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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한 밤에...읽을거리..(에드가 엘런포우의 '살아있는 시체')

topgun-762006.01.06 01:48조회 수 665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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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어찌 한두 가지뿐이겠는가? 지상에 비참한 일이 어찌 한두 가지로 그치겠는가? 불행과 비참은 무지개와 마찬가지로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뻗친 채 다양한 색채를 드러내며, 무지개처럼 아득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불행과 비참이 무지개처럼 드넓은 지역을 뒤덮고 있다니!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내가 어떻게 추한 것을 연상해 냈단 말인가? 평화의 계약에서 어떻게 슬픔의 씨앗을 발견했던가? 그것은 악이 선에서 파생되는 윤리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슬픔이 기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행복했던 과거의 추억은 오늘의 고뇌가 되거나, 아니면, '현재'의 고뇌는 '과거에 누렸을지도 모르는' 환희 속에 그 뿌리가 있을 것이다.
나의 세례명은 에게우스인데, 가족들의 세례명은 여기서 밝히지 않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대대로 물려온 회색빛의 침침한 방들이다.
사람들은 우리 가문을 몽상가들의 집안이라고 불렀는데 그럴만한 특징이 적지 않았다. 대저택의 모습, 거실의 프레스코 벽화들, 무기창고 버팀벽의 조각들도 특이했지만, 오래된 유화들을 전시한 화랑은 더욱 유별났고, 서재를 채운 책들은 너무나도 기이했다. 그래서 몽상가들의 집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거슬러 올라갈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서재이고 그다음이 책들이다. 그러나 책들에 대하서는 설명하고 싶지 않다.
그서재에서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또 내가 거기서 태어났다.
그런데 내가 전생의 삶을 살지 않았다고, 다시 말하자면, 영혼이 전생에 존재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가 없다.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논쟁을 피하기로 하자.
나 자신은 확신을 하지만, 남을 확신시키려고 애쓸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정신적이면서도 유심히 쳐다보는 눈들 그리고 음악적이면서도 슬픈 각종 소리가 나의 추억속에 투명한 형태로 남아 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고 자주
변하고 불확실하며 불안정한 추억을 지워 버릴 수가 없다. 또한 그림자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성의 빛이 나를 떠나지 않는 한, 이 추억도 버릴 길이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서재에서 나는 태어났다. 비존재처럼 보이기는 해조 사실은 비존재가 아닌 상태의 긴긴 밤에서 깨어나, 요정의 나라로, 상상의 궁전으로, 엄격한 사상과 교육의 난폭한 영역으로 갑자기 던져진 것이다. 그래서 당연한 일이지만,주위를 둘러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랐고, 놀라면서도 열심히 쳐다보았으며, 소년시절을 책에 파묻혀서 보냈고, 젊은 시절을 몽상으로 낭비해 버렸다.
그렇지만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가서 내가 어른이 된 뒤에도 선조들의 대저택에 여전히 살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결코 아니다. 한창 젊은 시절이 정체되어 버린 것은 기이한 일이고 , 더욱이 매우 평범한 생각으로 가득 찬 나의 성격이 완전히 내향성이 된 것은 더욱 기이한 일이다.
현실이 나에게 오로지 몽상으로만 작용했을 뿐인 반면, 꿈의 세계에서 종잡을수 없이 피어 오르는 모든 생각은 일상적으로 이어지는 나의 존재의 밑거름이 아니라, 바로 완전하고 유일한 나의 존재 자체가 된 것이다.

사촌간인 베레니스와 나는 우리 부모가 살던 대저택에서 같이 자라났다.
그러나 성장 과정이 서로 달랐다. 나는 몸이 약하고 늘 침울한 성격이었지만,베레니스는 몸이 날래고 쾌활하고 활기에 넘쳤다. 내가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반면, 베레니스는 들판을 쏘다녔다. 그리고 내가 홀로 고독한 상상에 파묻혀 살면서 몸과 마음이 온통 고통스러운 명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반면, 베레니스는 앞길에 그림자가 있든, 세원이 쏜살같이 흘러가 버리든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제멋대로 삶의 길을 달려갔다.
아아, 베레니스! 네 이름을 소리쳐 불러본다. 아아, 베레니스! 베레니스를 부르는 소리에 무수한 회상의 물거품이 추억의 황량한 폐허에서 문득 소용돌이친다. 아아! 쾌활함과 기쁨에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베레니스를 볼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모습은 너무나 뚜렷하다.
오오! 찬란하면서도 환상적인 그 아름다움이여! 아른하임의 숲 속의 요정이여! 오오! 분수에서 뛰어노는 물의 요정이여!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공포이고 입밖에 내서는 안 되는 이야기다.
질병이, 치명적인 질병이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베레니스의 몸에 닥치고,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응시하고 있는 동안에도 변화의 악령이 베레니스를 휘어잡아 정신과 습관과 성격을 파고들었으며, 가장 교묘하고 무서운 방식으로 베레니스라는 사람 자체마저 흐려 놓았다니!
아아! 파괴자가 휩쓸고 지나갔는데, 희생자인 베레니스는 어디 있었던가?
나는 베레니스를 몰랐다. 아니면, 베레니스는 내가 알고 있던 그 베레니스가 아니었다.
최초로 닥친 치명적인 질병이 베레니스의 도덕적·육체적 상태를 참혹하게 뒤바꾸어 버리고, 줄줄이 다른 병을 유발시켰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괴롭고 끈질긴 병은 아마도 일종의 간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병은 환자를 보통'황홀 상태' 즉 완전한 자아 상실과 거의 같은 상태에 빠뜨렸다. 그럴 때마다 베레니스는 놀랍게도 즉시 깨어나고는 했다.
한편 내가 앓고 있던 병은 나 자신이 병이라고밖에는 다른 명칭이 없었지만, 바로 이 병이 급속히 악화하다가, 결국 소설의 편집광적 성격과 특이한 형태를 띠고 끊임없이 위력을 떨치더니, 끝내는 나도 모르게 거기 압도당하고 말았다.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편집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병은 형이상학에서 '주의집중' 이라고 하는 정신 상태의 병적인 흥분이다.
일반 독자들은 내 말을 이해 하지 못할 것이다. 신경성 '주의집중'을 독자에게 적절하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여간 이런 상태에 들어가면, 내 경우에는, 이세상의 가장 평범한 대상에 대해서조차 끈질기게 사고력이(기술적인 관점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작용하고 거기 집중되는 것이다.
책의 여백에 있는 하찮은 도안이나 조판 체제에 주의를 집중한 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생각에 골몰했다. 양탄자나 문에 비스듬히 깃드는 희미한 그림자에 여름날 내내 정신이 팔려 있었다. 등잔 심지의 곧추선 불이나 사그라진 불더미를 밤새도록 응시했다. 꽃의 향기에 취해서 하루종일 꿈을 꾸며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일반명사를 단조롭게 반복했는데, 하도 여러 번 반복하는 바람에 그 발음이 전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육체적 동작을 오랫동안 악착스럽게 그리고 완전히 정지해서 움직임이나 육체적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예들은 정신 작용의 상태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변형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고 또 해독이 가장 적은 것인데, 유사한 것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해도,분석이나 설명 따위는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해받고 싶지는 않다. 하찮은 대상들의 자극으로 생긴 집중 즉 과도하고 진지하여 병적인 주의집중을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인 심사숙고의 경향과 혼동해서는 안 되고, 특히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이러한 집중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흔히 가지기 쉬운 선입견과 달리, 이것은 극단적인 상태나 과도한 숙고의 경향은 아니지만, 하여간 본질적으로 상이하고 또 두드러지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몽상가 또는 열광자는 일반적으로 그리 하찮은 것이 '아닌'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면, 연역과 그 연역에서 나오는 추론의 세계에서 헤매다가 대상 자체를 보지 못하게 되고, '대개의 경우 사치스러운 생각으로 충만한' 백일몽을 하루 종일 꾼 결과, 심사숙고의 최초의 원인 즉 '동기'마저 잊어버리고 만다.
내 경우에 주요 관심 대상은 비록 주제 넘은 것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하찮은 것'이고, 병적인 환상을 통해서 굴절되고 비현실적인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연역이라는 것은 전혀 하지 않았고 최초의 대상을 젖혀놓고 중심부에 끈질기게 들어앉는 것도 없었다. 명상은 '단 한번도' 유쾌하지 않았고, 몽상이 끝날 때면 최초의 원인이 사라지기는커녕,초자연적으로 더욱 확대되 관심을 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질병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한마디로, 가장 많이 작용하는 정신력이 내 경우에는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주의집중적'이고, 몽상가의 경우에는 '사변적'이다.
내가 읽은 책들이, 정신질환을 실제로 촉진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질병 자체의 대표적인 특성을 반영했다. 이것은 그 책들이 대체적으로 상상력이 풍부하면서도 하찮은 것이라는 점에서 드러날 것이다.
특히 내가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책은 고상한 이탈리아인 첼리우스 세쿤두스 쿠리오의 <신의 축복된 왕국의 풍성함에 관하여>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걸작인 <신국론> 그리고 테르툴리아누스의 <그리스도의 육체에 관하여>인데, 특히 마지막 책에 적힌 역설적인 라틴어 구절 즉 '신의 아들이 죽었다. 이것은 무기력하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 신의 아들은 묻히고 부활했다.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실하다.'는 구절이 내 마음을 내내 사로잡아서 여러 달에 걸쳐 씨름을 해 보았지만 헛수고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사소한 것들에 의해서 균형을 잃는다는 점에서는 나의 이성이 프톨레미 헤페스티온이 말한 바다의 바위와 닮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바위는 인간이 아무리 강하게 공격해도 견디어 내고, 인간의 공격보다 더 거센 파도와 바람의 공격도 물리치지만, 아스포델이라는 꽃이 닿으면 몸을 떨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베레니스가 불행한 병에 걸려서 '도덕적' 상태에 변화를 일으켰을때, 나로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집중적이고 비정상 적인 명사의 대상을 내가 많이 발견했을 것이라고 누구나 쉽게 믿어 버리겠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병을 앓으면서도 제정신을 차리는 시기에는 베레니스의 병 때문에 고통을 느낀것은 사실이고, 베레니스의 아름답고 평온한 생활이 완전히 파괴된 점을 가슴 깊이 되새기면서, 이토록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 그 불가사의한 원인을 자주 생각하고 원통한 심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추 작용은 나의 질병의 특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조건에서라면 일반인도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질병의 진짜 특성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지만 한층 놀라운 베레니스의 그 '육체적'인 변화 , 다시 말하자면, 베레니스의 자아 동일성이 기이하고도 가장 참혹하게 왜곡된 것에 관해서 몽상을 한 것이었다.
베레니스가 그 누구보다더 아름답고 가장 행복하게 살던 시절에는 내가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음이 거의 확실하다. 나 자신이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감각들은 '결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었고, 걱정은 '언제나' 정신에서 나왔다.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빛을 통하여, 한낮의 숲 그늘 속에서 , 한밤 나의 서재의 침묵 속에서 베레니스가 나의 눈을 휙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살아서 숨쉬는 베레니스가 아니라 꿈속의 베레니스였고, 지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베레니스가 아니라 그런 베레니스의 추상이었으며, 숭배가 아니라 분석의 대상이었고,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산만하면서도 가장 심오한 사변의 주제였다.
그런데 '지금', 바로 나는 베레니스의 존재 안에서 부들부들 몸을 떨었고, 베레니스가 다가오기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면서도 베레니스가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것을 한없이 탄식했다. 그리고 베레니스가 오랫동안 나를 사랑했으며, 당치도 않은 순간에 내가 결혼을 제의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에 떠올렸다.
드디어 우리 결혼식 일자가 가까워졌다. 그해 겨울, 동지를 전후에서 예년과 달리 따뜻하고 고요하고 안개가 끼는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오후, 나는 서재 깊숙한 방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혼자서 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들어보니 베레니스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베레니스의 모습이 심하게 흔들리고 윤곽이 불확실해졌는데, 그것은 내가 흥분해서 상상한 탓이었을까? 뿌연 대기의 영향이나, 실내의 희미한 황혼빛, 아니면, 베레니스 뒤에 드리운 회색 휘장 탓이었을까? 어느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베레니스는 한마디도 던지지 않았고 나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통 알수가 없었다. 온몸에 싸늘한 냉기가 퍼졌다. 견딜 수 없는 고뇌에 휩싸였다. 불타는 호기심이 내 영혼을 휘어잡았다. 의자 깊숙히 몸을 던진 채 베레니스를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나는 숨을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아! 베레니스는 너무나도 쇠약해져서 과거의 모습이 어느 한구석에서나마 발견되지 않았다. 드디어 타는 듯한 시선으로 나는 베레니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마가 높고 매우 창백한데 기이하게도 평온했다. 한때 새까맣던 머리카락이 약간 이마에 드리웠고, 누렇게 변해 동그랗게 말린 머리카락들이 움푹 패인 관자놀이를 덮었으며, 표정에 가득 흐르는 심한 우울증의 기색이 환상적이고도 무질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은 생기와 광채를 잃고 눈동자마저도 없는 듯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텅빈 그 시선에서 눈을 돌려 얇게 시든 입술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벌어졌다. 특수한 의미를 띈 미소와 함께 이미 변한 베레니스의 '이빨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차라리 보지 말았더라면! 이미 본 이상, 그 자리에서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문 닫히는 소리에 놀라서 눈을 들어보니 사촌은 이미 서재를 떠났다. 그러나 이빨들의 희고 유령같은 '환영'은 혼란된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베레니스는 떠났지만 그 영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빨 표면의 점이나 빛깔이나 윤곽이 아니라, 잠시 동안의 베레니스의 미소 때문에 뇌리에 지울 수 없이 남은 것이다.
'예전'에 바라본 때보다도 '지금' 나는 더욱 뚜렷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빨들! 이빨들!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리고 사방 어디에도 있고, 내 앞에서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다. 길고 가느다랗고 너무나도 하얀 이빨들어었다. 그리고 유치가 막 돋아날 때처럼 창백한 입술이 그 이빨들 위에서 떨고 있었다.
그 이후 무서운 기세로 '편집증'이 닥쳤다. 기이하고도 막강한 그 힘에 대항해서 몸부림쳤지만 헛수고였다. 외부 세계의 수많은 대상 가운데서도 나는 이빨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과 모든 관심이 이빨에 대한 한 가지 명상 속에 흡수되었다. 이빨들만이 오로지 나의 정신적 눈에 보였고, 그 유일한 독자성과 함께 나의 정신적 생활의 핵심이 되었다.
이빨들의 모든 색깔을 살펴보고, 모든 각도에서 관찰하고, 모든 특성을 조사했다. 그 특이성에 관심을 두고, 구조를 곰곰 생각하고, 성질의 변화에 대해서 숙고했다. 상상의 세계에서 이빨들에게 감각과 지각의 능력을 부여하면서 나는 몸을 떨었다.
마드므아젤 살레에 대해서 '그 여자의 모든 발걸음은 감각이었다'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는데, 베레니스에 대해서 나는 '그 여자의 모든 이빨은 생각이었다'라고 한층 진지하게 믿었다. '생각'이라니! 아아, 바로 이 바보 같은 믿음이 나를 파멸시켰다! '생각'이라니!
아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생각들을 그토록 미친듯이 탐냈다! 그 생각들을 내가 손아귀에 넣어야만 평온을 회복하고 이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어느덧 해가 이울고 어둠이 깔렸고 한참 머물다가 사라졌다. 아침이 찾아보고 다음날 밤의 안개가 깔렸다. 그런데도 나는 적막한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여전히 명상에 잠긴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빨들의 '환영'은 서재의 빛과 그늘의 변화에 맞추어 가장 생생하고 가장 무시무시하게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듯 나를 꼼짝 못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드디어 공포와 실망에서 치솟는 듯한 비명이 나의 꿈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잠시 후 근심에 서린 음성들이 슬픔 또는 고통의 신음을 토해 내는 각양각색의 낮은 목소리와 어울려서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문을 열었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기실에 서 있던 하녀가 하는 말이 베레니스가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간질병의 발작을 일으켰고, 밤이 끝나가는 그 무렵에는 무덤이 주인을 기다리는데 장례 준비가 다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서재에 앉아 있었다. 홀로 거기 앉아 있었던 것이다. 혼란스럽고 흥분에 찬 끔에서 새삼 깨어난 듯했다. 그 때가 한밤중이라는 것을 알았고, 해가 질 무렵에 베레니스가 묻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서운 시기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 추억은 공포에 가득 차 있었다.
모호하기 때문에 더욱 몸서리쳐지고, 애매하기 때문에 더욱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내 생애에서 그 페이지는 희미하고 무섭고 이해할 수 없는 추억으로 온통 기록된 것이었다.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라진 소리의 유령처럼 날카롭게 찢어지며 부르짖는 여자의 비명소리에 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나는 무엇인가 행동을 했다. 그런데 무슨 행동이었던가? 혼자 큰소리로 그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러자 서재에 메아리지는 대답은 "그게 무슨 행동이었지?"라는 것이었다.
서재에 놓인 테이블에서 등불의 심지가 타고 있었다. 등불 옆에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우리 집안의 주치의에게 속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내가 자주 본 상자이고, 별로 색다른 점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상자가 '거기'에 놓이게 되었고, 바라다보는 내가 왜 몸을 떨었단 말인가? 그런 것은 대수롭지가 않았다.
이윽고 내 시선이 펼쳐져 있는 책으로 옮겨 갔고, 거기 밑줄친 문장에서 멈추었다. 시인 이븐 자이야트의 기이하면서도 단순한 라틴어 구절이었다. '여자친구의 무덤을 찾아 보았더라면 나의 근심이 약간은 가벼워졌을 거라고 동료들이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그 구절을 정독하는 나의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내 혈관의 피가 모조리 얼어붙었던가?
서재의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덤의 주인처럼 창백한 표정의 하인이 발끝으로 걸어서 들어섰다. 공포에 가득 찬 표정인 하인은 탁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서 말을 건냈다.
무슨 말을 했던가? 더듬거리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미친듯 부르짖는 비명 소리가 밤의 고요를 깼고, 집 안의 모든 사람이 모였고, 비명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서 조사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소름이 끼치도록 점점 또렷해지는 음성으로 하인은 파헤쳐진 무덤에 대해서 설명했다.
거기 심하게 손상되 시체가 수의에 싸여 있었는데, 시체는 여전히 숨을 쉬고, 여전히 심장이 뛰고,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하인에 내 옷을 손으로 가리켰다. 옷은 흙투성이에다가 핏덩이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인이 내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거기 사람의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하인이 벽에 걸려 있는 어떤 물건으로 내 시선을 쏠리게 했다. 잠시 그 물건을 쳐다보았다. 삽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테이블을 덮쳐서 거기 놓였던 상자를 움켜쥐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상자를 열 수가 없었다.
떨리는 내손에서 상자가 미끄러져 쿵 하고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 상자에서 철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치과 도구들이 쏟아졌다. 동시에 상아처럼 하얀 32개의 작은 물건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굴러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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