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맞은 아스팔트 길이 고래같다. 춥다기 보다는 봄비가 대지를 적시듯 코앞의 겨울에 마지막 운치를 더해준다. 아주 포플라 나뭇잎은 색이 바라게 매달려 있다. 11월26일 홍천길의 한산함이 묻어 나는 아취를 느낀다.
11월26일 새벽. 날씨에 아랑곳 하기 않는 그런 사람들이 모였다. 기상청의 날씨예보도 이들의 머리속에 다 챙겨 와 있다. 모인 차는 세 대로 그중 압권은 말바의 비공식 투어링 밴인 쇼부님의 잔차다. 말들은 고분 고분 넉넉한 공간에 실렸다. 한강이 넘실대고 바람도 그리 차갑지 않았다. 구름은 다소 끼었으나 어쨌든 여명이 터왔다.
모인 분은 4명. 간밤에 2분이 잠과의 전투와 감기와의 포연속을 뚫고 나오지를 못했다. 이 분들과 락헤드님이 통신을 취했고, 일행은 모두 넷으로 정해 쇼부님의 잔차에 4인의 홍천강을 향한 용사들도 무거운 몸을 실었다. 넷보다 가벼운 여섯은 모순 같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구리를 지나 외곽 도로로 지나 한참을 달렸다. 해장국집 앞에는 벌써 차들이 즐비했다. 안에는 삼삼오오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등산객들이 대부분이었다. 날이 추워서인가 MTB 인구가 바닥에 눌러 붙었다. 해장국을 시켜 놓고 다시 선지를 한 사라 덜 달라고 했다. 선지는 과거에 먹을게 없던 시절에 먹던 음식이다. 그게 어디든 그 당시 사람들은 선지를 가끔 먹었다. 나도 선지를 어릴 적에 정육점에 가서 사 온 기억이 났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공간에 깃든 사람들인가?
다시 칼칼한 공기를 가르며 쇼부님의 밴은 홍천길 출발지에 가볍게 도착했다. 잔차를 내리고 아침공기를 마셨다. 다소 쌀쌀한걸 감추기 어렵다. 올해 처음 타 볼 강원도의 한기. 작년과는 비교가 않된단고 할 정도로 아주 마일드한 한기였다고 한다. 아주 짧은 구간, 워밍업을 위한 고속회전으로 몸을 뎁히고 근육을 깨우는 고수들의 몸동작. 흔히 워밍업은 아주 음풍의 속도를 맞추는 것으로 알던 나는 적잖이 호흡이 가빴다.
서울서 오던 길을 따라 경사진 곳을 올랐다. 길에 다니는 차량이 역시 한산했다. 일행의 언덕을 치는 속도가 달랐다. 쇼부님의 잔차가 아주 무거워보였다. 나중에 안거지만 디스크패드를 잡아주는 부품이 약간 휘어 있었다. 이때도 락헤드님의 진단으로 디스크도 고치고, 안장도 조금 낮추었다. 좀 더 낮추라는 락님의 배려에 쇼부님은 미안해서인지 더 안장을 낮추지 않았다. 라이딩의 마지막 비슬고개에서 다운힐을 끝내고 평지를 고속으로 바람의 질주자 4인. 쇼부님의 척추는 잔차의 축을 중심으로 좌로 우로 움직임이 규칙적이었다. 반면 락님과 곰님의 축은 고요한 물과 같았고, 준령과 같이 미동도 없었다. 아마도 안장이 아직 높은거 같았다. 미세한 간단한 동심에서 파문을 간파한 락님의 날카로운 눈.
홍천의 시골길은 평범했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길의 여유는 너그러웠다. 외지인에 대한 배타보다는 여늬길과 같지만 넉넉하게 느껴진 홍천의 길. 그 길을 넷은 달렸다. 그리고 또 달렸다. 바람이 귀볼에 차갑고 머리에 품은 온기를 뺐겨도 마음은 홍천길과 하나가 되어 길이 마음이고, 마음이 길이 되었다. 길을 달린 만큼 마음도 시원했다. 뒤에 대한 사주경계도 필요가 없었다. 고요한 적막을 가르는 잔차 4대도 화음을 이뤄 각자의 음색을 내어 길에 뿌렸다. 우리 4행은 홍천에서 황제라이딩의 호사를 누렸다. 홍천은 자갈밭이 모래밭을 대신했다. 홍수가 질 때면 저 자갈들이 굴러다닌다면 물은 얕아도 위력은 대단했겠다. 저 멀리 모퉁이를 돌며 홍천강이 길게 멀리 펼쳐 진다. 이 무슨 환대를 이리도 황송하게 받는 걸까.
어느 길에 이르니 길이 뚝 끊긴다. 산도 넘지 못한다는 물을 잔차로 건널 수가 있을까. 교각이 세워진 곳옆에 공사를 위해 흙으로 길을 막았다. 흙길을 건너 다시 멜바로 길 아닌 길을 간다. 어떻게 이런 길을 처음 열었을까? 결국 길은 사람이 만드는 거다. 오늘 다시 그 길을 우리는 다지고 왔다.
갈대 사이에 환송의 박수 소리. 자갈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잠시 뒤에 잔차 3대의 행렬이 교행을 했다. 맨 앞에 소녀, 그 뒤에 소녀의 엄마, 그리고 머리가 짭은 가장과 아이의 텐덤 잔차. 우리는 락님, 쇼부님, 아빠곰님, 몬. 합치면 잠시 행운의 숫자였다. 일기를 암시한 것일까. 그날 작년의 냉혹함은 간데 없이 따뜻한 여유만이 있었다. 이것이 진본 관광 라이딩 이라고 락님의 음성이 갈대밭 사이로 흩어진다.
갈대는 강가에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를 길이 났다. 좌로 보이는 홍천강과 이름 모를 작은 산들 그리고 강변. 긴 파노라마에 담긴 일상의 모습. 요새는 이걸 보기가 어려워졌다. 사람도 그럴까? 가끔 조금 큰 돌들은 물에 비추인 모습 덕에 눈에 띄게 커 보였다. 실제로는 조금만 큰데 물에 비친 모습과 합하면 거대해 보였다. 우리도 내면의 고요한 강에 비추고 한 생각 조금 크게 먹으면 성인도 될 수 있는걸까. 바위에 새겨진 무늬가 물속까지 깨끗하게 그어져 있다.
다시 펜션이 있는 곳에서 커피를 마신다. 머리가 짧은 사십 후반의 쥔장께 물을 달여 달라고 곰님이 부탁했다. 쥔장은 그리 인심이 나쁘지 않게 물을 뎁혀 커피를 타왔다. 아빠곰님의 9살난 아이가 구청서 하는 필리핀 어학연수에 간다고 한다. 곰님은 당분간 잔거 업글 힘들겠다(ㅎㅎㅎ).
락님도 자제를 미국의 명문대학에 오는 봄이면 보낸신단다. 부모들의 껍질은 그렇게 자식들에게 알맹이를 내주면서 세월 속에 말라 간다. 그것이 자연의 의발전수일까.
팔봉산 1봉에서 1970년대 초반의 최초의 팔봉산 연봉기를 일간스포츠와 月刊山에 올리셨다는 락님의 전설을 듣는다. 제 1봉의 밑에서 산을 오르던 세월을 말씀하시는 락님은 그저 고승같다. 달을 가리키는 손에 묻은 세월의 흔적을 간과하면 과연 가당할까.
매운탕 집을 찾아간다. 연봉은 8개의 검문이 너울대는 칼바위다. 강은 칼등이고 바위는 칼날이다. 1봉에 이어 나머지 7봉이 호도알처럼 다닥다각 붙어있고 누군가 칼로 이 호도를 앏게 베어낸 것 같다. 그리고 이 호도알을 무수한 산객들이 삽다리를 오가며 오른다. 산은 특이했다. 물도리처럼 팔봉산을 에워 흘렀다. 오뚜기 매운탕집 쥔장은 순무를 깍아 허기진 배를 달래게 했다. 순무는 단단하다. 때로 이빨을 부러뜨릴 정도다. 서합이 제대로 못되면 강한 것도 약한것에 부러질 수 있다. 매운탕에 꺽지, 모래무지가 나왔다. 맛은 길을 따라 생겨나고 소멸되는 건가 보다. 여기서도 락님의 마음에 담긴 세월의 풍경화가 다시 그려 졌다. 예전에는 이곳을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팔봉산을 갔다고 한다. 자갈밭이 있던 곳이 지금은 팔봉산 휴게소며 주차지가 생겨났고 그만큼 물도 나빠졌다고 한다. 쥔장과 락님은 혹시 동향이실까 하는 착각마저 쥔장을 했나 보다. 은근히 락님을 팔았다. 저 분은 전문 산악인이고 사진작가세요. 쥔장의 토끼 같은 마음이 내 귓전에 파문이 전해 왔다. 다음 번에 누군가가 다시 락님과 일행이 되어 홍천강 라이딩을 하면 순무 두 접시라도 떨어지겠지(ㅎㅎ). 그리고 팔봉산은 강원도 홍성군 서면 어목대리 392미터의 산이다.
널미재는 퍽퍽했다. 자전거는 장사진의 고갯길을 한참 올랐다. 은근히 숨을 조여 오는 고갯길. 나는 고갯질이 이제 싫지 않았다. 고개를 오로는 몸짓, 물을 토해내는 피부, 머리는 염분에 떡이 되어 얽히고, 잔차의 페달질도 무거웠다. 그래도 고갯길의 업힐은 맛이 있었다. 아빠곰님은 가학미라고 야지를 놓는다. 그래도 좋다, 잔차를 타고 업힐 하는 이 맛을 나는 부인하지 못한다. 거세 파도처럼 고갯마루에 다가오자 더 길은 잔객들의 기를 꺽으려는 수 십 미터 높이의 파도를 산속에서 일으킨다. 깊은 각도, 핸들바의 움직임도 그만큼 더 여유가 부족했다. 정상은 스스로 알린다. 하늘아래 바로 그곳이 산의 정상이며 고개의 더 갈 수 없는 높은 곳이라고.
중간에 소리산 정상도 왼쪽 편에 보였다. 석간수앞에 즐비한 사람들의 인파와 물을 먹으러 줄을 선 백옥의 물통들. 용감한 쇼부님은 여기서도 용맹을 떨치셨다. 물을 3통 받아 우리는 나눠 마셨다.
그리고 비슬재.를 다시 오르고 정상은 추웠다. 바람이 불고 이제 다운힐을 시원하게 하고 나면 우리의 시원인 쇼부님의 밴이 눈앞에 있을 것이다.
평지에 내려 쏜살같이 달렸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오직 햇살과 내달리는 잔차의 4행이 있었을 뿐이다. 고갯질 오를 때 흐르던 식은땀이 바람에 날려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자전거를 눕히고 햇살이 따사로왔다. 멀리 연무가 인가에 피어나고 락님이 이를 기술적으로 담으셨다. 오늘 사진기술을 하나 더 전수받은 아빠곰님 마냥 신기해 한다. 오늘 받은 기술은 1000냥짜리란다. 1000냥에 포장된 비결.
햇살과 건강이 관계가 있을까. 구름은 높고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은은한 생선비늘같게 우리의 눈앞을 헤엄쳐 다녔다. 그날의 라이딩은 그렇게 좋았다. 마이들하게 연무처럼 기억속에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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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6일 새벽. 날씨에 아랑곳 하기 않는 그런 사람들이 모였다. 기상청의 날씨예보도 이들의 머리속에 다 챙겨 와 있다. 모인 차는 세 대로 그중 압권은 말바의 비공식 투어링 밴인 쇼부님의 잔차다. 말들은 고분 고분 넉넉한 공간에 실렸다. 한강이 넘실대고 바람도 그리 차갑지 않았다. 구름은 다소 끼었으나 어쨌든 여명이 터왔다.
모인 분은 4명. 간밤에 2분이 잠과의 전투와 감기와의 포연속을 뚫고 나오지를 못했다. 이 분들과 락헤드님이 통신을 취했고, 일행은 모두 넷으로 정해 쇼부님의 잔차에 4인의 홍천강을 향한 용사들도 무거운 몸을 실었다. 넷보다 가벼운 여섯은 모순 같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구리를 지나 외곽 도로로 지나 한참을 달렸다. 해장국집 앞에는 벌써 차들이 즐비했다. 안에는 삼삼오오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등산객들이 대부분이었다. 날이 추워서인가 MTB 인구가 바닥에 눌러 붙었다. 해장국을 시켜 놓고 다시 선지를 한 사라 덜 달라고 했다. 선지는 과거에 먹을게 없던 시절에 먹던 음식이다. 그게 어디든 그 당시 사람들은 선지를 가끔 먹었다. 나도 선지를 어릴 적에 정육점에 가서 사 온 기억이 났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공간에 깃든 사람들인가?
다시 칼칼한 공기를 가르며 쇼부님의 밴은 홍천길 출발지에 가볍게 도착했다. 잔차를 내리고 아침공기를 마셨다. 다소 쌀쌀한걸 감추기 어렵다. 올해 처음 타 볼 강원도의 한기. 작년과는 비교가 않된단고 할 정도로 아주 마일드한 한기였다고 한다. 아주 짧은 구간, 워밍업을 위한 고속회전으로 몸을 뎁히고 근육을 깨우는 고수들의 몸동작. 흔히 워밍업은 아주 음풍의 속도를 맞추는 것으로 알던 나는 적잖이 호흡이 가빴다.
서울서 오던 길을 따라 경사진 곳을 올랐다. 길에 다니는 차량이 역시 한산했다. 일행의 언덕을 치는 속도가 달랐다. 쇼부님의 잔차가 아주 무거워보였다. 나중에 안거지만 디스크패드를 잡아주는 부품이 약간 휘어 있었다. 이때도 락헤드님의 진단으로 디스크도 고치고, 안장도 조금 낮추었다. 좀 더 낮추라는 락님의 배려에 쇼부님은 미안해서인지 더 안장을 낮추지 않았다. 라이딩의 마지막 비슬고개에서 다운힐을 끝내고 평지를 고속으로 바람의 질주자 4인. 쇼부님의 척추는 잔차의 축을 중심으로 좌로 우로 움직임이 규칙적이었다. 반면 락님과 곰님의 축은 고요한 물과 같았고, 준령과 같이 미동도 없었다. 아마도 안장이 아직 높은거 같았다. 미세한 간단한 동심에서 파문을 간파한 락님의 날카로운 눈.
홍천의 시골길은 평범했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길의 여유는 너그러웠다. 외지인에 대한 배타보다는 여늬길과 같지만 넉넉하게 느껴진 홍천의 길. 그 길을 넷은 달렸다. 그리고 또 달렸다. 바람이 귀볼에 차갑고 머리에 품은 온기를 뺐겨도 마음은 홍천길과 하나가 되어 길이 마음이고, 마음이 길이 되었다. 길을 달린 만큼 마음도 시원했다. 뒤에 대한 사주경계도 필요가 없었다. 고요한 적막을 가르는 잔차 4대도 화음을 이뤄 각자의 음색을 내어 길에 뿌렸다. 우리 4행은 홍천에서 황제라이딩의 호사를 누렸다. 홍천은 자갈밭이 모래밭을 대신했다. 홍수가 질 때면 저 자갈들이 굴러다닌다면 물은 얕아도 위력은 대단했겠다. 저 멀리 모퉁이를 돌며 홍천강이 길게 멀리 펼쳐 진다. 이 무슨 환대를 이리도 황송하게 받는 걸까.
어느 길에 이르니 길이 뚝 끊긴다. 산도 넘지 못한다는 물을 잔차로 건널 수가 있을까. 교각이 세워진 곳옆에 공사를 위해 흙으로 길을 막았다. 흙길을 건너 다시 멜바로 길 아닌 길을 간다. 어떻게 이런 길을 처음 열었을까? 결국 길은 사람이 만드는 거다. 오늘 다시 그 길을 우리는 다지고 왔다.
갈대 사이에 환송의 박수 소리. 자갈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잠시 뒤에 잔차 3대의 행렬이 교행을 했다. 맨 앞에 소녀, 그 뒤에 소녀의 엄마, 그리고 머리가 짭은 가장과 아이의 텐덤 잔차. 우리는 락님, 쇼부님, 아빠곰님, 몬. 합치면 잠시 행운의 숫자였다. 일기를 암시한 것일까. 그날 작년의 냉혹함은 간데 없이 따뜻한 여유만이 있었다. 이것이 진본 관광 라이딩 이라고 락님의 음성이 갈대밭 사이로 흩어진다.
갈대는 강가에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를 길이 났다. 좌로 보이는 홍천강과 이름 모를 작은 산들 그리고 강변. 긴 파노라마에 담긴 일상의 모습. 요새는 이걸 보기가 어려워졌다. 사람도 그럴까? 가끔 조금 큰 돌들은 물에 비추인 모습 덕에 눈에 띄게 커 보였다. 실제로는 조금만 큰데 물에 비친 모습과 합하면 거대해 보였다. 우리도 내면의 고요한 강에 비추고 한 생각 조금 크게 먹으면 성인도 될 수 있는걸까. 바위에 새겨진 무늬가 물속까지 깨끗하게 그어져 있다.
다시 펜션이 있는 곳에서 커피를 마신다. 머리가 짧은 사십 후반의 쥔장께 물을 달여 달라고 곰님이 부탁했다. 쥔장은 그리 인심이 나쁘지 않게 물을 뎁혀 커피를 타왔다. 아빠곰님의 9살난 아이가 구청서 하는 필리핀 어학연수에 간다고 한다. 곰님은 당분간 잔거 업글 힘들겠다(ㅎㅎㅎ).
락님도 자제를 미국의 명문대학에 오는 봄이면 보낸신단다. 부모들의 껍질은 그렇게 자식들에게 알맹이를 내주면서 세월 속에 말라 간다. 그것이 자연의 의발전수일까.
팔봉산 1봉에서 1970년대 초반의 최초의 팔봉산 연봉기를 일간스포츠와 月刊山에 올리셨다는 락님의 전설을 듣는다. 제 1봉의 밑에서 산을 오르던 세월을 말씀하시는 락님은 그저 고승같다. 달을 가리키는 손에 묻은 세월의 흔적을 간과하면 과연 가당할까.
매운탕 집을 찾아간다. 연봉은 8개의 검문이 너울대는 칼바위다. 강은 칼등이고 바위는 칼날이다. 1봉에 이어 나머지 7봉이 호도알처럼 다닥다각 붙어있고 누군가 칼로 이 호도를 앏게 베어낸 것 같다. 그리고 이 호도알을 무수한 산객들이 삽다리를 오가며 오른다. 산은 특이했다. 물도리처럼 팔봉산을 에워 흘렀다. 오뚜기 매운탕집 쥔장은 순무를 깍아 허기진 배를 달래게 했다. 순무는 단단하다. 때로 이빨을 부러뜨릴 정도다. 서합이 제대로 못되면 강한 것도 약한것에 부러질 수 있다. 매운탕에 꺽지, 모래무지가 나왔다. 맛은 길을 따라 생겨나고 소멸되는 건가 보다. 여기서도 락님의 마음에 담긴 세월의 풍경화가 다시 그려 졌다. 예전에는 이곳을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팔봉산을 갔다고 한다. 자갈밭이 있던 곳이 지금은 팔봉산 휴게소며 주차지가 생겨났고 그만큼 물도 나빠졌다고 한다. 쥔장과 락님은 혹시 동향이실까 하는 착각마저 쥔장을 했나 보다. 은근히 락님을 팔았다. 저 분은 전문 산악인이고 사진작가세요. 쥔장의 토끼 같은 마음이 내 귓전에 파문이 전해 왔다. 다음 번에 누군가가 다시 락님과 일행이 되어 홍천강 라이딩을 하면 순무 두 접시라도 떨어지겠지(ㅎㅎ). 그리고 팔봉산은 강원도 홍성군 서면 어목대리 392미터의 산이다.
널미재는 퍽퍽했다. 자전거는 장사진의 고갯길을 한참 올랐다. 은근히 숨을 조여 오는 고갯길. 나는 고갯질이 이제 싫지 않았다. 고개를 오로는 몸짓, 물을 토해내는 피부, 머리는 염분에 떡이 되어 얽히고, 잔차의 페달질도 무거웠다. 그래도 고갯길의 업힐은 맛이 있었다. 아빠곰님은 가학미라고 야지를 놓는다. 그래도 좋다, 잔차를 타고 업힐 하는 이 맛을 나는 부인하지 못한다. 거세 파도처럼 고갯마루에 다가오자 더 길은 잔객들의 기를 꺽으려는 수 십 미터 높이의 파도를 산속에서 일으킨다. 깊은 각도, 핸들바의 움직임도 그만큼 더 여유가 부족했다. 정상은 스스로 알린다. 하늘아래 바로 그곳이 산의 정상이며 고개의 더 갈 수 없는 높은 곳이라고.
중간에 소리산 정상도 왼쪽 편에 보였다. 석간수앞에 즐비한 사람들의 인파와 물을 먹으러 줄을 선 백옥의 물통들. 용감한 쇼부님은 여기서도 용맹을 떨치셨다. 물을 3통 받아 우리는 나눠 마셨다.
그리고 비슬재.를 다시 오르고 정상은 추웠다. 바람이 불고 이제 다운힐을 시원하게 하고 나면 우리의 시원인 쇼부님의 밴이 눈앞에 있을 것이다.
평지에 내려 쏜살같이 달렸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오직 햇살과 내달리는 잔차의 4행이 있었을 뿐이다. 고갯질 오를 때 흐르던 식은땀이 바람에 날려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자전거를 눕히고 햇살이 따사로왔다. 멀리 연무가 인가에 피어나고 락님이 이를 기술적으로 담으셨다. 오늘 사진기술을 하나 더 전수받은 아빠곰님 마냥 신기해 한다. 오늘 받은 기술은 1000냥짜리란다. 1000냥에 포장된 비결.
햇살과 건강이 관계가 있을까. 구름은 높고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은은한 생선비늘같게 우리의 눈앞을 헤엄쳐 다녔다. 그날의 라이딩은 그렇게 좋았다. 마이들하게 연무처럼 기억속에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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