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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1200투어 -녹차-

바이크리2003.06.04 12:16조회 수 7176추천 수 16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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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7월 21일 --------

눕자 마자 일어난듯 하다. 아침부터 힘겨운 패달질을 하여 동해시까지 빨리 도착하였다. 식사를 하고 양양으로 가는길은 힘겨웠다. 컨디션이 조금 나으셨는지, 와우님, 콜진님, 그리고 투캐이문님은 엄청 "쏘셨고", 뒤에서 따라 오는 자는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떄 앞에서 가시던 분들이 하신 말씀중에 "뒤에 쳐지만 너무 힘들어서 빨리 갔어요. 진짜 뒤에선 못 가겠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약간 기분이 비꼬였다. 우리는 지금 경주를 하는것도 아니고, 팀 워크를 이용해야할 팀이다. 그런데 그렇게 개인적인 생각으로 꽉 차있으니 어떻게 팀워크가 가능할지… 이런 팀으로 여행을 할때는 자신보다 팀으로서 생각해야 한다는데, 그런것이 하나도 않 보여서 약간 실망도 하였다. 그떄 와우님이 말씀해주셨다. 지금 모든 맴버들이 체력의 한계에 와있으니 그런 약한 모습이 나오는건 당연한거고, 실제로 느린 맴버 만을 위해서 모두가 느리게 간다는거는 불가능 한거라고. 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제일 느렸던 내가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양양 까지의 길 도 힘들었다. 체력과 정신력이 끝을 다가서고 있었고, 나는 많이 뒤쳐져서 앞분들의 상태도 몰랐다. 강원도의 산은 역시 다르다. 업힐에서는 오기로 올라가리라 도 했지만 다른 분들이 빨리 가시던 다운힐이나 평지에서 난 죽을 맛이였다. 양양은 멀게만 느껴졌고, 주위의 아름다운 해수욕장도 아무런 느낌이 없이 느껴졌다. 초보맨님은 해안 도로로 가자 하셨지만, 어쩌다 보니 다시 산악으로 들어왔다. 엄청나게 때려대는 태양. 뜨거워진 도로. 매연. 미칠 지경이였다. 양양에 다가가서 난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다달었고, 쓰러져서 눈물로 흐려지는 해를 봐야 했다. 왜 저 사람들은 팀이라면서 혼자 씽~ 앞으로가서 혼자 쉬려는걸까? 그런식의 어리석은 원망이 분노로 바뀌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나의 생각이지만, 그런 분노라도 없었으면 양양까지 가지 못했을거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면 팀분들은 끝까지 나를 도와주셨던것이다, 그 순간에도 말이다. 찔끔 찔끔 눈물을 흘리며 패달질을 해갔다. 강산에의 "넌 할수있어" 와 "거꾸로 흐르는 저 강을 힘차게 거슬로 올라가는 연어들처럼" 을 반복해 들으며 패달질을 하니 마음이 좀 안정이 되었다. 가보니 와우님과 다른 분들이 쉬고 계셨다. 이야아아! 하면서 그분들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였지만 "녹차 대단해. 수고 했어!" 하시는 그분들에게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0.3초만에 마음이 누글어져서 "음료수 드실래요?" 하고 가계로 달려갔다. 잠시 휴식후, 이 투어 내내 기다리던, 두려워 하던 한계령으로 들어갔다.

한계령. 말만 들어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그곳을 자전거를 타고 올라간다니… 투어 내내 와우님이 겁을 주신 덕분에 난 엄청 쫄아 있었다. 투캐이문님과 콜진님과 한계령 입구로 가는데 초반부터 난 힘들었다. 두분을 따라가기가 힘들어 포기를 해버리고 내 패이스로 가기로 했다. 너무 힘들고 걱정이 되었다. 도저히 성공할수 없을것같았고, 하늘이 두꺼워 지는 것을 보며 비가 올것같았다.

이 부분은 내 스캐치 북에서 그대로 옯긴것이다.

한계령을 넘으며.
남자에게는 아이에서 남자로 넘어가는 시기가 있는 듯 하다. 그것을 평생 넘기지 못한 체 살아가는 이가 있는 반면, 그것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잡는 이도 있을것이다. 나에게는 한계령이 그 전환점 이었다.
4일간 지속된 하루에 15시간이 넘는 격한 자전거 라이딩으로 육신으로 나는 약해져 있었다. 겁먹은 아이마냥 파래진 나는 패달질 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3시간 정도 걸린다는 말과 20개가 넘는다는 고개… 지친 내 몸은 눈물로 그 안개 낀 산을 보개 하였다. 조금씩 두꺼워 지는 하늘과 바람. 두려움에 가득찬 나는 엄마가 보고싶었다. 그 순간 느꼈다. 이 한계령이 나에게는 성인식이 되리라는 것을. 양양 시부터 올라가는 이 길은 나에게 어린 아이로부터 성인이 되는 나의 인생의 지도와도 같다는 것을 느꼈다.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 어둠. 외로움. 실패의 그림자에 찌든 나는 한발자국도 갈수 없었다. 그렇게 힘겹게 가기를 한시간 삼십분. 어머니의 걱정하시는 목소리, 그냥 트럭 잡아서 올라가라는 말씀이 나에게는 나를 아직도 어린 아이로 붙잡아 놓으려 하시는 부모의 사랑이라 느껴졌고, 그것을 이겨내야 내가 이 땅에 두 발로 슬 수 있을것같았다. 나는 가야 했다. 나는 남자가 될것이였다. 처절할 정도로 천천히 올라갔다. 한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 가는 것 같이 천천히 패달질을 하였다. 한없이 울고 나니 마음이 진정되는듯 하였다. 서서히 두려움이 없어 졌다. 정산이 보였다. 희미한 불빛 세 게가 보였다. 그러나 그 앞에 20개도 넘는 고개가 보였다. 그래도 불빛을 보고나니 마음이 더욱 진정 되었다. 얼마 않 남은것같아서 힘차게 패달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점점 갈수록 멀어지는것같았고 고불 고불 꼬인 산 길이 길게만 느껴졌다. 눈물을 닦고, 난 할수 있어! 난 할거야! 를 외친후 다시 시작한 패달질… 고개. 그리고 또 고개. 갈수록 멀어지는 정상. 나를 휘어잡는 어둠과 바람. 그리도 두려움. 사탕을 입에 집어 넣었다. 달콤한 포도맛에 빠져 온몸을 흔드는 바람도 막아내었다. 고개. 또 고개. 후에 불빛이 보였다. 난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서 있었다. 한 남자가 한계령 꼭대기에 서있었다.
7월 21일. 한계령

첫 키스를 했을떄보다 짜릿한 한계령 꼭대기 였다. 올라오니 와우님과 다른 분들이 뛰어 나와서 환영 해주셨다. 가장 걱정되었던 놈이 올라오니 좋아하시는 표정이셨다. 투어 처음부터 많은 도움이 되어 주신 와우님은 "녹차. 한번 안아 보자" 하시면서 포옹도 해주셨다. 엄청난 바람과 어두움 또한 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였다. 당당하게 한계령 꼭대기에 서서 나는 바라 보았다. 내가 올라온 수 많은 고개들. 이제 나는 한계령을 넘은것과 같이 인생을 살면 되겠구나. 그리고 아마도 잘 할수 있을것 같다는 느낌과, 이제 막 인생의 고개를 시작했으니 열심히만 하면 되겠구나 하는 뿌듯함…

그후…
실질적인 투어는 그 날로 끝났다. 그 다음날은 비로 인하여 인제 이후로는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투어를 잘 마치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고가 있던 것은 불행하였지만, 나는 개인적이로는 그것이 더 반가 웠다. 서울로 돌아와 환영을 받고 집으로 흩어져 투어는 예상외로 단순하게 끝났다.
허나, 투어가 우리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그리 단순하지않으리라 믿는다. 물론 투어 직후 내 철학이나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가슴 깊은곳에서는 엄청난 자부심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수 없는 많은 추억들이 고스란이 남아 있다. 그림 그리기를 즐기는 나는 작품도 많이 변하였다. 스캐일이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커졌고, 한계령을 넘어서 라는 작품도 끝냈다. 지금 투어에 참여하신 분들을 만나러 또 자전거를 타고 나간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정말로 감사하고, 평생잊지 못할 큰 획을 같이 그어주신것에 감사한다고…

그리고…
투어 맴버들을 그릴려 한다. 6일의 지옥 투어를 같이 한 분들을 어찌 잊을수 있을까. 위의 후기를 쓴지도 시간이 지났다. 이런 경험은 직 후보다 서서히 그 영향이 오는듯 하다. 이제 몇주 후면 나는 다시 출국한다. 앞으로 힘들 유학생활과 인생을 앞에 두고 갖은 나의 성인식. 이 투어는 언제나 나를 지켜 보시는 부모님과 같은, 하지만, 앞에서 끌어주는 지팡이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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