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가 가본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
부사의방장은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 동쪽 절벽 중간에 있었던 암자이다. 의상봉 동쪽은 기암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으로, 절벽 아래로는 무시무시한 골짜기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로 내려오는 변산의 가장 깊은 오지이다. 절벽 위에서 백 척이 넘는 나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네 평쯤 되는 반석이 있는데 이곳에 암자를 짓고 사방에 쇠말뚝을 박아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도록 얽어매었다 한다. 이 곳을 다람쥐 절터라고도 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암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신라의 중 진표(眞表)가 우거하던 곳으로서 백 척 높이의 나무사다리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 방장에 닿을 수 있는데 그 아래는 측량할 수 없는 골짜기이다. 쇠줄로 그 집을 매어 바위에 못질을 하였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바다의 용이 한 것이라 한다.
변산의 벌목 책임자로 온 이규보는 부사의방장을 찾아가는 험로와 진표율사의 진용에 참배한 일을 그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른바 부사의방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 구경하여 보니, 그 높고 험함이 원효의 방장보다 만 배나 더했다. 높이가 백자쯤 되는 나무 사다리가 바로 절벽에 의지해 있는데 삼면은 다 헤아릴 수 없는 구렁이라, 몸을 돌이켜 층층을 헤아리며 내려가야 방장에 이를 수 있으니, 한 발만 실수하면 다시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보통 때에도 한 대(臺)나 누(樓)에 오를 때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도 신경이 약한 탓인지 머리가 아찔하여 밑을 내려다 볼 수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서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빙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 승적(勝跡)을 익히 들었다가 지금 왔는데, 만일 그 방장에 들어가서 진표대사의 상에게 예(禮)하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이제 기다시피 내려가니, 발은 아직 사다리에 있으나 몸은 하마 굴러 떨어지는 듯 하면서 마침내 들어갔다.
이규보가 갔을 때 이곳에는 진표의 상이 있었다. 그의 일기 중에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켜 향을 피우고 율사의 진용(眞容)께 예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부사의방장은 조선 중기까지 승려들의 참회 기도처로 이용되다 폐허가 되었다 한다. 이규보는 부사의방장을 방문한 소감을 다음 칠언율시로 남겼다.
蚣矗危梯脚低長 무지개 같은 사다리 다리 밑이 길어서
回身直下萬尋强 몸을 돌려 곧장 내리니 만 길이 넘네
至人已化今無迹 도인은 이미 가고 자취마저 없는데
古屋誰扶尙不疆 옛집은 누가 붙들었기에 아직도 쓰러지지 않나
丈六定從何處現 일장육척의 불상은 어느 곳으로 좇아 나타날는지
大千猶可筒中藏 대천의 세계는 그 가운데 감추어져 있네
完山吏隱忘機客 완산의 벼슬아치 숨어들어 나그네임을 잊으니
洗手來焚一辨香 손씻고 들어와 한 조각 향을 사르네
이규보가 부사의방장을 천신만고 끝에 방문하고 오자, 그를 수행했던 현령은 그를 위해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에 있는 망해대(望海臺)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선계(仙界)인지 불계(佛界)인지 모를 비인간(非人間)으로 흠뻑 빠져들었다.
돌아오려 할 때 현령이 한 산봉우리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말하기를, "이곳이 망해대입니다. 제가 공을 위로하고자 먼저 사람을 시켜 좌석을 베풀고 기다리니 잠깐 쉬어 갑소서." 하였다. 내가 올라가 바라보니 큰 바다에 둘려 있는데 산과의 거리가 백여 보에 지나지 않는다. 한 잔 술에 한 수의 시를 읊으니, 정녕 세상의 티끌 생각이 없어지고 속세를 벗어나서 훨훨 육합(六合) 밖을 나는 듯하다. 머리를 들어 한 번 바라보니 바로 뭇 신선들을 부를 듯도 하다. 자리를 함께 한 십여 명이 다 취하였고, 내 선군(先君)의 기일이므로 관현(管絃), 가취(歌吹)만이 없을 뿐이었다.
/허정균huhja@buan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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