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보이는 길로 죽 올라가면 비암리 임도가 나온다.
'땅땅땅'
시끄러운 금속 파열음이 끊이지 않는 철공소에서 키우는 고양이는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태평하게 낮잠을 즐긴다고 한다.
좀 잔인한 실험이긴 하지만 조용한 환경에서 사는 고양이의 뇌의 일부를
철공소 고양이에게 이식했더니 탕탕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수시로 깨며 잠을 통 못 이루며 불안해하더란다.
난 태평스럽게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쏟아지는 비를 꽤나 좋아해서 아들놈은 '날궂이 라이딩',
마누라는 '저게 대관절 무신 병일꼬?'하며 혀를 찼지만
그 소리들을 듣는둥마는둥 귓전으로 흘리며
비만 내리면 물 만난 고기처럼 잔차를 끌고 뛰쳐나갔었는데
더운 여름이면 아무리 거센 빗줄기일지언정 비옷이 없어도 좋았다.
바람이 심한 날에 거세게 내리는 비는 헬멧과 비옷을 때리며
그야말로 깨와 콩을 함께 뒤섞어 볶아대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한산한 자전거도로에서 빗방울들을 가슴으로 안으며 무심하게 달리노라면
어느 순간에 시끄러운 빗소리가 잦아들면서 명상에 빠져들었었다.
끝없이 다가와 뒤로 밀려나는 중앙선에 표시된 점선들도
어느덧 영원처럼 이어지며 한 줄로 실선화한다.
모든 소리와 사물들이 정지되며 자전거를 탄 나는
어쩌면 정물화 한 구석의 소품이었다.
가끔 조향이 흔들리면 멈춘 듯하던 앞바퀴와 실선의 간격이
파도가 출렁이듯 멀어졌다 가까와졌다 하는 광경이 어렴풋이 느껴져
이따금씩 내가 페달링을 계속하고 있다는 자각을 일깨웠다.
미나리꽝의 맹꽁이 개구리 우는 소리에 귀가 따가와
"엇따! 그놈들 참 되게 시끄럽네."
하면서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조그만 돌 하나를 집어서 던지면
갑자기 귀가 멍할 정도로 사위가 적막해지곤 했었다.
우중라이딩을 하면서도 꼭 그런 느낌처럼
일순 빗소리가 사라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데
철공소 고양이의 시끄러운 환경에 대한 적응과 비슷한 건지는 모르겠다.
두어 해 잊고 지냈던 우중라이딩.
어제 모처럼 비암리 임도와 싱글을 타며 비를 맞으며
비와 자연이 어우러지며 주는 감성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난 고운 흙으로 다져진 길을 가장 좋아한다.
초등학교 시절, 자전거를 배운답시고 동네에 한 대밖에 없는
이장님댁 자전거를 단짝 친구와 야심한 밤에 몰래 끌고
계룡산이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들판으로 난 기다란 농로로 나가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밤을 꼬박 새우며 탔다.
고작 검정고무신을 겹쳐 볏짚 줄기를 고무신 사이에 끼우고는
그게 자동차라며 모래를 담아 끌고 다니던 시절이라
이 깡촌의 쥐방울 만한 자전거도둑들에겐
자전거란 매커니즘은 실로 가슴이 설레는 감동이었다.
기다란 농로는 짐을 잔뜩 실은 소달구지 바퀴에 여기저기 눌려
그리 평탄한 길은 아니었지만 거칠고 각진 울퉁불퉁함이 아니었고
완만하고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곡선이었다.
게다가 대단히 부드러운 고운 흙은
비록 다져졌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융통성이 있어
울퉁불퉁한 지면의 반발을 대부분 무마시켰다.
모처럼 찾은 비암리 임도에 가끔씩 마주치는 고운 흙길.
아득히 먼 고향이 거기에 있었다.
▲이곳 비암리 임도를 탈 때만 해도 어쩌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였는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광인가.
산으로 난 길에 시멘트 포장이 깔리면 정나미가 떨어지며 가기 싫어진다.
등산로에 난 인공 구조물을 싫어하는 건 라이더뿐만 아니라
등산객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요즘은 지자체에서 등산로에 계단 등의 구조물을 수없이 설치하던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면 계단을 잘 이용하지 않고 계단 옆으로 올라
새로운 길을 다져서 내며 계단을 머쓱하게 만든다.
자연이란 생긴 그대로가 가장 좋다는 생각은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행정을 담당하는 지자체들에선
그냥 오르기 힘든 경사라거나 꼭 필요한 장소 외엔
무차별하게까지 보이는 구조물 설치를 재고해볼 일이다.
아직 체력이 온전하게 회복된 건 아니어서
간혹 심술궂게 페이스를 높이는 갑장님을 좇느라 주위에 펼쳐진 풍경을 놓쳤지만
정작 앞서 가시는 갑장님은 그 와중에도 길옆에 보이는 두릅을 거의 놓치지 않는다.
무르팍에 기름기가 슬슬 빠져가는 나이 탓인지
업힐은 별반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다운힐 실력은 그 환경을 접해보는 빈도 만큼 늘어가는 것 같다.
예전엔 조그만 돌부리만 나와도 쩔쩔매며 피해가느라 애를 썼는데
훨씬 더 세월이 지난 요즈음은 일부러 돌이나 바위를 찾아 타고 넘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싱글을 타는 사진은 하나도 없다냐?'
아마 둘 다 싱글의 재미에 빠져 주루룩 내려가기만 했을 터이다.
▲비암리 임도를 탄 다음 절벽 좌측으로 난 싱글길로 다운힐을 하면 여기로 내려오는데
여기서 조금 옆으로 가면 웨이브코스라 명명되어진 임도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부터 빗줄기가 굵어지며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응? 오늘 오후에 비가 온다고 하던데 어쩐 일이슈?"
"쉽게 비가 올 것 같진 않은데요?"
엊그제 임도 이야기를 했더니 갑장께서 오셔서 임도를 한 번 타자고 하신다.
비암리 임도로해서 싱글을 타고 내려오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 여기서 잘 판단을 해야 되는데요. 청죽님 여기서 돌아갈까요?"
"번짱도 아닌 제가 뭘 알겠습니까? 크크. 처분대로 따르지요 뭐"
결국 웨이브코스로 내쳐 오르기로 작정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도 그렇고 더욱 찌푸려오는 하늘도 그렇고
비가 잦아들 거란 기대는 애초에 둘 다 없었을 것이지만
그냥 내쳐 달렸다.
'나야 비를 좋아하지만 갑장께서도 전염되셨나?'
고라니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요즈음의 위성사진을 보면 뻘겋게 헐벗었던 예전과 달리
산하가 꽤 푸르게 변했다.
아마도 땔감이 나무에서 석유가스로 바뀐 게 가장 큰 이유이리라.
숲이 우거지니 고라니도 숨을 곳이 많아진데다
수렵을 금지시킨 탓인지 개체수가 무척 는 게 실감난다.
산을 내려와 도로를 달리다 마주친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러
자판기에서 뽑아 권하시는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받자니
무더운 땡볕에 종일 밭을 매다가 맞는
어머니께서 내오신 반가운 새참을 받는 기분이다.
"캬~ 정말 좋습니다."
연이은 단비를 맞아 한층 짙푸러진 녹음을 눈에 넣어 내려와
커피에 담아 마시니 그 향기를 어디에 비할꼬.
(단비를 맞았으니 나같은 토종의 키도 조금은 자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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