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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권에도 관심을 가져주세요.

갓맨2006.04.25 22:16조회 수 665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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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한민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참 많으신거 같습니다.

그런데 한민족인 효순이와 미선이를 죽인 미군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비난하면서도
같은 한민족인 수백 수천의 북한 동포를 죽인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너무 조용하신거 같네요.

당연히 잘못을 했으면 미국이든 북한이든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인권을 개같이 여기는 북한 정권은 미국 보다 휠씬 더 많은 비판을 받아야하지 않을까요.

탈북자들은 중국에서는 성노리개나 돈받고 팔려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북한 잡혀들어가면 개만도 못한 생활을 합니다.

같은 민족으로서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중국에 있는 한 탈북자의 수기입니다. 길지만 관심을 가져주셨음 하네요.
탈북자 수기가 있는 사이트입니다.      여러개의 수기가 있으니 읽어보셨음 합니다.

http://www.nkd.or.kr/board/zboard.php?id=nk_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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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01년 북한을 탈북하여 중국에 살고 있는 탈북여성입니다. 북한에서 내가 겪었던 일들과 중국에서 겪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북한에서 악몽 속에 헤매고 있을 우리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언제나 무사하기만을 기원합니다.

- 어머니와 함께 겪은 남양안전부와 온성단련대 그리고 청진 농포집결소에서의 생활

저는 양강도 보천군에서 한 보위부 운전사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집은 그래도 전사자 가족이라고 나라에서 대우도 받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소나무” 텔레비전도 나라에서 선물로 주어 내가 어릴 적엔 우리 마을에서 우리 집에만 텔레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위부장 승용차를 운전하던 아버지가 보위부장이 직책에서 철직되면서 아버지도 그 직업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친할머니가 사시는 길주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3대 독자로 태어나서 형제가 많은 집이 부럽다고 우리에게 4형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가정은 딸 둘, 아들 둘로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화목한 가정이었습니다. 저녁이면 온 가정이 모여 앉아 오락회도 하며 얼마나 화목하게 살았는지 모른 답니다.

그런데 김일성 사망과 함께 점점 어려워지는 경제난으로 화목했던 우리 가정에도 검은 구름이 밀려 왔습니다. 먹을걸 겨우 이어대는 형편에 바로 아래 여동생이 심장병에 걸려 우리는 어려움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책가방 대신 장사 배낭을 메지 않으면 안 되었고 우리 집 텔레비전은 강냉이하고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부모님들은 동생의 병을 고치려고 집 재산을 다 팔아 약을 썼고 청진 병원에도 입원하였지만 동생은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동생이 죽으며 “엄마 나 죽기 싫어 나 살려줘요” 하던 말이 생각나 글 쓰는 이 순간도 저는 눈물이 가리워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중국에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얼굴이 퉁퉁 부어 앓는 동생에게 맛있는걸 사 줄 수 없었던 것이 마음에 걸려 동생 생일마다 맛있는걸 사놓고 중국식으로 종이도 태우며 동생에게 언니가 맛있는 과자랑 사탕이랑 계란이랑 많이 샀으니 저 세상에 가서라도 많이 먹으라고 생일을 쇠 주었습니다.

동생이 우리 곁을 떠난 다음 우리 집 형편은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저와 저의 어머니는 중국 친척 도움을 혹시 받을 수 없을까 해서 온성군 남양리로 갔습니다. 북한에서는 중국 땅을 바라보며 친척이 나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하여 “왜가리”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저와 저의 어머니는 왜가리로 석 달 동안 기다리다 못해 지칠 대로 지치고 가지고 있던 노자도 다 떨어져 강냉이 이삭을 주우러 낮 12시쯤 두만강변으로 나갔습니다.

강냉이 이삭을 줍다가 나는 먼발치에서 경비대가 부대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제는 안되겠다고 중국으로 넘어가자고 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당원이고 또 교원생활을 하시던 분이고 세포부비서라는 것 때문에 갈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당장 굶어 죽을 형편인데 동생들이 눈이 빠지게 우리를 기다릴텐데 빨리 강을 건너자고 하였습니다.

어머닌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삼촌이 도와 주겠다고 했다고... 한없이 순진한 우리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전 그럼 내가 혼자 갈 테니 엄마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우리 두 모녀는 논쟁 끝에 강을 건널 결심을 하고 강에 들어섰습니다.

중간쯤 들어서니 물이 키를 넘었고 가던 도중에 어머니가 물살에 휘감겨 떠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순간적으로 어머니의 머리를 잡아당겨 어머니를 물살에서 건져냈습니다. 다행히도 제가 수영을 잘했기 망정이지, 또 물에 사람이 빠졌을 때 머리를 잡아 댕겨야 한다는 상식이 있어서 큰일을 면했습니다. 저도 어느 순간에 어머니 머리를 잡아 당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친척집을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찾아갔지만 우리를 보는 그들의 눈길은 곱질 않았습니다. 하도 북한 친척들이 찾아와서 그들은 우리를 도와 줄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이공장에서 일을 했고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가을걷이와 삯일을 해서 우리는 두 달 동안에 친척들도 조금씩 보태주어 돈을 가지고 다시 북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97년 12월 중순일 것입니다.

- 불행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저의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국경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 가다가 국경경비대에 잡혀 남양안전부에 호송되었습니다. 경비대에선 우리가 가지고 오던 물건을 다 빼앗고 안전부에 넘겼지만 안전부는 국경경비대하고 달랐습니다.

남양 안전부에 들어가니 안전원들이 우리를 다른 방에 갈라놓고 심문하였습니다. 당시 어머니하고 나는 이런 내용을 알았으므로 중국 친척집에 3일만 있다가 도움을 받고 넘어왔다고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안전원들은 거짓말이라며 똑바로 대라고 했습니다.

내가 바로 대지 않자 안전원이 어머니가 있는 방에 갔다오더니 저를 구둣발로 들이차고 내차고 하면서 "간나새끼야, 네 에미가 사실대로 다 불었는데 너는 왜 사실대로 안 말하는가"라고 하면서 저의 턱을 구둣발로 올려 차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들은 어머니를 데려오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끓게 하고 구둣발로 어머니의 허벅지를 마구 짓밟으며 “사실대로 말해라, 이 XX아 중국에 가 있은 지 얼마이며 또 가서 뭘 했으며 또 남조선 텔레비는 보지 않았는가,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가" 등을 물었습니다.

친척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살려고 돈을 벌었다고 어머니가 말하는 동안에 밖에 차가 오더니 우리를 온성단련대로 실어 갔습니다. 이날 남양 교두를 통해 중국에서 잡혀온 여성들도 남양단련대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이 되여 한사람 한사람 불러가더니 아니 글쎄 상상도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글세 단련대 보위지도원이라는 사람이 내가 들어가자 옷을 다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멈칫거리는 저에게 보위지도원은 “뭘 꾸물거리는 가고 중국에 가서 몸을 팔 땐 안 그랬겠지... 야 이 개간나야 빨리 벗어...” 그의 옆에는 몽둥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온몸이 오싹해서 저는 벗으라는 대로 다 벗고 하라는 대로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반항이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옷가지의 갈피갈피를 샅샅이 뒤지고 좋은 옷은 자기들이 다 가지고 헌옷만 골라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로 앉았다 일어섰다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돈이 안 나타나니 “야 이 간나들아 중국에 갔다는 것이 돈도 못 가지고 돌아오나. 돈이나 많이 가지고 오면 봐나 주지”라고 지껄여댔습니다.

저의 어머니 차례였습니다. 제가 먼저 들어갔었고 어머니는 몇 명이 들어간 다음에 들어갔으므로 그래도 저는 재빨리 어머니가 입은 오리털 솜옷을 내가 춥다고 하며 받아 입었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중국 돈 백 원을 살릴 수 있었고 오리털 솜옷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신검(신체검사)이 끝나고 잠자러 호실에 들어 왔는데 글쎄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맞은 어혈로 하여 저의 입은 원숭이 입처럼 흉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너무 통증이 나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문소리가 나더니 보위 지도원이 들어와 왜 앉자 있는가하며 규율을 어긴다고 자라고 하면 다 잘 것이지 앉아서 무슨 궁상인가고 하며 전원을 다 기상시키고 밖에 나가 모이라고 하고 저를 대열 앞에 내세우고 욕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퍼붓는 욕설에 저는 기절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앞으로 규율을 안 지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라고 주는 것이 무 시래기에 강냉이 몇 알, 정말 강냉이 알을 셀 정도로 멀건 통강냉이 시래기죽이었습니다. 중국에 개도 입쌀밥이 맛이 없어 안 먹습니다. 그런데 사람인 우리가 그런걸 먹으며 목숨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고달픈 단련대에서 하루하루는 정말 힘든 나날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죄인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알게 되었고 또 우리 북한정권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온성단련대에서 어느 날 우리가 방에서 10대원칙(북한의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을 외우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밖으로 불려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나가서 한참만에 할머니의 통곡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건 안 됩니다. 이걸 뺏으면 나는 죽습니다. 이것만은 주세요 안전원동지.... 절 도와줘요. 이 늙은이 살게 한 장만 돌려줘요...” 할머니의 애타는 울음소리가 들리고 “미친년 노망하네”라는 욕 퍼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린 제 마음에도 그 할머니가 얼마나 불쌍하던지.....

알고 보니 그 할머니가 간신히 검열 속에서도 품속에 중국 돈 오백 원을 감추고 있었는데 그것을 한번 확인해 보다가 온성군에 집이 있는 여성이 잘 보여서 빨리 단련대에서 나가려고 보위지도원에게 이 사실을 알려 돈을 다 빼앗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할머니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귓전에 쟁쟁합니다.

단련대에서 남성들의 신세는 우리 여성들과는 대비도 못하게 가혹한 신세였습니다. 그래도 여성들은 안 때리는데 남자들이 조금 잘못해 그들이 손을 대기 시작하면 피를 보고야 시원해서 때리지 않는 그 비참한 현실을 목격 할 때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여기에다 겪은 진실을 다 쓰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다 쓰지 못하겠습니다.

온성단련대에서 한 스무날 무렵까지 있다가 우리는 청진 농포 직결소로 호송되었습니다. 호송할 땐 우리에게 두 명씩 족쇄를 채우고 갑니다. 글세 우리가 죄인입니까? 가는 길에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입고 있던 옷을 한 벌씩 주고 빵과 떡을 바꾸어 먹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어머니가 입고있던 여름 상의를 주고 빵 15개를 받아먹으며 온성에서 부터 청진으로 오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팔 것이 없는 아이들은 굶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 돈을 빼긴 할머니에게 빵을 두 개를 주며 “할머니 잡수시고 용기 내여 우리 꼭 살아서 집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고맙다고 했습니다. 어떤 애들은 신고 온 가죽 신발을 돈을 받고 안내원이 신고 있던 신발과 바꿔 신으면서 돈을 받아서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요기를 했습니다.

청진에 도착하자 우리는 거리를 족쇄를 찬 모습으로 끌려갔습니다. 사람들은 다 처량한 눈길로 우릴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을 생각하니 아마 그들도 우리가 처량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청진 집결소에 도착하자 우리는 단체로 옷을 홀딱 벗어야 하는 신검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신검 하는 안전원들은 두 줄 박이 하전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회초리를 들고 있었습니다. 신검이 시작되자 여성들이 옷 벗는 것을 주춤해 하자 안전원은 한 여성의 등을 회초리로 정신 없이 내리치며 중국에 가서 몸을 팔 땐 이러치 않았지 하며 있는 힘을 다해 그 여성을 때렸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당시 저는 생리를 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여성 죄인들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안 해 줍니다. 생리 할 때도 우리는 속옷을 벗어 찢어서 방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리를 하는걸 알면서도 거기에다 혹시 돈을 감추었을까봐  피묻은 생리대를 헤쳐 보게까지 하는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번째로 홀몸으로 앉았다 일어섰다 해야 하는 봉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찍소리 한마디 할 수가 없으며 행동을 잘못해도 뭇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청진 농포집결소에서의 생활은 정말 비참했습니다. 콧구멍 만한 집결소 방안에는 한방에 30~40명이 있는데 누울 자리가 없어 모두 앉아서 잠을 자야 했고 이가 득실거려 앉으면 이 잡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집결소에서는  강냉이 영양 가루에 완두콩을 넣은 밥을 주었는데 그 밥이 그때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영옥이라는 애가 염장창고에 들어갔다가 뭇매를 맞았습니다. 반찬이라는 걸 주지 않아 우리는 간을 전혀 먹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날 영옥이라는 애가 염장배추를 훔쳐와 우리도 김치처럼 맛있게 그 염장 배추를 얻어먹었습니다. 그런데 오분도 못 지나서 그걸 안전원이 알게 되어 영옥이가 눈이 시퍼렇게 얻어맞는 비참한 광경이 펼쳐졌고 또 남성 호동에서도 남성 한 명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총탁(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피 흘리며 쓰러지는 광경을 보게 되였습니다. 그 후로부터 누구도 염장배추를 먹을 생각도 안 했습니다.

집결소 두 달 동안의 생활에서 나는 처음으로 소금이 그 무엇보다도 맛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느 날 직결소 한 안전원네 집에 석탄을 운반해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그 집 할머니에게서 소금 한 사발을 얻어 가졌습니다. 그걸 몸 속에다 감추고 들어와 저는 우리 호실 사람들에게 한줌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금을 밥을 먹은 다음에 한 알씩 먹었고 기침 날 때도 한 알씩 먹으며 피눈물을 삼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호실에 파라티푸스 환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결소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날도  전원이 운동장에 모였었는데 황해도에서 안전원들이 자기지역 사람들을 호송하러 와 식당에서 일하던 여성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 날 저는 맨 앞줄에 서있었는데 그래도 안전원의 눈에 띄었던 지 식당 근무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집결소 안에선 제일 좋은 일자리였습니다. 그래도 재수가 좋게 이런 복이 저한테 차려졌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식당에서 남은 밥을 몰래 감춰 가지고 어머니와 호실 사람들에게 조금씩이라도 주었고 염장배추도 가져다 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앓는 사람들을 도와 안전원들의 밥을 짓는 아주머니와 사정하여 정통편(중국 해열제, 진통제)과 엿 그리고 강냉이 볶은 것을 옷과 바꾸어 그들이 병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사는 고장에서도 데리러와 저와 어머니가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호실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자기집 주소를 알려주며 사람이 사느라면 언제든지 도움 받을 일이 꼭 생길 거라고 하면서 서로 집 주소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훗날에 제가 이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저와 어머니는 당일 날로 우리 사는 고장에 도착했습니다. 집이라고 도착하니 엉망이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기업소에서는 내가 직장 승인 없이 갔다고, 그리고 어떻게 나라를 배반하고 국경을 넘는가 하였고
이때로부터 저는 청년동맹에서 비판 대상이고 우리어머닌 당세포에서 비판대상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우리공장 당비서에게 눈에 나지 않았던 터라 당비서와 청년동맹 위원장은 저에게 남포 고속도로에 나가라고 그래도 단련대 생활을 하기보다 낳을 거라고 하면서 나를 거기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련대 생활을 면제하게 되였고 우리 어머닌 연세가 많으심에도 불구하고 단련대에 가  그 추운 겨울에 통나무를 메고 나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남포고속도로 생활은 단련대 생활하고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 진흙으로 만든 토굴집인데 우리 기업소에선 마지막으로 가다나니 문 옆에 자리가 차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쌩쌩 부는 추운 겨울날 우리는 너무 추워 담요 한 장을 먼저 덮고 비닐방막을 덮고 쪼그리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쥐가 오는 것 같았습니다.

첫 날 일을 하려 나가서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마대에다 흙을 메어 날라 도로를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간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건설했나 싶을 정도로 남포 고속도로는 넓었고 저는 여기서 고생해야할 일이 끔찍해 첫 날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곳은 태성리라는 곳인데 우리들이 사는 곳은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여기는 물도 길어 먹어야 하는 한심한 곳이었습니다.

아침에 세수를 하려면 일찍이 일어나야 살얼음 낀 물에라도 머리를 감을 수 있고 빨래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한국여성에게 얼음구멍에서 빨래를 하고 머리를 감으라면 감을 수 있을까요? 북한 정권은 인민들이 겪는 고통을 생각지도 않고 생활조건을 마련해주지 않고 힘들어서 남포고속도로에서 일 안하고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장군님의 뜻을 거역했다고 하면서 남포고속도로 공사에서 도망을 한 사람은 단련대로 보내 인민들을 못살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죄가 되고 장군님의 명령이란 무엇입니까?

세계적으로 아마 사람의 힘으로 도로를 건설하는 건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북한 정권은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당은 청년들을 믿습니다”라는 구호를 내놓고 청년들이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일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건 뼈빠지게 힘들게 일한 진짜 노동자는 아무 대가도 없고 그늘 밑에서 방탕하게 지시나 하고 앉아 있던 사람이 영웅이 되고 표창장을 받는 현실입니다 .

평양-남포 도로 건설장에서 저는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 생각다 못해 그때 집결소에서 내가 도와 주었던 남포시 한두동에 살고 있는 강이 언니를 찾아갔습니다. 언니는 교원이었는데 교원 생활을 못하고 버스 안내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찾아가니 얼마나 반갑게 대해 주던지...

저는 한달 만에 거기서 처음으로 입쌀밥에 두부국을 먹고 따뜻한 부뚜막에서 단잠을 자보게 되었습니다. 생각 밖으로 언니는 저에게 잘해주었습니다. 제가 떠나 올 때는 돈 400원에다 김치를 자그마한 통에 한 통 채워주시고 강냉이도 볶아 주었습니다. 나는 돌아오면서 많은걸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남을 도우며 사는 고운 마음을 키워주셨기에 내가 오늘 이렇게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우리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우리 어머님은 교육자이시고 22살에 조선로동당에 입당을 하셔서 누구보다도 김일성의 사상을 옹호하고 받들어 온 사람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여성은 여성스러워야 하며 웬만하면 남의 어려움을 도와 줄줄도 알아야 한다고 항상 가르치셨습니다.

어머님 말씀대로 집결소에서 앓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 준 것이 오늘 그 사람들의 도움을 내가 받게 된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려운 고비에 그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정일이는 자기는 세계은행에 달러를 몇 십억씩 저금해 놓고도 자기나라 인민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청년들에게 강냉이밥을 먹이며 쇠약하게 만들어 놓고도 당은 청년들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백만 무고한 북한 인민들을 굶겨 죽인 죄인은 김정일이다. 그는 사죄해야 합니다. 아직도 수많은 북한 인민들이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 쓸데없이 중국을 방문하며 소란을 피울 것이 아니라 그는 무고한 인민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나는 1997년에 중국에서 돌아간 다음 이렇게 칠보산 돌격대, 평양 남포 고속도로 건설, 어대진 소금밭, 길주탄광 돌격대를 비롯해서 수많은 건설장을 돌아다니며 저는 생활 고초를 겪을 대로 겪으며 살았습니다. 제가 2001년 중국에 올 최종결심을 내리게 된 것은 평양-남포 건설장에서 죄 아닌 죄로 돌격대 남성 불량배들에게 억을 한 뭇매를 맞은 뒤 부터였습니다.

평양-남포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되자 김정일은 중국에서 수입한 건설용 손수레를 건설장에 선물로 보내 왔습니다. 그걸로 각 대대마다 물 운반을 하였는데 손수레 바퀴가 걸려 가지고 물을 길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나간 지 얼마 안 되여 중대장의 눈에 들어 그의 심부름을 해왔고 그러는 과정에 함북도 여단  대열참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힘든 일에 빠지고 조금 쉽게 일하게 되자 중대에 불평불만 많은 자들은 저를 눈에든 가시처럼 여겼습니다. 남이 잘되는 걸 배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과정에 우리 기업소 사람이 내가 중국에 월경했던 월경자라는 소문과 또 좋지 않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저는 이웃에 살고 있는 새별 대대에 대열참모의 심부름을 갔다가 거기 중대장이라는 사람이 길주중대에 아마 손수레 바퀴가 많았었는데 구해 줄 수가 없는 가고 물었습니다. 평소에 남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주던 저는 그럼 한번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초기부터 건설에 동원되었던 길주 합판공장의 경00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자기한테 건사했던 것이 한 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손수레 바퀴 타이어 내피를 200원 받고 팔아서 저도 돈이 일전도 없는지라 50원은 내가 가지고 150원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일이 내가 봉변을 당하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글세 중대에서 손수레 바퀴를 잊어 버렸는데 그게 내 작간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억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니라고 하는데 중대 정치지도원은 남자호실에 저를 불러 들여 저를 신문했습니다. 그 숱한 남성들 앞에서 중국엔 언제 갔다 왔으며 가서는 뭘 했는가. 저는 중대장이 저에게 관심이 있는지라 처음엔 완강하게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날 중대장이 사적인 일로 중대를 떠난 것을 아는 그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소대장은 자기 소대를 팔아먹는다면서 들어오는 자세로 저를 발길로 차고 손찌검을 해 저의 코에선 피가 쏟아져 나오고 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중대장이 저녁에야 돌아 왔으나 사건이 일어난 뒤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손수레 바퀴를 훔쳐간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과 타이어 내피를 판 사람이 다름 아닌 돌격대 1기생이었다는 것이 판명되고 나에게 손찌검을 했던 자들은 모두 중대장의 명령으로 나에게 미안하다고 빌었습니다.

이것이 문제로 된 것은 다름아니라 그 손수레가 김정일이가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것이 개인 소유물이라고 했다면 이들이 이렇게 까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처구니없이 뭇매를 맞고 나는 며칠동안 자리에 누워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가자. 이 더러운 나라에서 살지 말자... 자유를 찾아서 가자... 내가 이 나라에서 과연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무섭고 다시는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북여단 대열참모에게 참모부 어느 부서 식당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었는데 그때 그는 저를 많이 도와 주려고 했고 또 그가 저를 식당에 들어 가 일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또 말했는지 내가 중국에 갔다 잡혀온 여성임을 알자 그는 저를 도와주는 것을 포기했고 저를 멀리 하였습니다. 밤 낮 없이 내가 힘든 일을 할세라 중대장에게 거짓말해서 문건 작성 할 것이 있다고 하고는 나를 쉬게 해주고 간식이 생기면 자기가 먹지 않고 가져다주던 사람이 마음이 하루아침에 변할 줄이야.....

여기서 나는 결심을 더욱 굳게 다졌습니다. “이 나라에 내가 설자리는 없다. 나는 내가 버티고 설자리를 찾아가야겠다. 매일 어찌 이렇게 남 밑에서 짓밟히며 인간답지 못하게 살겠는가. 나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이렇게 결심하고 남포에서 돌아와 얼마 안 되어 물고기 장사를 해 가지고 돈을 장만해 중국으로 탈북했습니다.

- 중국에서의 나의 생활은 생각 밖이었다

중국에 오면 거저 모든 일이 다 잘 될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습니다. 나는 중국에 오려고 온성군 남양리에 도착했습니다. 정작 중국으로 가려고 하니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한 달 정도 거기에 있으며 동정을 살피다가 중국에 드나드는 성일이라는 사람을 만나 중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먼저 친척집에 찾아가니 왜 또 왔느냐 라는 식입니다. 누구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23살 처녀였습니다. 어찌할까 망설이는데 성일이라는 사람이 할 수 없으니 내가 사람을 소개해 줄 테니 거기가면 다방이 있는데 거기 가서 일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방이라는 곳을 당시는 몰랐습니다. 뭘 하는 곳인가 고 물으니 북한에서 일하는 접대원과 비슷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거짓말을 믿었던 나는 나를 데리러온 한 50대 되는 중년의 사나이를 따라 택시에 몸을 싫었습니다. 가는 길에 저는 “아저씨 내가 가서 일하는 곳이 어딘가”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일 하기는 잘사는 중국사람 만나 애 낳고 잘살면 얼마나 좋은가 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고 하자 그 사람은 자기가 나를 4000원 주고 사왔다고 하며 이제 나를 데리고 산동으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억이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범의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똑바르면 살아난다고 생각하고 기회만을 노렸습니다. 이 사람은 나를 자기 집이라고 데리고 갔는데 그 집에는 사람이 없었고 아마 그 사람이 혼자 사는 듯 했습니다. 저녁을 해서 먹고 그는 자기가 갔다 올 테니 집에 있으라고 하고는 어디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무작정 택시를 잡아타고 “투먼 난시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알아듣고 차를 몰아 갔습니다. 나는 성길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다짜고짜로 사람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사람을 팔아먹는 법이 어데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팔았다니 나도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개에 소개를 받아서 내가 팔리다 보니 성길이는 천 원 밖에 받지 못했고 벌써 돈을 300원이나 써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 사람보고 내가 타고 온 택시요금을 주게 한 다음 나는 우리 친척집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그는 뻐젓이 말하고는 나를 데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중국말로 뭐라고 하더니 도착하는 곳이 자기가 아는 조선족 집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중국말을 몰라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모르면 속힌다는 것이 내가 겪은 현실입니다.

내가 그 집을 나가겠다고 대응해 나서자 그는 나를 죽여 가마니에다 둘둘 말아 압록강에 처넣으면 네가 어디 가서 해보겠는가 라고 위협하며 나를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이 북한에서도 깡패들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중국말을 잘했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게 중국말로 수군거리더니 저를 어디론가 데려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루저녁 기차를 타고 흥룡강성 멍쟈툰이라는 마을에 가서 한족 사람에게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중국말을 모르니 당시에는 살아 남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위로하며 살았습니다. 나를 데리려 온 사람은 28살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나이가 더 먹어 보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안가겠다고 했는데 그들은 이 사람이 부모도 없고 혼자 사는데 앞으로 누가 감시하는 사람도 없으니 도망치기도 쉽고 석 달만 극복하고 살다가 도망쳐오면 자기들이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해주고 북한에 집하고 연결도 다 해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또 거기로 따라 갔습니다.

마음씨 착한 한족총각은 저에게 한없이 잘해 주었습니다. 세수 물도 떠다주고 발도 씻어주고 저를 정말 보배처럼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나는 그의 행동이 민망스럽고 짜증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열흘째 되는 날 도망을 쳤는데 중국말을 몰라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또 농촌이다 보니 택시도 없고 버스가 아침에 한번 오후에 한번 다니는데 운전사가 한마을에 사람이어서 내가 버스에 오르면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없어졌다고 하면 버스를 천천히 몰아 그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데리러 오게 했습니다.

이렇게 몇 번, 몇 십 번 도망을 치다가 저는 중국말을 배우기 전에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중국말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내가 도망 칠 때마다 다른 한족들은 그에게 저를 때리라고 때리지 않으니 계속 도망간다고 하면서 나를 때릴 것을 강요하였고 그들이 나를 모여들어 때리려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와 함께 살던 사람은 저를 못 때리게 했고 저에게 더 잘해 주었으며 글도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년..... 날이 갈수록 중국말을 많이 알게 되었고 이제는 중국말을 능숙하지 못하지만 사람들과 회화를 할 정도로 할 수 있으며 중국어디든 마음대로 다니며 활동할 수 있으며 내 힘으로 돈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당개 삼 년이면 글을 읊는다고 중국에 와서 몇 년 살고 보니 이제는 무엇인가 알게 되었고 북한에선 만져 보지도 못했던 컴퓨터를 저는 타자도 능숙하게 칠 수 있고 또 한국에 이메일도 보내고 한국사람과 대화도 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알고 싶은 것을 검색만 하면 다 알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북한인민 모두는 김정일 정권 아래 노예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먹을걸 먹지 못하고 입을걸 입지 못하면서도 사회주의 내 나라가 좋다고 해야만 하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한해에도 수많은 죄 없는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 있고 앞으로 또 누가 죽음을 당해야 될지 모르는 북한의 현실, 정성산 감독이 요덕스토리를 세상에 내놓았지만 아마 그 진상을 다 내놓자면 아마 아직도 많을 것입니다.

북한 인권과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두고 계신 각계 각층 여러분, 그리고 한국에 먼저 가신 탈북자 선배님들, 아직도 중국과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는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인권과 자유를 찾기 위해 많이 노력해 주십시오. 비록 저는 지금 중국에 있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선배님들과 힘을 합칠 날을 앞당길 것입니다.

2006년 4월 11일 중국에서 아롱이(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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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저도 2000년도에 정치수용소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할머니 한분의 간증을 조그만한교회에서 들었습니다 지하용광로에서 정치사상범과 기독교인을 가두고 있는일 그리고 그용광로물로 사람을 죽이는일 그곳에서 이할머니는 기독교인을 만나 신앙을 가지게
  • 2006.4.25 23:56 댓글추천 0비추천 0
    저도 중국서 유학할 때 조선족들을 간간히 보긴했습니다만,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면 안타깝기 그지 없더군요. 길게 생각해보면 강대국에 둘러쌓인 지정학적 위치,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 만들어낸 또하나의 비극이라 생각도 들구요. 자정능력을 상실해버린 현 북한 정권에 뭘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고, 통일과 북의 주민을 우리가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명제라고 봤을때, 지금은 우리의 역량과 내부적으로 강력을 길러야 할 때라고 봅니다. 요새 독도문제와 연관지어, 힘이 바탕이 되지 않는 외교력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을 시대가 증명해주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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