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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바지에 얽힌 단상 - 긴 이야기.

........2003.05.13 14:27조회 수 21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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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사는 이상발입니다.

요사이 날씨 참 좋습니다. 잔차 타기에는 딱 그만입니다.

어제는 택배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주문한 쫄바지가 하나 왔습니다. XL를 신청했는데, 해 놓고 보니 너무 큰 것으로 주문했나 싶어서, 내심 걱정했는데, 싸이즈가 너무 크면 다시 중고로 내다 팔아야지 생각했는데, 딱 맞습니다. 언제 이렇게 살이 쪘지? 금연의 덕분으로 살이 조금 찌기는 했나 봅니다.

퇴근 시간 후 사무실에서 예의 쫄바지를 처음 입고, 퇴근 준비를 합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복도 밖을 살짝 내다 보고,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걸어 나갑니다.

그런데, 저 복도 끝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옵니다. 저는 병원에 근무하는 지라, 낮이고 밤이고 출입하고 복도에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괜히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쩔까 싶어 순간 긴장합니다.

그리고는 , 나도 모르게 한 손에 들고 있던 헬멧을 슬그머니 양 손을 앞으로 해서 양 손으로 헬멧을 잡습니다. 이러면 뭐가 좀 나은가요?  무심결에 그렇게 가리게 되는군요.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제는 옆에 자전거가 있으니, 쫄바지에 대한 부담감이 전혀 없습니다.  아니 안 느껴집니다.
잔거를 타고, 잘 다닙니다. 사타구니 사이에 끼인 이상한 것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쫄바지 재질이 폴리에스테르라 그런지, 안장 위에서 느껴지는 촉감도 좋습니다.

직장 뒷산을 가볍게 올라봅니다. 허벅지 전체를 감싸도는 가벼운 아주 가벼운 압박감이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아하, 이런 느낌이구나.

산을 내려서, 집사람을 만나기로 한, 대형할인매장에 도착합니다.  예전에는 그냥 자전거 거치대에 잔차를 묶어 두었는데, 이놈 프로코렉스로 바꾸고 나서는 영 마음이 안 놓입니다. 그래서, 차량 주차 하는 곳으로 들어가서,
출입문 가장 가까운 곳은 장애우 주차장입니다. 바로 그 앞에 할인매장에서 쓰는 카트를 묶어 놓는 기둥이 있습니다.

이 기둥에다가 잔차를 묶어 둘 요량입니다.  출입문 바로 앞이라 드나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소 안심이 됩니다.
보안이 의심되는 곳에서는 잔차에 달린 것도 다 떼어 내어야 합니다. 펌프도 데고, 속도계도 떼고, 안장가방도 떼고, 핸들바에 달아 놓은 라이트도 떼어낼까 했는데, 이것은 그냥 둡니다. 나사 돌려서 풀려고 하면 귀찮은 놈이니까요. 물론 물통케이지에 밧데리도 분리합니다.  

이것도 한 짐이구만요, 가방에 차곡차곡 넣는데, 아무래도 이 놈의 쫄바지가 또 슬슬 신경이 쓰입니다.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저만 쳐다 보는 듯한 느낌이 점점 강하게 듭니다.  그리고는 매장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 ,  

마치 모든 사람들이 저만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이고, 경상도 사투리로 "남사시러버서" 입니다.  그래도 이겨내야 합니다. 직장에서야 제 얼굴을 사람들이 아니까, 계면쩍었겠지만, 여기는 나 아는 사람 만나기 어려운 대형할인매장아닙니까?

잔차 타는 사람의 자연스런 모습으로 당당하게 그냥 걸어 들어가면 돼! 라고 속으로는 생각하지만, 잘 안되는군요.
제가 시선을 둘 곳이 없습니다. 천장에 광고판도 쳐다 보다가, 바닥고 쳐다 보다가, 마치 저를 보는 듯한 얼굴로 마주오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옆 코너로 획 돌려 도망가기도 합니다. 아이고,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디 쫄바지를 입고 다니겠나? 아니 쫄바지만 입고 잔차는 두고 다니겠나?  

그렇다고  "이 쫄바지는 잔차 탈 때 입는 것입니다. 저는 변태 비슷한 사람 아닙니다" 라는 투로  이 실내에서 헬멧을  쓰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이럴 때 스포츠 고글이라도 있다면 좀 나을 텐데, 그냥 투명한 안경이니, 이거 참 시선처리도 어렵고, 한마디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드디어 만난 집사람과 아들도 뭐라고 놀려댑니다. 이런 아빠를 응원해 주지는 못할 망정, "쫄쫄이와 타이즈" 라고 놀리다니.
결국은 다시 나가서 락커 속의 가방에서 반바지를 꺼내서 덧입습니다. 이제서야 행동이 좀 자유스럽습니다.

이것 저것 반찬거리도 좀 사고, 애들 과자 부스러기도 챙기고,  자, 이제 계산하고 나가자.
계산 후에 저는 잔차로 집으로 가고, 집사람은 애들 데리고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퇴근시간. 누가 먼저 가나 내기를 하기로 하면서, 주차장에 들어가는 순간.  


앗,


이런 세상에,


쫄바지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정작 제일 중요한 잔차를 묶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덩거러니, 쇼핑카트 고정하는 기둥옆에 기대어 외로이 혼자 서 있는 불쌍한 노란 프로코렉스 !

아, 한 40여 분은 지났는데, 그 사이에 누가 가져 가기라도 했다면 어쨌을까 눈 앞이 캄캄해집니다.  

쫄바지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잔차를 무방비 상태로 팽개친, 잔차맨 이상발이 아니라, 쫄쫄이 이상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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