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일 자체가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이라는데...
삶이 이러니 다른 일이야 말 할 나위가 없겠지요.
모든 만남과 헤어짐에는 생전에 영겁의 질기고도 질긴 인연이 있어서
지금에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만남이든 헤어짐이든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동물의 만남, 사람과 사물의 만남.
사람과 만물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 말입니다.
만나서 좋아라하고 헤어짐으로 아파하는 것이야 또 모든 만물에 다 동일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 자체가 완벽한 불완전이라 늘 기뻐하고 아파하는 감정의 굴곡을 겪지않을 수 없습니다.
웃고 노여워하고 우는 감정의 변화말입니다.
그런 감정의 굴곡이 없다면 사람의 형상을 한 인형과 다름이 없겠지요.
너무 포괄적입니다.
자전거와의 만남이라면 간단해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떻든 어떤 연유로든 자전거를 만나 자전거에 미쳐서
모든 길이란 길은 헤집고 다니며 그 많은 난관과 기쁨과 아픔과 희열을 만끽하며
미친듯이 자전거의 약효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무작정 자전거가 좋아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달리고 뛰고 넘어지며 울며 오르고
울부짖으며 내리막을 질주합니다.
수백킬로미터가 넘는 장거리를 하루만에 달리기도 하고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합니다.
수백명의 라이더와 자웅을 겨루기도 하고 널널하게 산길을 달리기도 합니다.
온 몸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아찔한 바위길을 간단하게 정복하기도 합니다.
내 스타일은 이런거야 하며 자전거를 입맛대로 꾸미기도 하고
스타일은 뭔! 하며 주구장창 하나만을 고집하며 타기도 합니다.
2%가 부족하다며 윗사양으로 바꾸며 보람을 느끼는가 하면
고장만 아니면 하나로 가랑이 늘어질때까지 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드에서 산에서 골목에서 어디서든 크랭크는 돌아가고 안장에 올라앉은 사람은
그냥 행복하기만 합니다.
끊을수 없는 마약의 강력한 효능에 숙달된 사람처럼 어디서든 어느 순간이든
어떤 상황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전거를 생각하며 그걸로 인해 하루가 즐겁고
슬프고 화가 나고 괴로우며 행복합니다.
눈을 뜨고 있을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잠속에 빠져서도 자전거 꿈을 꿉니다.
그렇군요.
우리에게 자전거란 이렇군요.
표현의 한계가 이정도 밖에 않되니 이정도 밖에 표현해 내지 못합니다.
그런 자전거 입니다 우리에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런 자전거를 아무도 없이 혼자 탄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전거를 혼자 탄다.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자전거를 탄다.
혼자서? 매일? 일년 내내?
여러분은 어떨것 같습니까?
위에 줄줄이 늘어놓은 것들이 과연 가능할까요?
행복하고 슬프고 기쁘고 화가 날까요?
정말로 자전거에 미친듯이 빠져 들 수 있을까요?
자전거를 타면서 느끼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자신 있습니까?
자신 있습니까?
짧은 자전거 생활을 하면서 가장 슬프고 화나고 아팠던 기억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 많은 기억들이 모두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많은 기억들이 말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아픈 기억들의 중추에 동료들의 떠남이 있습니다.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신경의 끝을 사정없이 갉아 댑니다.
절멸할 것 같은 고통입니다.
자전거를 못타게 되는 최악의 상황보다 더 지독한 몸살입니다.
단 한번이든 수십, 수백번이든 숫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떠난 이, 떠나는 이와 함께 했던 시간 말입니다.
늘 겪어 왔지만 역시 힘들어 질겁니다.
늘 그들의 자리를 비워두고 있지만 심지어 언제 떠나보내기나 했답니까? 하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듯 대범한 척 해보기도 하지만......
역시 힘들어 질겁니다.
저는 식구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식구 : [食口] 같은 집에서 끼니를 함께 하며 사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집단, 식구.
굳이 피를 나눈 사람만을 식구로 인정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집을 찾아 다시 돌아올 식구를 위해 언제나 밥상의 한자리에
깨끗한 수저와 젓가락을 놓아 두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가만히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으면 따뜻한 밥 한그릇 퍼 올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동료란 어떤 의미입니까?
삶이 이러니 다른 일이야 말 할 나위가 없겠지요.
모든 만남과 헤어짐에는 생전에 영겁의 질기고도 질긴 인연이 있어서
지금에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만남이든 헤어짐이든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동물의 만남, 사람과 사물의 만남.
사람과 만물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 말입니다.
만나서 좋아라하고 헤어짐으로 아파하는 것이야 또 모든 만물에 다 동일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 자체가 완벽한 불완전이라 늘 기뻐하고 아파하는 감정의 굴곡을 겪지않을 수 없습니다.
웃고 노여워하고 우는 감정의 변화말입니다.
그런 감정의 굴곡이 없다면 사람의 형상을 한 인형과 다름이 없겠지요.
너무 포괄적입니다.
자전거와의 만남이라면 간단해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떻든 어떤 연유로든 자전거를 만나 자전거에 미쳐서
모든 길이란 길은 헤집고 다니며 그 많은 난관과 기쁨과 아픔과 희열을 만끽하며
미친듯이 자전거의 약효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무작정 자전거가 좋아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달리고 뛰고 넘어지며 울며 오르고
울부짖으며 내리막을 질주합니다.
수백킬로미터가 넘는 장거리를 하루만에 달리기도 하고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합니다.
수백명의 라이더와 자웅을 겨루기도 하고 널널하게 산길을 달리기도 합니다.
온 몸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아찔한 바위길을 간단하게 정복하기도 합니다.
내 스타일은 이런거야 하며 자전거를 입맛대로 꾸미기도 하고
스타일은 뭔! 하며 주구장창 하나만을 고집하며 타기도 합니다.
2%가 부족하다며 윗사양으로 바꾸며 보람을 느끼는가 하면
고장만 아니면 하나로 가랑이 늘어질때까지 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드에서 산에서 골목에서 어디서든 크랭크는 돌아가고 안장에 올라앉은 사람은
그냥 행복하기만 합니다.
끊을수 없는 마약의 강력한 효능에 숙달된 사람처럼 어디서든 어느 순간이든
어떤 상황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전거를 생각하며 그걸로 인해 하루가 즐겁고
슬프고 화가 나고 괴로우며 행복합니다.
눈을 뜨고 있을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잠속에 빠져서도 자전거 꿈을 꿉니다.
그렇군요.
우리에게 자전거란 이렇군요.
표현의 한계가 이정도 밖에 않되니 이정도 밖에 표현해 내지 못합니다.
그런 자전거 입니다 우리에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런 자전거를 아무도 없이 혼자 탄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전거를 혼자 탄다.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자전거를 탄다.
혼자서? 매일? 일년 내내?
여러분은 어떨것 같습니까?
위에 줄줄이 늘어놓은 것들이 과연 가능할까요?
행복하고 슬프고 기쁘고 화가 날까요?
정말로 자전거에 미친듯이 빠져 들 수 있을까요?
자전거를 타면서 느끼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자신 있습니까?
자신 있습니까?
짧은 자전거 생활을 하면서 가장 슬프고 화나고 아팠던 기억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 많은 기억들이 모두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많은 기억들이 말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아픈 기억들의 중추에 동료들의 떠남이 있습니다.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신경의 끝을 사정없이 갉아 댑니다.
절멸할 것 같은 고통입니다.
자전거를 못타게 되는 최악의 상황보다 더 지독한 몸살입니다.
단 한번이든 수십, 수백번이든 숫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떠난 이, 떠나는 이와 함께 했던 시간 말입니다.
늘 겪어 왔지만 역시 힘들어 질겁니다.
늘 그들의 자리를 비워두고 있지만 심지어 언제 떠나보내기나 했답니까? 하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듯 대범한 척 해보기도 하지만......
역시 힘들어 질겁니다.
저는 식구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식구 : [食口] 같은 집에서 끼니를 함께 하며 사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집단, 식구.
굳이 피를 나눈 사람만을 식구로 인정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집을 찾아 다시 돌아올 식구를 위해 언제나 밥상의 한자리에
깨끗한 수저와 젓가락을 놓아 두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가만히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으면 따뜻한 밥 한그릇 퍼 올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동료란 어떤 의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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