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08일 사회
5월 30일. 서울광장이 ‘털렸다’. 검은 장정들이 어스름한 새벽, 잔디밭 안으로 밀고 들어와 장악한 것이다. 당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집회’를 열기 위해 광장을 사수하려 했던 소수의 민간 활동가들은 전경의 완력(腕力)에 연행 또는 퇴거당하고 말았다. ‘노무현 추모 열기’로 재 점화될 줄 알았던 촛불은 그렇게 무력하게 꺼지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은 “80년대 대학생들이 2009년에 부활해 그 자리에 있었다면…”이라며 덧없는 통분(痛憤)만 쏟아냈다. 대학생이라. 2009년에도 선발됐고, 재학 중이고, 취업 될 때까지 졸업하려고 버티는 선배까지 합치면 학생들이 제법 있을 텐데, 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물어 봤다. 바쁘단다. 맞는 얘기이다. 취업하려면 입학식 끝나기가 무섭게 어학 실력 향상, 학점 관리, 스펙 쌓기에 혈안이 돼야 한다. 이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틈을 내 연애도 해야 한다. 어쨌든 아주 어렵게 이들에게 시간을 얻어낸다. 그리고 시국집회 참석을 권유한다. 그러면, “그거 합법 집회인가요? 네? 집회 허가가 안 났다고요? 불법 집회네? 불법 집회를 왜 하는데요?”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눈물 어린 준법정신이다. ‘법질서’를 강조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표창이 뒤따라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3·1, 4·19, 5·18, 6·10 중에 합법집회가 있었나?) 그렇게 해서 간신히 설득해 집회 장소로 데리고 나와도 이들의 ‘까칠함’은 꺾일 줄 모른다. “집회가 너무 선동적이네요. 정치적으로 세뇌시키려는 것 같아요.” 그래. 졌다. 네 팔뚝 굵다!
지금의 20대 초중반을 이루는 대학생 세대. 이들을 일컬어 ‘IMF 세대’라 부르는 이가 있다. 사실 일리 있다. 19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사춘기 무렵에 아버지의 실직 등 외환위기의 여파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감수성 예민한 그 때에 뼈저리게 했던 고민, 뭐였겠나. “우리 아버지는 왜 잘렸을까” 이거였을 것이다. 이 화두 앞에서 ‘처세’와 ‘생존’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이후 모든 사안을 ‘가치’보다는 ‘자신의 유불리’에 방점을 두고 사리판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수가 2007년 겨울, 투표장에서 밑도 끝도 없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설레발 떠는 후보에게 표를 헌납했다. 이 후보의 부도덕한 과거를 충분히 숙지했음에도 말이다. ‘참을 수 없는 가벼운’ 현실 인식에 있어 기성세대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내 말을 들려주려 한다. 요컨대 “너희처럼 처신하면 밥되기 딱 좋다”라는 말이다. 자, 들어보라.
이명박은 너희에게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다. “누가 찍으래?” 이런 입장일 것이다. 너희의 등록금 걱정, 취업 고민에 대해 공감이라도 해줄 것 같나. 천만에. 그러니 등록금 반값 공약을 일말의 거리낌 없이 부도냈다. 아, 이런 대안은 제시했더군.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 받으면 되겠네”라는. 또 너희의 미래? “4대강 살리기 할 테니 삽 하나 들고 와서 한 반 년 일하라”는 게 최선의, 또 전부인 해법이다. 참, 이것도 있군. “정규직인 아버지의 일자리를 없애줄 테니 대신 네가 인턴으로 들어와 커피 타오고 복사나 하라”고 하는.
386선배들이 있었다면 그래서 권력의 골칫거리가 됐다면,
과연 이명박이 지금과 같이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을까.
누굴 탓하겠나. 너희가 만만하게 보여서이다. 앞서 얘기한대로 지금의 너희 자리에 1980년대 군부 독재 권력에 온 몸으로 항거했던 386선배들이 있었다면 그래서 권력의 골칫거리가 됐다면, 과연 이명박이 지금과 같이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을까. 이명박은 강한 자에게 약하다. 아무리 수틀려도 미국에게 또 북한에게 찍소리 못하는 거 봐라. 봉하마을에서 험한 꼴 당할까봐 직전 대통령 빈소도 못 들르는 졸렬한 보신을 봐라. 촛불 또 일어날까봐 지나가는 다섯 살짜리의 촛불도 끄게 겁박하는 심약함을 봐라. 만약 천지가 개벽해 대학생들이 조직적인 봉기를 벌인다면, 이명박은 어떻게 나올까. 아마도 대학생 사회를 운동권과 비운동권 둘로 이간하기 위해 등록금 또 취업 정책에 상당한 성의를 나타낼 것이다. “강한 자가 (목표물을) 쟁취할 수 있다”는 원리, 연애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너희에게 데모할 것을 부추기는 게 아니다. 도리어 만류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미 너희는 뭘 해도 늦었기 때문이다. 너희의 단점, 즉 뒷모습을 이미 이명박이 목격했기에 어설픈 저항했다가는 더 가혹한 보복만 당할 것이다. 그냥 조용히 공부하고, 졸업해서, 삽 들고 안전한 삶의 길을 모색해 나가길 바랄 뿐이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또 너희가 소화하기 좋은 유일한 충고이다. 다만, 나는 지금 10대에게 큰 기대를 건다. 이 친구들은 촛불의 발화점이 됐던 소위 촛불 소년 소녀 세대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토론하는 애들이다. 독재 권력은 물론,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 불평등 현상에 대해 강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이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올 내년 또는 내후년쯤이면 아마 우리 대학 사회도 생존의 쟁투장이 아니라 가치와 사상이 꽃피는 진정한 지성의 전당이 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졸업하면 너희 세대를 앞지를 것이고, 곧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판 돈 모두를 걸련다. 너희에게 너무 야박하게 들렸을 법한 이야기였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너희는 안 된다. 뭘 해도 늦었기 때문이다.
출처 http://press.cnu.ac.kr/news/?news/view/id=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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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반격이 좀 논리성도 없고 남 원망 수준이더군요. 그리고 매우 이기적이기도 하고요.
이에 김용민 교수가 다시 글을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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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댓글을 쭉 읽어봤습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하고
캠퍼스는 다르나 같은 학교라고
‘살살’ 비판해주셔서 또한 감사합니다. ㅎㅎ
논리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왜 20대만 갖고 그러냐`
`과거 운동한 경력을 앞세우지만,
지금은 부귀영화나 추구하는 신종 기득권 세력인 386을 교본 삼으라니 말이 되느냐`
`당신들은 우리가 이렇게 되기까지 뭘 했는데`
혹은 ‘우리 세대의 고통을 당신이 알기나 하냐’
`(기대를 건다는) 10대도 똑같다`
혹은 `우리도 과거 미선 효순 사건 때 촛불 들었다`
내용은 다르나, 골간은 대체로 이런 것들입니다.
20대 다 싸잡아서 비난할 일도 아니라는 지적,
일리 있습니다.
반론의 내용에 앞서,
무엇보다도 다행스럽고 반가운 점은
20대일 것으로 보이는 반론자들에게서
자존심과 저항 심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저의 글에 대한 동조의 표현이건
강한 비판의 글이건 말입니다.)
저 같은 ‘듣보잡’이 욕먹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런 분기(奮起)를 부디 삭히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20대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도발했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는데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20대에겐) 희망 없다`라는 생각은 심중의 90% 이상 됐습니다.
도발의 의도는, 따라서 10%도 안 된다는 겁니다.
(누군가는 ‘20대를 계도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반발심만 불렀기에 실패한 것’고 하는데,
설득할 목적 역시 따라서 10%도 안 됩니다.)
솔직히.
왜 그럴까요.
수많은 세대들이 거쳐 간 20대 중,
지금의 20대가 가장 심각한 것은 사실입니다.
프랑스 6.8혁명에 영향을 받았겠습니다만,
지금 60대는 20대에 4.19혁명과 부당한 한일수교회담 반대 투쟁을 벌인 이들이죠.
(놀라운 일이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여기에 일원이었습니다.)
지금 50대는 20대에 유신독재투쟁을 벌이며 항거했던 때였습니다.
지금 이 분들의 보편적 정치 성향을,
수구 보수 성향에 안정 희구에 기득권 지향적으로 표현합니다.
변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386도 이쪽을 향해 가고 있겠죠? 여러분들의 지적처럼.
386세대가 아닌 저 역시 그러하겠고요.
그러나 논지는 분명히 하고 싶네요.
이분들의 20대는 이랬다는 겁니다.
더 얘기해볼까요?
지금 40대 즉 386세대의 20대는 87년 6월 항쟁의 중심에 섰습니다.
지금 30대의 20대는 김영삼 정권의 수구 보수적 공안정국에 항거했습니다.
저를 향한 반론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 때 학생운동 좀 했다고 자랑하는 거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서 부끄럽게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저의 동기들이 김영삼한테 얻어터질 때,
솔직히 그들을 냉소하며
`그런 식으로 구태의연한 운동을 해서야 되겠느냐`라며 손가락질 했습니다.
(`운동해서 달리지는 게 뭔데` 이러며 저의 글에 대해 비판하던 학생이 있었는데
저도 그 때 그랬습니다.)
물론 저는 그때의 과오를 대오 각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들이 느꼈을 심한 좌절감에
용서를 구하는 길을 찾고 있고
실천에 옮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속한 세대 중, 우리 사회의 담론 형성에 기여하는,
저널리스트, 학자 상당수는
이명박 대통령이 탄식해마지 않는 `전문 시위꾼` 출신입니다.
가장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시위를 해야만 치열하게 사는 거냐‘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개 대학생이 국가 권력을 상대로 싸우는 건,
치열함 없이는 불가능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 치열함의 배경에는 ‘바른 세상’을 향한 열정이 있었을 것이고요.
여담입니다만, ‘김영삼 때는 전두환 때와 달라
학생운동의 존재감이 없었다‘는 일각의 비판 논리에는 그래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네들의 강력한 학내 영향력에 반기를 들며
비난했던 저를 제가 잊을 수 없기 때문이죠.
386이 썩었다지만, 그 보다 한 단계 낮은 세대인 30대들은 아직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20대를 걱정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그치죠.
이제 20대의 20대. 바로 지금은 어떨까요?
지금 20대에겐. 1%만을 위한 나라, 또 민주주의가 압살당하는 시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지금 시기를 김영삼 시대와 비교하는 이들이 있지만,
적어도 김영삼 시대엔 자기를 비난한다고 입 틀어막지는 않았습니다.
비교하자면 지금은 전두환 시대에 가까운 환경이죠.
(꼭 총을 쏘고 고문을 해야만 전두환 시대는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응당 치졸한 기성세대를 꾸짖어야 할
여러분의 볼륨은 엉뚱한 부분에서 증폭됩니다.
“왜 우리를 개○○라고 하느냐” 여기에 말이죠.
여러분의 빈자리에
세태에 찌든 기성세대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이들의 아킬레스건을 찾으면 얼마든지 나오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광장에 나옵니다.
통상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은
학생들이 앞장서 나간 뒤, 뒤에 제자들을 지원해주는 형태인데,
어떻게 된 게 이번엔 교수들이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연한 혹은 속에 두는 20대에 대한 탄식이
그저 공허한 세대 이간론 정도로 들립니까?
이런 주장도 있더군요.
‘우리가 10대일 때도 그랬다’라고.
미선, 효순 사건에 관한 미군의 무죄판결 이후 이어진 들불 같은 SOFA개정 투쟁…….
거기 나왔다며 말이죠. 잘했습니다.
그러나 시국 집회에 10대가 참여해서 주목받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판돈을 걸겠다던 지금의 10대는
‘출연’ 정도가 아니라 ‘주최’를 했습니다.
그들의 수많은 문제제기를 통해
경쟁중심의 사회에 순응하기 보다는 맞서 저항하며
지형을 바꿔가려는 응분이 느껴졌습니다.
‘솔까말’ 20대 여러분,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여러분은 그런 문제인식, 저항의식 모든 면에서
지금 10대에게 밀립니다.
지금 10대도 물론, 현실과 타협하는 세대로 가겠죠.
그러나 이들은 기득권, 연고, 이해타산으로부터 가장 초연할 20대를
가장 20대답게 가꿀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부인하고 논박한 들,
10대에 대한 강한 기대는
접기 힘들 것 같습니다.
왜냐. 여러분의 논리에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탓만 합니다.
누군가 ‘20대의 유전자가 선천적인 줄 아느냐’라고.
맞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거죠.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형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꿔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타락했다고 규정한 386의 힘,
존재감 없는 학생운동을 한 우리 세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말입니다.
물론 키보드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20대들도 잘 알더군요.
그렇습니다.
피눈물 흘리며 숨어 다니고 제적당하고 포박당하고 불이익당해도
바른 일을 위해 싸웠던 이들과,
기껏 인터넷에서 뒷담화나 늘어놓으며
`우리가 왜 개○○냐, 개○○야!`
‘니 애는 안 그러나 보자!’
이러는 이들의 자세와 열정 그리고 미래가 같을 수 없습니다.
물론 20대 중에 실천 하는 양심들, 없지 않죠.
그러나 그들은 수 천 학우가 모일 줄 알았던
등록금 투쟁 현장에 10명도 채 안 보이는 현실 속에서
절망을 느끼는 소수입니다.
길거리에서 시국 관련서명 받을 때,
냉소어린 눈짓에 마음에 상했던 소수입니다.
게다가 학내외에서 `운동권`으로 낙인 찍혀
처신이 쉽지 않고 운신의 폭이 좁은 소수입니다.
자기 돈 들여 시간 내 청춘을 바치는 소수입니다.
혹시 이들도 슬프게 하지 않았나요.
제 글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반박은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라는 가설을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너나 잘해` 속에 묻어있는 `우린 이대로 살래`의 강한 시사,
이걸로는 제 글에 대한 설득력만 실어줄 뿐입니다.
저는 제 글이 ‘병○ 인증’을 받길 진심으로 원합니다.
20대, fighting 좀 하시라.
*** 새벽에 써서 간혹 오타나 문맥호응 오류, 동어 반복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양해해주시길.
*** 반론 또는 토론을 원하는 분은 http://newstice.tistory.com으로 오셔서
방명록에 글을 남겨주세요. 세심하게 답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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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운동권 시대의 종언쯤에 대학을 들어갔습니다.
김영삼 정부에 의해서 한총련이 붕괴되는 시기 아마 연대사태가 지나고 입학을 하였을 겁니다.
입학하고 보니 일명 운동권 동아리 들의 이름인 "민족" "해방" 류의 동아리에 들어가는 수는 극소수 였고
교수님들도 노골적으로 들어가지 말기를 권하는 분위기 였습니다.
물론 저 부터도 관심이 완전히 없었고요.
당연한것인줄 알고 누렸습니다. 물론 imf의 직격탄으로 군대에 도망가는 세대 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촛불 집회에서 (전혀 집회에 참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간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구경가자는
생각으로 나간 그곳 광화문에서의 모습은 충격이었습니다.)
새벽무렵 40대정도 남자분의 숨죽이는 울음을 듣고서는 참 그렇더군요.
알고보니 저희학교 선배이셨고 나름 사회에서 사업도 하시는 분이었는데 저희학교 총학 후배들이
동십자각에서 얻어 맞고 개끌리듯 끌려가는것을 보시며 우신다고 하시더군요.
참....너무나 당연한 것 인줄 알았고 소중한줄 몰랐습니다.
정말로....후배들의 리플들을 보니 좀 울적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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