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곤씨가 채 50도 안된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답니다.
죽음이란 불청객은 우리가 초대하지 않아도 불쑥불쑥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서 우리를 놀래키네요.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저 역시 내일 죽어도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새 노대통령에게 험한 말을 내뱉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예전에 ebs에서 강의할때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는(숫자는) 최고도의 추상이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숫자로 표시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다른 인격과 성질과 외모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모든 것을 숫자로 바꿔서 표시해버리려고 합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을뿐만 아니라 남자의 경우 신병 훈련소나 유격 훈련장에 가보면 번호를 부여받습니다.
몇번 올빼미 누구누구 도하준비끝이라고 외쳤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여기 4천만 또는 5천만의 한국인이 있다고 칠때에
또는 여기 50억의 세계 인구가 있다고 칠때에
그들 한사람 한사람의 특징은 모두 다를겁니다.
그러나 여기에 숫자가 개입되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나타내는 이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냥 숫자 1이, 인구수 한명이 되고 맙니다.
너도 1 나도 1. 나나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차별적인 특징은 필요없고 그냥 너나 나나 1로
표시됩니다. 모든 거추장스러운 질적 차이는 제거해버리고 그 사물에 공통적인 추상적 요소로 환원시켜버리는 숫자의 힘. 이게 바로 숫자는 최고도의 추상이라는 말의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말이 될까요.
당신이 사랑하던 가족이 죽었을때하고 생판 모르던 남이 죽었을때
당신의 느낌은 똑같습니까 다릅니까.
당연히 다르지요.
고인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 죄송합니다만 저의 가족중 누군가가 죽었을때와 김형곤씨가 죽었을때 그것이 제게 다가오는 의미는 분명히 다를겁니다.
다르지 않다면 제가 비정상이겠지요.
나와 삶의 경험을 공유한 그 어떤 사람과 그렇지 않은 어떤 사람은
당연히 내게 다가오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숫자로 표시해버리면 그냥 다 똑같이 1입니다. 다 똑같은 한 사람의 죽음입니다. 아무 차별적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모든 것을 숫자로 치환시켜버리려고 애씁니다.
심지어 인간의 목숨의 값어치마져도 말입니다.
저는 그런 모든 것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압니다.
예전에 국내 항공사의 비행기가 전라도 어디에 추락했을때 그 희생자에게 당시 화폐가치로
1억여원의 보험금이 지급되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반면에 기차를 타고가다
똑같이 사고를 당한 희생자에게는 단돈 몇천만원이 지급되었다더군요.
저는 이런 뉴스를 들었을때에 참 이 세상이 부조리하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누구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 죽었다는 이유로 누구는 단지 기차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사람의 목숨값이 다르게 매겨진다니 말입니다.
예전 월남전에 우리나라가 참전했을때에는 한국군의 생명수당이 필리핀 군인이 받는 돈보다도 적었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필리핀이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이 더 높았기 때문에 그렇다나요.
이와 같이, 돈으로(숫자로) 결정할 수 없는 생명의 값어치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계산해야만 할때가 있습니다. 호프만식이니 라이프니츠식이니 이런저런 계산법을 적용하여 죽은 사람의 나이나 직업 그리고 소득에 따라서 남은 인생에 대한 보상금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을 어찌 안단 말입니까.
정주영 회장같은 이는 겨우 국졸인데도 대기업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어떤 이가
돈도 별로 못벌고 하찮아보이는 직업이라 해서 미래에도 반드시 그러리라는 법은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이게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게 느껴진다면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옛날 함무라비 법전에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사람을 죽인자는 무조건 사형이었다고 합니다. 같은 것으로 갚으라는 말이죠.
그런데... 만일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나타나 이제 다른 사람을 네가 죽게 하였으니 너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겠지만 네가 만일 살기를 희망한다면 내게 너의 전 재산을 내놓아라
그러면 너의 목숨을 살려주겠노라고 말한다면 즉, 자기의 전재산과 목숨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자기 전재산을 조물주에게 헌납하더라도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기에 어떤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차라리 그 재산을, 내 가족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데 쓰라하고 나하나 희생하는셈치고 그냥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경우는 오히려 예외일것입니다. 추측컨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다 바치는 대신 삶을 선택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죽게 한 이가 부자라면 그 희생자의
가족은 많은 돈을 받을수 있지만 만일에 가난한 자가 부자를 죽게 했다면 그는 아무 것도
자기 목숨을 건지는 댓가로 내놓을 것이 없을테지요. 그러고 보면 이 방법도 합리적인 방법은 별로 아닌듯 싶습니다. 원래 숫자로 바꿀수 없는 것을 어거지로 숫자로 바꿔보려니 이래저래 사람이 곤혹스러워집니다.
어떤 물건을 구입하고 교환이나 반품할 수 있는 기간이 7일이랍니다. 그리고 물건은 이전에
판매된 최초 상태 그대로 다시 판매가 가능하도록 원상복구되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만일에, 만일에 말씀이지요.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다.
반품 기간에 저런 제한이 없다고 가정하고,
듣자하니 회사에서는 유족들에게 원하는 보상금의 액수를 제시하고 그 근거 또한 제시하라고 했다는데요.
만일 자전거때문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책임져야 할 상대방에게 이렇게 외친다면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요.
내 아들이 샀던 자전거는 내 아들을 죽게했을뿐 아니라 이미 뽀개지고 망가져서 원상복구 시킬 수가 없으니 당신네 회사의 제품중 제일 비싸고 좋은 물건으로 내가 하나 사서 그 망할놈에 자전거 대신으로 당신들에게 되돌려 주리다. 나는 돈이고 보상금이고 필요없으니 당신들도 죽은 내 아들을 내 앞으로 다시 데려오시오!
정말 당신이 사고를 당한 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마음속에서부터 느끼고 있다면 무슨 대답을 해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사람 다시 살려낼수 없으니 양자라도 알선해주겠다고 하시려나요?
아니면 직접 나서서 아들노릇 평생 대신해주겠다고 하실건가요.
유족들에게 원하는 보상금을 묻기 전에 먼저 저런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진지하게 생각해봤어야 했던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죽음이란 불청객은 우리가 초대하지 않아도 불쑥불쑥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서 우리를 놀래키네요.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저 역시 내일 죽어도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새 노대통령에게 험한 말을 내뱉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예전에 ebs에서 강의할때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는(숫자는) 최고도의 추상이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숫자로 표시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다른 인격과 성질과 외모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모든 것을 숫자로 바꿔서 표시해버리려고 합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을뿐만 아니라 남자의 경우 신병 훈련소나 유격 훈련장에 가보면 번호를 부여받습니다.
몇번 올빼미 누구누구 도하준비끝이라고 외쳤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여기 4천만 또는 5천만의 한국인이 있다고 칠때에
또는 여기 50억의 세계 인구가 있다고 칠때에
그들 한사람 한사람의 특징은 모두 다를겁니다.
그러나 여기에 숫자가 개입되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나타내는 이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냥 숫자 1이, 인구수 한명이 되고 맙니다.
너도 1 나도 1. 나나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차별적인 특징은 필요없고 그냥 너나 나나 1로
표시됩니다. 모든 거추장스러운 질적 차이는 제거해버리고 그 사물에 공통적인 추상적 요소로 환원시켜버리는 숫자의 힘. 이게 바로 숫자는 최고도의 추상이라는 말의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게 말이 될까요.
당신이 사랑하던 가족이 죽었을때하고 생판 모르던 남이 죽었을때
당신의 느낌은 똑같습니까 다릅니까.
당연히 다르지요.
고인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 죄송합니다만 저의 가족중 누군가가 죽었을때와 김형곤씨가 죽었을때 그것이 제게 다가오는 의미는 분명히 다를겁니다.
다르지 않다면 제가 비정상이겠지요.
나와 삶의 경험을 공유한 그 어떤 사람과 그렇지 않은 어떤 사람은
당연히 내게 다가오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숫자로 표시해버리면 그냥 다 똑같이 1입니다. 다 똑같은 한 사람의 죽음입니다. 아무 차별적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모든 것을 숫자로 치환시켜버리려고 애씁니다.
심지어 인간의 목숨의 값어치마져도 말입니다.
저는 그런 모든 것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압니다.
예전에 국내 항공사의 비행기가 전라도 어디에 추락했을때 그 희생자에게 당시 화폐가치로
1억여원의 보험금이 지급되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반면에 기차를 타고가다
똑같이 사고를 당한 희생자에게는 단돈 몇천만원이 지급되었다더군요.
저는 이런 뉴스를 들었을때에 참 이 세상이 부조리하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누구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 죽었다는 이유로 누구는 단지 기차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사람의 목숨값이 다르게 매겨진다니 말입니다.
예전 월남전에 우리나라가 참전했을때에는 한국군의 생명수당이 필리핀 군인이 받는 돈보다도 적었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필리핀이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이 더 높았기 때문에 그렇다나요.
이와 같이, 돈으로(숫자로) 결정할 수 없는 생명의 값어치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계산해야만 할때가 있습니다. 호프만식이니 라이프니츠식이니 이런저런 계산법을 적용하여 죽은 사람의 나이나 직업 그리고 소득에 따라서 남은 인생에 대한 보상금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을 어찌 안단 말입니까.
정주영 회장같은 이는 겨우 국졸인데도 대기업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어떤 이가
돈도 별로 못벌고 하찮아보이는 직업이라 해서 미래에도 반드시 그러리라는 법은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이게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게 느껴진다면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옛날 함무라비 법전에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사람을 죽인자는 무조건 사형이었다고 합니다. 같은 것으로 갚으라는 말이죠.
그런데... 만일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나타나 이제 다른 사람을 네가 죽게 하였으니 너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겠지만 네가 만일 살기를 희망한다면 내게 너의 전 재산을 내놓아라
그러면 너의 목숨을 살려주겠노라고 말한다면 즉, 자기의 전재산과 목숨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자기 전재산을 조물주에게 헌납하더라도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기에 어떤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차라리 그 재산을, 내 가족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데 쓰라하고 나하나 희생하는셈치고 그냥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경우는 오히려 예외일것입니다. 추측컨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다 바치는 대신 삶을 선택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죽게 한 이가 부자라면 그 희생자의
가족은 많은 돈을 받을수 있지만 만일에 가난한 자가 부자를 죽게 했다면 그는 아무 것도
자기 목숨을 건지는 댓가로 내놓을 것이 없을테지요. 그러고 보면 이 방법도 합리적인 방법은 별로 아닌듯 싶습니다. 원래 숫자로 바꿀수 없는 것을 어거지로 숫자로 바꿔보려니 이래저래 사람이 곤혹스러워집니다.
어떤 물건을 구입하고 교환이나 반품할 수 있는 기간이 7일이랍니다. 그리고 물건은 이전에
판매된 최초 상태 그대로 다시 판매가 가능하도록 원상복구되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만일에, 만일에 말씀이지요.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다.
반품 기간에 저런 제한이 없다고 가정하고,
듣자하니 회사에서는 유족들에게 원하는 보상금의 액수를 제시하고 그 근거 또한 제시하라고 했다는데요.
만일 자전거때문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책임져야 할 상대방에게 이렇게 외친다면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요.
내 아들이 샀던 자전거는 내 아들을 죽게했을뿐 아니라 이미 뽀개지고 망가져서 원상복구 시킬 수가 없으니 당신네 회사의 제품중 제일 비싸고 좋은 물건으로 내가 하나 사서 그 망할놈에 자전거 대신으로 당신들에게 되돌려 주리다. 나는 돈이고 보상금이고 필요없으니 당신들도 죽은 내 아들을 내 앞으로 다시 데려오시오!
정말 당신이 사고를 당한 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마음속에서부터 느끼고 있다면 무슨 대답을 해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사람 다시 살려낼수 없으니 양자라도 알선해주겠다고 하시려나요?
아니면 직접 나서서 아들노릇 평생 대신해주겠다고 하실건가요.
유족들에게 원하는 보상금을 묻기 전에 먼저 저런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진지하게 생각해봤어야 했던겁니다...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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