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하군요....
한때 마라톤을 했었던 저로선 그 감동이 더 크게 다가 옵니다.
그 기록이 3시간도 안되다니....
아침에 조선일보 잠간 보다가 퍼왔습니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18평형의 시영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니, 박미경(43)씨가 고개를 내밀었다. 방 두 개와 부엌의 좁은 공간으로 기자는 들어섰다. 그녀가 앉을 자리를 지정해주듯 황급히 상을 폈다. 곧이어 “별로 드릴 얘기가 없는데…”라는 말이 들렸다.
2급 정신지체 장애인(자폐증)인 그녀의 아들 배형진(18)군은 지난 21일 조선일보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57분7초에 뛰었다. 일반인 1만153명과 함께 달려 48등이다. 그녀는 아들의 코치 겸 감독이었다.
“마라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등산은 10년 이상 아이와 함께 다녔어요. 하지만 마라톤은 달라요. 제가 힘이 부쳐 같이 뛸 수 없죠. 마라톤 관련 자료를 찾거나 메모를 해 지도했어요. 가끔 미사리 조정경기장에 데려가 연습시킬 때는 자전거로 따라가곤 했지요.”
아들이 마라톤을 한 것도 우연이다. 98년 봄 아들을 데려 나와 운동장을 돌게 했다. 그런데 한 시간을 뛰어도 지치지 않았다. 그때 마라톤을 시켜볼 만하다 생각했다고 한다.
“정신장애 치료를 위해 맞는 운동을 찾아주려는 거였죠. 운동을 하면 아이의 얼굴은 밝아졌으니까요. 아는 분의 소개로 고 정봉수 코오롱 감독의 댁에 찾아갔어요. 그분이 아이의 발목을 만져보더니 장거리 뛰기에는 좋다고 했어요. 그해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 10km 코스를 완주해 들어오는 장면을 잊지 못해요. 장애인 대회에는 그전에 참가한 적은 있죠. 하지만 이번에는 일반인 틈에 아이가 끼여 있었어요.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마구 울었어요. 아이는 물론 힘들다고 했어요. 그러나 얼굴 표정은 밝았어요.”
그녀는 차분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마구 울었다는 얘기를 할 때도 감정의 기복은 없었다.
“그전까지는 맨날 똑같은 생활이었어요. 아이는 스스로 변화를 못 만들죠. 결혼한 뒤로 저는 아이에게 묶여 있었죠. 제게도 무척 힘든 시기였어요. 봉제 공장을 하는 남편도 어려웠어요.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것이 필요했어요. 아이가 마라톤 대회에 나가 완주한다면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를 계기로 남편의 사업이 잘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었지요. 물론 현실에서는 그런 행운이 오지 않죠.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성취감을 주었지요. 마라톤 완주를 하고 난 아이의 표정은 뿌듯해 보였어요. 저는 삶이 무엇인가를 종종 생각합니다. 그냥 숨만 붙어있다고 살아있는 걸까. 기회가 닿으면 아들을 철인 삼종 경기에도 도전시켜볼 작정이에요.”
그녀는 시간만 나면 아들을 운동시켰다. 지금도 아들은 방과 후에 수영, 볼링, 등산을 교대로 하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날 형진이는 학교에서 볼링을 한 뒤 오후 5시쯤 귀가했다. 그는 싱글벙글거리며 “어-어-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처음엔 줄넘기와 자전거, 롤러스케이트를 가르쳤죠. 또 매일 산에 데리고 다녔어요. 일부러 배낭을 무겁게 했어요. 몸을 지치게 하면 잠이 잘 들고 이상행동이 덜 나와요. 처음에는 안 따라오려고 하죠. 아이는 집착과 고집이 세요. 그러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운동을 시켰죠. 아들을 너무 혹사시킨다, 심지어 계모라는 소리도 들었죠. 그러나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겪는 제 고통을 어떻게 알겠어요. 혼자 설 수 있도록 만들자, 일찌감치 습관을 잡아야 한다고 마음먹었죠. 아이는 좋아지고 있어요. 요즘 일상적인 것은 혼자서 해요. 학교도 혼자 다녀요. 남한산성까지 버스 타고 등산갈 때도 더 이상 제가 따라가지 않아도 돼요. 자폐아를 가진 부모들은 이제 저를 부러워해요. 마라톤을 완주한 우리 아이가 어떤 가능성을 줬는지 모르죠.”
그녀는 아들이 결승점에 들어올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기자는 이 단정한 여인의 눈물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누선을 건드려도 울지 않았다. 다음날 그녀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자존심 때문에 남 앞에서는 잘 울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자가 다녀간 뒤 혼자 방 안에서 통곡했다고 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화선을 통해 그녀의 흐느낌이 들렸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을 다니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했다. “당초 결혼할 때만 해도 행복하게 살 거라고 여겼죠”라며 그녀는 씩 웃었다.
“그런데 단란해야 할 가정이 전쟁터였어요. 처음에는 그냥 늦된 아이인 줄로 알았지요. 말을 전혀 안 하고, 손가락을 이상하게 놀리고, 타인과 눈을 맞추지 않았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다가 자폐증이라는 걸 알게 됐죠. 그 뒤로 제 인생은 없어졌어요. 아이 곁을 늘 쫓아다녀야 했어요. 남에게 실수할지 모르니까. 지금도 여전히 불안해요.
이번 마라톤이 끝난 뒤 식당에서 아이가 물 마시러 가다 옆 사람을 밀쳤어요. 그분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죠. 물 마시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아이는 그냥 지나갔어요. 이런 식이죠. 신체 장애인은 자기 표현을 할 수 있으나, 정신 장애인은 보호자가 대신 해줘야 해요. 대처능력이 없으므로 설령 어른이 돼도 보호자가 필요해요.”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녀는 매일 학교에 같이 다녔다. 수업시간에는 나란히 교실에 앉았다. 아들이 정상인과 함께 어울리는 걸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장애인을 위한 한국육영학교로 옮겨야 했다.
“대학병원에서 언어치료도 받았어요. 저도 아이를 앉혀놓고 열심히 가르쳤어요. 아이에게는 모방 학습 능력이 전혀 없어요.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무너졌죠. 아이에게 화가 났고, 그러면 아이의 이상행동은 더 심해졌죠. 가족 모두가 절망했어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어차피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면 신체라도 개선해보자고 마음먹은 거죠.”
멀쩡한 자식도 키우려면 속이 타는데, 그녀는 지쳐 포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렸을 때는 아이를 때리고 같이 절망적으로 울었어요. 제 인생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요. 우울증에 걸렸죠. 늘 위장병을 앓고 있어요. 이 아이를 위해 내가 희생한 걸까, 아니면 부모로서 당연한 노릇인가, 이런 심적 갈등을 수백 번도 더 겪었어요. 그럴 때마다 이 아이를 잘 키우는 게 더 의미가 있다, 나 자신의 문제까지 따질 여건이 아니라고 최면을 걸지요.”
그녀는 “이 아이가 마치 제 존재 이유처럼 되어버렸어요. 남들은 왜 그렇게 아이에게 집착하느냐고 말합니다. 저도 가끔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자신에게 물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게는 아이를 떠넘길 사람이 없어요. 아이를 키울 작정을 하면서 다른 것은 다 포기했어요. 아내로서의 역할도 포기했어요. 평생을 이렇게 산다는 것은 너무 불행하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어요. 그러나 저보다 더 심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걸 떠올리죠. 이것이 제게 주어진 운명인지 모르죠.”
그녀에게는 정상적인 둘째 아들(고2)도 있다.
“어린 시절 둘째 아이가 급우들을 생일 파티에 초대했어요. 생일상을 다 차려놓았죠. 그런데 아무도 안 왔어요. 자폐증에 걸린 형이 있다는 이유였죠. 한 아이로부터 ‘우리 엄마가 정신병자와 어울리지 말라고 했어요’라는 말을 들었어요. 저는 속으로 울면서 정말 이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세월이 가면 그녀도 늙고 병들 것이다. 언제까지 아들의 후견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하면 제가 지금까지 힘들게 해온 게 너무 허무해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것이 한계구나, 정말 그게 답답해요. 아이가 비록 정신적 장애가 있지만 전문적인 마라톤 훈련을 받아볼 수는 없을까. 그러면 어느 정도의 변화가 올까 궁금해요. 아이를 통해 한번 그 한계를 넘어보고 싶어요. 주변 사람들은 ‘그 정도면 됐지 왜 또 욕심이냐’라고 합니다. 정말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걸까요?”
( 인터뷰=최보식기자 congchi@chosun.com )
한때 마라톤을 했었던 저로선 그 감동이 더 크게 다가 옵니다.
그 기록이 3시간도 안되다니....
아침에 조선일보 잠간 보다가 퍼왔습니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18평형의 시영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니, 박미경(43)씨가 고개를 내밀었다. 방 두 개와 부엌의 좁은 공간으로 기자는 들어섰다. 그녀가 앉을 자리를 지정해주듯 황급히 상을 폈다. 곧이어 “별로 드릴 얘기가 없는데…”라는 말이 들렸다.
2급 정신지체 장애인(자폐증)인 그녀의 아들 배형진(18)군은 지난 21일 조선일보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57분7초에 뛰었다. 일반인 1만153명과 함께 달려 48등이다. 그녀는 아들의 코치 겸 감독이었다.
“마라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등산은 10년 이상 아이와 함께 다녔어요. 하지만 마라톤은 달라요. 제가 힘이 부쳐 같이 뛸 수 없죠. 마라톤 관련 자료를 찾거나 메모를 해 지도했어요. 가끔 미사리 조정경기장에 데려가 연습시킬 때는 자전거로 따라가곤 했지요.”
아들이 마라톤을 한 것도 우연이다. 98년 봄 아들을 데려 나와 운동장을 돌게 했다. 그런데 한 시간을 뛰어도 지치지 않았다. 그때 마라톤을 시켜볼 만하다 생각했다고 한다.
“정신장애 치료를 위해 맞는 운동을 찾아주려는 거였죠. 운동을 하면 아이의 얼굴은 밝아졌으니까요. 아는 분의 소개로 고 정봉수 코오롱 감독의 댁에 찾아갔어요. 그분이 아이의 발목을 만져보더니 장거리 뛰기에는 좋다고 했어요. 그해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 10km 코스를 완주해 들어오는 장면을 잊지 못해요. 장애인 대회에는 그전에 참가한 적은 있죠. 하지만 이번에는 일반인 틈에 아이가 끼여 있었어요.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마구 울었어요. 아이는 물론 힘들다고 했어요. 그러나 얼굴 표정은 밝았어요.”
그녀는 차분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마구 울었다는 얘기를 할 때도 감정의 기복은 없었다.
“그전까지는 맨날 똑같은 생활이었어요. 아이는 스스로 변화를 못 만들죠. 결혼한 뒤로 저는 아이에게 묶여 있었죠. 제게도 무척 힘든 시기였어요. 봉제 공장을 하는 남편도 어려웠어요.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것이 필요했어요. 아이가 마라톤 대회에 나가 완주한다면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를 계기로 남편의 사업이 잘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었지요. 물론 현실에서는 그런 행운이 오지 않죠.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성취감을 주었지요. 마라톤 완주를 하고 난 아이의 표정은 뿌듯해 보였어요. 저는 삶이 무엇인가를 종종 생각합니다. 그냥 숨만 붙어있다고 살아있는 걸까. 기회가 닿으면 아들을 철인 삼종 경기에도 도전시켜볼 작정이에요.”
그녀는 시간만 나면 아들을 운동시켰다. 지금도 아들은 방과 후에 수영, 볼링, 등산을 교대로 하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날 형진이는 학교에서 볼링을 한 뒤 오후 5시쯤 귀가했다. 그는 싱글벙글거리며 “어-어-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처음엔 줄넘기와 자전거, 롤러스케이트를 가르쳤죠. 또 매일 산에 데리고 다녔어요. 일부러 배낭을 무겁게 했어요. 몸을 지치게 하면 잠이 잘 들고 이상행동이 덜 나와요. 처음에는 안 따라오려고 하죠. 아이는 집착과 고집이 세요. 그러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운동을 시켰죠. 아들을 너무 혹사시킨다, 심지어 계모라는 소리도 들었죠. 그러나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겪는 제 고통을 어떻게 알겠어요. 혼자 설 수 있도록 만들자, 일찌감치 습관을 잡아야 한다고 마음먹었죠. 아이는 좋아지고 있어요. 요즘 일상적인 것은 혼자서 해요. 학교도 혼자 다녀요. 남한산성까지 버스 타고 등산갈 때도 더 이상 제가 따라가지 않아도 돼요. 자폐아를 가진 부모들은 이제 저를 부러워해요. 마라톤을 완주한 우리 아이가 어떤 가능성을 줬는지 모르죠.”
그녀는 아들이 결승점에 들어올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기자는 이 단정한 여인의 눈물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누선을 건드려도 울지 않았다. 다음날 그녀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자존심 때문에 남 앞에서는 잘 울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자가 다녀간 뒤 혼자 방 안에서 통곡했다고 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화선을 통해 그녀의 흐느낌이 들렸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을 다니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했다. “당초 결혼할 때만 해도 행복하게 살 거라고 여겼죠”라며 그녀는 씩 웃었다.
“그런데 단란해야 할 가정이 전쟁터였어요. 처음에는 그냥 늦된 아이인 줄로 알았지요. 말을 전혀 안 하고, 손가락을 이상하게 놀리고, 타인과 눈을 맞추지 않았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다가 자폐증이라는 걸 알게 됐죠. 그 뒤로 제 인생은 없어졌어요. 아이 곁을 늘 쫓아다녀야 했어요. 남에게 실수할지 모르니까. 지금도 여전히 불안해요.
이번 마라톤이 끝난 뒤 식당에서 아이가 물 마시러 가다 옆 사람을 밀쳤어요. 그분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죠. 물 마시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아이는 그냥 지나갔어요. 이런 식이죠. 신체 장애인은 자기 표현을 할 수 있으나, 정신 장애인은 보호자가 대신 해줘야 해요. 대처능력이 없으므로 설령 어른이 돼도 보호자가 필요해요.”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녀는 매일 학교에 같이 다녔다. 수업시간에는 나란히 교실에 앉았다. 아들이 정상인과 함께 어울리는 걸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장애인을 위한 한국육영학교로 옮겨야 했다.
“대학병원에서 언어치료도 받았어요. 저도 아이를 앉혀놓고 열심히 가르쳤어요. 아이에게는 모방 학습 능력이 전혀 없어요.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무너졌죠. 아이에게 화가 났고, 그러면 아이의 이상행동은 더 심해졌죠. 가족 모두가 절망했어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어차피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면 신체라도 개선해보자고 마음먹은 거죠.”
멀쩡한 자식도 키우려면 속이 타는데, 그녀는 지쳐 포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렸을 때는 아이를 때리고 같이 절망적으로 울었어요. 제 인생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요. 우울증에 걸렸죠. 늘 위장병을 앓고 있어요. 이 아이를 위해 내가 희생한 걸까, 아니면 부모로서 당연한 노릇인가, 이런 심적 갈등을 수백 번도 더 겪었어요. 그럴 때마다 이 아이를 잘 키우는 게 더 의미가 있다, 나 자신의 문제까지 따질 여건이 아니라고 최면을 걸지요.”
그녀는 “이 아이가 마치 제 존재 이유처럼 되어버렸어요. 남들은 왜 그렇게 아이에게 집착하느냐고 말합니다. 저도 가끔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자신에게 물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게는 아이를 떠넘길 사람이 없어요. 아이를 키울 작정을 하면서 다른 것은 다 포기했어요. 아내로서의 역할도 포기했어요. 평생을 이렇게 산다는 것은 너무 불행하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어요. 그러나 저보다 더 심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걸 떠올리죠. 이것이 제게 주어진 운명인지 모르죠.”
그녀에게는 정상적인 둘째 아들(고2)도 있다.
“어린 시절 둘째 아이가 급우들을 생일 파티에 초대했어요. 생일상을 다 차려놓았죠. 그런데 아무도 안 왔어요. 자폐증에 걸린 형이 있다는 이유였죠. 한 아이로부터 ‘우리 엄마가 정신병자와 어울리지 말라고 했어요’라는 말을 들었어요. 저는 속으로 울면서 정말 이 아이를 잘 키워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세월이 가면 그녀도 늙고 병들 것이다. 언제까지 아들의 후견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하면 제가 지금까지 힘들게 해온 게 너무 허무해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것이 한계구나, 정말 그게 답답해요. 아이가 비록 정신적 장애가 있지만 전문적인 마라톤 훈련을 받아볼 수는 없을까. 그러면 어느 정도의 변화가 올까 궁금해요. 아이를 통해 한번 그 한계를 넘어보고 싶어요. 주변 사람들은 ‘그 정도면 됐지 왜 또 욕심이냐’라고 합니다. 정말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걸까요?”
( 인터뷰=최보식기자 congch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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