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키님...어제 밤 대화중에
내 또래의 젊은 시절에 대해 궁금해 했었죠?
청춘 이라는 것이 타 오르는 점화의 시기가 다를 뿐
크게 틀릴게 있겠습니까?....^^
어제 약속했던대로..내 젊은 시절..(지금 50대들)의
한 부분을 그린 글 올려 봅니다
그해 겨울은 추웠네
------------------
예술의 전당에 서 있는 키큰 활엽수의 여린 잎을 흔들며
바람이 서걱거리는 저녁...친구가 건네 준 티켓을 들고
양희은 콘서트를 보러 갔다
60년대의 세월은...듬성이는 내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
양희은의 늘어진 얼굴과 두둑한 뱃살을 스치고
덕수궁 돌담옆의 경기여고...구세군 회관..
몬테칼로. 드시에네. 세시봉. 아카데미 음악감상실로 줄달음쳤다
한계령으로 객석을 향해 인사를 던지는 양희은의 새로운창법은
클래식 가수의 창법을 흉내내어 쉽게 불러 보자는...
세월은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관람을 시작케 하였으나
중간 중간의 멘트에 나오는 60년대의 향수어린 단어들이
3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관객들을 그 어두웠던 유신의 암흑,
저항의 60 년대 종로거리로, 무교동거리로 끌고 갔다
장발을 잘리지 않기 위해 골목 골목으로 숨어 다녔던 나는
머리를 틀어 올려 털모자로 감추고 다녔었다
결국 경찰의 단속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머리를 박박 밀어 삼단(?)같은 머리카락을
팔아 먹은 적이 있는데,그 가격이
당시 구로공단의 주요 수출 품목이 가발이었던 탓에
그 돈으로 친구들과 함께 무교동 낙지를 포식할만한 거금이었다
장발을 피하여 머리를 밀었으나,경찰은 박박 민 중대가리를
사회에 대한 저항분자로 몰아 또 다시 나를 잡아 넣었다
서울 시내 경찰서란 경찰서는 거의 빼놓지 않고 잡혀 들어 갔던 나는
어느새 야간 통행금지나 무전취식으로 들어 오는 신삥들에게
신입식을 시키며 킬킬거릴만큼 사회의 이단아로 자라고 있었다
그 암흑의 세월에 투명한 유리구슬같은 목소리가 있어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양희은이었다
촌티나는 티셔츠와 낡은 청바지를 입고 나타 난 양희은은
처음엔 동정심으로...(기타도 살 돈이 없다는 소문 때문에)
다음엔 신선함으로 우리에게 다가 왔으나
그 힘찬 음성과 선동적인 김민기의 노래들이 합하여
어느새 당시의 청년문화의 구심점으로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봉기..라는 표현이 옳다.
당시의 의식있는 젊은이들은 모두 문제아였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버림받고 있었다
그렇게 흩어져 상처난 이들을 한자리에 모여 노래하게 한 죄...
양희은은 그렇게 유신정부에 국가반역의 큰 죄를 짓고 있었다
그의 노래들은 운동가로 선동가로 개사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는 노래는
버림받은 소외감에 상처 받았던 이들을 위로하여
사회의 불순분자이며 패배자따위인 그들의 위치를
올곧고 날선 정신의 임자로서 격상시켜 주었다
김민기가 만든 양희은의 노래 중에서
<아무리 개사를 하여도 운동가가 되지 않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내 젊은 운명을 가르는 한 분기점이 된 곡이다
어린 나는 공부에만 전념하는 것이 청춘의 의무라는
가족들의 세뇌에 적극 동조하는 타잎이었는데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그 노래를 즐겨 부르는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 선배의 과격함.슬픔.분노.대중에 대한 애정.고독에
존경과 우정을 감출 수 없었던 나는 끝내 그 선배와 의형제를 맺었다
아마도 김민기의 그것 말고 그 선배의 모습을 그리는데 적합한 노래가 있다면
조동진의 <그> 라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말이..말이 없지만
그는 항상 자유롭고 ..
....
그가 숲속을 거닐면 그는 나무 한 그루
그가 냇가에 앉으면 그는 작은 돌 하나
....
그는 날으는 새...
어느 흐린 날...눈이 지천으로 하늘과 땅을 뒤덮던 날...
그 형은 소주한병과 이발소 면도칼을 들고 나를 찾아 왔다
칼로 팔뚝을 그어 둘의 피를 섞은 소주를 마신 밤..
나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다는 기쁨과
그를 나의 수준으로 낮추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으리라
내 팔뚝의 상처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연히 남아있으나
얼마 후 그 선배는 길위에서 죽었다.
길가에서 죽었다는 주변의 표현에 나는 항상 길위에서..라고 수정하곤 했다
< On the Road>....그 다운 ...자유로운 죽음이었다
집을 뛰쳐 나와 그 후로 보낸 수년간의 방랑 생활은 나를 변화 시켰다
지리산으로 설악산으로 기어 다니며
그 동안 있는 자, 배운 자의 기득권에 안주하며 보낸 세월에 대해...
학문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 갈등했고
내 존재가 두려웠고,앞으로의 변화가 두려웠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가위 눌리곤 했다
며칠씩 암벽에 매달려 있으며 죽고도 싶었고
이유없는 눈물이 몇시간씩 흐르도록 사람이 그리웠다
어두운 비 내려 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검은 두눈에 눈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 이름..사람이어라
한없는 청춘의 방황속에서
그 선배가 <유치하지만 가장 위로가 되는 노래>라며 불러 주던
양희은의 그 노래가 화려한 조명 밑에서 불리워 지고 있었다
안치환의 곡을 만들거나 유명한 노래들을 만든 세션맨들이
양희은을 더욱 빛내고 있었다
장중한 남성 합창단의 백코러스로 우리를 크라이막스로 끌고 간 곡은
아침이슬...
그 겨울...청춘의 뜨거운 불길마저 얼어 붙던 유신의 겨울을 지낸
관객들이 목청껏 따라부르는 아침이슬은
30년 전 횃불을 밝혀 놓고 스크램을 짜고 부르던 바로 그 노래였다.
경찰들과 통행금지를 피해 숨어 든 싸구려 여인숙에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세코날로 마음을 다스리던 내 젊은 친구들...
전차표 한장으로 소주를 바꾸어 마시고
몇시간 씩 걸어 가며 벌이던 열띤 토론들
담배 반개피로 다섯명쯤 돌아가며 태우던 그 바싹 마른 입술들..
시골 한 구석에서 대마초를 키우며
가끔 서울로 올라 와 한 주먹씩 나누어 주던 그 자식....
양희은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될 무렵
서유석과의 결혼설이 파다했다
밥 딜런의 <부로윙 인 더 윈>을 개사하여
대학가에서 널리 불리던 서유석의 노래 역시 저항가요였다
<오 내 친구야 묻지를 마오..
너도 몰라 나도 몰라요 >
녹슨 레일을 긁는 듯한 밥딜런의 호소력에는 비할바가 아니지만
이 나라 팝송 매니아의 시조 세대들에게는 새로운 물결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가문의 불균형등의 문제로 유야무야되었으나
박두진의 <하늘>이라는 시에 서유석이 곡을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노래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 여릿 멀리서 온다
멀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은
향기로운 하늘은 ..호흡...
......
그렇게 양희은의 청춘도...나의 청춘도
오는 줄도 모르게 여릿 여릿 다가오는 하늘처럼
가는 줄 모르게 지나갔다
세월은 ...뜨거운 모래사장에 숨어 번뜩이는 유리같이
가슴을 찔러 들어 오는 양희은 특유의 패기를 빼앗아 갔지만
세월에 잘 익은 양희은의 목소리는 우리를 실망 시키지 않았다
이제 그토록 갈망할 것들이 많았던 암흑의 세월을 지나,
운동가요의 대명사 양희은의 시대를 지나...
넓고 푸른 하늘에 향기롭게 익어 가는 양희은의 목소리를 기대하며
박두진의 시, 마지막 부분을 기억해 본다
......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내 마음이 익는다
내 또래의 젊은 시절에 대해 궁금해 했었죠?
청춘 이라는 것이 타 오르는 점화의 시기가 다를 뿐
크게 틀릴게 있겠습니까?....^^
어제 약속했던대로..내 젊은 시절..(지금 50대들)의
한 부분을 그린 글 올려 봅니다
그해 겨울은 추웠네
------------------
예술의 전당에 서 있는 키큰 활엽수의 여린 잎을 흔들며
바람이 서걱거리는 저녁...친구가 건네 준 티켓을 들고
양희은 콘서트를 보러 갔다
60년대의 세월은...듬성이는 내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
양희은의 늘어진 얼굴과 두둑한 뱃살을 스치고
덕수궁 돌담옆의 경기여고...구세군 회관..
몬테칼로. 드시에네. 세시봉. 아카데미 음악감상실로 줄달음쳤다
한계령으로 객석을 향해 인사를 던지는 양희은의 새로운창법은
클래식 가수의 창법을 흉내내어 쉽게 불러 보자는...
세월은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관람을 시작케 하였으나
중간 중간의 멘트에 나오는 60년대의 향수어린 단어들이
3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관객들을 그 어두웠던 유신의 암흑,
저항의 60 년대 종로거리로, 무교동거리로 끌고 갔다
장발을 잘리지 않기 위해 골목 골목으로 숨어 다녔던 나는
머리를 틀어 올려 털모자로 감추고 다녔었다
결국 경찰의 단속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머리를 박박 밀어 삼단(?)같은 머리카락을
팔아 먹은 적이 있는데,그 가격이
당시 구로공단의 주요 수출 품목이 가발이었던 탓에
그 돈으로 친구들과 함께 무교동 낙지를 포식할만한 거금이었다
장발을 피하여 머리를 밀었으나,경찰은 박박 민 중대가리를
사회에 대한 저항분자로 몰아 또 다시 나를 잡아 넣었다
서울 시내 경찰서란 경찰서는 거의 빼놓지 않고 잡혀 들어 갔던 나는
어느새 야간 통행금지나 무전취식으로 들어 오는 신삥들에게
신입식을 시키며 킬킬거릴만큼 사회의 이단아로 자라고 있었다
그 암흑의 세월에 투명한 유리구슬같은 목소리가 있어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양희은이었다
촌티나는 티셔츠와 낡은 청바지를 입고 나타 난 양희은은
처음엔 동정심으로...(기타도 살 돈이 없다는 소문 때문에)
다음엔 신선함으로 우리에게 다가 왔으나
그 힘찬 음성과 선동적인 김민기의 노래들이 합하여
어느새 당시의 청년문화의 구심점으로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봉기..라는 표현이 옳다.
당시의 의식있는 젊은이들은 모두 문제아였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버림받고 있었다
그렇게 흩어져 상처난 이들을 한자리에 모여 노래하게 한 죄...
양희은은 그렇게 유신정부에 국가반역의 큰 죄를 짓고 있었다
그의 노래들은 운동가로 선동가로 개사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는 노래는
버림받은 소외감에 상처 받았던 이들을 위로하여
사회의 불순분자이며 패배자따위인 그들의 위치를
올곧고 날선 정신의 임자로서 격상시켜 주었다
김민기가 만든 양희은의 노래 중에서
<아무리 개사를 하여도 운동가가 되지 않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내 젊은 운명을 가르는 한 분기점이 된 곡이다
어린 나는 공부에만 전념하는 것이 청춘의 의무라는
가족들의 세뇌에 적극 동조하는 타잎이었는데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그 노래를 즐겨 부르는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 선배의 과격함.슬픔.분노.대중에 대한 애정.고독에
존경과 우정을 감출 수 없었던 나는 끝내 그 선배와 의형제를 맺었다
아마도 김민기의 그것 말고 그 선배의 모습을 그리는데 적합한 노래가 있다면
조동진의 <그> 라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말이..말이 없지만
그는 항상 자유롭고 ..
....
그가 숲속을 거닐면 그는 나무 한 그루
그가 냇가에 앉으면 그는 작은 돌 하나
....
그는 날으는 새...
어느 흐린 날...눈이 지천으로 하늘과 땅을 뒤덮던 날...
그 형은 소주한병과 이발소 면도칼을 들고 나를 찾아 왔다
칼로 팔뚝을 그어 둘의 피를 섞은 소주를 마신 밤..
나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다는 기쁨과
그를 나의 수준으로 낮추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으리라
내 팔뚝의 상처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연히 남아있으나
얼마 후 그 선배는 길위에서 죽었다.
길가에서 죽었다는 주변의 표현에 나는 항상 길위에서..라고 수정하곤 했다
< On the Road>....그 다운 ...자유로운 죽음이었다
집을 뛰쳐 나와 그 후로 보낸 수년간의 방랑 생활은 나를 변화 시켰다
지리산으로 설악산으로 기어 다니며
그 동안 있는 자, 배운 자의 기득권에 안주하며 보낸 세월에 대해...
학문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 갈등했고
내 존재가 두려웠고,앞으로의 변화가 두려웠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가위 눌리곤 했다
며칠씩 암벽에 매달려 있으며 죽고도 싶었고
이유없는 눈물이 몇시간씩 흐르도록 사람이 그리웠다
어두운 비 내려 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검은 두눈에 눈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 이름..사람이어라
한없는 청춘의 방황속에서
그 선배가 <유치하지만 가장 위로가 되는 노래>라며 불러 주던
양희은의 그 노래가 화려한 조명 밑에서 불리워 지고 있었다
안치환의 곡을 만들거나 유명한 노래들을 만든 세션맨들이
양희은을 더욱 빛내고 있었다
장중한 남성 합창단의 백코러스로 우리를 크라이막스로 끌고 간 곡은
아침이슬...
그 겨울...청춘의 뜨거운 불길마저 얼어 붙던 유신의 겨울을 지낸
관객들이 목청껏 따라부르는 아침이슬은
30년 전 횃불을 밝혀 놓고 스크램을 짜고 부르던 바로 그 노래였다.
경찰들과 통행금지를 피해 숨어 든 싸구려 여인숙에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세코날로 마음을 다스리던 내 젊은 친구들...
전차표 한장으로 소주를 바꾸어 마시고
몇시간 씩 걸어 가며 벌이던 열띤 토론들
담배 반개피로 다섯명쯤 돌아가며 태우던 그 바싹 마른 입술들..
시골 한 구석에서 대마초를 키우며
가끔 서울로 올라 와 한 주먹씩 나누어 주던 그 자식....
양희은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될 무렵
서유석과의 결혼설이 파다했다
밥 딜런의 <부로윙 인 더 윈>을 개사하여
대학가에서 널리 불리던 서유석의 노래 역시 저항가요였다
<오 내 친구야 묻지를 마오..
너도 몰라 나도 몰라요 >
녹슨 레일을 긁는 듯한 밥딜런의 호소력에는 비할바가 아니지만
이 나라 팝송 매니아의 시조 세대들에게는 새로운 물결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가문의 불균형등의 문제로 유야무야되었으나
박두진의 <하늘>이라는 시에 서유석이 곡을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노래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 여릿 멀리서 온다
멀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은
향기로운 하늘은 ..호흡...
......
그렇게 양희은의 청춘도...나의 청춘도
오는 줄도 모르게 여릿 여릿 다가오는 하늘처럼
가는 줄 모르게 지나갔다
세월은 ...뜨거운 모래사장에 숨어 번뜩이는 유리같이
가슴을 찔러 들어 오는 양희은 특유의 패기를 빼앗아 갔지만
세월에 잘 익은 양희은의 목소리는 우리를 실망 시키지 않았다
이제 그토록 갈망할 것들이 많았던 암흑의 세월을 지나,
운동가요의 대명사 양희은의 시대를 지나...
넓고 푸른 하늘에 향기롭게 익어 가는 양희은의 목소리를 기대하며
박두진의 시, 마지막 부분을 기억해 본다
......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내 마음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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