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가평 계곡으로 1박2일 일정으로 놀러갔는데 하필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로 잘못 택일하는 바람에 숙소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며 전화로 투덜거렸다. '헛, 이런 맹꽁이가 날궂이를 좋아하는 나의 유전인자를 어디다 분실한 건가?'
아무튼 자전거를 끌고 또 한강 나들이나 할 요량으로 집을 나섰는데 중랑천에 들어서자마자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고글을 때리는 바람에 앞이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우중라이딩을 즐기는 라이더들이 요즘들어 꽤 많아졌다는 느낌이 든다. 이 장대빗속을 앞서서 달려가는 라이더를 추월하면서 "안녕하십니까?"하는 순간에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면서 "꽈르르"하는 굉음이 하늘을 깨뜨려버리기라도 하듯 울린다. 인사하다 말고 둘 다 자전거가 흔들릴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지은 죄가 많아 비는 안 무서운데 당최 천둥번개는 무섭다. 하는 수 없이 가까운 샵으로 대피를 했다. 수다를 떨면서 한 시간여를 보내니 비가 그쳤는데 한강으로 가려던 계획을 천보산으로 바꿨다.
▲운무에 휩싸인 수락산
천보산 아래에 당도하니 또 비가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천둥번개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바위를 오르다 한 번 넘어진 뒤로 내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 중에 끌바신공이 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닫고 대체로 끌바로 오르다. 약숫물이 나오는 수도꼭지에 고글을 걸어 놓고 100여 미터쯤 오르다 '아차'하는 생각에 되돌아 내려왔는데 고작 100미터를 가서 고글을 생각했다는 사실에 상당히 고무되고 말았다.
올해 분실한 장갑이 벌써 세 켤레다. 때로 주위 사람들에게 치매라고 모함을 받는 나의 인간문화재급 건망증 증상이 상당한 차도를 보이는 듯해서 산아지랑이님이나 쭈꾸미님보다 적어도 이 깜빡이 증상에서 대단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던 것도 잠시, 물속에 풍덩 뛰어들어 조그만 폭포까지 뒤집어쓴 뒤에 지갑이며 휴대폰이며 담뱃갑이 바지 주머니에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 뒤엔 우위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 돈이 젖은 것이야 상관이 없는데 아버님께서 스물다섯 살 때의 사진과 어머니, 딸아이 사진이 물에 흠뻑 젖고 말았다. 징징. 다행히 휴대폰과 담뱃갑은 주방용 비닐 주머니에 둘둘 말아서 침수까지는 면했다. (사진은 주로 오르면서 찍는다. 다운힐 재미에 여간해서 내려올 땐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
이 무더운 날씨에 천보산에서 몇 시간을 꼼지락거리면서 그럭저럭 살 만하던 시절, 큰 비용을 들여 동해안으로 놀러다녔던 기억들보다 훨씬 더 유쾌했으며 또 대단히 서늘한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이 간다.
▲장대비에 평소 메말랐던 조그만 지천들까지 빗물을 사정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빗물에 잠긴 징검다리로 인해 여물목이 생기고
▲쉼터는 비 탓에 객이 없다.
▲시민의식의 결여가 아쉽다. '장수'라는 좋은 뜻이 이런 땐 곤혹스럽다.
▲체온을 보전하기 위해 우중라이딩엔 비옷을 걸치고 다니는데 업힐을 하려니 땀이 범벅이라 벗어서 배낭에 넣었다.
▲일전에 평행봉에 올려 주었더니 마다해서 이번엔 턱걸이 운동을 할까 싶어 올려 주었더니 또 잠잠하다. '인석이 당최 운동엔 소질이 없는 모냥여.'
▲중간쯤 오르려니 뜻밖에도 볕이 짬을 내 주었다.
▲물이 깊지 않은 듯 비가 내리는 날의 약숫물은 한겨울 풀민님 콧물처럼 수량이 풍부하다.
▲'내가 이런다고 이 비가 내리는 산 속에서 설마 누가 보기야 하겠어? 켈켈.'
▲비에 흠뻑 젖은 숲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문득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다.
▲너무 많이 마셔서 한 번 끊을까 생각했던 커피. 천변으로 내려와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대단한 위안을 준다.
자전거가 좋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