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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를 하다

진이헌규2003.06.02 15:26조회 수 590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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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분당 율동공원에서 번지점프를 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사실 율동공원 번지점프... 별로 안높습니다.

근데 제가 어렸을때 아파트 12층에서 살았거든요?
하필이면 이노무 번지점프대 높이가 딱 그정도인거 있죠.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 어렸을때의 공포어린 기억들이
꿀렁거리는 기억 밑바닥에서 기어오르는 시커먼 벌레들마냥
서서히 촉수를 뻗쳐오던 그 느낌...

야... 여기서 내가 과연 뛰어내릴 수 있을까? 진짜?
하얗게 표백돼버린 머리속에는 "줄이 끊어지면 어떡하지?"
"점프대 탑이 바람에 넘어지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은
아예 들어갈 자리가 없더군요.

딱 한발만 앞으로 디디면,
평소에 그렇게도 나를 구속하던 중력의 당김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 힘에 몸을 완전히 내맡겨 추락함으로 오는
자유감을 맛볼 수 있을텐데,

아무리 안전하다고 이성으로 확신해도
높이의 차이에서 오는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감과.
단 한걸음 앞의 자유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나를 구속하던 그 힘에 여전히 속박당하고싶어하는
내 자신에 대한 무력감...

며칠전에 회사에 사표를 냈습니다.
3년 반동안 다녔지만, 항상 외부파견직이었기 때문에
친한 선후배도, 애정도 없는 회사였지만,
(제킬님도 왈바 아니었으면 그냥 얼굴아는 선배였을껄요?)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첫직장이고,
다음 회사를 정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던지는 사표는
꽤나 묵직하게 느껴지더군요.

"야... 과연 내가 이걸 던질 수 있을까?"

그동안 내게 회사란,
친구들과의 술자리, 흥미땡기는 세미나나 토론회,
하다못해 어느 볕좋은 오후에 밖으로 싸돌아다니고싶은 충동까지도
꽉꽉 죄고 눌러왔던 존재였습니다만,

또 이렇게 자유로운 곳으로 한발짝 디디려고하니
그 구속감이 오히려 그리워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순간에 자전거 생각이 나더군요.

왜냐하면...
주변에 유난히도 나이먹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뭐 주변에 많기만 한게 아니라, 나도 그중의 한사람이죠.

한쪽에는 IT 개발자라는 아직 안정화되지 않은(근데 과연 안정화될까요?)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이 '30대 중반 넘어서는 이 직업
계속하기 힘들다. 뭔가 딴걸 잡아야된다'는 불안감 속에 서있고,

또다른 한쪽에는 대학시절 학생운동의 경험을 그냥
'좋은 추억'으로 정리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그 경험을
현재의 삶과 결합시키지도 못하면서 어정쩡하게
나이만 먹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내게 인생이란, 더 나이를 먹고 30, 40이 되기 전에
무언가 내 인생의 큰 월척을 낚아올려야만 하는,
이미 반환점이 정해져있는 레이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와 왈바의 수많은 라이더들을 접하게 되면서,
삶은 숨을 멈추는 그순간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라는
정말 단순한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이립이든 약관이든 지천명이든 자전거는 탈수록 느는 것이고,
또 한번 타기 시작한 자전거는 절대로 까먹지 않는 것처럼,
삶도 그와 같이 살아갈수록 느는 것이고,
나이란 결코 허투루 먹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회사를 떠나는 발걸음의 뒤꿈치를 잡아끌던 공포감도
꼭 포샵에서 blur를 준것처럼 (표현이 이상한가요?)
그 존재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훨씬 받아들이기 쉽게 변하더군요.

이번에 그만두면 한달 반정도 여행을 다녀와서 좀 쉬다가,
그담에는 여건이 허락한다면 한 반년에서 일년정도
개인적으로 해보고싶었던 일을 하려고 합니다.

IT기술자로서의 경력관리에는
다소 문제가 되겠지만, 뭐... 신경 안쓰기로 했습니다.

당장 다음 회사를 구해야한다는 공포심에서 벗어나,
당분간 자유낙하에서 오는 불안한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개인시간 벌어 자전거도 타고, 이 기회에 초보티도 벗어야지 싶네요.
저랑 비슷한 시기에 입문한 분들이 지금은 다들 날아댕기고 있으니...

ps.
원래는 1000포인트 넘기려고 그냥 쓴 글인데 이렇게 길어졌군요.
이것도 왈바병의 일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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