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목수님의 머리 얘기에 추억이 떠올라 적어 봅니다.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발소에 한번도 가보질 못했습니다.
당시야 대부분이 까까머리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동네 이발소에서 세련된 '상고머리'를 하는 호사를 누리는 아이들이 부럽기 그지 없었지요.
동네 이발사는 다름 아니라 동란때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귀순하신 분인데
평소 농사를 지으면서 여가 벌이로 이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아 생각해 보니, 딱 한번 그 이발사께 머리를 깍은 적이 있군요.
큰형 혼례를 앞두고 였을 겁니다.
제 머리는 늘 아버지께서 깍아 주셨습니다.
아버님은 귀여운 막둥이 돌보는 재미가 있으셨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였죠.
아버지께서 큰형님적부터 사용해 오신 머리깍는 기계는
주먹만한 크기에 녹이 다닥 다닥 슬었고
이가 부러진 날은 논외로 치고라도, 수십년을 사용하는 동안 무딜대로 무뎌 있던 터였지요.
그저 사용전 겨우 겨우 미싱 기름을 처가면서 기능을 유지하는 '유물' 수준이었고.
게다가 한자 길이나 되는 나무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아버지께서는 두손으로 그것을 길~게 잡고
'봉사 지팡이 흔들 듯' 머리를 깍으시는데....
탈..탈..탈...두손 기계질이 다섯번도 못되어 무딘 날이 머리카락을 찝질 않나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이 잡것이 왜이려' 하시면서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기계를 제 머리에서 휙 잡아 채어
눈 가까에 당겨 날을 확인곤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머리카락이 한움큼 띁겨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불호령이 두려워 이를 악물어야 했습니다.
더 힘든 것은 60을 바라보는 연세가 연세인지라 수전증이 있으신지
기계질을 할때마다 고르게 지나가질 못하고 비뚤 빼뚤 갈짓자 행보여서
저의 고통은 극심했지요.
대충 깍으시고는
'됐다. 깨끗이 감아라' 하시면서 손을 탈탈 털고는
양잿물이 허옇게 묻어나와 있는 빨래비누를 던져 주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머리를 감고 방으로 들어와 거울들 들여다 보며
조금은 더 인자하시고 자상하신 어머니께 부탁하여
뽀족 뽀족 금강산 만물상 같은 머리 다듬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평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푸시느라 그런지 가위로 제 머리를 다듬으시면서
'깍으려면 제대로 하지, 이게 뭐여. 자식 인물 다 버려 놨다'고 푸념하시곤 하셨죠.
세월은 흘러
두 아들놈이 생기자 마자 저는 최신 전동식 기계를 구입했습니다.
온갖 길이에 맞추어 자를 수 있는 보조 기구까지 들어 있는 놈으로다가..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놈들도 지 아비의 이발 솜씨에 만족해 하는 눈치였습니다.
덕분에 저도 솜씨를 발휘하여
한번은 '중 머리'로 하얗게 밀어 버리거나
어릴 적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상고머리도 만들어 보고
때로는 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보기도 하고
온 갖 기행을 저지르다가
놈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부터는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지요.
녀석들 스스로가 제 머리가 친구들 머리보다 촌스럽다고 느낀 때문입니다.
그 이후론 '자식들 이발해 주는 재미'마져 미용실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경제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때까지만 해도 목욕탕에 데려가 떼밀이로도 부려먹고 참 좋았는데...
제 딴에는 아버님께서 손수 실천하신 '자식 사랑'을 자식들에게 베풀고자 하였으나
중학교까지 가지도 못하고 그만두게 된 것이 여간 아쉽습니다.
다시 세월은 흘러 어느날 밥상 머리에서
아버지는 고 3 자식과 실랑이를 벌입니다.
아버지 : 너 머리 언제 깍을래..
고3: 기르고 있어요.
아버지는 이 '싸가지' 없는 댓구에 그만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1주일이 지난 지금 녀석의 머리는 그대로네요.
정말 길러볼 작정인가 봅니다.
이제 대학 입학도 목전에 있고, 제 논리도 빈약함을 느껴
모른 척 보고만 있습니다.
지금도 제 머리는 그때 아픔으로 얼얼한 기, 남아 있는 듯 한데
아버님은 지난 6월 4년이 모자라는 한세기를 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병상에 누워 계시던 아버님 손은 참 부드러웠고 따스했습니다.
말씀은 엄하셨지만
자식들에게는 무척 관대하신 분이셨는데
어르신께서 보여주신 관대함의 반의 반도 제 자식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사는게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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