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위로 네분의 형님과 세분의 누님을 두었다.
그중 둘째 형님과 둘째 누님을 제일 좋아했다.
형님은 지금으로부터 17년전 4월 51세되시던 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형님과의 수많은 에피소드중 지금도 나를 아련하게 하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나는 자전거를 타고 혹은 걸어서 4km 고개너머 면소재지 중학교에 다녔다.
물론 그 자전거는 면사무소에 다니시는 형님께서 사주신 것이다.
하루는 자거를 타고 등교 했다가
아무 생각없이 친구집에서 잠을 잣다.
당시만 해도 전화도 없었고, 혹 있었다 해도 집에 연락하고 허락을 받을
그런 세심한 내가 아니었다.
당연히,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났었다고 들었다..)
아버니, 어머니, 형님들, 누나들 모두가 밤새
논두렁이며
산길이며
개울까지
그것도 모자라
모든 동네 집집을 삿삿히 찾아 다녔다고 한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봐 맘을 조리며...
세상 모르게 잠을 자고 일어난 나에게 친구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새벽이 다되야서 느그 형이 왔었다,
아 그 면사무소 댕기는...
너 자는 모습을 보더니 됐다며, 깨우지 말라며 기냥 돌아가더라......"
철부지 중학생은 그제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형님께서 얼마나 단속을 해 놓으셨던지
아버님은 막내 아들을 보고도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중에 그 형님이 돌아가셔서 상여를 타고 집을 나설때
대문에 쓰러지듯 의지하며 눈물만 흘리시던 아버님과 어머님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어려운 형편에 읍내 중학을 끝으로
고등학교를 형에게 양보하고 일찌기 면서기가 되어
부모님을 모신 둘째 형님은 효자였다.
++++++++++++++++++
어버이 날에 고향에 가지 못할거 같아
어제 아내와 고향에 내려갔다.
읍내에 사시는 둘째 누님 댁에도 들렀다.
꽃처럼 이쁘시던 누님도 이제는 환갑진갑 다 지나고
할머니가 되셨다.
누님은 친구집에 마실갈때마다 막둥이 동생을 데리고 다니셨다.
나는 댕기머리 누님 친구들 앞에 서서 노래를 곧잘 불렀는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너진 사랑 탑"이 애창곡이었다.
누님은 어머니를 대신해 할머니 할아버지 병수발이며
집안 일을 도맡아 하셨다.
그러시느라 당시로서는 늦은 26살 되던 초겨울에 읍내 지주 막내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시집가는 날 친구들은 우리 집에 찾아와 맛있는 음식을 먹었지만
나는 할아버지 방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종일 눈물을 흘렸다.
누님이 시집가고 내가 중학생이 되어 30리 길을 걸어 수학여행을 갔는데
마침 누님이 사시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 몰래 누님집에 가서 누님을 만났다.
누님은 아무 말없이 눈물을 흘리시며 막둥이 동생을 안아 주셨다.
누님의 큰아들은 대학생때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를 당해 죽었다. 누님은 읍내 교회에 다니시며 그 고통을 이겨내셨다.
누님은 어머니의 음식 맛과 솜씨를 그대로 가지고 계신다.
도시 음식에 혀에 가시가 돋힐라 치면 누님 음식이 그리워 기회가 닿으면 찾곤 한다.
이번에 누님은 쌉쌀한 두릅을 대처주셨다.
입안 가득히 스며드는 그 향기란..
누님은 아직도 농사를 지으신다.
포도, 수박, 배,
누가 말려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늙고 병들어 더이상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을때까지 손에서 일을 떼지 않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누님은 농가에 방을 몇개 들여 민박도 하신다.
근처에 제법 유명한 관광지가 있어 철따라 손님이 든다.
자가용차가 대중화 된 뒤로는 휭하니 둘러보곤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어제는 비도 오고 연휴라서 그런지
손님이 두어팀 들었다.
손님을 받으신 누님은 이내 쓸쓸한 표정이시다.
매형이 그러신다..
13명이 잠을 잔다길래 10만원을 달랬더니
5만원만 주더란다.
불때주고 전기쓰고 물쓰고 남는 것도 없으련만
도시사람들은 어찌 그리 야박한지 모르겠다.
위로 네분의 형님과 세분의 누님을 두었다.
그중 둘째 형님과 둘째 누님을 제일 좋아했다.
형님은 지금으로부터 17년전 4월 51세되시던 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형님과의 수많은 에피소드중 지금도 나를 아련하게 하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나는 자전거를 타고 혹은 걸어서 4km 고개너머 면소재지 중학교에 다녔다.
물론 그 자전거는 면사무소에 다니시는 형님께서 사주신 것이다.
하루는 자거를 타고 등교 했다가
아무 생각없이 친구집에서 잠을 잣다.
당시만 해도 전화도 없었고, 혹 있었다 해도 집에 연락하고 허락을 받을
그런 세심한 내가 아니었다.
당연히,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났었다고 들었다..)
아버니, 어머니, 형님들, 누나들 모두가 밤새
논두렁이며
산길이며
개울까지
그것도 모자라
모든 동네 집집을 삿삿히 찾아 다녔다고 한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봐 맘을 조리며...
세상 모르게 잠을 자고 일어난 나에게 친구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새벽이 다되야서 느그 형이 왔었다,
아 그 면사무소 댕기는...
너 자는 모습을 보더니 됐다며, 깨우지 말라며 기냥 돌아가더라......"
철부지 중학생은 그제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형님께서 얼마나 단속을 해 놓으셨던지
아버님은 막내 아들을 보고도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중에 그 형님이 돌아가셔서 상여를 타고 집을 나설때
대문에 쓰러지듯 의지하며 눈물만 흘리시던 아버님과 어머님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어려운 형편에 읍내 중학을 끝으로
고등학교를 형에게 양보하고 일찌기 면서기가 되어
부모님을 모신 둘째 형님은 효자였다.
++++++++++++++++++
어버이 날에 고향에 가지 못할거 같아
어제 아내와 고향에 내려갔다.
읍내에 사시는 둘째 누님 댁에도 들렀다.
꽃처럼 이쁘시던 누님도 이제는 환갑진갑 다 지나고
할머니가 되셨다.
누님은 친구집에 마실갈때마다 막둥이 동생을 데리고 다니셨다.
나는 댕기머리 누님 친구들 앞에 서서 노래를 곧잘 불렀는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너진 사랑 탑"이 애창곡이었다.
누님은 어머니를 대신해 할머니 할아버지 병수발이며
집안 일을 도맡아 하셨다.
그러시느라 당시로서는 늦은 26살 되던 초겨울에 읍내 지주 막내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시집가는 날 친구들은 우리 집에 찾아와 맛있는 음식을 먹었지만
나는 할아버지 방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종일 눈물을 흘렸다.
누님이 시집가고 내가 중학생이 되어 30리 길을 걸어 수학여행을 갔는데
마침 누님이 사시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 몰래 누님집에 가서 누님을 만났다.
누님은 아무 말없이 눈물을 흘리시며 막둥이 동생을 안아 주셨다.
누님의 큰아들은 대학생때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를 당해 죽었다. 누님은 읍내 교회에 다니시며 그 고통을 이겨내셨다.
누님은 어머니의 음식 맛과 솜씨를 그대로 가지고 계신다.
도시 음식에 혀에 가시가 돋힐라 치면 누님 음식이 그리워 기회가 닿으면 찾곤 한다.
이번에 누님은 쌉쌀한 두릅을 대처주셨다.
입안 가득히 스며드는 그 향기란..
누님은 아직도 농사를 지으신다.
포도, 수박, 배,
누가 말려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늙고 병들어 더이상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을때까지 손에서 일을 떼지 않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누님은 농가에 방을 몇개 들여 민박도 하신다.
근처에 제법 유명한 관광지가 있어 철따라 손님이 든다.
자가용차가 대중화 된 뒤로는 휭하니 둘러보곤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어제는 비도 오고 연휴라서 그런지
손님이 두어팀 들었다.
손님을 받으신 누님은 이내 쓸쓸한 표정이시다.
매형이 그러신다..
13명이 잠을 잔다길래 10만원을 달랬더니
5만원만 주더란다.
불때주고 전기쓰고 물쓰고 남는 것도 없으련만
도시사람들은 어찌 그리 야박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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