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00세 쪽에 더 가까우신 어르신은 치매에 걸려 그토록 어여삐 하시던 막둥이마져
몰라보신다. 3년전만 해도 해가 지는 쓸쓸한 초겨울 홀로 누워 계시는 방에 소리없이 들어가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인기척에 눈을 뜨시고는 어둠속에서도 "막둥이 언제 왔어" 하셨다.
"빨리 죽어야 하는디...."
"...........좀 어떠세요?
"이거시 사는게 아니랑게..........니 자식들은 잘 크냐?
"예..................."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신다는 입버릇 속에 일년에 겨우 몇번 생색내듯 찾아 뵙는 자식을
보시고도 썩 반겨 하시지는 않으셨다. 하기사 평생 자식들에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시지도 않으셨지만.
어른은 꽃을 좋아 하셨다.
철따라 일거리가 쌓이는 농가 마당 한가운데 떠억하니 화단을 만드실 정도였으니까.
일찌기 농대를 졸업하고 농진청에 다시시던 큰형님에게 하명하셔서
당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온갖 꽃들을 많이도 심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나라에 막 도입하기
시작한 칸나, 글라디올러스, 사루비아 등등 서양 꽃들이 대부분이었다.
실용적이신 어머니께서는 이내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남편의 권위에 도전하는 그런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 아버지께서 대문 옆 우물가에 탐스러운 쩔죽을 심으신 때는 아마 여든을 넘기셨을 때다.
말년에 뎅그머니 커다란 시골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사시면서 불편한 '마누라' 병수발을 들던
무렵일 것이다. 어머니 배설물로 얼룩진 내의를 빠시느라 고단해진 심신을 달래 줄
친구 하나 두는 마음으로 그 꽃을 심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를 평소 봐두신 합장 묫자리에 묻으시고 나서도 몇년간을 홀로 시골집을 지키며 사셨다.
어느 해, 며느리들이 설음식 장만 후 뿌려 놓은 설겆이 물이 얼어붙은 마당에서
넘어져 대퇴골 골절상을 입으신 뒤에야 '자식들 신세'를 지기 시작하셨다.
아버님이 계시지 않아도 난 5월이면 휴가를 얻어 시골집에 들르고 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대문 우편함에도 우편물이 꼬박꼬박 배달되었다.
부고장
사슴 사육자 협회 회보
농지조합세 독촉장
청첩장
경로잔치 초대장
국회의원 후보자 이력서......
심지어 나의 중학교 동창회에서 보내는 '추석맞이 동창회 안내장'까지도...
이런 추억물을 뒤로 하고 대문을 들어서면
아! 철죽 꽃.......화사한....
눈물이 흐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봐주는 이 없는 집에서
떠나간 이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피를 토하듯 붉게 피어난 철쭉 꽃.
어머니 무덤에 꽃치마를 둘러 놓은 듯 하다.
'집으로 모셔가는게 좋겠습니다. 편히 계시다 돌아가시게...."
부친께 말기 '대장암' 선고를 내리는 의사의 말이다.
자식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모시고 나왔다.
작년 이맘때 나는 타양살이를 떠나며
'생전의 부친께 드리는 마지막 인사'라는 각오로
작별 문안을 드렸다.
'어디 불편한데는 없으세요?"
'응, 아픈디는 없어. 근디 빨리 죽어야 하는디....누구여........?"
아버지는 말상대가 막내 자식임을 알지 못하셨다.
그져 정말 평온하신 표정이시다. '말기 암'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시는 듯....
"아버지? 잘 계셔~어..."
며칠전 국제전화선을 따라 구르듯 들려오는, 아버지를 모시는 형수님의 호들갑 스런 '하소연(?)' 이다.
"밥 잘드시고, 잠도 잘 주무시고 혈색도 더 좋아지셨당게...."
"사람만 몰라보지 멀쩡허당게...백살도 넘게 사시것어"
"정신이 없응게 신간은 더 편하신가봐..............."
참 질긴 삶을 살고 계시다.
지금쯤 시골집에는 철죽이 만발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몸짓으로 피어 올랐을 것이다.
부질없는 기다림 처럼 슬픈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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