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에 좋은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물론 초등학교 때도 친구는 있었지만 이사를 멀리 가다보니 헤어지게 되었지요.
서울에서 태어나 전차 몇 번 타보고 초등학교 시절 인천으로 이사를 했고
또 경상남도 진해로 이사. 그러다 보니 깊이 사귄 친구가 없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사귄 그 친구는 언제나 명랑하고 웃음이 참 많았습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웃음이 끊이질 않았지요. 그 친구로 인해서 너무 웃다가
우리 반 전체가 단체기합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표정연기 또한 짐 캐리를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저와는 단짝으로 거의 붙어
다녔습니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웃느라 넋이 빠져서 끼니때도
잊어버리곤 했지요. 어쩌다 동네에서 껄렁한 애들을 만나게 되면 서울에서 온
나를 지켜주려고 어려운 일을 조금 겪었습니다.
아들 삼형제에 딸 하나. 둘째가 그 친구이고 다음이 여동생. 그리고 막내.
일학년 말 겨울방학식이 있던 날 그 친구가 저에게 하는 말이
“우리 미국에서 다시 만나자“하는 것이였습니다. 뚱딴지같은 말에 또 장난을
치는 줄로 알고 웃어넘기려고 했는데 무언가 심각하게 보였습니다. 그 때 제 마음
한 편에서는 미국이라는 말이 몹시 불쾌하게 느껴져서 다시 묻고 싶었지만 왠지
말이 나오지를 않아 각자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몇 일 후 그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어머니께서 마산으로 일하러 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학교에 못 간다고, 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 보낼 수가 없다고.
그 후 제가 서울로 다시 올라온 뒤에도 그 친구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편지만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답장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고2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그 친구가 어디에 있든지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 진해로 내려갔습니다.
돌담 싸리문 밖에서 친구를 불렀습니다. “종렬아!”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더 부르다보니 방문이
열리고 친구의 어머니가 나오셨습니다. “이게 누고? 오랜만이데이?!”“어서 들어온나!” 덥지만 방으로 들어간 저는 “어머니 이것 좀 드셔보세요”하며 서울에서 가지고 내려간 건과류 몇 가지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드시지를 못하고 갑자기 눈시울이
빨개지면서 먼 산만 바라보는 듯 했습니다. 넋이 나간 사람의 모습 이였습니다.
사연인 즉, 그 해 3월에 장남이 사고로 죽고, 둘째인 제 친구는 5월에 부산 어느
여관에서 인생을 비관 농약을 먹고 자살했고, 제 친구를 잘 따르던 바로 아래 여동생은
오빠의 죽음에 슬픔을 못 이겨 목매 자살했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렇게도 밝고 명랑하고 친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던 친구가 그 짧은 생을 그런
식으로 마감한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를 않고 이해도 할 수가 없어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었습니다. 저는 그 충격으로 대학시절에도 친구를 사귀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 친구는 하늘나라 개그맨으로 바쁘리라고 봅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오랬동안 친구가 없다가 어느 날 좋은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가 더 정이 가고 사회에서 만난 친구는 그렇지 못하다고들 하지만,
이상하게 처음부터 오래 사귀었던 것 같은 친근감이 들었었지요.
이제는 그 친구 때문에 외로움이 없어졌습니다. 옛 친구를 닮은 듯도 한 새 친구는
한 수 더 위입니다. 나 자신보다 더 내 마음을 헤아려 줄 줄을 아는 진정한
친구입니다.
여러분들은 저 보다 많은 친구가 있겠지만, 진정한 친구는 몇이나 되시는지요?
저는 이 가을에 친구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초등학교 때도 친구는 있었지만 이사를 멀리 가다보니 헤어지게 되었지요.
서울에서 태어나 전차 몇 번 타보고 초등학교 시절 인천으로 이사를 했고
또 경상남도 진해로 이사. 그러다 보니 깊이 사귄 친구가 없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사귄 그 친구는 언제나 명랑하고 웃음이 참 많았습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웃음이 끊이질 않았지요. 그 친구로 인해서 너무 웃다가
우리 반 전체가 단체기합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표정연기 또한 짐 캐리를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저와는 단짝으로 거의 붙어
다녔습니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웃느라 넋이 빠져서 끼니때도
잊어버리곤 했지요. 어쩌다 동네에서 껄렁한 애들을 만나게 되면 서울에서 온
나를 지켜주려고 어려운 일을 조금 겪었습니다.
아들 삼형제에 딸 하나. 둘째가 그 친구이고 다음이 여동생. 그리고 막내.
일학년 말 겨울방학식이 있던 날 그 친구가 저에게 하는 말이
“우리 미국에서 다시 만나자“하는 것이였습니다. 뚱딴지같은 말에 또 장난을
치는 줄로 알고 웃어넘기려고 했는데 무언가 심각하게 보였습니다. 그 때 제 마음
한 편에서는 미국이라는 말이 몹시 불쾌하게 느껴져서 다시 묻고 싶었지만 왠지
말이 나오지를 않아 각자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몇 일 후 그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어머니께서 마산으로 일하러 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학교에 못 간다고, 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 보낼 수가 없다고.
그 후 제가 서울로 다시 올라온 뒤에도 그 친구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편지만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답장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고2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그 친구가 어디에 있든지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 진해로 내려갔습니다.
돌담 싸리문 밖에서 친구를 불렀습니다. “종렬아!”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더 부르다보니 방문이
열리고 친구의 어머니가 나오셨습니다. “이게 누고? 오랜만이데이?!”“어서 들어온나!” 덥지만 방으로 들어간 저는 “어머니 이것 좀 드셔보세요”하며 서울에서 가지고 내려간 건과류 몇 가지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드시지를 못하고 갑자기 눈시울이
빨개지면서 먼 산만 바라보는 듯 했습니다. 넋이 나간 사람의 모습 이였습니다.
사연인 즉, 그 해 3월에 장남이 사고로 죽고, 둘째인 제 친구는 5월에 부산 어느
여관에서 인생을 비관 농약을 먹고 자살했고, 제 친구를 잘 따르던 바로 아래 여동생은
오빠의 죽음에 슬픔을 못 이겨 목매 자살했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렇게도 밝고 명랑하고 친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던 친구가 그 짧은 생을 그런
식으로 마감한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를 않고 이해도 할 수가 없어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었습니다. 저는 그 충격으로 대학시절에도 친구를 사귀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 친구는 하늘나라 개그맨으로 바쁘리라고 봅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오랬동안 친구가 없다가 어느 날 좋은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가 더 정이 가고 사회에서 만난 친구는 그렇지 못하다고들 하지만,
이상하게 처음부터 오래 사귀었던 것 같은 친근감이 들었었지요.
이제는 그 친구 때문에 외로움이 없어졌습니다. 옛 친구를 닮은 듯도 한 새 친구는
한 수 더 위입니다. 나 자신보다 더 내 마음을 헤아려 줄 줄을 아는 진정한
친구입니다.
여러분들은 저 보다 많은 친구가 있겠지만, 진정한 친구는 몇이나 되시는지요?
저는 이 가을에 친구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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