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디즈니를 비롯한 미국영화사들이 주도해온 애니메이션 영화시장에 올해 새로운 변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가을 국내에 첫 개봉된 재패니메이션으로 관심을 끌었던 무사 주베이가 흥행에 참패했던 것과 달리 이번달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의 추앙을 받아온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30일 개봉 예정)와 공각기동대로 유명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제작을 맡은 인랑(9일 개봉 예정), 그리고 지난해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을 만큼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포켓몬스터(23일 개봉 예정)가 잇달아 간판을 올린다.
일본 만화영화 3편과 대결할 맞수는 미국 드림웍스가 영국 클레이메이션(진흙인형 애니메이션)의 명가(名家)로 꼽히는 아드만 스튜디오와 손잡고 만든 야심작 치킨런(16 일개봉 예정)이다. 국내 개봉될 재패니메이션 3편 중 진지한 문제의식과 셀애니메이션으로서의 최고기량을 뽐내는 진정한 성인만화인랑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비교분석한다.
◆"인랑" / 오시오 마모루
국민을 전쟁병기로 이용한 정부 비판 극사실주의 영상 빛나는 철학작품
관객에게 행복함과 따스함만을 안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달리 재패니메이션에는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산업자본주의의 폐해들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사유하게 하는 휴머니즘적인 작품들이 많다. 또한 재패니메이션은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미야자키 하야오, 다카하다 이사오, 안노 히데야키 등 자신들의 세계를 확실히 가진 작가(Auteur)로 불리는 감독을 가지고 있다. 이들 감독 중에서도 휴머니즘과 작가주의를 가장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 오시이 마모루다.
특히 95년작인 공각기동대에서 그가 보여준 지적이고 철학적인 시나리오와 실사인지 그림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든 극사실주의 영상은 애니메이션 마니아와 영화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오시이 마모루가 제작과 시나리오를 맡고 3년간 8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인랑(원제 人狼감독 오키우라 히로유키)은 공각기동대의 사이보그였던 캐릭터를 인간늑대인 전투요원으로 바꾸어서 여전히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이란 무거운 주제를 사유하게 한다.
인랑의 배경은 2차 대전 패전 후 60년대 일본. 거리에는 실업자들의 격렬한 시위가 끊이지 않고 반정부 레지스탕스 빨간 두건단이 득세하자 정부는 케르베로스라는 특수조직을 만든다. 케르베로스의 정예요원 후세는 폭탄을 운반하는 빨간두건단의 소녀와 맞닥뜨려 그녀를 처참히 사살한 후 고뇌에 빠진다. 그뒤 후세는 그 소녀와 꼭 닮은 아이를 만나지만 자신을 속인 그녀 또한 죽이게 된다.
60년대 일본의 전공투 운동의 일원이었던 오시이 마모루는 당시의 자신의 경험을 시나리오에 투영시켜 국민을 인간늑대처럼 이용한 일본을 비판하고 있다. 인랑은 늑대에게 속아 엄마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시는 빨간 모자동화를 극의 진행과 병치시키는 장치를 통해 비장감을 더하고 있다. 인랑은 기술적으로도 놀라울만한 성취를 얻었다.
울부짖는 주인공들의 얼굴은 실제 사람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해서, 영화를 본 이들에게 어떻게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내면연기를 할 수 있느냐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또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구현하기 힘들다는 물을 실제처럼 그려내고, 화려한 액션신의 배경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여전히 영화가 오락이란 인식이 강한 우리에게 오시이 마모루가 98분 동안 쏟아내는 이 철학적인 작품은 과영양분이긴 하지만, 걸작 애니메이션이 갖춰야 할 요소를 놓치지 않고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에 맞서려는 인간의 무모한 도전 '공존의 가치' 장대한 스케일로 담아 !
미야자키 하야오(宮崎俊) 감독은 TV 시리즈 미래소년 코난, 극장용 장편만화 이웃의 토토로 등으로 이미 국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일단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만으로도 애니메이션 팬들은 귀가 솔깃해질 것이고, 불법 비디오로만 돌아다니던 이 장대한 스케일의 작품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반가워할 이들도 많을 것이다. 명작이고, 대작(大作)이다. 84년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장엄한 영상, 자연과 인간을 잇는 철학의 깊이, 피아(彼我)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반전, 히사시 조의 아름다운 음악 등 눈이 휘둥그러지게 한다.
작품의 배경은 불의 7일간이라는 인류의 대재앙이 지나고 난 1000년 뒤, 부해라는 죽음의 숲 부근에 있는 바람계곡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부해에 사는 거대곤충(옴)들이 자연의 공격이라면, 오염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바람은 자연의 혜택이다. 족장의 외동딸 나우시카는 옴과 바람이라는 자연의 두 얼굴을 이해하는 특수한 능력을 지녔으며, 구원자가 도래해 인류를 청정 대지로 인도할 것이라는 전설을 믿고 있다.
바람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나우시카는 작은 비행정을 타고 날아다니며 성난 옴들을 달래곤 한다. 그러나 부해는 늘어만 가고, 주변 국가들은 부해를 태워없애려는 시도를 한다. 바람계곡 사람들은 자연에 맞선 인간의 무모한 도전에 반대하지만 강국들 틈에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불의 7일간이나 구원자 등 성서적 모티브가 눈에 띈다. 또 인물들의 복장이나 풍차, 검술 따위는 중세유럽풍으로 구성돼 있다. 특기할 것은 작품 전반에서 읽히는 여성성인데, 주인공 나우시카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해와 공존, 공동체주의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미야자키는 이 영화를 연출하기전 잡지에 만화 연재를 시작, 94년에 완결했다. 이 영화는 13년간에 걸쳐 집필한 만화의 앞부분을 극화한 것으로, 미야자키의 첫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면서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그러나 다소 어려운 주제에, 현란한 영상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 감각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어 국내에서도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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