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신록의 때입니다.
첫 싹이 나오는 것을 보고 탄성을 지른 것이 엊그제인데
노루귀를 보고, 바람꽃과 복수초, 얼레지를 보고 나서 보니
이제 初夏의 조짐이 곳곳을 엄습해 와 있습니다.
이른 봄에 오는 비는 봄의 전령을 볼 수 있지만
한 가운데 봄비는 봄의 본대(本隊)이며
오늘 맞은 비는 그 쇠해진 봄의 기운을 떨치려는
여름의 침략입니다.
비가 오는 숲을 향한 외출이 그래서 더 의미심장합니다.
가는 봄, 가는 연두색의 향연을 안타까워 하는 외출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봄임을 강조하는 꽃들,
그러나 여름의 세력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보러나온 중년의 암울한 마음과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빗방울이 굵어지지 않았으니
아직 잎들은 떨지 않아도 되지만
그 속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더 파랗게, 뙤약볕과 천둥번개에 익숙해져야 하는 숙명을 간직한 것이죠.
그러나 마지막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들 처럼
작은 물방울 하나를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그걸 즐길 여유는 더욱 없습니다.
정원이 아무리 여름을 향해 달려도
숲은 아직 신중한 모습으로 봄을 간직하기에
나는 그 숲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가 귓가에 있어도,
흙 냄새가 먼 옛날 고향의 황토집 한지 바른 벽의 그것이라도
뜻 모를 갈증에 물 한 모금을 마셔야겠습니다.
물을 마심으로써 마음속에서부터 기인한 갈증을 풀 길은 없지만
숲을 바라다 보기위한 심호흡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가는 연두색, 가는 녹색이 아쉬워서 나온 산책
그러나 그 걸음 걸음마다 녹색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보지 않을려고 해도
아무리 외면하고 걸어도
눈에 익은 것들을 떨칠 수는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숲을 봅니다.
숲은 잔잔함으로, 아름다움으로, 여유로움으로 내 앞에 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관심 없는 대문,
그 대문과 그 너머 이 봄과 단절된
애절한 역사가 그립습니다.
정신이 떠나고, 순수가 떠나고
예절마져도 떠나서
남아 있는 분쟁과 미움과 아픔
그것에서 떠나고싶기도 합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가는 세월과 늘어나는 주름살은 그것을 거역할 능력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길이 다 그렇듯 시작하고 끝나고,
끝나는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돌아서
'이제는 돌아와 선 누님'이 되는가 봅니다.
그러나 비가와도 따스한 곳은 있습니다.
비와 함께 여름이 쳐들어 온다고 해도
마음속의 고향,
그 오아시스 같은 포근함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해 가던
가는 봄의 마지막,
그 아름다움은 간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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