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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 안나푸르나

바보이반2010.03.28 18:45조회 수 1641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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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jpg

 

카트만두에 와서 어정거리면서 닷새를 쉬고 나니 지친 몸과 마음이 얼마쯤 회복되었다.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를 가기 위해 며칠 전에 항공권을 예약해 놓았었다. 동행자는 마음내켜 하지 않았지만, 나는 오로지 안나푸르나를 보기 위해 네팔에 들어올 때부터 별러 왔었다.

언제부터인지 안나푸르나라는 이름이 내게는 아주 정답게 들려왔다. 히말라야의 그 많은 봉우리 중에서도 안나푸르나 히말이 아주 친근하게 다가서곤 했다.

오후 3시 25분, 예정시각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포카라행 18인승 프로펠러기는 이륙했다. 카트만두에서 서쪽으로 2백km 떨어져 있는 호반의 도시 포카라. 오른쪽 창문으로 내다 보이는 히말라야의 연봉들은 신비와 장엄의 베일에 싸여 있는 듯싶었다. 기내 방송으로 마나슬루,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등 귀에 익은 히말라야의 이름들이 거론되었다. 이륙한 지 불과 30분 너무도 아쉽게 포카라 공항 풀밭에 착륙했다.

초라한 공항 청사 위로 피라미드형으로 우뚝 솟은 안나푸르나를 보는 순간, 나는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마침내 그리던 안나푸르나 앞에 마주 선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나는 여행의 기쁨을, 삶의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 안나푸르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네팔에 들어온 보람이 있었다.

우리 불일암의 앞마루 벽에는 몇 해 전부터 컬러로 된 안나푸르나의 사진이 조그만 액자 속에 걸려 있다. 조석으로 대하던 이 사진을 현장에 와서 실물 앞에 마주 선 그 감동은 내 감성을 한껏 부풀게 했다. 무례한 세관관리의 짐검사쯤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었다.

택시를 타자마자 호텔 안나푸르나로 가자고 했다. 그 호텔이 어떤 수준의 호텔인지도 모르고 안내 책자에 나온 그 이름 하나만으로 그 곳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나푸르나는 이미 만원, 빈방이 없었다. 호반에 있는 호텔이 좋을 거라는 운전사의 말을 듣고 그 곳에 가 보았지만 정작 안나푸르나늘 볼 수 있는 전망이 안 좋아 가장 전망이 좋은 호텔로 가자고 했다.

거리 외곽에 위치한 그 호텔은 방은 좀 엉성했지만 안나푸르나를 마주할 수 있는 전망만은 그만이었다. 출입구와 창문이 산을 향한 서북쪽으로 나 있어 햇볕은 볼 수 없지만 누워서도 커튼만 젖히면 안나푸르나를 내다볼 수 있는 방이었다. 한겨울철이라 밤낮을 가릴 것 없이 몹시 추워서, 있는 대로 옷을 껴 입어야 했다.

페와 호수와 안나푸르나의 전망으로 여행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포카라는 히말라야에서 흘러내린 시냇물 덕에 초록이 무성한 분지의 도시다.

포카라란 지명은 호수를 의미하는 네팔어 포카리에서 왔다는 것. 표고 8백m에서 900m, 카트만두보다는 높지 않다.  표고 8백m에서 8천m 급 히말라야를 바로 그 턱밑에서 쳐다보기 때문에 그 고도의 차는 대단하다.

이곳 포카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피라미드형으로 우뚝 치솟은 해발 6,993m의 이 봉우리를 이곳 에서는 마차푸차레라고 부른다. '물고기의 꼬리'란 뜻. 지상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산에 올라 서쪽에서 바라보면 그 정상은 마치 물고기의 꼬리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고 한다.

이 봉우리는 안나푸르나 제3봉에서 남쪽인 포카라 쪽으로 뻗어내렸기 때문에 7천m에서 8천m의 안나푸르나 연봉을 배경으로 하여 한층 더 높게 보인다. 그 좌우에 있는 8천m급의 다울라기리나 마나슬루보다 높게 보이는 것은 거리상으로 더 가깝기 때문이다.

12월인데 벚꽃이 한창이었다. 이곳은 봄과 겨울 한 해에 두 차례씩 벚꽃이 핀다고 했다. 거리에는 봄기운을 느끼게 하는 연분홍삧 벚꽃이 활짝 피어 있는데, 산은 흰눈으로 덮여있어 꽃과 함께 雪山이 다 같이 신비스럽게 보였다.

호텔 옥상에 올라가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안나푸르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내 안에서 향기로운 행복이 부시럭부시럭 날개를 펴려고 했다. 이런 산을 항시 마주하고 산다면 참으로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시사철 산에서 사는 처지이면서도 새로운 산 앞에서 삶에 대한 잔잔한 기쁨과 고마움을 누리고 있는 것은 조촐한 복이 아닐 수 없다.

꼬박 이틀 동안 틈만 나면 호텔 옥상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도하듯 안나푸르나와 마주하면서 無心을 익혔다. 명산과 마주하고 있으면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명상에 잠기기엔 아주 적합한 대상이다. 지치고 닳아진 내 심신이 안나푸르나에 기대면서 맑고 투명하게 씻겨지는 것 같았다. 만약 이번에 포카라에 오지 않았더라면 네팔을 찾아온 보람이 없을 것 같았다.

해돋이 때의 안나푸르나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어둠에서 깨어난 안나푸르나는 소녀의 얼굴처럼 청순하고 앳되어 보였다. 안나푸르나를 하직하던 날 카트만두행 쌍발 프로펠러기는 포카라의 상공을 한 바퀴 선회하는 바람에, 나는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작별의 인사를 보낼 수 있었다. 잘 있게, 안나푸르나여!

(하략)

법정스님, 인도기행 중에서.

 

   날이 맑은 일요일, 감기 때문에 종일 집에 있으면서 법정스님의 책을 꺼내 뒤적여봤습니다. 경외의 대상인 안나푸르나를 만나 감동을 느끼는 부분이 정겹게 느껴지더군요. 과연, 산은 선승도 우러러보는 것인가 보네요.

   자승인지 자박인지, 땡초 하나가 불교계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즈음, 법정스님의 맑은 음성을 떠올리면서 화를 가라앉히고자 글을 타이핑했습니다.

   악이라고 혐오하지 말고, 선이라고 친하지 말라는 '경구'가 있더군요. 선과 악이라는, 분별로 인한 가치 판단도 상대적인 것이고,  지나고 나면 선이든 악이든 결국 모두 무상한 거 아니겠는가 하는 뜻이겠죠.

   평소엔 그 말을 불교적 허무주의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감기 때문에 모두가 시들해 보이는 요즘,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안나푸르나를 마주하고 있으면 선이든 악이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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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이상하리 만치 큰 산의 사진을 마주 보면 숨이 턱 막히며

    흥분을 합니다.

    사진이 비록 선명 하진 않지만 흥분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네요.

    부럽습니다.

  • ㅋㅎ 밑에 탑돌이님 글 보구...

  • 순간 이반님 기행문으로 착각을..

    '인도 기행', 읽어 보고 싶었는데. 품귀라 구하기도 쉽지 않겠죠?

    이 좋은 봄에 감기 걸리시다니,,,저라면 참 억울할 것 같습니다.

  • 히말라야를 접할 기회가 있으려나.

    덕분에 간접적으로나마 시원한 사진을 봅니다.

  • 어이쿠....

     

    실컷 장문의 글을 쓰고 기껏 한다는것이..어이쿠네요.

    아 놔~~ 자연앞의 소심함이라 치부하고 싶슴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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