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홍이는 노래를 잘 불렀다.
국민학교는 1년 선배지만 나이는 나보다는 2살 위이니
이미 50줄 초반이다.
노래로 치면 그의 아버지 따를 사람이 없었다.
여름 모내기, 풀매기 때면 그 어른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노래도 노래지만 걸쭉한 입담으로 아슬아슬한 性談論을 펼쳐대면
갓 시집온 새댁도 차마 목놓아 웃지는 못하고 배시시 홍조를 띠다가
신랑의 눈짓에 움찔 하곤 하였다.
시홍이는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70년대 초...산골 초등학교 졸업생 5-6십명
그중 반을 차지하는 여학생은 고작 3-4명이 진학을 했고
남학생인들 반수를 넘지 못하였다.
그나마 10리 밖 면소재지에 중학교가 생기면서 진학률이 많이
좋아 진 것이 이랬다.
그러니 중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한들
그다지 크게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홍이는 달랐다.
중학교가 가지 못한 설움을 달래려
그는 밤이면 혼자 고샅을 돌며 노래를 불렀다.
마을 앞 냇가에서도
아무도 찾지 않는 공동묘지로 향하는 산모퉁이에서도
(산모퉁이 ? ㅋㅋㅋ)
지금도 그의 형제가 몇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아무튼 그 위로 누님이 둘이고..아래로 여동생 남동생 합하여 대여섯을 추가하면
8-9명은 족히 넘을 것이다.
농사보다 놀기 좋아하는 그의 부친이다 보니
자식들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이 영어 꼬부랑글자 배우는 일보다 중히 여겼음은
이해가 된다.
그렇게 슬프게 생활하던 시홍이가
어느날 마을에서 사라졌다.
소문에 의하면 부산에 있는 큰 공장에 취직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복하였던지
일을 하다가 몸을 크게 상하여 20대 한창 나이에
고향에 쫒기듯 다시 돌아와 농사일을 시작했다.
한량인 아버지 이름으로 된 땅 한평 없다 보니
결국 소작농 신세..
소도 키우고 열심히 농사일을 하였건만
40이 다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다가
같은 처지의 총각들 처럼 도시로 위장 취업을 떠났다.
무슨말인고 하니
도시에서 취직을 하였다고 속여 색시를 구하는 것이다.
시홍이는 결혼 6개월만에 임신까지 된 색시를 프라이드
뒷좌석에 태우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 색시는 아이를 낳고 삼이레를 채우지 못하고 홀로 줄행랑을 쳤다.
술로 날을 지새던 시홍이는
중매쟁이에게 거금 1천만원을 주고 필리핀 색시를 들였다.
그 색시는 아들 하나 딸하나 낳도록 붙어 살더니
이 역시 3년 넘기지 못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시홍이는 3명의 자식을 어머니에게 맡긴채 도시로 나갔다.
어머니는 아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3자식을 몽땅 고아원으로 입양시켜 버렸다.
이를 안 시홍이는 집으로 달려와서는 3일 밤낮을 술만 마시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버렸다.
==============
지난 설날에 나는 고향에 들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 쓰러져 가는 그의 집에 가 보았다.
아버지는 돌아 가신지 오래 되었고
어머니는 동생과 읍내로 나가 버리고 벌써 몇년째 빈집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다.
시홍이는 그래도 설날이라고 고향에 찾아와
영하 7-8도를 밑도는 날씨에 벌써 1주일째 머물고 있노라고 했다.
그와 나는 영하의 냉방에서 김칫국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어이 동상(나와는 8촌간이다)...내가 말이여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거여. 보란 듯이 재기하여 자식들 불러 들이고
애비 노릇을 제대로 할 것이란 말이여"
그의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것이 그를 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것을 알므로...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가니
그는 환한 낮으로 동구밖 마을 회관에서 귀향하는 마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자식들을 다시 데려다 놓았다며 자랑이다.
그러나 상경하는 차안에서 친구의 말은 달랐다.
"고아원에서 연락이 왔더란다.
추석 명절 며칠간만이라도 집에 데려다가 따듯한 밥한그릇 먹이라고..."
++++++++++++++++++++
우리 주위에는 "시홍이"가 너무 많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다.
국민학교는 1년 선배지만 나이는 나보다는 2살 위이니
이미 50줄 초반이다.
노래로 치면 그의 아버지 따를 사람이 없었다.
여름 모내기, 풀매기 때면 그 어른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노래도 노래지만 걸쭉한 입담으로 아슬아슬한 性談論을 펼쳐대면
갓 시집온 새댁도 차마 목놓아 웃지는 못하고 배시시 홍조를 띠다가
신랑의 눈짓에 움찔 하곤 하였다.
시홍이는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70년대 초...산골 초등학교 졸업생 5-6십명
그중 반을 차지하는 여학생은 고작 3-4명이 진학을 했고
남학생인들 반수를 넘지 못하였다.
그나마 10리 밖 면소재지에 중학교가 생기면서 진학률이 많이
좋아 진 것이 이랬다.
그러니 중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한들
그다지 크게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홍이는 달랐다.
중학교가 가지 못한 설움을 달래려
그는 밤이면 혼자 고샅을 돌며 노래를 불렀다.
마을 앞 냇가에서도
아무도 찾지 않는 공동묘지로 향하는 산모퉁이에서도
(산모퉁이 ? ㅋㅋㅋ)
지금도 그의 형제가 몇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아무튼 그 위로 누님이 둘이고..아래로 여동생 남동생 합하여 대여섯을 추가하면
8-9명은 족히 넘을 것이다.
농사보다 놀기 좋아하는 그의 부친이다 보니
자식들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이 영어 꼬부랑글자 배우는 일보다 중히 여겼음은
이해가 된다.
그렇게 슬프게 생활하던 시홍이가
어느날 마을에서 사라졌다.
소문에 의하면 부산에 있는 큰 공장에 취직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복하였던지
일을 하다가 몸을 크게 상하여 20대 한창 나이에
고향에 쫒기듯 다시 돌아와 농사일을 시작했다.
한량인 아버지 이름으로 된 땅 한평 없다 보니
결국 소작농 신세..
소도 키우고 열심히 농사일을 하였건만
40이 다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다가
같은 처지의 총각들 처럼 도시로 위장 취업을 떠났다.
무슨말인고 하니
도시에서 취직을 하였다고 속여 색시를 구하는 것이다.
시홍이는 결혼 6개월만에 임신까지 된 색시를 프라이드
뒷좌석에 태우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 색시는 아이를 낳고 삼이레를 채우지 못하고 홀로 줄행랑을 쳤다.
술로 날을 지새던 시홍이는
중매쟁이에게 거금 1천만원을 주고 필리핀 색시를 들였다.
그 색시는 아들 하나 딸하나 낳도록 붙어 살더니
이 역시 3년 넘기지 못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시홍이는 3명의 자식을 어머니에게 맡긴채 도시로 나갔다.
어머니는 아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3자식을 몽땅 고아원으로 입양시켜 버렸다.
이를 안 시홍이는 집으로 달려와서는 3일 밤낮을 술만 마시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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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날에 나는 고향에 들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 쓰러져 가는 그의 집에 가 보았다.
아버지는 돌아 가신지 오래 되었고
어머니는 동생과 읍내로 나가 버리고 벌써 몇년째 빈집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다.
시홍이는 그래도 설날이라고 고향에 찾아와
영하 7-8도를 밑도는 날씨에 벌써 1주일째 머물고 있노라고 했다.
그와 나는 영하의 냉방에서 김칫국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어이 동상(나와는 8촌간이다)...내가 말이여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거여. 보란 듯이 재기하여 자식들 불러 들이고
애비 노릇을 제대로 할 것이란 말이여"
그의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것이 그를 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것을 알므로...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가니
그는 환한 낮으로 동구밖 마을 회관에서 귀향하는 마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자식들을 다시 데려다 놓았다며 자랑이다.
그러나 상경하는 차안에서 친구의 말은 달랐다.
"고아원에서 연락이 왔더란다.
추석 명절 며칠간만이라도 집에 데려다가 따듯한 밥한그릇 먹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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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는 "시홍이"가 너무 많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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