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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듯한 한여름의 그 어느날, 저의 친구가 세상에 태어난 아들을 보고 언젠가는 보여줄 편지를 띄웠습니다...

소중한 기억들이 생각저편너머로 가기전에..

친구씀:

또 다른 나로 살아갈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이렇게 극적인 만남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신생아실 유리창을 통해 널 보면서 생전 처음 느껴본 그 신선한 충격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지도 벌써 1년반이나 지났구나.

겨우 엄마, 아빠하고 입을 방긋거리는 너를 두고도 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한 네 눈빛속에 이 애비의 모든 생각과 염원을 담아보느라 하염없이 널 바라볼 때가 한두번이 아니란다.

이시간, 너에게 하는 얘기들은 이 애비가 자칫 피곤한 삶에 찌들어 그 찌든 삶의 찌꺼기로만 훗날 너와 대화하게 될까봐 미리 적어보는 것이란다.

먼훗날 너의 시대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들이 혼란스럽게 얽혀있단다.

삶과 죽음에 대해 이 애비의 생각을 정리하자면 이 애비는 영생을 믿는단다. 그리고 신이란 거대하고 위대한 존재가 있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정작 신의 실재는 믿지 않는단다.

영생을 믿는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죽어서 땅에 묻히더라도 통합된 기억과 사유를 가지지는 못하지만, 살아 생전에 살아온 그 무언가가 나를 구성한 물질 하나하나에 나뉘어져 영원히 이 세상에 남아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흙속에서 나의 모든 것들은 흙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이름모를 벌레의 먹이가 되고, 그래서 꽃들이며, 새들이며 그 생명들의 양식이 되어 그들 몸속에서 잠시 머무를 것이다.

그렇게 끝없이 우주를 떠돌다가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 쌓아온 업에 따라 통합된 의지로 독립된 개체를 부릴 수 있는 그 무언가로 태어나겠지. 그것이 날아다니는 새이든, 저 심해의 물고기든, 아니면 이름없는 들풀이든.

그래서 참을 수 없을만큼 가벼운 존재지만 그 영속됨을 믿고, 그 끝없이 이어지는 인연을 믿기에 결코 하루하루의 삶을 가볍게 내던질 수 없었단다.

아들아!
너로하여 이 믿음들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실현됨을 보았단다. 내살과 피 그리고 뼈를 받은 네가 태어난 순간, 아득한 옛날부터 영속해온 [나]란 존재가 또다른 존재로 환생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단다.

뒷날 네가 자라면서 배우고 체험하고 느낀 것 외에 무언가 너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너만의 성향을 느끼게 된다면... 다른 사람과 분명히 섞일 수 없는 독특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원불멸의 [나]임을 깨닫을 수 있을 것이다.

아들아!
우린 이미 분리된 개체로 살아가고 앞으로 독립된 인격을 형성하게 되겠지만, 우리 둘 사이의 교감만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로 해서 이 애비는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아직은 많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에 대해서 여전히 진지하지 않을 수 없구나. 몸은 떨어져 있어도 너의 슬픔과 고통이 나의 가슴을 짓이겨놓듯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너에게 그대로 교신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아들아!
인생은 소망과 회한의 세월이라 했던가. 아직은 길지않은 생을 살아왔지만 안타까움이 많이 남는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좁아지고, 현실을 공제한 꿈이 아주 조그맣게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래서 또다른 [나]인 너의 존재에 자꾸만 의지하게 되고, 그 꿈을 너에게 불어넣고 싶은 충동에 상념속을 방황할 때가 많단다.

시원스럽지 못한 정치를 보면 너에게 훌륭한 정치가 수업을 시켜볼까... 아니 체계적인 과학공부를 시켜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게 할까... 아니면, 이 애비처럼 성적에 갇힌 학창시절을 보내게 하지말고 많은 걸 느끼고 경험하게하여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게 할까...

그러한 욕심들은 결국 너무 넘쳐 혼란에 빠지게 한단다.

하지만 아들아!
자식에 대한 이러한 소망과 욕심은 인지상정이라고 위안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마음을 비우고, 또다른 [나]인 너이지만 자유로운 [너]로 살아가기를 더 바란다는 말을 하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거란다.

먼 훗날 이 애비가 널 너무나 사랑하기에 하게되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너무 앞서지 말아라", "사자후를 위해 지금은 자신을 죽여라", "그러는 건 너만 손해야..."

이 애비에게 그 말들을 전해준 분들의 애틋한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그 말들에 대해 저항감을 가졌듯이 너도 그러길 소망한다. 철저히 [너]로 살아가주길 바란다.

삶은 유한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너의 시대를 더욱 충실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결코 시지프스의 굴러 떨어지는 바위만을 보고 허무만을 생각지 말아라. 못다 끌어올렸다고 조급해 하지마라. 그것 또한 너의 성취이며, 다음 생을 위한 업이며, 최선의 충실이니까.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어느 사회에서나 부조리가 있어왔다고 배웠고, 이 애비가 사는 이 시대에도 직접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단다. 너희 시대엔 어떨까?

이성과 정신의 세계는 무척 자유롭고 합리적일 수 있다. 그래서 현실과 곧잘 부조화나 부조리를 유발하곤 하지. 결국 그 시대의 현실이 있고, 이상이 있으면 부조리는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인생에 있어서 의의를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아들인 너는 몇번이나 경험하게 될까?

아들아!
우리에겐 교감만이 있을 뿐 무엇으로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구나!

부조리를 겪을 때마다 이 애비는 곧 굴러떨어질 바위지만 힘겹게 밀어올리는 그 노동의 시간에 충실하고 그 고통을 사랑한 시지프스의 신화를 뒷날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구나.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네 눈을 보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마음에 사로 잡힐 때가 많단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걱정스럽고...

네가 다시 자식을 가져야 이 마음을 알 수 있겠지.
다짐한다. 이 애비의 한이든, 소망이든 너에게 전하지 않겠다.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향유하며, 네 삶을 풍요롭게 살아가실 빌 뿐이다.

이 순간 가장 간절한 바램은 너의 건강뿐이구나.

사랑하는 아들아.


- 아들 謙牧이는 93년 7월 26일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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