친 거라고 하더군요. '어디야?' 내가 물었더니 빌이,'칼버가야.'
하고 대답했죠. '몇 번지인데?' 하고 다시 물으니까 빌은 자세 살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말했읍니다."
빌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헛기침을 하며 발을 이리저리 움직였댜.
조가 이야기는 계속했다.
"그래서 제가, '어디 우리 둘이 가서 자세히 알아보세.'하고 말하며 그곳으로
가보았죠. 살인사건이 일어난 집이 74번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린 이런 말을
주고받았읍니다. 빌은, '그 사건과 수첩에 적힌 주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몰라.'하고 말했고, 저는 어쩌면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읍니다.
어쨌든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경찰이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그 집에서
나온 남자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그 사건을
담당하고 계신 분을 만나고 싶다고 한겁니다. 우리가 말씀드린 것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잘 와주셨읍니다." 파민터 경감이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 수첩은 가지고 오셨읍니까? 아, 고맙습니다."
그 다음에 파민터 경감은 좀 더 적극적이고 직업적인 질문을 했다. 그들로부터
정확한 장소와 날짜, 시간는 알아 낼 수 있었지만, 범인으로 생각되는 그남자의
정확한 인상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신경질적인 하숙집 여주인이 말한 범인의
인상 - 눈 위까지 모자를 눌러쓰고, 외투 단추를 전부 채우고, 얼굴 아랫 부분을
목도리로 감쌌으며, 쉰 듯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 라는
것이 전부였다.
두 남자가 나가자 파민터 경감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서 책상 위에 펼쳐진 작은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 수첩은 감식반으로 보내져서 지문을 채취하고 철저히
조사하면, 혹시 어떤 단서라도 찾아낼 수 있으리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경감의
주위를 끄는 것은 수첩에 적힌 두 군데 주소와 위쪽에 쓰여진 작은 글씨였다.
그 때 케인 부장형사가 들어왔다.
"케인, 이리 와서 이것 좀 보게."
케인은 경감 뒤에 서서 수첩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 마리의 눈먼 쥐! 놀랍군요!"
"그렇지." 파민터 경감은 서랍을 열고 공책에서 찢은 반쪽짜리 종이를 꺼내어, 책상
위에 놓인 수첩 옆에 올려 놓았다. 그 종이는 살해된 여인의 옷에 핀으로
조심스럽게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 종이에는 '이것이 첫번째'라고 쓰여 있었다.
글씨 아래에는 어린애가 그런 것 같은 세 마리의 쥐그림과 한 소절의 악보가
그려져 있었다.
"세 마리의 눈먼 쥐, 그들이 달려가는 것을 보세요 ─"
"맞아, 그거야. 그게 바로 주제 음악이야."
"미친 짓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경감님?"
"그렇네." 파민터 경감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죽은 여자의 신원은 확인되었나?"
"예, 여기 감식반에서 보내온 보고서가 있읍니다. 살해된 라이언 부인의 본명은
모린 그레그였읍니다. 두 달 전에 형기를 마치고 홀로웨이 형무소에서
나왔읍니다."
파민터 경감이 신중하게 말했다.
"그 여자는 모린 라이언이란 이름으로 칼버가 74번지에 하숙을 정했네. 이따금 술을
마셨고, 한두 번 남자를 데리고 하숙집으로 온 적도 있었다고 하네, 하지만,
무엇인가에 겁을 먹거나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
그녀가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도 전혀 없어. 그녀를 찾아 왔던 그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고 그녀의 방을 물은 다음, 여주인이 3층이라고 대답하자
계단을 올라갔다는군. 하숙집 여주인은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네.
단지 중간 정도의 키에, 목소리로 보아서 심한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고만 했지.
여주인은 다시 아래층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그 뒤에는 수상한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했네. 그 남자가 집을 나가는 소리도 못 들었다네. 그리고 여주인은
10여분 뒤에 차를 타 가지고 라이언의 방에 올라갔는데, 그 때 그 여자가 목이
졸린 채로 살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일세. 이 사건은 흔한 살인사건이 아니야.
케인. 신중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이란 말일세."
파민터 경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우리 나라에 '몽스웰'이란 이름의 여관이 몇 군데나 있는지 알고 있나?"
"아마 한 군데뿐일 겁니다. 경감님."
"그렇다면 천만다행이군. 우린 운이 좋은 걸세. 자세히 조사해 보게. 시간이 없네."
케인은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칼버가 74번지'와 '몽스웰 여관'이란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경감님 생각은─"
"그렇다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파민터 경감이 재빨리 말했다.
"가능한 일입니다. 몽스웰 여관이라── 그게 어디였더라? 이 이름은 제가 어디선가
최근에 본 적이 있읍니다. 경감님."
"어디서 보았나?"
"글쎄요. 기억이 날 듯 말듯 합니다만. 아! 신문에서 봤읍니다. '타임즈'지의 뒷면,
그러니까 호텔과 하숙집을소개하는 광고란이었읍니다. 며칠 전 신문이었는데,
저는 그 신문에 실린 낱말 퀴즈를 풀고 있었읍니다."
이렇게 말하며 케인 형사는 얼른 사무실을 나갔다가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여기 있읍니다. 이걸 보십시오. 경감님."
파민터 경감은 케인 형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 '버크셔 군(런던의 서쪽의 군) 하펠든 시이 몽스웰 여관.'"
경감이 전화를 끌어당겼다.
"버크셔 군 경찰을 불러 주게."
메트카프 소령이 도착하자, 몽스웰 여과은 바야흐로 여관다운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메트카프 소령은 보일 부인처럼 까다롭게 굴지도 않았고, 크리스토퍼
렌처럼 엉뚱하지도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군복무를 인도에서 한 퇴역장교였는데,
군인다운 깔끔함과 엄격함이 엿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지내게 될 방과 가구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 메트카프 소령과
보일 부인은 직접적으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였지만, 메트카프 소령은 푸타라는
곳에서 '요크셔 은행 지점'에 근무한 보일 부인의 사촌 형제들을 알고 있었다.
메트카프 소령이 들고 온 돼지가죽으로 만든 두 개의 가방은 가일즈의 의심을 풀어
주기에 족할 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몰리와 가일즈는 자기들이 맞이한 하숙인들에 관해 알아 볼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그들 부부는 식사를 준비하고 식탁을 차리고 설겆이를 하는 일 등을
해내기에 바빴다. 메트카프 소령은 커피 맛이 좋다는 찬사를 했다. 그 말을 들은
가일즈와 몰리는 잠자리에 들 때에 무척 피곤했지만 아주 흐뭇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잠든 새벽 2시경에 느닷없이 초인종이 계속 울렸다.
"이런, 젠장." 가일즈가 잠이 깨어 투덜거렸다.
"현관문에서 들리는군, 도대체 이런 시각에 누가─"
"얼른 일어나서 가보세요." 몰리가 재촉했다.
가일즈는 몰리에게 귀찮다는 눈짓을 하며 가운을 걸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와 함께 홀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몰리에게 들려 왔다.
그녀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나 계단 위에서 홀을 살짝 내려다 보았다.
아래층 홀에서는 가일즈가 턱수염을 기른 어떤 낯선 남자의 외투 벗는 것을 도와
주고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낯선 남자는 말투로 보아 외국 사람인 것 같았다.
"손가락이 얼어서 감각이 없어요. 그리고 발도─"라고 말하며 그는 발을 굴렀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가일즈가 서재 문을 열며 말했다.
"이 안은 따뜻합니다. 제가 침대에 잠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이곳에서 기다리시죠."
"아!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 낯선 남자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몰리는 호기심이 생겨 난간의 작은 기둥 사이로 그를 살펴보았다. 그는 턱수염을
기르고 메피스토펠레스(독일 작가 괴테의 작품「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처럼
음흉한 눈썹의 늙은 남자였다. 관자놀이께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데도 불구하고,
마치 젊은 사람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로 들어갔다.
가일즈는 서재 문을 닫고 급히 위층으로 올라왔다.
몰리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누구예요?"
가일즈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집에 온 또 한 사람의 손님이야. 저 사람이 자동차가 눈더미에 미끄러져서
뒤집히고 말았다는군. 그래서, 뒤집힌 차에서 빠져 나와 눈속을 헤메다가 겨우
우리집까지 왔다지 뭐야. 밖에는 아직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어. 그는 길을 따라
걷다가 우리 집 간판을 발견한 거야.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 것 같다고
말하더군."
"그사람─ 괜찮을까요?"
"여보,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돌아다니지는 못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 남자는 외국인인것 같던데요?"
"맞아. 이름이 파라비치니라고 했어. 그 사람의 지갑을 봤는데 - 아마 내가
의심할까 봐 일부로 보여주는 것 같았어 - 돈이 가득 들어 있었어. 그 사람에게
어느 방을 줄까?"
"녹색 방을 주세요.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이불만 가져다 주면 될
거예요.
"그 사람에게 잠옷을 빌려 주어야겠더군. 짐은 전부 차안에 두고 왔다니까.
자동차 문을 통해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지 뭐야."
몰리는 이불과 베개의 타월을 꺼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잠자리를 준비했다.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어." 가일즈가 말했다. "눈이 많이 쌓여서
바깥 세상과 완전히 두절될 것 같아, 몰리.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하겠지?"
"글쎄요." 몰리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여보, 내가 소다빵을 만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당신은 뭐든지 만들 수 있어."
가일즈가 진심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난 아직 빵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걸요. 그렇더라도 빵 만드는
일쯤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갓 구운 것이건 오래 되어
딱딱한 것이건 빵가게에서 배달해 주었는데, 눈 때문에 길이 막히면 빵
배달원이 못 올 거예요."
"정육점에서도 못 오고, 우편 배달부나 신문 배달부들도 오지 못하겠지.
그리고 아마 전화선도 끊어지고 말거야."
"그렇게 되면 라디오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겠군요."
"어쨌든 전기는 자가 발전을 할 수 있으니까."
"당신, 내일 아침에 엔진을 다시 한 번 가동시켜야겠어요. 중앙난방에도 계속 불을
지피도록 하세요."
"그런데, 다음번 코크스가 배달되지 못할 것 같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머 큰일이네요. 우린 이제 어려운 때를 만난 것 같아요. 당신은 빨리 가서 파라
뭔가 하는 손님을 데려오세요. 난 침대로 돌아가겠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가일즈의 예측은 현실로 나타났다. 모든 출입무고 창문은
1.5m 나 쌓인 눈으로 가려졌는데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고, 고요한 적막감은 어떤 위기를 몰고올 것만 같았다.
보일 부인은 식탁에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그녀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옆에 있는 메트카프 소령의 식탁은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렌씨의 식탁에는 아직도 아침식사가 놓여져 있었다. 메트카프 소령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사람인 것 같았고, 렌 씨는 늦잠꾸러기가 분명했다.
보일부인은 아침 식사 시간을 9시로 정해 놓고 있었다. 보일 부인은 훌륭하게
요리된 오믈렛을 먹고 나서, 하얗고 튼튼한 치아로 토스트를 씹어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뭔가 불만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몽스웰 여관은 그녀가
생각한 곳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이곳에서 나이든 노처녀들과 브리지 게임을
즐기며, 자신의 시회적 경험과 훌륭한 친척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고, 전쟁시에
자기가 얼마나 중대한 비밀업무를 수행했던가를 슬쩍 귀뜸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전쟁이 끝나자, 보일 부인은 무인도에 버림 받은 사람처럼 혼자 남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능률과 조직에 관해 열변을 토하며 바쁘게 지내왔었다.
그녀의 불 같은 열성과 박력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정말 유능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생각할 여유조차 가질 수 가 없었다. 전쟁때의 활동은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일들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못 살게 굴며 으스대고, 때로는
웃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기도 했지만, 맡은 일에는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녀의 여자 부하들은 그녀에게 쩔쩔매면서, 그녀가 약간만 얼굴을
찡그려도 겁을 먹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토록 의욕적이고 활기찬 생활이 끝난
것이다. 그녀는 다시 자신만의 생활로 돌아왔지만 전쟁 전의 생활과 같을 수는
없었다. 군대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징발 되었던 그녀의 집은 많은 수리와 단장을
해야만 했고, 집안 일을 해줄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찾을 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적당히 지낼 곳을 마련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잠시 지낼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호텔이나 하숙집이 좋을 것 같았기에 이곳 몽스웰 여관을 선택했던 것이다.
보일 부인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거짓말을 하다니.'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내게 하숙집을 새로 시작한다는 말을
미리 하지도 않고.'
그녀는 접시를 되도록 멀리 밀어 놓았다. 아침식사는 훌륭한 것이었고, 커피와
집에서 만든 잼도 맛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평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잠자리도 아주 편안했다. 자수로 장식된 이불과 폭신한 베개도 마음에 들었다.
보일 부인은 마음이 편안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흠잡는 것을 좋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일 부인은 당당한 태도로 일어나서 식당 문을 나설 때
문간에서 바로 그 이상한 붉은 머리의 젊은이를 만났다. 이날 아침 그는 진한 녹색
줄무늬이 모직 넥타이를 메고 있었다.
'자연스럽지 못하군.' 보일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우수꽝스러운차림새야.' 보일 부인은 그가 불안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뭔가 비웃는 듯한 그
눈초리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이야. 틀림없어.' 보일 부인은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렌 씨가 허리를 잔뜩 굽히며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를 하자, 보일 부인은
거만하게 고개만 까딱하고는 넓은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거실에는 안락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특히 장미꽃 무늬로 장신된 큰 의자가
보일 부인의 눈에 띄였다. 그녀는 그 의자를 자기 자리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앉지 못하도록 뜨개질감을 그 위자 위에 내려
놓고 난방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예상했던대로 난방기는 미지근하기만
했다. 이제야 불평거리를 찾았냈다는 듯 보일 부인의 눈이 예리하게 번득였다.
이제 난방기를 구실로 뭔가 할 말이 생긴 것이다. 보일 부인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지독한 날씨였다. 그녀는 이 하숙집에 손님들이 더 많이 와서 즐길 만한 곳이 되지
않는다면, 이 집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붕 위에 쌓인 눈이 미끄러져 내리며 부드럽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보일 부인은
갑자기 펄쩍 뛰며, "싫어!"하고 소리쳤다.
"이런 곳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어."
그 때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낄낄거리며 소리죽여 웃고 있었다.
보일 부인은 고개를 홱 돌렸다. 렌 씨가 문간에 서서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시겠죠." 그가 말했다.
"나도 부인이 이곳에 오래 머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메트카프 소령은 가일즈를 도와 뒷문 앞에 쌓인눈을 치우고 있었다. 그가 눈치우는
일을 열심히 해주고 있었으므로 가일즈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좋은 운동이 된다오." 메트카프 소령이 말했다. "운동을 매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메트카프 소령은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가일즈는 그것이 오히려
걱정거리였다. 왜냐하면, 아침식사를 7시 반에 준비해 달라고 말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일즈의 마음을 알아채기라고 한 듯 소령이 이렇게 말했다.
"부인이 내 아침식사를 일찍 준비해 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읍니다. 갓 낳은 달걀도
함께 말입니다."
가일즈는 하숙집을 시작한 이후로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야 했다. 몰리와 함께 달걀을 삶고 차를 끓이고 거실을 정돈했다. 모든
일들이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가일즈는 자신이 만일 손님이였다면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 없이 마음껏 늑장을 부리며 잠자리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손님인 메트카프 소령은 저렇듯 일찍 일어나서,
아침식사까지 끝내고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할 일거리를 찾아 집 안팎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잘 됐지.' 가일즈가 속으로 생각했다.
'치울 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일즈는 곁눈질로 소령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 같지 않아. 중년은 넘은
듯한데, 눈초리에는 어딘가 날카로운 면이 엿보이는군. 만만한 사람은 아니야.
어떤일이라도 허술하게 처리할 것 같지도 않군. 그런데 저 사람은 왜 하필 이
몽스웰 여관으로 왔을까? 아마 군대에서 제대를 한 다음 적당한 직업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파라비치니 씨는 뒤늦게 자기 방에서 내려왔다. 그는 간소한 유럽식 아침식사로
커피와 토스트 한 조각을 먹었다. 몰리가 그에게 아침식사를 가져갔을 때, 그는
발꿈치를들고 야단스럽게 과장된 태도로 인사를 하며,
"매력적인 부인이시군요. 이집의 안 주인이시죠?" 라고 말는 바람에 약간
당황했었다.
몰리는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찬사의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도대체─" 몰리는 접시를 개수대에 마구 쌓아놓으며 말했다. "왜 손님들은 같은
시간에 아침식사를 하지 못할까? 정말 힘들어 죽겠어."
그녀는 접시를 닦아서 천장에 넣고 침대를 정리하기 위해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늘 아침에는 가일즈가 그녀를 도와 줄 수 없었다. 가일즈는 보일러실과 닭장에
이르는 길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몰리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각 방의 침대를 정리했다.
그녀가 목욕탕을 청소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몰리는 일에 방해가 되자 처음에는 신경질이 났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전화가
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며 좋아졌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재로 뛰어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약간의 사투리가 섞인 밝고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몽스웰 여관입니까?"
"예, 몽스웰 여관입니다."
"주인이신 데이비스 씨를 부탁합니다."
"죄송하지만, 그이는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어요." 몰리가 말했다. "저는 이집
안주인인데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버크셔 군 경찰의 호그벤 총경입니다."
몰리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그─그러세요?"
"데이비스 부인, 급한 일이 생겼읍니다. 전화로는 길게 말씀드릴 수가 없읍니다.
그래서 부장형사인 토로터를 그곳 몽스웰 여관으로 파견했읍니다. 얼마 뒤에
도착할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지 못하실 거예요. 우린 눈에 파묻혀 있거든요. 완전히 파묻혀
있어요. 다닐 수 있는 길이 없는 상태예요.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몰리의 말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트로터 형사는 꼭 도착할 겁니다. 문제 없어요. 그리고, 데이비스 부인, 남편께
트로터 형사의 지시를 잘 듣고, 그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라고 말씀 전해
주십시오. 아셨죠? 이상입니다."
"그런데 호그벤 총경님, 무슨 일이─"
찰칵 하며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그벤 총경은 할 말만 간단히 하고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몰리는 전화기를 한두 번 두드려 보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때 서재 문이 열렸다. 몰리는 얼른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 당신이군요."
가일즈의 머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얼굴에는 석탄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불을 지피고 왔는지 더워 보였다.
"무슨 일이지? 난 석탄통을 가득 채워 놓고 장작을 날라다 놓았어. 이제부터 닭장을
청소하고 보일러실을 살펴봐야겠어. 아니, 당신 괜찮아? 무슨 일이 생겼어?
당신,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데?"
"여보, 경찰에서 전화가 왔어요."
"경찰?" 가일즈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경찰에서 형사인지 부장인지를 우리 집으로 파견했대요."
"왜? 무슨 일로? 우리가 뭘 잘못했지?"
"모르겠어요. 아일랜드에서 사온 그 버터 2파운드 때문이 아닐까요?"
가일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라디오 수신 허가증을 받았던가?"
"예, 그건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어요. 비드록 부인이 낡은 트위드 코트를 구할 수
있는 자기의 구매표를 내게 주었는데, 그게 문제가 된 건 아닐까요? 설마 그런게
다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코트가 한벌도 없는 사람이 옷 구매표를
가진게 무슨 잘못이겠어요? 여보, 그 밖에 우리가 뭐라도 잘못한 일이 있었나요?"
"며칠 전에 자동차 접촉 사고가 생길 뻔했어. 하지만 그건 저쪽 차의 운전사가
잘못했기 때문이었어. 분명해."
"그래도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확실해요."
몰리는 울상이 되어 흐느끼듯 말했다.
"문제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거의 다 위법이라는 거야."
가일즈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 거야. 내 생각에는 이 하숙집을
경영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이런 일에는 우리가 들어 본 적도 없고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들이 가로 막혀 있는 법이야."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술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우린 아직 손님에게 술을 팔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도대체 왜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숙집을
경영하지 못하고 되어 있는지 모르겠어요."
"글쎄 말이야. 당신 말이 옳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법으로 급지된 일이 하도
많아서."
"여보, 하숙집을 시작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몰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 며칠 동안 우린 눈에 갇혀 있게 될 거예요. 그러면 손님들은 불평을
늘어놓을 테고, 저장해 둔 식량은 전부 바닥이 날 것이고....."
"여보, 힘을 내요.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좋아질 거야."
가일즈는 몰리의 이마에 건성으로 키스를 하고 나서 약간 심각하게 말했다.
"여보, 생각해 보니까 일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 경찰이 이런 날씨를 무릅쓰고
우리 집에 형사를 보냈다면, 그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분명해."
가일즈는 창문 밖에 쌓인 눈을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틀림없이 위급한 일이 생긴 거야....."
몰리와 가일즈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앉아 있을 때, 서재 문이 열리며 보일
부인이 들어왔다.
"아, 여기 있었군요. 데이비드 씨. 거실이 지금 얼마나 추운지 알고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보일 부인. 코크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ㅡ"
보일 부인은 가일즈의 말을 냉정하게 가로채며 따지듯 말했다.
"나는 일주일에 7기니를 지불하고 있어요 - 7기니를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얼어
죽을 정도로 춥게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가일즈는 얼굴이 싱기되어 짧게 대꾸했다.
"제가 가서 연료를 더 넣겠읍니다."
가일즈가 방을 나가자, 보일 부인은 몰리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여기 손님 중에 정말 이상한 젊은이가 한 사람
있더군요. 그 사람이 태도와 그 넥타이하며, 머리는 빗질조차 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그 분은 아주 똑똑한 젊은 건축가예요." 몰리가 말했다.
"뭐라고요?"
"크리스토퍼 렌 씨는 건축가란 말입니다. 그리고ㅡ"
"아니, 이봐요, 젊은 부인." 보일 부인이 달려들듯이 말했다. "내가 그 유명한
크리스토러 렌 경을 모르는 줄 알아요? 물론 그 분은 건축가였죠. 세인트 성당을
세운 분이죠. 당신 같은 젊은 사람들은 이 나라에 교육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교육도 받지 못한 줄 알고 있더군요."
"저는 그 젊은 렌 씨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젊은이의 이름도 크리스토퍼
렌이에요. 그 사람의 부모님은 그가 건축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름을
그렇게 지어 주셨다는군요. 그래서 그 젊은이는 이제 머지않아 유능한 건축가가 될
거라고 했어요."
"흥!" 보일 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믿어지지가 않는군. 내가 당신이었다면 그 젊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좀더 자세히
알아보았을 거예요. 그에 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있죠?"
"부인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 만큼은 알고 있어요. 말하자면, 부인과 그 젊은이가
우리집에 머물면서 일주일에 7기니씩 하숙비를 지불한다는 사실이죠. 제가 그 이상
뭔가를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 사실밖에
없어요. 손님이 제 마음에 들거나ㅡ"
몰리는 보일 부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건 아무 상관 없어요."하고 말을 마쳤다.
보일 부인은 몰리의 말을 듣자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신처럼 젊고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자기보다 경험이 많고 나이가 든 사람의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거예요. 그리고, 그 수상한 외국인은 또 누구죠?
도대체 언제 이 집에 도착했죠?"
"어젯밤 늦게 왔어요."
"정말 이상한 일이군. 그런 시간에 사람ㅇ르 집안에 들어오게 하다니."
"진실해 보이는 외국인 여행자를 쫓아낸다면, 그건 법에 어긋나는 일일 거예요."
몰리가 상냥하게 덧붙였다.
"아마 그걸 모르셨나 보군요. 그건 아셔아죠."
"그 파라비치닌가 뭔가 하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ㅡ"
"그걸 아셔야죠. 아셔야 하고말고요. 부인께선 지금 악마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
같군요. 그리고...."
보일 부인은 정말 악마가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깜작 놀라며 펄쩍 뛰었다.
서재에는 파라비치니 씨가 보일 부인과 몰리가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로 살며시
들어와서 두 손을 비비며 늙은 악마같이 웃고 서 있었다.
"깜짝 놀랐쟎아요." 보일 부인이 말했다.
"아니, 소리도 없이 들어 왔군요."
"발꿈치를 들고 들어왔으니까요, 부인." 파라비치니 씨가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걸어다니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한답니다. 살금살금 걸어다니면
아주 재미있읍니다. 이따금 듣지 않아야 될 말도 듣는 적이 있지만, 그것 또한
재미있죠. 그리고 나는 한번 들은 말은 절대로 잊지 않는답니다."
보일 부인은 겸연쩍은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아, 난 뜨개질감을 가지러 가야겠군요ㅡ 거실에 두고 왔거든요."
보일 부인은 황급히 방을 나갔다. 몰리는 당황한 채 파라비치니 씨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는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의 매력적인 안주인께서 기분이 안 좋은신 것 같군요." 하고 말하며 그는
몰리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몰리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했다.
"무슨 일입니까, 부인?"
몰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이 사람에게 좋게 대해야 할지 불쾌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하고 생각했다.
파라비치니 씨는 늙은 사티로스(사람의 몸뚱이에 염소의 귀.뿔.다리.꼬리를 가진
괴물로,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함)처럼 몰리를 곁눈질해 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모리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전부 눈 때문이에요."
"그렇습니다." 파라비치니 씨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눈 때문에 일이 어렵게 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쉬워지기도 했읍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그러시겠죠." 파라비치니 씨가 심각하게 말했다. "부인은 아직 모르는게 많을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부인은 하숙집 경영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러자 몰리는 턱을 앞으로 내밀여 단호하게 말했다.
"예,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리 부부는 최선을 다할 작정이에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어쨌든─" 몰리는 딱딱한 태도를 약간 누그러뜨리며, "제 요리 솜씨는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부인의 요리 솜씨는 아주 훌륭합니다."
몰리는, '정말 불쾌한 외국인이군.'하고 생각했다.
파라비치니 씨는 몰리의 생각을 눈치챈 듯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심각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두 마디 조언을 해도 괜찮겠읍니까, 데이비스 부인? 부인과 부인의 남편은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집에 온 손님들에
관해서 잘 알아보셨읍니까?"
"그러게 해야 되나요?" 몰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숙집이란 누구나 쉽게
드나드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부인은 이 집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 대해 약간은 알아두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파라비치니 씨는 몰리에게 몸을 굽히며 위협을 하듯이 몰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나를 예로 들어 보죠. 나는 한밤중에 이 집에 왔어요. 내 자동차가 눈길에
미끄러져서 뒤집혔다고 말한 것밖에 부인이 나에 관해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전혀 모르고 계신 겁니다. 아마도 부인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죠."
"보일 부인은─" 하고 뭔가 말하려다가 몰리는 보일 부인이 뜨개질감을 손에 들고
다시 서재로 들어오자 말을 멈추었다.
"거실은 너무 춥군요. 여기 앉아 있어야겠어요." 보일 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벽난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파라비치니 씨는 발끝으로 한 바퀴 뱅글 돌고 나서 보일 부인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제가 부인을위해 불꽃을 돋우어 드리겠읍니다."
어제밤에 몰리는 파라비치니 씨가 젊은 사람처럼 활기차게 걷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었다. 그리고, 그는 불빛을 정면으로 받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무릎을 굽히고 벽난로의 불꽃을 돋우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확실하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파라비치니 씨는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 늙은 남자는 젊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구나.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어. 지금 저 얼굴은 오히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니까 말이야. 젊은이 같은
걸음걸이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아마 사람들을 속이려고 꽤나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겠지.' 몰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때 메트카프 소령이 뛰어 들어오는 바람에 몰리의 생각은 다시 불쾌한 현실로
돌아왔다.
"데이비스 부인, 아무래도 화장실의 수도관이─저─" 하고 큰소리로 말하던 소령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래층 화장실의 수도관이 언 것 같습니다."
"어머, 큰일났네!" 몰리는 신음하듯 말했다. "오늘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조금
전에는 경찰이더니 이번에는 수도관이라니."
몰리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파라비치니 씨는 '쨍그랑'소리를 내며 부지깽이를 떨어
뜨렸고, 보일 부인은 뜨개질하던 손을 갑자기 멈추었다.
몰리는 메트카프 소령도 몸이 굳어지며 얼굴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소령의 표정은 전혀 딴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나무로
깎은 목각 인형처럼 모든 감정이 사라진 것 같았다.
˙˙˙˙˙ ˙˙˙˙
"경찰이라고 했읍니까? " 메트카프 소령이 스타카토처럼 한 마디씩 짧게 끊어
말했다.
몰리는 소령의 굳어진 태도 뒤에는 어떤 격한 감저이 불타 오르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나 경계심, 또는 흥분된 감정이 분명했다.
'이 사람은 뭔가 숨기고 있어. 위험한 사람이 틀림없어.' 몰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메트카프 소령이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호기심을 나타내는 듯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경찰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조금 전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몰리가 말했다.
"우리 하숙집에 형사를 파견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날씨에는 형사가 이곳에
오기가 어려울 거예요."
몰리는 창 밖을 쳐다보며 희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왜 형사를 보냈다고 하던가요?" 메트카프 소령은 모리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며
물었다. 몰리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가일즈가 들어왔다.
"이 형편없는 코크스는 반 이상이 돌멩이야." 가일즈는 화가 난 듯 말하다가,
"무슨일이 있었읍니까?"라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메트카프 소령이 가일즈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찰이 온다고 하던데, 무슨 일입니까?"
"아,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일즈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런 날씨에는 아무도 못 올 겁니다. 눈이 1.5m 나 쌓여서 길이 전부 막혔거든요.
아무도 오지 못할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세 번 들려 왔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잠시 동안은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 소리는 마치 유령의 경고처럼 크고 기분 나쁘게 들려 왔다.
갑자기 몰리가 비명을 지르며 프랑스식으로 된, 바닥까지 내려온 창문을 가리켰다.
그곳에 어떤 남자가 창문을 두드리며 서 있었다. 그는 아무도 오지 못할 것 같은
이곳까지 스키를 타고 온 것이다. 가일즈는 소리를 지르며 방을 가로질러 가서,
손잡이를 더듬어 창문을 밀어 젖혔다.
"고맙습니다." 스키를 타고 온 남자가 말했다. 그는 흔히 들을 수 있는 평범하고도
활기찬 목소리에다, 햇볕에 검게 탄 얼굴의 사나이였다.
"나는 부장형사인 트로터입니다."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보일 부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르 가만히 쳐다보더니, "당신처럼 젊은 사람이
부장형사라니 좀 이상하군요?" 라고 믿을 수 없다는 말했다.
정말 무척 젊어 보이는 그 남자는 모욕을 느낀 듯, "나는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젊지는 않습니다, 부인." 하고 약간 화가 난 투로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가일즈에게 말을 했다.
"당신이 데이비스 씨죠? 이 이 스키를 어디엔가 넣어두어야겠는데, 좀 도와
주시겠읍니까?"
"예, 그러죠. 절 따라오시죠."
그 남자가 홀 안쪽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보일 부인이 언짢다는 투로
말했다.
"경찰관들이 스키를 타고 돌아다니며 겨울 스포츠나 즐기게 하려고 우리가
세금을 내고 있군요."
파라비치니 씨는 몰리에게 다가와서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고 재빠르게 말했다.
"왜 경찰을 불렀읍니까, 부인?"
몰리는 원망이 담긴 것 같은 파라비치니 씨의 눈초리를 보자,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예기치 못했던 파라비치니 씨의 새로운 일면이었다.
몰리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느 그의 눈초리에서 잠시 두려움을 느꼈다.
"제가 부른 것이 아니에요. 전 경찰을 부르지 않았어요."
몰리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 때 크리스토퍼 렌이 흥분한 모습으로 들어오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홀에 있는 그 남자는 누굽니까? 어디서 왔죠?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서도 기운이 넘쳐 보이던데요."
보일 부인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안 믿을지 모르지만, 그 남자는
경찰이에요. 스키를 타고 온 형사라는 군요!"
이렇게 말하는 보일 부인의 태도에는 마침내 하층계급 사람들의 잘난 체하는 면모가
드러났다.
메트카프 소령이 몰리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데이비스 부인, 미안하지만 전화를
써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소령님"
메트카프 소령이 전화기 곁으로 다가설 때, 크리스토퍼 렌이 째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지 잘생겼더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난 항상 경찰관들은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메트카프 소령은 조바심을 내며 전화기를 두드렸다.
그러다가 몰리를 바라보며, "데이비스 부인, 전화가 통하지 않는군요. 완전히
먹통이에요." 라고 말했다.
"조금 전까지도 통화가 되었었는데요. 왜―"
몰리의 말을 가로채며 크리스토퍼 렌이 큰소리로 웃었다. 쉿소리를 내며 거의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웃음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제 우린 바깥 세상하고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군요. 완전히
단절되었어요. 우습지 않습니까?"
"웃을 일이 아닙니다." 메트카프 소령이 굳어진 목소리로 나무라듯 말했다.
"맞아요. 웃을 일이 아니에요." 보일 부인이 말했다.
크리스토퍼 렌은 그래도계속 웃었다. 그리고, "이건 나만 알고 있는 농담 입니다."
라고 말하더니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쉿, 형사가 들어오는군요."
가일즈가 트로터 부장형사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트로터 형사는 스키를 벗고
눈을 털어낸 모습으로 큰 노트와 연필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냉정하고
침착한 재판관 같았다.
"여보―" 가일즈가 말했다. "트로터 형사님이 우리게 할 말이 있다고 하시는군."
몰리는 그들을 따라 방을 나갔다.
"독서실로 가시죠." 가일즈가 트로터 형사에게 말했다. 그들 세 사람은 홀 뒤쪽에
있는 바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작기는 했지만, 독서실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품위 있게 꾸며진 방이었다. 트로터 형사는 방으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몰리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잘못이냐구요?" 라고 말하며 트로터 형사는 물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 일이 아닙니다, 부인. 오해를 하셨다면 내가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데이비스 부인, 그런 문제와는 전혀 다른 일 때문에 온 겁니다. 경찰의 보호나
필요한 문제가 생겼읍니다. 내 말이 이해하시겠읍니까?"
몰리와 가일즈는 트로터 형사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묻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트로터 형사가 유창하게 말을 계속했다.
"이 문제는 라이언 부인, 즉 모린 라이언 부인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그 부인은 이틀 전에 런던에서 살해당했읍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셨읍니까?"
"예." 몰리가 대답했다.
"우선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두 분이 그 라이언 부인을 알고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전혀 모르는 여자입니다." 가일즈가 이렇게 대답하자, 몰리도 작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군요. 우리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읍니다. 그런데, 사실 라이언이란 이름은
살해된 여자의 진짜 이름이 아니었읍니다. 그 여자는 죄를 짓고 형무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 그 여자의 지문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여자의 진짜 신원을 쉽게 알 수 있었죠. 그 여자의 진짜 이름은 그레그, 모린
그레그였읍니다. 전남편인 존 그레그는 이곳에서 멀지 않는 롱리지 농장에서 살던
농부였읍니다. 두 분도 롱리지 농장 사건에 관해서 들어 본 적이 있겠죠?"
방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지붕에쌓였던 눈이 미끄러지며
땅에 떨어져 부드럽게 부서지는 소리뿐이었다. 침묵을 깨는 그 소리는 은밀하고도
불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트로터 형사는 말을 계속했다.
"1940년에 세 명의 전쟁 고아가 롱리지 농장의 그레그 부부에게 입양되었읍니다.
v 그런데, 얼마 뒤 그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가 그레그 부부의 범죄에 가까운
냉혹한
학대와 무관심 때문에 죽고 말았읍니다. 그 사건이 보도되자 세상은 떠들석했고
그레그 부부는 감옥에 보내졌읍니다. 그러나, 그레그는 붙잡혀서 감옥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을 쳤읍니다. 그는 자동차를 한 대 훔쳐 타고 달리다가 경찰이 추격해
오자, 정신없이 차를 몰았죠. 그러다가 결국 사고를 당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읍니다. 한편, 그레그 부인은 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두 달 전에
석방되었읍니다."
"그리고 살해당했군요." 가일즈가 말했다. "누가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트로터 형사는 가일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하고
천천히 물었다. 가일즈는 고개를 저었다.
"1940년에 저는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지중해에서 복무하고 있었읍니다."
그러자 트로터 형사는 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저는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 몰리는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하지만 왜 우리에게 오셨죠? 그사건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죠?"
"당신들이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스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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