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이발관...머리깎기가 즐겁지 않았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큼지막한 손에
끌려가다시피 들어가서 한참을 졸다가 겨우 해방되었던 기억이 있는 곳.
복덕방...나이 드신 어른들이 모여 앉아서 신문도 보고 바둑,장기도 두고
때로는 화투장과 김치,막걸리가 오가며 큰 소리도 가끔 나던 곳.
두곳다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따스함과 편안함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예전 이미지를 간직한 곳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양산입구의 산타바이크.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편안하게 들리는 하루라도 안가면 허전한 동네사랑방과
같은 곳. 고급스럽고 잘 정리된 대부분의 바이크샵과 비교하면 동네이발관이나
복덕방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편하다.
주인장의 이미지도 보편적인 바이크샵의 오너와는 거리가 멀다. 한참 멀다.
동네이발관의 주인 같다.
고급의 그리고 최신의 제품도 별로 없다. 조금은 철지난듯한 제품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양산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분주한 곳.
난 이곳이 오래도록 문을 열고 있기를 바란다. 가능하면 하루도 쉬지 말고.
어릴 때 동네이발관이나 복덕방이 문이 닫혀 있는걸 본 기억이 별로 없기에.
돈을 많이 버는 것은 그의 몫이다. 내가 언제나 편하게 들러서 물도 마시고
자리도 하나 턱 차지하고 앉아서 지양산을 즐기는 이들의 소식도 전해 듣고.
아주 대단히 이기적인 생각인줄은 안다.
그렇지만 정말 오래도록 문을 열기를 바란다. 가끔은 늦게 문을 열어도
가끔은 전화를 안받아도 그래도 지양산이 있는 동안은 동네이발관이나
복덕방처럼 편하고 따스하고 정겨운 사람냄새가 나는 공간으로 존재해주기를
바란다. 가을 아침에 바라는 커다란 욕심이다.
[포토다큐]가위소리만 남은 ‘추억의 박물관’
입력: 2007년 09월 02일 16:24:49
▶ 사랑방이 된 그곳 장흥 수문이발관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풍경이 되어버린 시골 이발관. 전남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수문이발관은 60년이 넘은 이발관이다. 낡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고향을 지키시는 아버지의 깊이 팬 주름살만큼이나 굵고 강인한 세월의 힘이 아슬아슬한 건물을 굳건하게 지탱해 주고 있는 듯 했다.
거동이 불편한 방종열할아버지(69) 댁에 출장 이발을 나간 이수신씨가 시골집 툇마루에서 할아버지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집집마다 ‘바리깡’ 하나쯤은 있었던 어린 시절. 동네 이발관 육중한 의자 팔걸이에 널빤지 깔고 앉아 머리를 자르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수세미로 머리를 박박 문질러 댈 때면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느라 눈물 찔끔 흘린 적도 있지만 이발사 아저씨의 바리깡 솜씨는 어머니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었다. 읍내에 뚫린 신작로보다 더 반듯하게 머리를 깎아주던 어린시절 그 이발관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을까. 무뎌진 바리깡 날 때문에 머리카락이 뜯겨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오래된 시골 이발관을 찾았다.
갯내음 물씬 풍기는 전남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200여가구가 살고 있는 장흥에서 제법 큰 어촌 마을이다. 18번 국도가 지나가는 마을 입구 왕복 2차선 도로옆. 슬레이트 지붕 올린 단층 건물은 한눈에 봐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한글로 또박또박 적힌 ‘수문이발관’이라는 간판이 아니었다면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이발관 선반에 놓여 있는 뚜껑이 달아난 로션 통에서는 고향의 향기가 흘러나오는 듯 했다.
네댓평 남짓 될 듯한 이발관 안에는 검은 테두리의 거울 네개가 사이좋게 나란히 걸려있고, 선반 위에 놓여 있는 14인치 컬러 TV에서는 색 바랜 화면이 연기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유리로 된 약장에는 녹슨 도로코 면도날과 사용하지 않는 이발도구가 골동품처럼 수북이 쌓여있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관 주인은 낚싯줄로 군데군데 얽어맨 파리채로 썰렁한 이발관 허공만 쉴 새 없이 쫓고 있다. “요새는 아그들도 백프로 미장원에 가뿐께로 찾는 손님이 없당께로. 내 또래들이나 심심혀서 놀러 오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만 하루에 서너 분이나 오실랑가 몰것네.” 수문이발관 주인인 이수신씨(56)의 말이다.
이발관 주인 이수신씨가 수돗가에서 이발을 끝낸 김종철할아버지(74)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다. 화단에 물을 주던 물뿌리개로 머리를 감겨주는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무허가 이발사 노릇을 하던 부친의 어깨너머로 배운 이발 기술. 정식으로 이용면허증을 따서 손에 가위를 쥔 지 어느덧 40년이 넘었다고 했다. “울 아부지가 옛날에는 집집이 봄엔 보리 서되, 가슬 타작 땐 쌀 두되씩 ‘나가시’를 받아갖고 머리를 잘랐던 시절도 있었다하데. 그것도 뭣이냐, 부잣집 일꾼들이 들새경 날새경 받고 살아가던 시절 야그지.”
지금처럼 미장원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명절이 다가오면 하루에 서른댓명씩 머리를 잘라줘야 했을 정도로 이씨도 바빴다고 했다. 1990년대 들어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 해지면서 바빴던 손이 한가해졌다며 이씨는 마디 굵은 손을 매만진다. “인자 이 거 해갖고는 생활이 안되지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뭐 딱이 다른 할 일도 없응께로 이라고 있제. 글고 내가 이거 안 하믄 인자 누가 할 사람도 없는 기라….”
42년째 가위질을 해온 수문이발관 주인 이수신씨(56)가 얼굴에 웃음 한바가지 머금은 채 단골손님인 김윤정할아버지(65)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60년을 훌쩍 넘긴 낡은 이발관 내부는 골동품 가게를 연상케 하지만 골동품 가게에서는 찾을 수 없는 훈훈한 정(情)이 선반 가득 쌓여 있다.
<사진·글/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끌려가다시피 들어가서 한참을 졸다가 겨우 해방되었던 기억이 있는 곳.
복덕방...나이 드신 어른들이 모여 앉아서 신문도 보고 바둑,장기도 두고
때로는 화투장과 김치,막걸리가 오가며 큰 소리도 가끔 나던 곳.
두곳다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따스함과 편안함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예전 이미지를 간직한 곳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양산입구의 산타바이크.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편안하게 들리는 하루라도 안가면 허전한 동네사랑방과
같은 곳. 고급스럽고 잘 정리된 대부분의 바이크샵과 비교하면 동네이발관이나
복덕방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편하다.
주인장의 이미지도 보편적인 바이크샵의 오너와는 거리가 멀다. 한참 멀다.
동네이발관의 주인 같다.
고급의 그리고 최신의 제품도 별로 없다. 조금은 철지난듯한 제품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양산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분주한 곳.
난 이곳이 오래도록 문을 열고 있기를 바란다. 가능하면 하루도 쉬지 말고.
어릴 때 동네이발관이나 복덕방이 문이 닫혀 있는걸 본 기억이 별로 없기에.
돈을 많이 버는 것은 그의 몫이다. 내가 언제나 편하게 들러서 물도 마시고
자리도 하나 턱 차지하고 앉아서 지양산을 즐기는 이들의 소식도 전해 듣고.
아주 대단히 이기적인 생각인줄은 안다.
그렇지만 정말 오래도록 문을 열기를 바란다. 가끔은 늦게 문을 열어도
가끔은 전화를 안받아도 그래도 지양산이 있는 동안은 동네이발관이나
복덕방처럼 편하고 따스하고 정겨운 사람냄새가 나는 공간으로 존재해주기를
바란다. 가을 아침에 바라는 커다란 욕심이다.
[포토다큐]가위소리만 남은 ‘추억의 박물관’
입력: 2007년 09월 02일 16:24:49
▶ 사랑방이 된 그곳 장흥 수문이발관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풍경이 되어버린 시골 이발관. 전남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수문이발관은 60년이 넘은 이발관이다. 낡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고향을 지키시는 아버지의 깊이 팬 주름살만큼이나 굵고 강인한 세월의 힘이 아슬아슬한 건물을 굳건하게 지탱해 주고 있는 듯 했다.
거동이 불편한 방종열할아버지(69) 댁에 출장 이발을 나간 이수신씨가 시골집 툇마루에서 할아버지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집집마다 ‘바리깡’ 하나쯤은 있었던 어린 시절. 동네 이발관 육중한 의자 팔걸이에 널빤지 깔고 앉아 머리를 자르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수세미로 머리를 박박 문질러 댈 때면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느라 눈물 찔끔 흘린 적도 있지만 이발사 아저씨의 바리깡 솜씨는 어머니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었다. 읍내에 뚫린 신작로보다 더 반듯하게 머리를 깎아주던 어린시절 그 이발관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을까. 무뎌진 바리깡 날 때문에 머리카락이 뜯겨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오래된 시골 이발관을 찾았다.
갯내음 물씬 풍기는 전남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200여가구가 살고 있는 장흥에서 제법 큰 어촌 마을이다. 18번 국도가 지나가는 마을 입구 왕복 2차선 도로옆. 슬레이트 지붕 올린 단층 건물은 한눈에 봐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한글로 또박또박 적힌 ‘수문이발관’이라는 간판이 아니었다면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이발관 선반에 놓여 있는 뚜껑이 달아난 로션 통에서는 고향의 향기가 흘러나오는 듯 했다.
네댓평 남짓 될 듯한 이발관 안에는 검은 테두리의 거울 네개가 사이좋게 나란히 걸려있고, 선반 위에 놓여 있는 14인치 컬러 TV에서는 색 바랜 화면이 연기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유리로 된 약장에는 녹슨 도로코 면도날과 사용하지 않는 이발도구가 골동품처럼 수북이 쌓여있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관 주인은 낚싯줄로 군데군데 얽어맨 파리채로 썰렁한 이발관 허공만 쉴 새 없이 쫓고 있다. “요새는 아그들도 백프로 미장원에 가뿐께로 찾는 손님이 없당께로. 내 또래들이나 심심혀서 놀러 오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만 하루에 서너 분이나 오실랑가 몰것네.” 수문이발관 주인인 이수신씨(56)의 말이다.
이발관 주인 이수신씨가 수돗가에서 이발을 끝낸 김종철할아버지(74)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다. 화단에 물을 주던 물뿌리개로 머리를 감겨주는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무허가 이발사 노릇을 하던 부친의 어깨너머로 배운 이발 기술. 정식으로 이용면허증을 따서 손에 가위를 쥔 지 어느덧 40년이 넘었다고 했다. “울 아부지가 옛날에는 집집이 봄엔 보리 서되, 가슬 타작 땐 쌀 두되씩 ‘나가시’를 받아갖고 머리를 잘랐던 시절도 있었다하데. 그것도 뭣이냐, 부잣집 일꾼들이 들새경 날새경 받고 살아가던 시절 야그지.”
지금처럼 미장원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명절이 다가오면 하루에 서른댓명씩 머리를 잘라줘야 했을 정도로 이씨도 바빴다고 했다. 1990년대 들어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 해지면서 바빴던 손이 한가해졌다며 이씨는 마디 굵은 손을 매만진다. “인자 이 거 해갖고는 생활이 안되지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뭐 딱이 다른 할 일도 없응께로 이라고 있제. 글고 내가 이거 안 하믄 인자 누가 할 사람도 없는 기라….”
42년째 가위질을 해온 수문이발관 주인 이수신씨(56)가 얼굴에 웃음 한바가지 머금은 채 단골손님인 김윤정할아버지(65)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60년을 훌쩍 넘긴 낡은 이발관 내부는 골동품 가게를 연상케 하지만 골동품 가게에서는 찾을 수 없는 훈훈한 정(情)이 선반 가득 쌓여 있다.
<사진·글/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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