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계획한 야간 번개는 봄비로 인해 취소 되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또 다시 함께하는 그 날을 위해...
아래는 제가 인터넷 기사를 읽다 퍼 온 글입니다.
지루한 내용이지만 뭔가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여기로 퍼 옮깁니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이반 일리치 지음 / 미토::)
서울시 천안구...
고속철 개통을 앞둔 지난달 30일 어느 조간 신문의 1면 톱 기사 제목이다.
이 신문에 따르면 기존의 새마을호보 다 3배 빨리 달리는 고속철로 서울역에서 천안 아산역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34분.
서울 주변부에서 도심으로 출근하는 시간과 별 차이가 없고, 서울 인근의 일부 신도시보다 가깝다.
이 신문은 고속철의 개통으로 인해 혁명적으로 달라질 주거,레저 ,
출퇴근 등의 국민생활 전반과 항공, 유통, 물류, 소비자들의 쇼핑문화 등을 그린다.
전반적으로 장밋빛이다. “지방의 고속철 역세권 주민들이 수도권의 고급 명품점이나 대형 할인점, 동대문, 남대문 등
재래시장을 이용하기가 한결 수월”해진 것도 그 중 일부다.
자동차 1000만대 시대, 새마을호로도 모자라 이렇게 꿈의 고속철 시대가 왔는데도,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니, 무슨 말인가.
이반 일리치라는 저자의 이름에서 이미 짐작했듯, 책은 요즘 유행하는 웰빙의 물결을 타고 자전거를 타면
건강하고 행복해진다는 따위의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아일랜드-푸에리토리코 교구 가톨릭 사제로, 교회의 권위에 맞서다 사제직을 떠난 일리치는
학교와 병원 등 근대화 기획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상가 아닌가.
원제 ‘Energy and Equity’를 직역하면 ‘에너지와 공정성’쯤 될 책의 대강은 이렇다.
에너지 과소비로 요약되는 고도 산업 기술화와 속도에 대한 찬미와 과잉소비가 자연파괴를 가속화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고 사회적 불공정 을 확대했다,
속도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버리면, 우리의 실질적 생활시간은 박탈되고 상상력은 마비된다,
무제한의 속도는 엄청난 고가이고, 비경제적이며, 불합리하다.
요컨대 책은 편의를 추구하는 인간이 이루어낸 속도가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고 있으며,
그 극복 방법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것이다.
속도, 그것도 주로 자동차의 폐해를 중심으로 논리를 펼치는 책에서 한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전형적인 미국의 남성이 자신의 차를 위해 소비하는 시간은 연간 1600시간.
여기에 포함되는 시간은 자동차를 타고 달릴 때나 정지할 때 등 차와 관련해 직접 소비하는 시간뿐 아니다.
자동차 값과 기름값, 보험료와 세금, 교통 위반시의 벌금 등을 내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모으는 시간까지 포함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리 많은 시간이라 할 수도 없다.
이렇게 1600시간을 투자해 평균적인 미국인이 달리는 거리는 연간 평균 7500마일(약 1만2000Km).
이를 시속으로 환산하면 시속 5마일 정도, 인간의 걷는 속도를 크게 넘지 못한다.
여기에 사고로 병원이나 경찰, 검찰에서 보내는 시간이나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보내는 시간,
자동차를 사기 위해 광고를 보는 시간 등은 계산에 넣지 않았으니, 이것까지 포함하면 자동차의 속도는 더욱 느려진다.
하지만 보다 큰 문제는 겉보기에 빠른, 결국은 느린 자동차의 속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우선 수송 수단을 위해 소비되는 에너지 사용량을 든다.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 수송 수단에 사용 되는
에너지는 총에너지 사용량의 최고 45%. 세계 1,2위의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총량을 압도한다.
멕시코와 페루처럼 가난한 나라의 경우 1인당 에너지 사용량은 낮으나, 교통에 사용되는 비율은 더욱 높다.
이런 에너지 사용이 지구자원 고갈, 환경공해, 자연파괴 등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는 진부한 것이니 그냥 넘어 가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설령 무공해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책은 속도를 관리하기 위한 전문기술 관료체제의 공고화, 산업하부 구조에 있는 거대한 기득권의 이익 강화 등
‘교통의 정치학’ 혹은 ‘속도의 정치학’에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고속 수송 수단에 의지하는 인간의 발이 지면에 닿지 않은 채 차 창 안의 인간과 차창 밖의 인간,
창안의 인간과 창 밖의 자연이 서로 소외되는 것은 더욱 크고 심각한 문제다.
그렇다면 대안은? 저자는 열역학과 가격, 사회문화적 비용 등을 감안해 이상적인 대안으로 자전거를 내놓는다.
인간의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히 맞춘 이상적인 변환기,
자전거야말로 인간이 모든 기계의 효율뿐 아니라, 다른 동물의 능력도 능가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4만명의 인간을 1시간 이내에 다리를 건너게 하기 위해서는 전차를 이용하면 노선이 두개 필요하고,
버스는 차로 4개, 승용차는 차로 12개가 필요하다. 하지만 자전거로는 단 하나의 차로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이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구성원이 참여하지 못하는 비민주적 정치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주로 자동차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 폐해에 메스를 들이대며 그 대안을 내놓고 있으나,
‘타율적 관리’를 축으로 하는 현대 문명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그의 현대 학교 교육이나 의료체제 비판과 맥락을 같이한다.
현대 문명의 특징이라 할 ‘타율적 관리’를 넘어 ‘자율적 공생’으로 가는 문제가
결국 정치 과정에 달려있다는 것도 학교나 의료, 교통 문제 모두 똑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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