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 더우니 겨울 산행 사진이나 올려야겠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제3자들은 전화를 통해서 들리는 나와 아버님의 목소리가 정말 똑같다며 여간해서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그로 인한 에피소드가 꽤 많은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한 번은 내가 스무 살 무렵이던가? 전화가 왔기에 수화기를 집어들었더니 큰누님의 단짝 친구인 누님의 전화였다. "여보세요?"했더니 역시 아버님이 받으시는 줄 알고 "어머? 아저씨세요? 그간 안녕하셨어요?"하는 게 아닌가. 장난끼, 심술끼 하면 또 내가 아니던가. 곧바로 아버님의 어투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랴, 잘 지냈냐? 요즘 통 놀러오지는 않고 전화만 하냐?"
"어머, 너무 죄송해요. 아저씨. 먹고사는 일이 바쁘다고."
"언제 올 거냐?"
"네. 내일 일요일이라 쉬는 날이니 한 번 찾아뵐게요. 00이 집에 있어요?"
"어디 잠시 나갔는 개비다. 올 때 빵하고 과자 좀 많이 사 오너라."
"에? 아저씨? 술이 아니고요?"
"내가 언제 술을 먹더냐?"
"세상에, 아저씨처럼 약주를 좋아하시는 분이 어디 계시다고.."
"그리고 아저씨 소리 그만 해라. 거북하다. 사실은 말이다...
누나, 나야. 크하하"
"이....이.....때려죽일 놈 같으니라구."
지금은 작고하셨지만(ㅠㅠ)집에 지주 놀러오시는 이웃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우리집 식구들과 어찌나 친했는지 친할머니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시던 분이었다. 휴일에 낮잠을 자다 그 할머니 전화를 받았다. 자다 깬 나의 목소리가 흡사 아버님께서 만취하셨을 때의 목소리와 흡사했던 모양이다.
"여보세요?"
"아이구, 00아범. 술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네."
"술 안 마셨는데요?"
"시침 뗀다고 내가 모르남?"
"정말 안 마셨...(아하, 내가 아버님인 줄 아시는가 보다)
에휴, 정말 술을 좀 줄여야 할 텐데요."
"그려, 몸 생각해야지. 시방 거기 갈 건데 한 병 사 갈까?"
"그러지 마시고 돈으로 주세요."
"별일이네? 어째 술을 다 마다한대?"
"오늘은 그냥 돈으로 주세요.친구들 만나러 나가야 되는데
돈이 한 푼도 없슈.."
"가만....이거 이거..이놈...너 00지?"
"으하하하..아이고 할머니 허구헌 날 듣는 제 목소리도 모르시다니.."
(휴~그 할머니가 너무 그립다.)
반면에 똑같은 목소리 탓에 아버님도 비슷한 경우를 잘 당하셨다. 동네에 어머님과 친하게 지내시던 친구분이 계셨는데 그 분의 전화를 아버님께서 받으셨는데 내가 받은 줄 아셨는 모양이다. 대뜸,
"엄마 바꿔라."
했는데 촉이 워낙 빠르신 아버님께선 금방 눈치를 채시고는 시치미를 뚝 떼시고(내가 장난끼 8단이라면 아버님은 입신인 9단이시다)
"우리 엄마 돌아가셨는데요?"
하고 대답하셨다. 놀란 그 아주머니가 미처 수화기를 막을 경황도 없이 자기 딸을 큰 소리로 부르며
"얘..큰일났다. 아저씨인 줄 모르고 내가 실수했나 봐. 이걸 어째.."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압권은 내 친구녀석이 한 전화다. 다섯 단짝 중 가장 소심한 편이고 숫기가 없는 친구가 군에 입대했다가 첫 휴가를 나와서 전화를 했는데 하필 아버님께서 받으셨다. 이 친구가 내가 받은 줄 알고 친구 사이에서나 쓰는 말투를 던졌단다.
"얀마, 형님이다."
그러나 유교적 가풍이 투철했던 집안의 네 형제분 중 막내셨던 아버님께서는 생전 형님들에게서도 그런 어투를 들어본 적이 없으셨던 터라, 너무 의아하셔서,
"형님 누구세요?"
되물으시니
"건방진 짜식...이젠 아주 형님 목소리를 잊었구나?" 나야 임마, 나라니까?"
내 친구인 줄은 모르시고 어떤 젊은놈이 하는 장난 전화라고 생각하신 아버님께서 버럭같이 화를 내시며 나무라자 친구놈은 그제서야 사태를 짐작했지만 워낙 소심하고 내성적인 녀석이라 미처 해명할 생각도 못하고 인사를 드릴 생각은 더구나 꿈도 못 꾸고 수화기를 잡은 손을 달달 떨며(아버님께서 좀 엄하셨어야지) 한참을 공중전화 부스에서 마냥 서 있다가 수화기를 슬며시 그냥 내려놓았단다. 불같이 화를 내시는 아버님께 가서 무슨 일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아, 글쎄, 어떤 미친 녀석이 장난전화를 했구나."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가 그 녀석이 휴가를 나왔다며 같이 만나자기에 나가서 만났더니 그 전화 사건을 이야기하며 큰일이 났다는 게 아닌가. 모르고 한 실수인데 뭔 대수겠냐며 신경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나의 집을 제집처럼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 소심한 친구는 아버님 뵙기가 무섭다며 그 뒤로 무려 3년여를 나의 집에 오지 못했었다. 신기한 건 피는 못 속인다고 장성해버린 아들놈이 또 나와 목소리가 비슷해서 가끔 아들놈 친구들이 헷갈린다는 거다. 세월따라 피도 흐르고 목소리도 흐르는 갑다.
당당하고 무서운 분이셨지만
이제 힘 없고 왜소하게만 보이는 아버님.
얼마나 더 기다려 주실지.
不孝父母 死後悔
자전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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