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멘 붕이다.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울화통이 터져 끊었던 담배도 한 대 피워보지만 답답하기만 하다.
한 노인 자전거여행가로서 죽기 전에는 꼭 북한에 자전거 여행을 가 보겠다는 자그마하고 소박한 꿈은 이제 좀처럼 이루어 질 것 같
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결코 거창하지 않은 꿈을 잉태하기 시작한 것은 그러니까 막 MTB를 시작한 무렵인 12년 전인 2001년 11월 중순 금강산 자전
거대행진이란 이름의 대회에 참가하면서 부터다.
그로부터는 자전거 핸들을 잡을 때 마다 얼핏 하면 아련한 금강산의 추억이 떠오르고 목이 말라진다. 이런 목마름 탓인지 북한 북쪽,
중국쪽의 백두산은 물론 몽골을 두 번이나 갔다 오고 심지어 러시아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 까지 갔다 왔지만 결코 그 갈증은 해소
되질 않았다.
12년 전의 그 자전거 대행진단은 후
원업체들에서 지원해준 자전거 5백
대를 북한에 기증하겠다는 목적으
로 동해서 설봉 호 편으로 북한 장진
외항에 도착했다. 입국절차를 밟고
현대아산 측이 마련해둔 버스로 갈
아타고 꼬부랑길을 오르고 올라 금
강산 초입의 한 주차장에 도착하니
북한의 남녀 가이드들이 우리들을
맞았다. 우리들은 이들의 안내로 금
강산 계곡을 오르고 소 봉오리에 올
라 절경을 만끽하고는 하산했고 주
차장에서 뒤쳐진 일행을 기다리며
쉬고 있었는데 이때 자연스레 가이드들과 자유대화가 이뤄졌다.
솔직히 우리는 그들의 초라한 복장에 우선 좀 연민을 느꼈다.
30살 안팎으로 보이는 결코 부태스럽지 않은, 가냘프면서도 경쾌한 몸매에 아주 명석하면서 예리해 보이는 한 남자 가이드는 벌써
좀 쌀쌀한 날씨에도 얇은 천의 점퍼차림이었고 25살가량의 여자 가이드는 치마저고리에 털실 목도리를 목에 감고 있는, 마치 50년
대의 여성 옷차림 그대로 였다.
내게 닥아 온 그 남자 가이드는 다른 몇 명에 비해 책임자처럼 보였고 그래서 틀림없이 김일성대학 출신의 기관원일 것으로 짐작됐
다. 그리고 옆의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은 두 여성 가이드 가운데 얼굴이 곱상한, 털실 목도리 여인은 특히 그 얼굴 모습이나 옷차림
이 꼭 옛날 고교시절 경북산골 외갓집에 갔을 때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사촌 누나 모습을 방불케 해 절로 연신 눈길이 쏠렸다.
나는 그들의 노고에 답례라도 하는 양 담배를 꺼내(지금은 금연한지 1년이 지났다.) 그 남자 가이드에게 권해 봤더니 현격한 세대 차
이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받으며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 주고, 그도 그것이 그쪽 풍속인 양 감히 맞담배질이다. 그 당시의 평소 내
습관대로 담배 한 모금을 머금고는 또 “에이~ 담배값을 올린다니..”라는 불만 투의 말을 내 뱉자 그는
‘누가 올린답니까?“
”누군 누구여..이해찬 이지.”
“누구라고요?”
“이 해 찬이라니까.. 우리 정부의 실세 인물이지.(당시는 국무총리가 되기 전이었으며 한 신문 지상에 흡연인구를 줄이기 위해 담배
값을 올려야 한다는 그의 말이 실렸었다.)
이렇게 우리 현 정부에 불만을 토로하자 그는 옳거니 하는 표정이 돼 신이 나서 바짝 붙어 서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한다.
“어떻습니까? 금강산 경치가? 또 언제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훌~륭하지. 쉽게 올수 있다면 언제라도 직접 차를 몰고 올 텐데.. 말이여”
“선생님은 아주 높은 분들과 많이 친하시지요?.”
“높기는 뭐가 높아?. 오래전에 일 손을 놓고 이제 회갑을 맞은, 그냥 평범한 한 늙은이에 불과한데..”
“어느 대학 출신에 전공은 무얼 했죠?“
“K대.....”
이렇게 까지 응대해주자 그는 남쪽의 거물급 인사라도 만난 양 좀 놀란 표정이 되어
“야~ 정말 대단한 분인 것 같군요.”
“웃기지 마셔.. ㅎㅎㅎ”
이렇게 얘기가 삽시간에 전개되자 아니나 다를 까 정말 정치적(?)인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통일이 된다고 봅니까?”
사실 나는 이 말이 틀림없이 나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마음속으로 `옳거니` 하고 쾌재를 올리며,
“우선 영구적인 권좌에 안주하려는 자들을 모조리 바다에 쳐 넣어야 해.”
란 말을 해주자 그의 눈이 큼지막해지며 경악하는 얼굴이 됐다. 그 뿐이 아니다. 다른 안내인도 놀라는 표정이었고 심지어 분당여성
자전거회원 몇 명 등 옆에서 이 말을 들은 우리 단원들도 당장 무슨 사건이라도 나는 것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는 표정이 되어 당혹스
러워 하는 것이 역력했다. 그 뒤로는 모두가 별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상 아무 일도 없었고 버스에 올라 하산했다.
다음 날은 금강산을 바라보며 북측에 기증할 자전거 5백대를 단원들이 타고 온정 각에서 절경의 삼일포(왕복 24km)까지 달리는,
영원한 추억으로 남은 쾌거를 가졌지만 해금강 입구서 잠시 대기 중 일 때 금지되어 있는 그들과의 `사진을 함께 찍자`는 농담을 하
며 한 여성 가이드양의 허리를 옆으로 살짝 안아 보기도 했는데 악수를 해보니 손도 야들야들하고 얼굴도 곱상한데 허리 촉감은 엄
청나게 너무나 딱딱해 웬일인지 섬직한 느낌이 들어 한 동안 놀란 마음을 스스로 달래며 진정시켜야 할 지경이었다.
갈 때는 5백 여명이 경주하듯 달려 좀 경황이 없었으나 올 때는 해금강의 경관에 몰입하고 사진을 찍
느라고 뒤처지는 통에 출발 전에 정비반에 가서 안장을 내 체격에 맞춰 높여 세팅해 잘 달리던 내 자전
거는 누가 먼저 타고 가버려 안장이 아주 낮아 내 체격에 전혀 맞지 않는, 남은 마지막 한대의 앉은뱅
이 자전거를 겨우 몰고 맨 꽁지로 혼자 돌아오는 통에 주위를 제대로 찬찬히 둘러 볼 수 있었다.
온정 각에서 삼일포까지의 2차선 너비의 비포장도로는 주민과 접촉 가능성이 있는 쪽에 철책이 쳐 있
었고 그 너머는 잿빛 일색의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주택들과 주민 복색들, 쇠바퀴 우차, 남여 젊은이
들의 삽 만으로의 도로정비 공사 등등 마치 50년대의 영화장면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가슴 북 바쳐 올랐
다. 멀리서 우리들이 다 지나가기까지 경비병에 의해 통행이 차단된 채 길 한가운데서 멍청하니 서 있
던 주민들, 그리고 멀리 보이던 그 초라한 교사의 그 시골 초등교의 개구쟁이 학생들의 모습 등을 보면
서 절로 어떤 울분이 치솟아 계속 한 손을 흔들면서 목청껏 `안녕하시오?`라는 등의 소리를 외쳐 대고 있었다.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시인 고은 씨가 울부짖듯 통일을 소망하던 그 시낭송-당시는
그 격한 어조가 이해 안 되었었지만 바로 내가 이렇게 울부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때 비로소
그의 뜨거운 열정의 울부짖음이 이해가 되었다.
귀로의 배에 올라서는 몰래 간 크게도 눈 덮이고 구름에 가린 금강산을 한 컷 찍었다.
원래 북한의 군항인 장전 외항에 정박 중인 설봉 호 선상에서는 금강산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항상 뭍 쪽에서 북측이 감시하고 있어 걸리면 큰일 난다는
거다. 그래서 가까운 육지 쪽서는 전혀 안 보이는 상갑판의 둔덕아래에 쪼그리
고 앉아 숨어서 디지탈 카메라로 한 컷 눌렀는데 지나고 보니 니콘 큰 카메라
로도 시도 할 껄 하는 후회가 생겼다. 이런 앵글의 사진은 사실 그들의 보안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리라 보이지만 하여튼 금지된 앵글이어서 좀 스릴
도 느꼈다..
특히 그 당시 마산의 한 노부부가 소형차를 캠프 카로 개조해 허가를 받아 단독으로 금강산을 갔다 온 소식
은 우리 라이더들을 매료시켰으며 북한의 묘향산, 백두산등지를 자전거로 누비는 꿈을 유도하기에 충분 했
다.
그러나 이제 요즘 `극우주의자`, `보수꼴통`들이 강세인 이 시대에서는 생전의 이런 꿈의 실현이 점점
더 요원해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항상 북으로 달리는 꿈만을 꾼다는 이유로 어느 누가 이 늙은이를 `좌빨`로 몰아치는 일이 생겨 난 이래봬도
국정원에 들어 간 여자 조카 때문에 외가 쪽의 제일 웃어른이라는 입장에서 신원조회를 다 받은 인물임을
내 세워야 할 정도의 울적한 시대가 다시 도래할까 염려스러운 것은 역시 노파심이기를 바랄뿐이다..
당시에 홈피에 올렸던 금강산 라이딩 얘기는 다음 주소에,
http://user.chollian.net/~mogab/kum.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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