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마치 나이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합니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오십 보 백 보 입니다. 둘 다 개념이 없으면 그게 뭔 차이입니까?
설사 연장자가 개념이 없어서 나이 값을 못했다 치더라도, 나이가 한참 어린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만큼 서러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말이 안 통하는 상대라 하더라도, 자신보다 연장자에게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항의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는 게 가장 올바른 상책 같습니다.
개념이 없는 연하자 역시, 그냥 연장자 자신의 개념 없던 시절을 생각해보셔서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봅니다. 그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뜨거운 피를 무슨 수로 당하겠습니까?
공자 말씀에, 개념이 있는 사람에게 따지라는 글이 있습니다. 개념도 없는 짐승 따위에게 따진들 뭐하겠습니까?
공자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공자가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걷는데 길 한복판에서 똥을 누는 이를 발견했습니다. 제자들이 달려가서 잘못을 일러주려고 하니까 공자가 말리더랍니다. 또 한참을 가는데 이번에는 길 한 옆에서 눈치를 보며 오줌을 누는 이가 있더랍니다. 그러자 공자가 냉큼 달려가서 호되게 뭐라 하더랍니다.
제자들이 이상해서 여쭈었습니다.
공자 가라사대,
“길 한복판에서 염치도 없이 똥을 누었으니 개념도 없는 짐승이 아니더냐. 그런 짐승에게는 암만 설교를 해봐야 소용없다. 반면에 길 옆에서 눈치 보며 오줌을 누던 이는 개념이 있어서 그런 거다. 배움이나 가르침은 바로 그렇게 개념 있는 것들에게 행하여야 효과가 있다. 개념도 없는 것들에게는 백날 가르쳐봐야 효과가 없고, 약간 깨우친다 하더라도 오히려 개념 있는 것들을 해한다.”
마지막으로 제가 하고픈 이야기는 씨를 말려버릴까 망설이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기회가 오면 씨를 말려버리세요. 같이 씨를 말리는 것을 권합니다. 기회라는 게 자주 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씨를 제대로 말리려면 삼대를 멸하여야 합니다. 뭘 알고나 씨를 말린다고 표현하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모택동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군요.
조카가 사상교육을 하는데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피교육자가 있더랍니다. 암만 민주적인 방식으로 깨우치려 해도 안되었죠. 그때 모택동이 말하더랍니다.
"그건 병자라고 판정해야 한다. 따라서 의사가 환자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치유해야지 정상인처럼 다루어서는 안된다."
개념 없는 것들은 나이를 떠나서 환자 다루듯이 지극정성으로 돌보시는 게 좋습니다. 지극정성이 어려우시면 선을 분명히 긋고 격리시켜야죠. 그 자리를 서둘러 토끼는 것도 격리의 한 방법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 지극정성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반적인 범인들이 흉내라도 내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죠. 초인들에게나 맡기시죠. 그저 잔차나 조용히, 얌전히, 사람 많은 데서는 속도를 줄여가며 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헬멧 착용하고 말이죠. 이것은 개인적 생각이지만 그것도 어려우실 걸요? 속도 말입니다.
설사 연장자가 개념이 없어서 나이 값을 못했다 치더라도, 나이가 한참 어린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만큼 서러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말이 안 통하는 상대라 하더라도, 자신보다 연장자에게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항의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는 게 가장 올바른 상책 같습니다.
개념이 없는 연하자 역시, 그냥 연장자 자신의 개념 없던 시절을 생각해보셔서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봅니다. 그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뜨거운 피를 무슨 수로 당하겠습니까?
공자 말씀에, 개념이 있는 사람에게 따지라는 글이 있습니다. 개념도 없는 짐승 따위에게 따진들 뭐하겠습니까?
공자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공자가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걷는데 길 한복판에서 똥을 누는 이를 발견했습니다. 제자들이 달려가서 잘못을 일러주려고 하니까 공자가 말리더랍니다. 또 한참을 가는데 이번에는 길 한 옆에서 눈치를 보며 오줌을 누는 이가 있더랍니다. 그러자 공자가 냉큼 달려가서 호되게 뭐라 하더랍니다.
제자들이 이상해서 여쭈었습니다.
공자 가라사대,
“길 한복판에서 염치도 없이 똥을 누었으니 개념도 없는 짐승이 아니더냐. 그런 짐승에게는 암만 설교를 해봐야 소용없다. 반면에 길 옆에서 눈치 보며 오줌을 누던 이는 개념이 있어서 그런 거다. 배움이나 가르침은 바로 그렇게 개념 있는 것들에게 행하여야 효과가 있다. 개념도 없는 것들에게는 백날 가르쳐봐야 효과가 없고, 약간 깨우친다 하더라도 오히려 개념 있는 것들을 해한다.”
마지막으로 제가 하고픈 이야기는 씨를 말려버릴까 망설이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기회가 오면 씨를 말려버리세요. 같이 씨를 말리는 것을 권합니다. 기회라는 게 자주 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씨를 제대로 말리려면 삼대를 멸하여야 합니다. 뭘 알고나 씨를 말린다고 표현하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모택동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군요.
조카가 사상교육을 하는데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피교육자가 있더랍니다. 암만 민주적인 방식으로 깨우치려 해도 안되었죠. 그때 모택동이 말하더랍니다.
"그건 병자라고 판정해야 한다. 따라서 의사가 환자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치유해야지 정상인처럼 다루어서는 안된다."
개념 없는 것들은 나이를 떠나서 환자 다루듯이 지극정성으로 돌보시는 게 좋습니다. 지극정성이 어려우시면 선을 분명히 긋고 격리시켜야죠. 그 자리를 서둘러 토끼는 것도 격리의 한 방법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 지극정성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반적인 범인들이 흉내라도 내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죠. 초인들에게나 맡기시죠. 그저 잔차나 조용히, 얌전히, 사람 많은 데서는 속도를 줄여가며 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헬멧 착용하고 말이죠. 이것은 개인적 생각이지만 그것도 어려우실 걸요? 속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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