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가 이상해서 쉬는 날마다 비가 왔습니다.
핑계김에 자출을 한 번 했지만 그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습니다.
불행스럽게도 요즘 활동하던 까페가 양분 위기에 처하는 바람에
잔차를 타는 것도 귀찮았습니다.
여하튼 지난 17일 자전거를 타고 오늘 처음 나선 라이딩은
헝그리 복서의 '의무 방어전'격입니다.
22일 서울에 거주하는 왈바 횐님이 임도 안내를 부탁하여
몇 몇 분들에게 번개 공지를 했고
오늘은 그저 몸풀기만 할 요량으로 길을 나섭니다.
며칠 와 보지 않은 나의 '구역'이 변했습니다.
겨울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내리 달리던 마일드한 싱글은
그 옛 모습이 아닙니다.
작년 여름 내 뺨과 종아리를 사정없이 후려치던
가시나무 가지 등을 적당히 제거하여 내리 달릴 수 있던 길이었는데
귀엽던 동네 중딩이 성장하여 이제는 코 밑에 털나고
덤벼 들듯이 자란 수풀이 또 도전을 하여 오는 것입니다.
오월의 그 싱그러움이 나뭇잎을 성장시켜서 가는 곳마다 팔을 내밉니다.
때로는 머리를 숙이고 때로는 어깨로 치고 나가 보지만
이게 싱글의 난이도를 다시 격상시키고 있습니다.
몸풀기 라이딩은 항상 정해진 코스입니다.
정해진 길, 숙달된 길로만 다니고자 하는 나의 습관이
처음 오는 친구들에게는 내가 자전거를 잘 탄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짙푸러진 산길에는 꽃향기가 널려 있습니다.
첫 번째 향기는 아까시나무 꽃 향기입니다.
야산이고 자연스럽게 자란 나무들 틈에는 아까시 나무가 많습니다.
가을에 밤나무가 눈에 띄듯이 향기를 잔뜩 풍기는 아까시는
라이딩을 즐겁게 하는 한 요소입니다.
내리달리면서 치 부는 바람에 실려 오는 아까시 향기는
단박에 내 폐 속까지 그 진한 향기를 배달시킵니다.
그 향기가 중독성이 있어서 내 코와 입은
잠시라도 향기가 그치지 않도록 바쁩니다.
폐 속까지 들어온 향기는 몽환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어쩌면 예쁜 여름의 여신의 하늘거리는 흰색 드레스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잠깐 도로를 타고 묘지길로 들어섭니다.
포장되어 있고 인적이 적은 묘지는 변변한 라이트도 없던 초보시절
밤에라도 자전거를 타게 하던 곳입니다.
잠시 잠깐 동안
고양이가 뛰어들거나, 새가 퍼덕이는 소리에 긴장하기도 하고
묘비에 비치는 달빛이나 자전거 라이트의 불빛이 놀라게 하기도 했지만
역시 시골출신, 험한 세대를 산 가슴에 부담은 아니었습니다.
서울의 유명한 교회의 묘지인 이 곳엔 오동나무가 많습니다.
오동나무의 넓은 잎과 넉넉한 보라색 꽃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세른 세 살 농염한 여인의 향기처럼 아스팔트 위는
온통 오동나무 꽃의 향기로 가득찹니다.
아까 아까시 꽃 향기는 폐로 직통했지만
은은한 오동나무 꽃 향기는 심장에 핫 라인을 연결한 것 같습니다.
덜 화려하고 덜 세련된 꽃이지만
그 풍겨나오는 향기는 폐가 아닌 심장으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황홀경에 빠져서 숲길을 내리 달립니다.
난이도가 적당한 싱글,
역광을 받고 녹색에서 노랑색 중간의 색조로 보이는 나뭇잎 들이
검은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그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면서
짦은 싱글도 다시 도로를 만납니다.
이제는 다른 작은 산을 탈 차례입니다.
마른개울을 건너갑니다. 언제부터인지 개울을 지나는 다리엔 차가 출입할 수 없게
말뚝이 박혀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서 비닐하우스를 지나 동구밖 과수원길에 들어섭니다.
여기도 아까시나무 꽃은 만발했습니다.
저절로 '동구밖 과수원길~~♪♬' 노래가 흥얼거려집니다.
그 과수원 끝에 이르렀습니다.
과수원지기가 배나무 사이의 풀을 쳐 내고 있습니다.
풀을 완전히 없애지 않는 이유는 적당한 습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랍니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자갈이 깔려진 길을 지날즈음
내 코는 먼 옛날 고향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먹골배 과수원 끝 지점에 흰색 찔레 꽃이 잔뜩 피어 있습니다.
흰색 꽃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고향의 향기는 내 뇌 속을 흔듭니다.
그 어려운 유년시절,
찔레가 나오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찔레 덤불로 들어가서
양껏 찔레를 꺾어 왔었습니다.
유난히 찔레를 잘 따던 고향 친구는 몇 년 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그 철도 지나면서 찔레덤불을 지날 때에 하얗디 하얀 찔레 꽃잎을 따 먹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유년이었지만
지금 저 꽃잎을 바라보면서
그 향기에 취한 마음은 아직도 그때나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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