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그랬고 한국의 영웅 차범근에 대해 잘 모르시는분들이 많으셔서
네이버 지식인에서 퍼옵니다.
장문이지만 한번 읽어볼만한 글인듯 싶습니다.
차범근의 활약
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Park''s Cup).
말레이지아 전 1:4로 뒤지던 상황.
종료 5분 남겨놓고 3골의 소나기 골.
79년 프랑크 푸르트 입단
8월 당시 세계 최고 리그로 불리던 분데스리가 데뷔
데뷔전 상대는 도르트문트.
스타팅으로 75분까지 뜀.
어씨스트 기록.
최고권위 축구전문지 ''KICKER''紙 선정 주간 베스트11.
세번째 경기 슈투트가르트 전.
헤딩으로 승리 결정 골.
KICKER지 선정 이주일의 골.
네번째 경기 바이에른 뮌헨 전.
그라보스키 어씨스트로 선취골.
다섯번째 경기 최강호 보루시아MG 전.
한가운데 돌파에 이어 찬 공, 왼쪽 포스트 맞고 골.
선취골.
세경기 연속 골.
이날 KICKER지, 처음으로 <차붐>이라는 단어 씀.
9월 강호 함부르크 전.
페차이의 어씨스트를 받아 강슛.
그라보스키 센터링, 헤딩 슛.
30M 중거리 슛.
첫 해트트릭 기록.
11월 일본의 오데쿠라가 소속된 쾰른 전.
두 동양인의 대결로 관심 집중.
차 선취골, 결승골로 두골 기록.
오쿠데라 헛발질 7번.
차붐 대승.
프랑크푸르트 3:1로 승리.
일간스포츠 톱기사
<차범근 두골! 오쿠데라 누르다>
이때 부터 MBC 차범근 경기 녹화방송 시작. 매주 월요일 밤. 시청률 최고.
12월 UEFA 컵 출전.
첫번째 경기 레알 마드리드를 맞아 차, 선취골을 넣었으나 1:1 무승부
두번째 경기 AC밀란 전.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강슛.
포스트 맞고 튀어나왔으나, 골대 5초이상 흔들림. 특종 기사실림.
3:2로 프랑크 푸르트 승리.
80년 3월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1차전.
당시 20세의 나이로 ''게르만의 혼''이라 불리던
로타 마테우스(90년 월드컵 MVP), 갈색 폭격기 ''차붐'' 전담마크 특명.
신문 <마테우스! 차붐을 막아라> 톱기사.
경기 마테우스의 완승. 차붐 속수무책.
2:3 패.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2차전.
역시 마테우스 차붐 전담 마크.
이번엔 마테우스 속수 무책. 차붐 대활약.
우측사이드 마테우스 여유롭게 제치고 어씨스트. 1:0 프랑크푸르트 승리.
차붐, 이날의 선수.
원정팀 득점 우선권으로 프랑크푸르트 창단이후 첫 UEFA컵 우승.
경기 후 신문 마테우스 인터뷰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는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이다."
79~80 시즌 득점 랭킹 7위 랭크.
세계 상승세 베스트 4 선정됨.
세계축구 베스트 11 선정됨.
연봉 독일에서 세번째 액수. 협상 타결.
독일 대표팀 감독 차붐 귀화 추진. 실패.
81시즌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겔스도프에게 육탄공격 받아 심한 부상.
프랑크푸르트 팬들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 살해 위협 소동. 경찰 출동.
부상이후 슬럼프. 이때도 역시 한국언론 차범근 씹기 발동.
KICKER지 이일로 <한심한 한국인들> 이라는 기사.
곧 슬럼프 회복.
83년 레버쿠젠으로 트레이드.
프랑크푸르트 팬들 울음바다.
85~86시즌 분데스리가 MVP !
득점 4위.
86년 한국대표팀 선수로 멕시코 월드컵 출전
88년 다시 UEFA컵 출동.
차붐 스페인 에스파뇰을 맞아 극적인 3:3 동점골 터뜨림.
5만 관중 차붐! 환호.
승부차기로 레버쿠젠 역시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UEFA컵 우승.
신문 톱기사
<지구 최고의 선수 ''차붐''>
KICKER지
<차붐, 팀 창단 첫 UEFA 우승 두번이나 이끌다,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의 영웅이자 분데스리가의 최고스타>
독일에서 본 차범근
그당시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전 나중에 들었습니다..물론 울나라 중계는 없었구요.가끔가다 후에 녹화로 해주긴 했었습니다.
제 친척이 그러더군요...여기선 차붐때문에 한국인이란 자체가 존중받는다고 ..올드팬들은 한국인이라면 식당에서 식사비도 안받을 정도로 열기는 정말 대단했었습니다.그당시 나라사정이 정말 안좋아서 해외로 인력수출할때인데 우리교민들 정말 차붐때문에 행복해했었다더군요.
지금 박지성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답니다.그당시는 못살고 힘들고 그러던 시기라 무시받기 일수고 그랬는데 차붐으로 인해서 한국인이라는 것하나로 존중받고 암튼 실로 피부로 와닿는 교민들이 느끼는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고 합니다.
독일시인이 차붐을 낳아준 코레아라는 나라에 대해 감사하다는 시를 쓸정도였고...지금도 그는 전설이자 레젼드입니다.축구를 떠나서
그가 보여준 인품과 행실은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선수였답니다.
정말로 수비들이 차붐을 막을려고 했던 짓들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정도였고 유에파컵 우승하고 그당시 감독하고 포옹시 전 독일이
정말 감격했고 운동장에서 모든관중들이 일어나서 5분여동안
차붐을 외치며 전광판에 차붐이라는 글씨가 써지면서 울렸답니다.
2002년에 차붐이 해설하면서 독일팀플레이가 너무 안좋다고 평가했다가
그당시 감독인 풸러가 언론에 불쾌하다고 그러면서 차범근한테 약간 안좋은투로 말했다가 독일언론에서 난리가 났답니다.감히 차붐한테 그런말을 할수있냐고 빨리 당장 사과하라고 해서 다음날 펠러가 차붐 찾아가서
해후하면서 사과햇던거 아시죠..암튼 정말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차범근에 대해
나는 차붐선수를 존경한다 난 어릴떄부터 차붐을 보고자라났다. 나도 그선수처럼돼고싶다. - 오웬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 - 발락
차붐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큰 영웅이다. - 피구
난아직 어리다 그러나 차범근은 세계최고의 공격수이다. - 마테우스
난 차붐을 낳은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독일에있었다면어 어김없이 독일 대표팀으로 넣고싶다. - 베켄바우어
차붐은 진정으로 축구를 할줄안다. - 펠레
내가 그런공격수랑 붙지 않은게 정말 다행이다. - 파울로 말디니
내자신은 어느정도 성공한 공격수로 평가받지만 차붐정도는 아니다. - 클리스만
차범근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1. 독일에서 활약하는 동안 기록한 98골중에 페널티골은 단 한골도 없었다.
2. 독일에서 활약하는 동안 경고(엘로우)카드를 딱 한 장만 받았다.
3. 겔스도프에게 의도적인 태클을 당해 척추가 부러져 선수 생명의 위기에 몰렸으나 병상에 오래누워있다가 나온후에도 그 선수를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해 전 독일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4. 차붐이 활약했던 당시 독일축구계가 그를 귀화시키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그는 자신의 조국을 버릴 수 없다고 단호히 사양했다.
5. 차붐이 병상에서 일어났으나 후유증으로 슬럼프가 길어지자 한국의 언론에서는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독일언론에선 정말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6. 상대방이 반칙을 하면 당신은 무어라 말할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건 규칙위반이다. 그러면 안된다'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그럼 그 선수에 대해 보복을 할 경우도 있냐는 질문에 '나는 신앙인이며 그런 행동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7. 차범근의 경기가 녹화방송되던 80년대 초의 월요일밤은 술마시는 사람들조차 귀가를 서둘렀다고 한다.
8. 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한국대표로 차붐이 출전하자 상대팀에서는 그를 막으려고 기본이 2명, 많게는 3명이 달라붙었었다.
차범근이 한 일에 대해서는 딴지일보에서 기막히게 묘사를 해놓았기에 이를 인용합니다.
"느낌이 잘 안오신다..?
박찬호가 데뷔 첫해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뛰어 데뷔하자마자 메이저리그를 통털어 투수부문 7위의 성적을 거두고, 그 다음 해 동양인 최초의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얼마 후 동양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MVP를 먹고, 다저스를 월드시리즈 결승에 두번이나 진출시키고 그때마다 마지막 7차전에서 완벽한 투구로 승리투수가 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라.
그리고는 그가 마운드에 등장하면 관중들이 전부 찬호를 연호하며 박수를 치고,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유니폼이 영구전시되고 도대체 박찬호를 모르는 미국시민이란 없는 그런 상황... "
차범근이 한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조선일보에서조차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에 선정한 위인이다.
1998년 독일 축구역사가협회에서는 20세기최고의 아시아선수로 차범근씨를 선정했다.
1999년 축구잡지로는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월트사커지는 차범근씨를 잊을수 없는 100대 스타로 선정했다.
그가 차지했던 분데스리가 MVP 는 지금의 세리에 리그의 MVP나 다를바가 없다.80년에는 세계축구 베스트 11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인 차범근인 것이다.그가 바로 변변한 홈페이지 하나 없이 매장당해버린 대한민국이 낳고 대한민국이 버린 차범근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국내 축구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내고 가장 위대한 선수인 차범근.
차범근 축구교실의 강태풍군은 한 인터넷까페에 차범근씨의 사진과 함께 이런글을 올려놓았다.
"저 뒤에 망치들고 계시는 저분 저분이 바로 우리 감독님 이시다.우리다칠까봐 망치들고 얼음 깨는 저분. 저분이 바로 세계속의 갈색 폭격기 우리 감독님이시다."
그리고 저기 작은 축구교실에서 아이들이 다칠까봐 묵묵히 얼음을 깨고 있는 허리숙인 저 사람이 바로 우리가 묻어버린 .. 그를 버린 한국축구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차범근인 것이다.
2002년에 또 하나에 일화는 차범근이 독일대표팀을 걱정하는 발언을 했는데 그걸 들은 푈러감독이 발끈하며 남에나라 신경쓰지말라는 비스무리한 발언을 하니까 독일언론이 위대한 분대스리가에 영웅말에 감독이 너무 경솔하게 행동하는거 아니냐며 도리어 푈러감독을 질타했다고합니다.
또 다른분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독일에서 선수생활을 할때도 누구처럼 요란스레 태극기로 치장을 하고 다니지 않아도 항상 그는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을 알렸다. 그가 부상으로 긴 재활을 거치는 동안 국민들은 지금 박찬호에게보다 더한 야멸찬 비난과 조소를 던졌지만 그는 스스로 단 한번도 국민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독일로 귀화하면 더 큰 기회와 혜택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는 하지 않았다. 국가대표로의 부름에 만사를 제쳐두고 임했으며 입버릇처럼 이 축구의 기쁨을 우리나라에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감독으로서 경력은 밝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축협에 비판적이었다는 이유로 모든 축구활동에서 파문당했을 때도 끝까지 놓치 않았던 것이 유소년축구였다. 모 방송사는 이 축구단이 비리가 있다고떠들어대기까지 했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2002해설 중에도 그는 국민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바로 이게 너무 부러워서 한국에 축구를 전하고 싶었다고, 이래서 내가 축구에 미쳐 산다고 말했다.
어떤 언론은 예전에 그를 비판하면서 이런 제목을 달았다.
축구대표팀감독이 축구와 가정 신 밖에 모른다고.
축협과의 원활한 교류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외국인감독들이 오면서 이 얘기는 하나의 코미디가 되었다.
4백을 처음 시도한 대표팀감독
지금은 안하면 난리칠거 같다는 파워프로그램을 처음 도입한 감독(그러나 당시 축협이 우린 체력은 무적이라고 거부)
평소의 선후배관계는 중요하지만 경기장에서는 대화를 위해 호칭을 빼라고 한 감독
기자회견시간을 정해놓았던 첫번째 감독
당시에 수없이 비난을 받은 이 모습들을 우린 2001년 히딩크감독이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보며 히딩크식 리더쉽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단 한번도 그 당시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유는 한가지. 자신은 패장이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이름을 높이 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국민들에게 쓴소리를 던진다.
자기를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쓴소리를 한적이 없는 이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쓴소리를 던지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
그는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독일인이었다면 지금쯤 베켄바워를 능가하는
축구지도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곧은 성격이 감독으로도 행정가로도 나설수 없게 만드는
(물론 감독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견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네의 모습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이상이 처범근이 쌓아올린 업적이며, 그의 인생입니다.
님이 제기하셨던 지단이나 호나우도 정도의 활약이 가능한가요라는 질문에는 선수를 평가하는 잣대가 단일한 것이 아니며 또한 위의 선수들이 포지션이 같지 않으며 저 또한 전문가가 아니기에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단이나 호나우도에 비해 그 활약이 전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차범근이 분데스리그에서 활약할 당시 분데스리가는 유럽 최고의 리그중 하나였으며(지금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의 세리에 A,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와 똑같은 위상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차범근 또한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차범근은 팀에서 윙 포워드로 주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니깐 전형적인 타켓맨 형식의 포워드는 아니었지요(여기서 윙포워드 네덜란드이 아르엔 로벤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타켓맨은 반 니스텔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윙포워드로서 게임당 0.3골이라는 괴물과도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전성기 시절에는 게임당 0.5골에 육박하는 기록을 남겼구요... 일반적으로 최전방 포워드가 게임당 0.3골만 기록해도 수준급의 포워드로 인정받는데 차범근은 윙 포워드로서 이런 기록들을 남긴것입니다. 윙 포워드는 그 특성상 중앙에 있는 포워드에게 센터링이나 패스를 통해서 득점 기회를 제공하며, 자기 자신이 직접 득점을 올립기도 한답니다. 따라서 중앙에 있는 포워드보다 득점 기회가 훨씬 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산 308경기에 출전 98골을 터트리며 40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차범근이 함부르크 SV나 바이에른 뭔헨과 같은 강팀에 있었다면 120골 이상 기록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차범근은 자기가 얻은 페널트킥을 차지 않았는데 만약 자기가 얻은 페널트킥(확실하지는 않지만 페널트킥 유도가 20개인 것으로 압니다)을 찾더라면 110골 이상은 거뜬히 넣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차범근 선수는 우리나라 언론에 의해서 과소 평가되었으면 과소 평가되었지 결코 과대 평가된 선수가 아닌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군요 ^^;;
네이버 지식인에서 퍼옵니다.
장문이지만 한번 읽어볼만한 글인듯 싶습니다.
차범근의 활약
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Park''s Cup).
말레이지아 전 1:4로 뒤지던 상황.
종료 5분 남겨놓고 3골의 소나기 골.
79년 프랑크 푸르트 입단
8월 당시 세계 최고 리그로 불리던 분데스리가 데뷔
데뷔전 상대는 도르트문트.
스타팅으로 75분까지 뜀.
어씨스트 기록.
최고권위 축구전문지 ''KICKER''紙 선정 주간 베스트11.
세번째 경기 슈투트가르트 전.
헤딩으로 승리 결정 골.
KICKER지 선정 이주일의 골.
네번째 경기 바이에른 뮌헨 전.
그라보스키 어씨스트로 선취골.
다섯번째 경기 최강호 보루시아MG 전.
한가운데 돌파에 이어 찬 공, 왼쪽 포스트 맞고 골.
선취골.
세경기 연속 골.
이날 KICKER지, 처음으로 <차붐>이라는 단어 씀.
9월 강호 함부르크 전.
페차이의 어씨스트를 받아 강슛.
그라보스키 센터링, 헤딩 슛.
30M 중거리 슛.
첫 해트트릭 기록.
11월 일본의 오데쿠라가 소속된 쾰른 전.
두 동양인의 대결로 관심 집중.
차 선취골, 결승골로 두골 기록.
오쿠데라 헛발질 7번.
차붐 대승.
프랑크푸르트 3:1로 승리.
일간스포츠 톱기사
<차범근 두골! 오쿠데라 누르다>
이때 부터 MBC 차범근 경기 녹화방송 시작. 매주 월요일 밤. 시청률 최고.
12월 UEFA 컵 출전.
첫번째 경기 레알 마드리드를 맞아 차, 선취골을 넣었으나 1:1 무승부
두번째 경기 AC밀란 전.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강슛.
포스트 맞고 튀어나왔으나, 골대 5초이상 흔들림. 특종 기사실림.
3:2로 프랑크 푸르트 승리.
80년 3월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1차전.
당시 20세의 나이로 ''게르만의 혼''이라 불리던
로타 마테우스(90년 월드컵 MVP), 갈색 폭격기 ''차붐'' 전담마크 특명.
신문 <마테우스! 차붐을 막아라> 톱기사.
경기 마테우스의 완승. 차붐 속수무책.
2:3 패.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2차전.
역시 마테우스 차붐 전담 마크.
이번엔 마테우스 속수 무책. 차붐 대활약.
우측사이드 마테우스 여유롭게 제치고 어씨스트. 1:0 프랑크푸르트 승리.
차붐, 이날의 선수.
원정팀 득점 우선권으로 프랑크푸르트 창단이후 첫 UEFA컵 우승.
경기 후 신문 마테우스 인터뷰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는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이다."
79~80 시즌 득점 랭킹 7위 랭크.
세계 상승세 베스트 4 선정됨.
세계축구 베스트 11 선정됨.
연봉 독일에서 세번째 액수. 협상 타결.
독일 대표팀 감독 차붐 귀화 추진. 실패.
81시즌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겔스도프에게 육탄공격 받아 심한 부상.
프랑크푸르트 팬들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 살해 위협 소동. 경찰 출동.
부상이후 슬럼프. 이때도 역시 한국언론 차범근 씹기 발동.
KICKER지 이일로 <한심한 한국인들> 이라는 기사.
곧 슬럼프 회복.
83년 레버쿠젠으로 트레이드.
프랑크푸르트 팬들 울음바다.
85~86시즌 분데스리가 MVP !
득점 4위.
86년 한국대표팀 선수로 멕시코 월드컵 출전
88년 다시 UEFA컵 출동.
차붐 스페인 에스파뇰을 맞아 극적인 3:3 동점골 터뜨림.
5만 관중 차붐! 환호.
승부차기로 레버쿠젠 역시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UEFA컵 우승.
신문 톱기사
<지구 최고의 선수 ''차붐''>
KICKER지
<차붐, 팀 창단 첫 UEFA 우승 두번이나 이끌다,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의 영웅이자 분데스리가의 최고스타>
독일에서 본 차범근
그당시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전 나중에 들었습니다..물론 울나라 중계는 없었구요.가끔가다 후에 녹화로 해주긴 했었습니다.
제 친척이 그러더군요...여기선 차붐때문에 한국인이란 자체가 존중받는다고 ..올드팬들은 한국인이라면 식당에서 식사비도 안받을 정도로 열기는 정말 대단했었습니다.그당시 나라사정이 정말 안좋아서 해외로 인력수출할때인데 우리교민들 정말 차붐때문에 행복해했었다더군요.
지금 박지성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답니다.그당시는 못살고 힘들고 그러던 시기라 무시받기 일수고 그랬는데 차붐으로 인해서 한국인이라는 것하나로 존중받고 암튼 실로 피부로 와닿는 교민들이 느끼는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고 합니다.
독일시인이 차붐을 낳아준 코레아라는 나라에 대해 감사하다는 시를 쓸정도였고...지금도 그는 전설이자 레젼드입니다.축구를 떠나서
그가 보여준 인품과 행실은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선수였답니다.
정말로 수비들이 차붐을 막을려고 했던 짓들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정도였고 유에파컵 우승하고 그당시 감독하고 포옹시 전 독일이
정말 감격했고 운동장에서 모든관중들이 일어나서 5분여동안
차붐을 외치며 전광판에 차붐이라는 글씨가 써지면서 울렸답니다.
2002년에 차붐이 해설하면서 독일팀플레이가 너무 안좋다고 평가했다가
그당시 감독인 풸러가 언론에 불쾌하다고 그러면서 차범근한테 약간 안좋은투로 말했다가 독일언론에서 난리가 났답니다.감히 차붐한테 그런말을 할수있냐고 빨리 당장 사과하라고 해서 다음날 펠러가 차붐 찾아가서
해후하면서 사과햇던거 아시죠..암튼 정말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차범근에 대해
나는 차붐선수를 존경한다 난 어릴떄부터 차붐을 보고자라났다. 나도 그선수처럼돼고싶다. - 오웬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 - 발락
차붐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큰 영웅이다. - 피구
난아직 어리다 그러나 차범근은 세계최고의 공격수이다. - 마테우스
난 차붐을 낳은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독일에있었다면어 어김없이 독일 대표팀으로 넣고싶다. - 베켄바우어
차붐은 진정으로 축구를 할줄안다. - 펠레
내가 그런공격수랑 붙지 않은게 정말 다행이다. - 파울로 말디니
내자신은 어느정도 성공한 공격수로 평가받지만 차붐정도는 아니다. - 클리스만
차범근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1. 독일에서 활약하는 동안 기록한 98골중에 페널티골은 단 한골도 없었다.
2. 독일에서 활약하는 동안 경고(엘로우)카드를 딱 한 장만 받았다.
3. 겔스도프에게 의도적인 태클을 당해 척추가 부러져 선수 생명의 위기에 몰렸으나 병상에 오래누워있다가 나온후에도 그 선수를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해 전 독일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4. 차붐이 활약했던 당시 독일축구계가 그를 귀화시키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그는 자신의 조국을 버릴 수 없다고 단호히 사양했다.
5. 차붐이 병상에서 일어났으나 후유증으로 슬럼프가 길어지자 한국의 언론에서는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독일언론에선 정말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6. 상대방이 반칙을 하면 당신은 무어라 말할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건 규칙위반이다. 그러면 안된다'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그럼 그 선수에 대해 보복을 할 경우도 있냐는 질문에 '나는 신앙인이며 그런 행동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7. 차범근의 경기가 녹화방송되던 80년대 초의 월요일밤은 술마시는 사람들조차 귀가를 서둘렀다고 한다.
8. 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한국대표로 차붐이 출전하자 상대팀에서는 그를 막으려고 기본이 2명, 많게는 3명이 달라붙었었다.
차범근이 한 일에 대해서는 딴지일보에서 기막히게 묘사를 해놓았기에 이를 인용합니다.
"느낌이 잘 안오신다..?
박찬호가 데뷔 첫해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뛰어 데뷔하자마자 메이저리그를 통털어 투수부문 7위의 성적을 거두고, 그 다음 해 동양인 최초의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얼마 후 동양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MVP를 먹고, 다저스를 월드시리즈 결승에 두번이나 진출시키고 그때마다 마지막 7차전에서 완벽한 투구로 승리투수가 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라.
그리고는 그가 마운드에 등장하면 관중들이 전부 찬호를 연호하며 박수를 치고,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유니폼이 영구전시되고 도대체 박찬호를 모르는 미국시민이란 없는 그런 상황... "
차범근이 한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조선일보에서조차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에 선정한 위인이다.
1998년 독일 축구역사가협회에서는 20세기최고의 아시아선수로 차범근씨를 선정했다.
1999년 축구잡지로는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월트사커지는 차범근씨를 잊을수 없는 100대 스타로 선정했다.
그가 차지했던 분데스리가 MVP 는 지금의 세리에 리그의 MVP나 다를바가 없다.80년에는 세계축구 베스트 11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인 차범근인 것이다.그가 바로 변변한 홈페이지 하나 없이 매장당해버린 대한민국이 낳고 대한민국이 버린 차범근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국내 축구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내고 가장 위대한 선수인 차범근.
차범근 축구교실의 강태풍군은 한 인터넷까페에 차범근씨의 사진과 함께 이런글을 올려놓았다.
"저 뒤에 망치들고 계시는 저분 저분이 바로 우리 감독님 이시다.우리다칠까봐 망치들고 얼음 깨는 저분. 저분이 바로 세계속의 갈색 폭격기 우리 감독님이시다."
그리고 저기 작은 축구교실에서 아이들이 다칠까봐 묵묵히 얼음을 깨고 있는 허리숙인 저 사람이 바로 우리가 묻어버린 .. 그를 버린 한국축구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차범근인 것이다.
2002년에 또 하나에 일화는 차범근이 독일대표팀을 걱정하는 발언을 했는데 그걸 들은 푈러감독이 발끈하며 남에나라 신경쓰지말라는 비스무리한 발언을 하니까 독일언론이 위대한 분대스리가에 영웅말에 감독이 너무 경솔하게 행동하는거 아니냐며 도리어 푈러감독을 질타했다고합니다.
또 다른분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독일에서 선수생활을 할때도 누구처럼 요란스레 태극기로 치장을 하고 다니지 않아도 항상 그는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을 알렸다. 그가 부상으로 긴 재활을 거치는 동안 국민들은 지금 박찬호에게보다 더한 야멸찬 비난과 조소를 던졌지만 그는 스스로 단 한번도 국민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독일로 귀화하면 더 큰 기회와 혜택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는 하지 않았다. 국가대표로의 부름에 만사를 제쳐두고 임했으며 입버릇처럼 이 축구의 기쁨을 우리나라에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감독으로서 경력은 밝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축협에 비판적이었다는 이유로 모든 축구활동에서 파문당했을 때도 끝까지 놓치 않았던 것이 유소년축구였다. 모 방송사는 이 축구단이 비리가 있다고떠들어대기까지 했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2002해설 중에도 그는 국민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바로 이게 너무 부러워서 한국에 축구를 전하고 싶었다고, 이래서 내가 축구에 미쳐 산다고 말했다.
어떤 언론은 예전에 그를 비판하면서 이런 제목을 달았다.
축구대표팀감독이 축구와 가정 신 밖에 모른다고.
축협과의 원활한 교류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외국인감독들이 오면서 이 얘기는 하나의 코미디가 되었다.
4백을 처음 시도한 대표팀감독
지금은 안하면 난리칠거 같다는 파워프로그램을 처음 도입한 감독(그러나 당시 축협이 우린 체력은 무적이라고 거부)
평소의 선후배관계는 중요하지만 경기장에서는 대화를 위해 호칭을 빼라고 한 감독
기자회견시간을 정해놓았던 첫번째 감독
당시에 수없이 비난을 받은 이 모습들을 우린 2001년 히딩크감독이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보며 히딩크식 리더쉽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단 한번도 그 당시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유는 한가지. 자신은 패장이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이름을 높이 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국민들에게 쓴소리를 던진다.
자기를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쓴소리를 한적이 없는 이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쓴소리를 던지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
그는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독일인이었다면 지금쯤 베켄바워를 능가하는
축구지도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곧은 성격이 감독으로도 행정가로도 나설수 없게 만드는
(물론 감독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견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네의 모습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이상이 처범근이 쌓아올린 업적이며, 그의 인생입니다.
님이 제기하셨던 지단이나 호나우도 정도의 활약이 가능한가요라는 질문에는 선수를 평가하는 잣대가 단일한 것이 아니며 또한 위의 선수들이 포지션이 같지 않으며 저 또한 전문가가 아니기에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단이나 호나우도에 비해 그 활약이 전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차범근이 분데스리그에서 활약할 당시 분데스리가는 유럽 최고의 리그중 하나였으며(지금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의 세리에 A,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와 똑같은 위상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차범근 또한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차범근은 팀에서 윙 포워드로 주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니깐 전형적인 타켓맨 형식의 포워드는 아니었지요(여기서 윙포워드 네덜란드이 아르엔 로벤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타켓맨은 반 니스텔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윙포워드로서 게임당 0.3골이라는 괴물과도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전성기 시절에는 게임당 0.5골에 육박하는 기록을 남겼구요... 일반적으로 최전방 포워드가 게임당 0.3골만 기록해도 수준급의 포워드로 인정받는데 차범근은 윙 포워드로서 이런 기록들을 남긴것입니다. 윙 포워드는 그 특성상 중앙에 있는 포워드에게 센터링이나 패스를 통해서 득점 기회를 제공하며, 자기 자신이 직접 득점을 올립기도 한답니다. 따라서 중앙에 있는 포워드보다 득점 기회가 훨씬 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산 308경기에 출전 98골을 터트리며 40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차범근이 함부르크 SV나 바이에른 뭔헨과 같은 강팀에 있었다면 120골 이상 기록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차범근은 자기가 얻은 페널트킥을 차지 않았는데 만약 자기가 얻은 페널트킥(확실하지는 않지만 페널트킥 유도가 20개인 것으로 압니다)을 찾더라면 110골 이상은 거뜬히 넣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차범근 선수는 우리나라 언론에 의해서 과소 평가되었으면 과소 평가되었지 결코 과대 평가된 선수가 아닌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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