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의 변방, 그러나 엄연한 주류, 크로몰리宗族(종족)에 합류하다 낙서장
2007/03/27 00:03
http://blog.naver.com/notuldole/150015988254
언젠가 티비 다큐에서 검을 만드는 장인을 보았다.
많은 산을 뒤져 질 좋은 철광석을 캐낸 다음,
재래식 용광로에 넣고 풀무질로 녹여
쇠를 추출하여 벼리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을 보며 너무나도 감탄하고 말았다.
匠人(장인) 2인이 1조가 되어
벌겋게 불에 달군 쇠막대기를 두드려 펴서 벼리고는
그걸 다시 접어서 또 두들겨 펴는 일을 반복하는데
그야말로 달구고 벼리고 담금질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 혼신의 정열을 쏟아붓는 것이었다.
한 번 접으면 두 겹이 되고
다시 접으면 네 겹이 되고,
또 다시 한 번 접어서 벼리면 여덟 겹,
열여섯 겹, 서른두 겹......
이렇게 벼리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한 자루의 劍身(검신)은
그 은밀하게 겹치고 섬세하게 포개진 게
무려 일 만 겹이 넘는다니
아뿔싸...
예전에 그냥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검에 대한 상식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일찌기 청동검을 딛고 일어난
철로 만든 검은 세상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부딪히면서도 쉽게 부러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칼 한 자루 만드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과
그토록 혼신을 쏟아붓는 정열이 있었기에
그것은 이미 한 가닥의 쇠막대기가 아닌 천라지망 즉,
철 성분으로 된 질기고 질긴 섬유였던 것이다.
좀 늦었다 싶은 마흔의 나이에
비로소 자전거의 세계에 발을 디딘
처음의 한 두 해 철티비를 잠시 타다가
본격적으로 엠티비의 세계에 빠져든 이후
이 용맹스러운 철은 적어도 나의 주위에선
더 이상 접할 수가 없었다.
오 년 전의 일이다.
산악자전거를 꽤 오래 탄 선배님 한 분이 있었는데
"이제 나도 크로몰리로 쓸 만한 거 하나 구해서 안주해야겠어"
라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있었다.
그 이전에도 자주 들리던 한 인터넷 싸이트에서
경력이 오랜 고수들의 글 중에 비슷한 내용을 보긴 했지만
이제 막 가벼운 알미늄의 세계에 빠져들어 잔뜩 흥분한 상태라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였고
더구나 자전거에 관하여 별반 지식도 없었던 터라
그게 단지 상당히 무게가 나가는 것이란 사실 정도만
귀에 들어와 왜 쓸데 없이 무거운 자전거를
타려는 것일까 의아해 했을 뿐, 그렇게 잠시
나의 뇌리에 들어왔던 크로몰리는 철저히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었다
요즘 매니아들에게 대단히 각광을 받고 있는
티탄이란 소재는 몇 년 전에 잠시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어떤 이유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관심 밖이었다.
티탄이 어딘가 모르게 비인간적인 것 같아서 싫다는
아는 교수님의 독특한 관점과는 달리 그냥 무관심이었다.
아무튼 달포 전에 내게 커다란 문제가 터졌다.
팔자에도 없는 값비싼 자전거를 얻어 타던 중
그 고가의 프레임에 치명적인 크랙이 가고 만 것이다.
아..이런..
애초부터 경량화된 고가의 제품들에게서
저급품들보다 더 나은 강성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결국 강성이 충분히 유지되고 보장되지 않는 경량화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해야 했다.
그간 인터넷에 꽤 자주 올라오는
크랙이 간 값비싼 프레임들을 보면서
경제적인 측면 만 본다면야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겐
그런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빈털터리에게 만약 저런 비극이 온다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이 씨가 됐었나...쩝
내게도 그런 일이 막상 닥치고 보니
그간 한 번도 외도를 않고 사이 좋게 지내 온
알미늄이란 놈에게 만정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중저가형이지만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본래의 나의 애마는
이제 막 자전거의 맛을 느끼며 빠져들기 시작한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막내 외삼촌에게
좋은 걸 살 때까지 타라며 절대 팔지는 말라는
당부와 함께 무상으로 대여해 준 상태였는데
나의 꼬라지가 이 꼴이 됐다며 그걸 찾아오기도
멋적은 일이라 며칠 이장님 잔차를 타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이장님 자전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단 6개월 만에 주인을 배반하고
의무와 의리를 저버린 놈에게는
늘 따뜻한 베란다를 차지하게 했지만
이 나이 많은 70년대산 이장님 자전거는
단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저 우직하게
어두운 아파트 복도 한 켠에 우두커니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지냈을 걸 생각하니
어찌 미안하지 않았겠는가.
이 가엾은 고철 자전거를 바라보자니
비록 군데군데 녹이 슬긴 했어도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 없이 튼튼한 게
마치 홀로 된 늙은 아비를 봉양한다며
과년하도록 시집도 가지 않고
억척스레 농사일을 하느라 검게 그을리고
통뼈가 굵어진 가엾은 딸년을 바라보는
굵게 주름이 패인 촌로라도 되는 양
마음 한 켠이 울컥하며 가슴이 저렸다.
그러다 문득 크로몰리란 소재가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쳐 검색해 보았는데
아....
있었다...
장구한 세월 엄청난 문명을
가능하게 했던 철의 세계는
적어도 자전거의 세계에서는 일견
주류에서 물러난 듯, 아니 흔적도 없는 듯했지만
소수의 그러나 확실히 고집스러운 사람들의
손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크로몰리 種族이었다.
내가 그들을 발견한 것은 적어도
오지의 숲속을 헤메다가 발견한
아주 오랜 옛날 찬란하게 빛났던
앙코르와트 사원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을 접하며 느꼈던 알 수 없는 감동은
결국 모든 검색기능을 총동원하여
분량으로 치자면 책으로 몇 권은 될 법한
그들 만의 경전(?) 모조리 검색하느라
거진 이 주일여를 보냈다.
그런 과정 중에 수많은 제품들을 모조리 타 보았다
물론 가상의 이미지 시뮬레이션이지만..
크로몰리족,
그들은 확실히 함부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자기들 만의 차별화된 아류가 있었다.
맹독을 가진 복어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며 복요리에 빠져들 듯
그들은 이 낭창낭창한 가늘고도 날렵하게 생긴
크로몰리 만이 가진
아주 독특하고 쫄깃쫄깃한 별미를 취하기 위해
다소 거추장스러운 크로몰리가 가진 독소들을
이해하고 감내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세계 유수의 자전거 메이커들에게서도
이 크로몰리는 단종된 경우가 많을 뿐더러
설사 생산된다 하더라도 골방 한 구석에서
간신히 그 명맥을 부지하고 있는
어찌 보면 구차해 보이기도 하는 형편이라
이 유서 깊은 소재인 철은
금방이라도 그 명맥이 끊길 것도 같지만
고집센, 그러나 신념이 확고한 크로몰리족들은
결코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 같다.
앙코르와트 사원처럼
마추픽추처럼
애오라지 뱃사공의 숨결을 타고
면면히 전해오는 정선아리랑처럼
크로몰리는 결코 잔차계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연히 가까운 곳에서
저렴한 크로몰리 프레임을 구할 수 있어서
하나 꾸몄다.
사진은 애마인
06년식 jamis dragon team 크로몰리.
정작 수입사엔 재고가 없었고
의정부에 새로 생긴 샵에 한 개가 남아 있었다.
나도 이제 크로몰리족인 것이다.
천천히 음미할 날만 남았다.
(種族 보다는 宗族이 더 정확한 의미 같아서 제목만 宗族으로 바꿨다)
정작 올리고 보니
리뷰는 아니네요..
한 달은 타 봐야 그럭저럭
리뷰 비스무리한 게 나올 것 같습니다.^^
여러분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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