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토마임...그리고 유진규
아직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들의 언어는 온갖 몸짓을 동원한 ‘원시성’을 갖는다. 그 언어는 거짓이란 길로 갈 겨를이 없다. ‘원초적’일 수밖에 없다. 현란하고 화려하게 발전한 언어를 구사하는 현대인에게 유진규의 마임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몸의 언어가 아닌 말의 언어로 장기간 학습 받아 몸의 언어인 마임언어가 생소하기 때문이다.
말 이전에는 몸이란 것이 존재하고 따라서 말 또한 몸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보다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마임의 언어는 몸의 언어이다.’ 마임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이 다르다. 몸이라는 원초적인 것을 통해 인간과 사물과 세상을 모방하고 사유하고 표현하는 몸짓예술의 한 형태이며 그것을 행하는 배우가 바로 마임이다.
마임은 아이러니하게 독재정권 아래서 발전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둘째 부인 맹뜨농 마담을 풍자하는 극단을 추방하고 대사 없는 공연만을 허락하였다. 18세기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1700년경 무언의 판토마임형식이 탄생하였으며 ‘피에로 무언극’이 성행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채플린이나 마르셀 마르소는 20세기 팬터마임 연기자로 유명하다. 그들은 이전의 ‘벙어리의 연기’가 아닌 새로운 ‘침묵의 연기’라고 하여 몸짓이 단순한 언어의 대변자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판토마임 예술의 존재방향을 풀이하였다.
한국에서는 70년대부터 전형적인 마임인 사사실주의적 판토마임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의 것은 퍼포먼스적인 마임이었으며 유진규가 개척한 마임은 현대적인 마임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의 마임을 현대적이라고만 한다면 틀린 말이다. 그는 우리 전통적인 표현법을 연구하여 한민족의 근원적이고 고유한 정신을 찾아 나서 영혼과 접맥시키려 한다. 무대에서 사용하는 것은 거창한 소품이나 도구가 아닌 촛불과 한지, 향, 정화수 등이다. 이런 상징들은 바로 우리 고유의 정신, 영혼과 잇닿아있다. 그는 또한 아무런 빛(조명)이 없는 암전 속에서 빛과 소리를 이용하여 우리의 몸을 새롭게 인식시키고 새로운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유진규의 마임은 ‘현대적이면서 한국적인’ 마임이다.
그는 80년대 초까지도 장르로 인정받지 못하던 마임이라는 것을 어엿한 예술장르로 끌려 올려놓았다. 마임이라는 장르는 스포츠에서 비인기 종목만큼이나 척박하다. 90년에 ‘한국마임협의회’를 결성할 당시 회원이 고작 6명이었으며 현재도 30여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유일한 ‘춘천마임축제’는 마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꿔놓고 있다. 이건 분명 한국의 자랑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무대에 등장하는 올해 쉰 살의 그는 분명 20, 30대의 젊은이였다. 공연 뒤 비결이 뭐냐는 엉뚱한 질문에 그는 ‘무대에 서면 늙지 않는다’고 답한다.
http://16th.mimefestiv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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