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줌마클럽 최윤정 11월17일자
직장생활을 할 때 옆자리에 있던 동갑내기 직원은 불행히도 폭군 상사 밑에서 업무를 보고있었다. 정말 그 상사는 말이 통하지않는 사람이었다. 아부와 뇌물에 닳을 대로 닳은 사람이었다. 업무능력과 상관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곤 했던 상사밑에서 시달리던 직원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는 담배였다.
업무능력보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얻어진 직분을 너무 남용하던 상사를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동료만큼은 꼬박꼬박 그 횡포를 받아주곤했다. 근무시간뿐 아니라 먹기 싫은 술좌석까지 꼭 데리고 다녀서 동료는 죽을 상을 하고 따라가야했다.
보다못한 다른 직원이 “승진도 중요하지만 노(No) 소리를 할 때는 해야지 스트레스받아서 어떻게 사냐”고, “찍혀봐야 다른 부서로 옮겨가면 그만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가정있는 남자가 어떻게 하고싶은 것만 하고 살겠냐는 뜻같았다. 아주 멋있게, 보란 듯 그 앞에서 ‘No’라고 말하거나 사표를 던지고싶지만 처자식 때문에 참는다는 여느 남자들처럼 말이다. 상사가 다른 부서로 떠나가자 동료는 “진짜 회사 나오기 싫었다”고 고백했다.
남편은 무뚝뚝한데다가 빈말을 하거나 변죽을 적당히 울리는 것도 못하는, 그래서 아부와 인사치레에 거리가 먼 사람으로 여겨졌다. 회사 가족모임에서 보면 빈말 잘하고 속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부성 발언으로 적당히 상사의 기분을 잘 맞춰주는 직원들이 있다. 그 자리에 남편은 허허 웃기만 할뿐 딱 한 방 그것을 못한다. 물론 남편의 성향을 알기때문에 화가 나거나 그것으로 바가지를 긁지는 않는다. 다만 내 남편이 대화의 중심이 아니라는 느낌 이상의 뭔가 허전한 것을 나는 느낀다. 나도 직장 생활을 했기에 인사고과가 승진의 결정타라는 것, 그것이 업무능력만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그렇지않은 사람이 먼저 과장, 부장자리에 오르는 일이 흔하지 않은가?
어느 날 남편 회사의 높으신 분 가족과 어려운 자리를 함께 했다. 예약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우리의 복장이나 태도가 영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먼저 일어나시는 그 분들을 배웅하러 남편이 따라 나섰는데 그 때 난 보았다. 남편이 그 차에 대고 수없이 인사하는 모습을….
내가 평소 알고있던 남편이 아니라 아주 낯설고,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잘 보이고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사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역시 계면쩍은 듯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돌아오는 길, 앞자리에 앉아 운전하는 그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의 인사가 자꾸 오버랩되었다. 가장의 무게라는게 이런걸까? 누가 그랬던가 아버지 속옷은 못빨아도 상사 속옷은 빨 수 있는게 남자라고. 남편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아주 가끔 한다. 하지만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로또에 당첨될 확률도 없기?문에 남편은 이게 최선인양 열심히 일을 한다. 그 역시 자존심도, 청년 때 가졌던 희망도 죽이고 죽여서 이제는 존재하고픈 희망이 아닌 존재하는 현실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인생 부라보!”를 노래하며 상사앞에서는 ‘No’ 소리를 하지못하는 그네들의 속내. 인사하는 남편이 아부쟁이나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내가 본 것은 여느 월급쟁이 남자들의 비슷한 모습일텐데. 나 역시 짐짓 원하던 아부가 아니었던가? 악덕상사든 착한 상사든 사장이 되기전까지 남편은 부하직원일것이고, 내가 본것은 지극히 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아마도 남편이 그보다 더한 일도 하리란 생각 때문일까.
같이 출발한 동기들 가운데 분명 누군가는 먼저 피라미드구조의 꼭지점에 가게 될 것이며 그것이 남편이면 좋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 상사의 한 마디보다 동기의 출세가 더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그를 위로하고 아무렇지 않은듯 더 큰 힘을 줘야 할 텐데…. 이래서 “남편들한테 잘해야 한다. 잘해야 한다”라고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나보다.
직장생활을 할 때 옆자리에 있던 동갑내기 직원은 불행히도 폭군 상사 밑에서 업무를 보고있었다. 정말 그 상사는 말이 통하지않는 사람이었다. 아부와 뇌물에 닳을 대로 닳은 사람이었다. 업무능력과 상관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곤 했던 상사밑에서 시달리던 직원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는 담배였다.
업무능력보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얻어진 직분을 너무 남용하던 상사를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동료만큼은 꼬박꼬박 그 횡포를 받아주곤했다. 근무시간뿐 아니라 먹기 싫은 술좌석까지 꼭 데리고 다녀서 동료는 죽을 상을 하고 따라가야했다.
보다못한 다른 직원이 “승진도 중요하지만 노(No) 소리를 할 때는 해야지 스트레스받아서 어떻게 사냐”고, “찍혀봐야 다른 부서로 옮겨가면 그만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가정있는 남자가 어떻게 하고싶은 것만 하고 살겠냐는 뜻같았다. 아주 멋있게, 보란 듯 그 앞에서 ‘No’라고 말하거나 사표를 던지고싶지만 처자식 때문에 참는다는 여느 남자들처럼 말이다. 상사가 다른 부서로 떠나가자 동료는 “진짜 회사 나오기 싫었다”고 고백했다.
남편은 무뚝뚝한데다가 빈말을 하거나 변죽을 적당히 울리는 것도 못하는, 그래서 아부와 인사치레에 거리가 먼 사람으로 여겨졌다. 회사 가족모임에서 보면 빈말 잘하고 속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부성 발언으로 적당히 상사의 기분을 잘 맞춰주는 직원들이 있다. 그 자리에 남편은 허허 웃기만 할뿐 딱 한 방 그것을 못한다. 물론 남편의 성향을 알기때문에 화가 나거나 그것으로 바가지를 긁지는 않는다. 다만 내 남편이 대화의 중심이 아니라는 느낌 이상의 뭔가 허전한 것을 나는 느낀다. 나도 직장 생활을 했기에 인사고과가 승진의 결정타라는 것, 그것이 업무능력만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그렇지않은 사람이 먼저 과장, 부장자리에 오르는 일이 흔하지 않은가?
어느 날 남편 회사의 높으신 분 가족과 어려운 자리를 함께 했다. 예약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우리의 복장이나 태도가 영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먼저 일어나시는 그 분들을 배웅하러 남편이 따라 나섰는데 그 때 난 보았다. 남편이 그 차에 대고 수없이 인사하는 모습을….
내가 평소 알고있던 남편이 아니라 아주 낯설고,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잘 보이고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사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역시 계면쩍은 듯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돌아오는 길, 앞자리에 앉아 운전하는 그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의 인사가 자꾸 오버랩되었다. 가장의 무게라는게 이런걸까? 누가 그랬던가 아버지 속옷은 못빨아도 상사 속옷은 빨 수 있는게 남자라고. 남편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아주 가끔 한다. 하지만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로또에 당첨될 확률도 없기?문에 남편은 이게 최선인양 열심히 일을 한다. 그 역시 자존심도, 청년 때 가졌던 희망도 죽이고 죽여서 이제는 존재하고픈 희망이 아닌 존재하는 현실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인생 부라보!”를 노래하며 상사앞에서는 ‘No’ 소리를 하지못하는 그네들의 속내. 인사하는 남편이 아부쟁이나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내가 본 것은 여느 월급쟁이 남자들의 비슷한 모습일텐데. 나 역시 짐짓 원하던 아부가 아니었던가? 악덕상사든 착한 상사든 사장이 되기전까지 남편은 부하직원일것이고, 내가 본것은 지극히 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아마도 남편이 그보다 더한 일도 하리란 생각 때문일까.
같이 출발한 동기들 가운데 분명 누군가는 먼저 피라미드구조의 꼭지점에 가게 될 것이며 그것이 남편이면 좋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 상사의 한 마디보다 동기의 출세가 더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그를 위로하고 아무렇지 않은듯 더 큰 힘을 줘야 할 텐데…. 이래서 “남편들한테 잘해야 한다. 잘해야 한다”라고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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