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같이 자주 라이딩을 했던 동호인 중에 자전거 핸들바 속에 비상금으로 5만 원을 꼭 넣고 다니던 사람이 있었다. 당시엔 '지갑이나 주머니만 있으면 되지 뭘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난 토요일에 모처럼 상암동까지 왕복 90km 라이딩에 나섰다가 호되게 경을 친 뒤로 생각이 달라졌다.
▲길 가에 화사한 장미가 지천으로 피었다.
자고 일어나니 아침밥 생각이 별로 없던 데다가 '불광천에 접어들기 전의 마지막 강변 매점에서 늘 그렇게 했듯 도착해서 컵라면이나 하나 사서 먹자'고 마음을 먹고 출발하면서 점심도 거른 상태였는데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무더위인 걸 모르고 방풍자켓을 떡하니 걸치고 현관문을 열고 나섰는데 복도에서 열기가 확 다가드는 게 아닌가. 부랴부랴 되돌아와 방풍자켓을 벗어던지고 반팔 저지만 입고 출발했던 것인데 지갑이 그 방풍자켓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던 것이다. 엉엉.
상암동 매점에 들려 버릇대로 돈부터 확인을 했는데 주머니가 텅....아뿔싸~!. 상도동에 산 세월이 30년이라 전화 한 통 해서 '나와서 밥 좀 사 다오.'하면 두말 않고 나올 후배들이 몇 있긴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염치도 좀 알아가는지 그런 주변머리도 발휘하지 못하고 쫄쫄 굶은 배로 퇴각을 하자니 이만저만 기력이 빠지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조그만 병에 담아 갔던 보리차는 무더위에 이미 떨어지고 둔치의 수둣물을(아리수라나.) 세 통이나 받아서 오는 중에 마셨다. 끄억~염소 향기. (물배라도 채운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방학동 인근에 다다를 무렵엔 거의 탈진해서 벤치에 한동안 널브러져 있었는데 누군가의 고함이 들렸다. "친구를 보고 아는 척도 않는 거얏? 그런데 뭔 낮술을 그렇게 마셨대?" 내가 너무 지쳐서 걸음을 비실비실 걸었더니 술을 마신 줄 아셨나 보다. 이 냥반이 나보다 열 살이나 위이신, 그러나 엄청난 내공을 가지신 분인데 몇 년 동안 '어르신, 어르신'했더니 기분이 좋지 않다며 "그냥 친구 먹자고." 하시는 바람에 근 5년여를 서로 만나면 '친구~" 하면서 반기며 지내는데 요즘은 내가 한 술 더 떠서 그 형님이 '어이~ 친구 반갑네!" 하면 "내가 생일이 1월이라서인지 사실 친구 소릴 들을 때면 약간 서운해요."하며 적반하장인지 땡깡인지를 부리고 있다.
▲환갑 기념으로 로드바이크를 장만할 생각이었는데 주위에서 권하는 이가 하도 많아서 아무래도 5년쯤 계획을 당겨야겠다.
아무튼 원군을 만난 게 너무 반가워 "빨리 먹을 것 좀 사 주세요."하고 소리쳤다. 삶은 계란 두 개, 망고 쥬스 한 개를 허겁지겁 먹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사연을 들은 그 냥반, "역시 친구밖에 없지?" "누가 아니랍니까. 하하하. 정말 친구밖에 없습니다." 삽십여 분을 이런저런 이야기로 보내다가 집을 향해 페달을 밟는데 역시 한결 가뿐했다.
앞으로 나도 불의의 상황에 대비해 단돈 3만 원이라도 핸들바 속에 꽁치고 다녀야겠다.
도로를 질주하고 땀을 많이 흘린 뒤라 마시긴 했는데 역시 난 술엔 숙맥이다. 500cc 한 잔에 어질어질, 가슴이 콩닥콩닥...에잇!
여러분도 자전거 어디에 비상금을 넣어 두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자전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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