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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잠설

........2001.01.02 21:03조회 수 16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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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잠설(養蠶說)

윤오영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훤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 방에서 누에가 풀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풀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었다. 이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며 엿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안기(催眼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식을 해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1]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최안,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 이령(一齡二齡) 혹은 한잠 두잠 잤다고 한다. 오령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 앉는다. 성가(成家)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共販場)에 가서 특등, 일등, 이등, 삼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꼭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대개 한 때는 문학소년 시절을 거친다. 이때가 가장 독서열이 왕성하다. 모든 것이 청신(淸新)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이때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그의 포부는 부풀 대로 부풀고 재주는 빛날 대로 빛난다. 이때 우수한 작문들을 쓴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는 사색에 잠기고 회의에 잠긴다. 문학서적에서조차 그렇게 청신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혹은 현실에 눈떠서 제 각각 제 길을 찾아가기도 하고 철학이나 종교서적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직 침울(沈鬱)한 사색에 잠긴다. 최안기에 들어선 것이다. 한잠 자고 나서 고개를 들 때, 구각(舊殼)[2]을 벗는다. 탈피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인생을 탐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적으론 극도의 쇠약기다. 그의 작품은 오직 반항과 고민과 기피에 몸부림친다. 이때를 넘기지 못하고 그 벽을 뚫지 못하고 대결하다 부서진 사람들이 있다. 혹은 그를 요사(夭死)한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글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전에 읽었던 글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제 이령(二齡)에 들어선 것이다. 몇 번이고 이 고비를 거듭하는 속에 탈피에 탈피를 거듭하며 자기를 완성해 간다. 그 도중에는 무수한 타락자들이 생긴다. 최후에, 자기의 모든 역량을 뭉치고, 글 때를 벗고[3], 자기대로의 세계에 안주한다. 누에가 고치를 짓고 들어앉듯 성가(成家)한 작가다. 비로소 그의 작품이 그 대소에 따라 일등품, 이등 품으로 후세에 평가의 대상이 된다.

대개 사람의 일생을 육십을 일기(日期)로 한다면 이십대가 일령기요, 삼십대가 이령기요, 사십대가 삼령기요, 오십대가 사령기요, 육십대가 되면 이미 오령기다. 이제는 크든 작든 고치를 짓고 자기 세계에 안주할 때다. 이때에 비로소 고치에서 명주실은 풀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뽕을 먹고 삭이니만치 자기가 부단히 고무되고 고초하고 탈피해 가면 지어 논 고치[경지]만큼, 실을 뽑는 것이다. 칠십이든 구십이든 가는 날까지 확고한 자기의 경지에서 자기의 글을 쓰고 자기의 말을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십대∼육십대로 예를 들어 말한 것은 육체적인 연령을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육체적인 연령에 대비해 보는 것이 알기 쉽기 때문이다. 우수한 문학가는 생활의 농도와 정력의 신비가 일반을 초월한다. 그런 까닭에 이 연령은 천차만별로 단축된다. 우리는 남의 글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논평하는 수가 가끔 있다.

"그 사람 재주는 비상한데, 밑천이 없어서."

뽕을 덜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의 부족을 말함이다.

"그 사람 아는 것은 많은데, 재주가 모자라."

잠을 덜 잤다는 말이다. 사색의 부족과 비판 정리가 안 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읽기는 많이 읽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뽕을 한 번만 먹었다는 말이다. 독서기가 일회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학식과 재질이 다 충분한데 그릇이 작아."

사령(四齡)까지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사람 아직 글 때를 못 벗은 것 같애."

오령기(五齡期)르 못 채웠다는 말이다. 자기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 원로지. 그런데 별 수 없을 것 같아."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구렁 방송이다.

"그 사람이야 대가(大家)지, 훌륭한 문장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일가(一家)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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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잠(起蠶) : 외피를 갓 벗은 누에 새끼.

[2] 구각(舊殼) : 낡은 껍질.

[3] 글 때를 벗다 : 다른 사람의 글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적인 느낌이나 생각을 드러낼 수 있음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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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한결같이 노력하는 '일령기' 녹차가 되겠습니다.
올 한해 여러모로 도와주신 왈바분들꼐 감사드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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