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내용(줄거리)
<자전거>는 윤서기가 동료인 구서기에게 42일간의 결근 사유를 밝히는 자신의 결근계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황당하고 비합리적인 사유서를 본 구서기에게 윤서기는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밤’에 겪었던 현실과 환영이 엇갈린 체험담을 들려주면서 전개된다. 시간과 공간의 변하는 인과성이 있는 줄거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윤서기의 의식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극은 자유자제로 뒤바뀐다.
윤서기의 체험 내용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사건이다. 6?25때 반동분자로 몰린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군청 내 등기소 건물에 갇히게 되었고, 집단 학살당한 사건으로 인근에는 집집마다 소위 ‘등기소 제삿날’이 같은 날짜에 겹쳐있다. 그 날이 되면 예외 없이 당숙이 나타나서 한바탕 난리를 치르게 되는데, 그 까닭은 집단 학살의 방화자가 바로 당숙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갇혔던 당숙은 인민군의 명령에 복종하여 살아 남았던 것이다.
둘째는 문둥이네 가족들의 이야기다. 산골짜기에서 외롭게 살아온 문둥이 부부는 네 아이를 낳았으나, 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 밝은 생활을 열어주기 위해 모두 남의 양자, 양녀로 입적시키는데 아이들이 입적된 집은 거위집이라는 별명이 붙은 인근의 한씨네 집이다. 네 아이 중 장녀와 차녀는 그들이 문둥이의 소생임을 알고 자신들의 처지와 환경에 무서움과 저주감을 느끼고 있다. 어느 날 장녀는 동생만이라도 마음의 상처를 잊고 살라고 차녀를 집에서 내보내고 자신은 솔매집으로 가서 불을 지른다. 집을 나간 차녀는 묘지근처를 배회하고 문둥이 엄마는 화재로 끝내 숨지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상의 두 사건은 모두 화재?방화와 관련을 맺고 있고 밤의 어두움 속에서 겪는 체험으로 되어 있어 강렬한 인상과 짙은 여운을 느끼게 해 준다.
이 밖에도 자전거를 타고 밤늦게 읍내에서 돌아오다가 웅덩이에 빠져 죽은 할아버지의 이야기, 인민군이 물러가고 수복할 때 자전거에 태극기 꽂고 달려온 이야기, 밤중에 황소가 우리를 뛰쳐나와 달리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이야기 등이 전개되고 때로는 죽은 사람의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작품 자체의 구조가 마치 괴기담을 형상화시킨 느낌을 주고 있으나 단순한 설화에 머물지 않고 그 속에 우리 한국인들이 겪는 온갖 수난과 어두운 운명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응축되어 마치 우리 민족의 현실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을 연상시키게도 한다.
□ 공연 의도
한 나라를 이해하려면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PC화, 정보화, 미분화의 말 죽이기 속에서 사회는 이미 전국이 일일권에 든지 오래고 이제는 같은 세대에 이름의 말이 지방색을 잃고 일체화되어 고유의 무늬, 냄새, 색깔, 울림, 떨림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통 성향, 고유 언어도 뚜렷한 표현력을 잃고 국적을 알 수 없는 말로 뒤바뀌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마저 잃을 수 있다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말의 근간이 되고 있는 사투리가 배우들의 소리와 몸짓으로 그 생명력이 회복되는 무대는 그러한 문제 인식을 실감케 할 수 있는 소중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의 현장 연구와 채록이 이루어졌고 그 첫 번째 과정으로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의 제주말로 연극의 출발점으로 삼고 두 번째 <자전거>를 경상도 말로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사투리는 각 도마다 북쪽과 남쪽이 서로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디 사투리라기보다 사투리가 서로 들어붙듯이 제 것을 걱정하고 나오기를 바라는 시비 거리를 만드는 일이 바로 우리가 일함의 의도가 되겠습니다.
□ 공연 특징
사투리에는 그 지역의 자연적 환경과 그 속에서 엮어온 역사, 우리의 숨결이 고유의 향토색을 띄며 담겨져 있다. 이러한 특색이 짙게 베어져 있는 작품으로 오태석 작 <자전거>를 선택하게 되었다.
<자전거>는 어느 지방의 말로 의역이 되더라도 한국적 정서를 느끼게 하는 공통분모의 작품인 것이다.
<자전거>의 탁월한 형식적 특징은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시점을 일치시킨데 있다. 즉 오늘과 40여일 전과 1950년대와, 시기를 정하기 어려운 먼 옛날부터 있었던 우리의 생활 속에 깃든 밤의 생활풍경을 한 시점에 모아놓고 있는 점이다.
이 밤의 풍경들은 사실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 주요한 기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영향은 낮의 생활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 연극은 오늘날 산업화?도시화?집중화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체험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지만 그같은 풍경들을 어렸을 때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그리움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는 놀람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문둥이에 대한 공포는 한국인의 의식 기층에 자리잡고 있고, 그 이미지는 한국인의 어떤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6?25의 상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간직하고 있는 낙인인데 이 극에서는 그 비극의 책임을 외부(타자)에 돌리지 않고 당숙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서양문학에서는 인생을 여로로 비유하는 것이 고전에서부터 상례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윤서기의 하룻밤 여로를 가지고 한국인의 특수한 생활체험을 집약시켜 놓은 것이다.
오태석의 <자전거>는 작가의 과거회상이 전혀 감상적인 여운을 남기지 않고 매우 객관적이면서 정교한 언어로 진술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적이고 간명한 언어로 이루어진 이 극이 보고 듣는 이의 마음속에 공명을 크게 울려주는 것은 한국인의 참모습,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피상적 묘사를 뛰어 넘어 그 내면세계를 정확히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자전거를 두 번째 방언 연극의 작품으로 선택한 이유다.
<자전거>는 윤서기가 동료인 구서기에게 42일간의 결근 사유를 밝히는 자신의 결근계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황당하고 비합리적인 사유서를 본 구서기에게 윤서기는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밤’에 겪었던 현실과 환영이 엇갈린 체험담을 들려주면서 전개된다. 시간과 공간의 변하는 인과성이 있는 줄거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윤서기의 의식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극은 자유자제로 뒤바뀐다.
윤서기의 체험 내용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사건이다. 6?25때 반동분자로 몰린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군청 내 등기소 건물에 갇히게 되었고, 집단 학살당한 사건으로 인근에는 집집마다 소위 ‘등기소 제삿날’이 같은 날짜에 겹쳐있다. 그 날이 되면 예외 없이 당숙이 나타나서 한바탕 난리를 치르게 되는데, 그 까닭은 집단 학살의 방화자가 바로 당숙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갇혔던 당숙은 인민군의 명령에 복종하여 살아 남았던 것이다.
둘째는 문둥이네 가족들의 이야기다. 산골짜기에서 외롭게 살아온 문둥이 부부는 네 아이를 낳았으나, 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 밝은 생활을 열어주기 위해 모두 남의 양자, 양녀로 입적시키는데 아이들이 입적된 집은 거위집이라는 별명이 붙은 인근의 한씨네 집이다. 네 아이 중 장녀와 차녀는 그들이 문둥이의 소생임을 알고 자신들의 처지와 환경에 무서움과 저주감을 느끼고 있다. 어느 날 장녀는 동생만이라도 마음의 상처를 잊고 살라고 차녀를 집에서 내보내고 자신은 솔매집으로 가서 불을 지른다. 집을 나간 차녀는 묘지근처를 배회하고 문둥이 엄마는 화재로 끝내 숨지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상의 두 사건은 모두 화재?방화와 관련을 맺고 있고 밤의 어두움 속에서 겪는 체험으로 되어 있어 강렬한 인상과 짙은 여운을 느끼게 해 준다.
이 밖에도 자전거를 타고 밤늦게 읍내에서 돌아오다가 웅덩이에 빠져 죽은 할아버지의 이야기, 인민군이 물러가고 수복할 때 자전거에 태극기 꽂고 달려온 이야기, 밤중에 황소가 우리를 뛰쳐나와 달리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이야기 등이 전개되고 때로는 죽은 사람의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작품 자체의 구조가 마치 괴기담을 형상화시킨 느낌을 주고 있으나 단순한 설화에 머물지 않고 그 속에 우리 한국인들이 겪는 온갖 수난과 어두운 운명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응축되어 마치 우리 민족의 현실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을 연상시키게도 한다.
□ 공연 의도
한 나라를 이해하려면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PC화, 정보화, 미분화의 말 죽이기 속에서 사회는 이미 전국이 일일권에 든지 오래고 이제는 같은 세대에 이름의 말이 지방색을 잃고 일체화되어 고유의 무늬, 냄새, 색깔, 울림, 떨림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통 성향, 고유 언어도 뚜렷한 표현력을 잃고 국적을 알 수 없는 말로 뒤바뀌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마저 잃을 수 있다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말의 근간이 되고 있는 사투리가 배우들의 소리와 몸짓으로 그 생명력이 회복되는 무대는 그러한 문제 인식을 실감케 할 수 있는 소중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의 현장 연구와 채록이 이루어졌고 그 첫 번째 과정으로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의 제주말로 연극의 출발점으로 삼고 두 번째 <자전거>를 경상도 말로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사투리는 각 도마다 북쪽과 남쪽이 서로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디 사투리라기보다 사투리가 서로 들어붙듯이 제 것을 걱정하고 나오기를 바라는 시비 거리를 만드는 일이 바로 우리가 일함의 의도가 되겠습니다.
□ 공연 특징
사투리에는 그 지역의 자연적 환경과 그 속에서 엮어온 역사, 우리의 숨결이 고유의 향토색을 띄며 담겨져 있다. 이러한 특색이 짙게 베어져 있는 작품으로 오태석 작 <자전거>를 선택하게 되었다.
<자전거>는 어느 지방의 말로 의역이 되더라도 한국적 정서를 느끼게 하는 공통분모의 작품인 것이다.
<자전거>의 탁월한 형식적 특징은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시점을 일치시킨데 있다. 즉 오늘과 40여일 전과 1950년대와, 시기를 정하기 어려운 먼 옛날부터 있었던 우리의 생활 속에 깃든 밤의 생활풍경을 한 시점에 모아놓고 있는 점이다.
이 밤의 풍경들은 사실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 주요한 기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영향은 낮의 생활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 연극은 오늘날 산업화?도시화?집중화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체험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지만 그같은 풍경들을 어렸을 때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그리움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는 놀람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문둥이에 대한 공포는 한국인의 의식 기층에 자리잡고 있고, 그 이미지는 한국인의 어떤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6?25의 상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간직하고 있는 낙인인데 이 극에서는 그 비극의 책임을 외부(타자)에 돌리지 않고 당숙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서양문학에서는 인생을 여로로 비유하는 것이 고전에서부터 상례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윤서기의 하룻밤 여로를 가지고 한국인의 특수한 생활체험을 집약시켜 놓은 것이다.
오태석의 <자전거>는 작가의 과거회상이 전혀 감상적인 여운을 남기지 않고 매우 객관적이면서 정교한 언어로 진술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적이고 간명한 언어로 이루어진 이 극이 보고 듣는 이의 마음속에 공명을 크게 울려주는 것은 한국인의 참모습,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피상적 묘사를 뛰어 넘어 그 내면세계를 정확히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자전거를 두 번째 방언 연극의 작품으로 선택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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