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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강원도 조칩령, 미천골 투어 후김다

........1999.12.21 09:35조회 수 989추천 수 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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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는 여행의 참맛을 잘 알고있는 강건너 불구경님 이군요...
오색과 미천골, 조칩령등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강건너불구경 wrote:
>올 단풍철에 다녀와서 친구들에게 보낸 기행문입니다.
>투어후기라고 하기에는 센치한 면이 좀 많은데...
>첨삭없이 싣습니다.
>
>----------------------------------------------------------------
>서울로 돌아온 저녁, 방바닥에 엎드려 KBS “세계는 지금”을 보았습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 전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는데,
>마가하티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다 같이
>격정을 못이겨 눈물을 흘리며 집회를 하더군요.
>굉장히 우스웠습니다.
>고작 “모성애를 중심으로!”라는 정책모토밖에 없는 후보를 교주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나, 오로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머리에서 피가 솟을 정도로 고함을 외쳐대며 반대하는 회교도들이나…
>생각해 보십시오. 1억2천만명의 대통령 후보라는, 그것도 국민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는 후보의 정책이념이 개혁이나 민주화 같은 그럴듯한 게 아니고 고작 “모성애”라니…
>
>그렇지만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인류를 위해, 이웃을 위해 중요한 일을 꿈꾸며,
>국가보안법을 마음속으로 반대하고
>국가의 교통정책이 차량위주에서 보행자, 자전거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고 굳게 믿으며,
>서갑숙씨의 포르노그라피 어쩌고 저쩌고 에 대해 청소년에 대한 유해성을 판별하기 위해 검찰에서 내사중이라는 얘기에 분통을 터트리는 내가,
>항시 하는 것이라곤
>난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과
>여자친구와 결혼하는 것이 내 자유를 앗아가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
>차를 안즉 안 사고 가끔씩 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환경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들 뿐입니다.
>
>왜 이런 앞뒤 아귀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해 대는 건지… 조칩령 임도를 힘겹게 오르다 여느 나무그늘아래에서 흠뻑 뒤집어 쓴 차갑디 차가웠던 바람,
>그 서늘했던 기억이 자꾸만 슬프고 신령스럽게만 느껴집니다….
>
>여행 첫날.
>
>……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물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절해 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
>- 등우량선1, 황지우 중
>
>새벽 5시 20분에 일어나 이미 정돈된 배낭을 왼쪽 어깨에, 자전거를 분해해
>넣은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메고 뭐 두고 온 거 없나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습니다.
>괴괴하고 스산한 거리의 새벽.
>택시를 타고, 동서울 터미널에 내려 오색행 첫차를 탔습니다. 차는 만원이었고 제 옆자리에는 늘그수레한 아저씨가 앉아 탱탱하게 잘 여문 귤을 구태여 나눠 먹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참, 예전에 학교 다니다 방학때 고속버스를 타고 집에 내려가던 적이 있었는데, 옆자리에 엄청 섹시한 아가씨가 그것도 미니스커트를 가릴 천조각도 없이 앉은 적이 있었고, 그 당시 제 가방엔 옥수수 세개가 있었고, 여행중 옆자리에 앉은 여성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먹을 걸 쑥 내밀며 “하나 드시죠. 근데 서울 사시는 분인가요?…”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능란한 화술과 부티나는 외모를 무기삼아 잘만 하면 삼류잡지에 나오는 스토리 하나 엮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잘생긴 청년은 옥수수를 무지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좋아했냐 하면…? 옥수수와 미인을 놓고 가끔씩 정신이 헷갈리기도 한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됐죠. 결국 그 옥수수 세개는 혼자 먹기 미안해 꾹꾹 참다가 집에 와서야 먹게 되었고 그 아가씨와는 다섯시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래저래 침만 삼키다 여행이 끝났습니다. 집에서 먹는 그 망할 놈의 옥수수, 간을 잘못 쳐서 그런지 아가씨 치맛자락이 어른거려서 그랬는지, 맛이 소태더군요. 하여튼 그랬다구요.
>
>차가 강원도로 들어서니 들불같은 단풍이 이산 저산 마구 불꽃을 뿌리며 번지고 있었습니다.
>오색 하차, 자전거를 다시 조립해서 야, 양양까지 신나는 내리막길이구나 신난다 하며 안장을 익빠이 올려 폼나게 달리기 시작했는데, 웬 걸 등고선에 표시 안된 오르막은 왜 그리 많은지. 예전에 차 몰고 다닐 때는 전혀 몰랐는데, 자그마한 고개들이 어쩜 그렇게 힘겹고 단풍 절정이라고 차들은 그리 많은가..
>
>구룡령으로 넘어가는 삼거리, 바로 작년에 문제소녀 셋을 데리고 희희낙락 지나갔던 그 길을 다리통을 엔진삼아 홀로 넘어가는 길목. 잠시 쉬고 있는데 삐까뻔쩍한 선수용 타이즈를 차려 입은 biker 셋이 쐐액 힐끔 보며 스쳐 지나가더군요. 힙합바지 같은 등산바지와 내리막길에서 조금만 바람을 받아도 찐빵인형처럼 부풀어 오르는 셔츠를 입은 제 모습-동네에서 잠바를 입고 짜장면 배달을 가는 오토바이소년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조금 초라해 지더군요. 아----! 그래도 쫄바지는 절대 안돼! 너무 야애….
>
>둘째 고개를 넘을 때부터 엉덩이, 엉덩이 중에서도 거울로도 확인할 수 없는 은밀한 부분이 안장의 타격을 받아 굉장히 아파오기 시작했어요. 어, 어떤 느낌이냐 하면(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람들이 은근히 구질구질한 거 갖고 즐거워 하쟎아요. 어, 왜 갑자기 말투가 대화형으로 변질되었을까.) x침을 놓다가 조준이 조금 틀려서 비틀려 맞은 그런 거 있쟎습니까. 그, 그, 그, 정통으로 맞았을 때의 톡 쏘는 아픔이 아니고 지릿하게 아파오는 뭐 그, 그런…
>
>참, 날씨가 처음에는 별로 였습니다. 잔뜩 흐리고, 아침나절에는 비까지 온 것 같더군요. 하지만 타다 보니 바지가 끈적하게 달라붙기 시작해서 고개 중간에서 인상몰수하고 옷을 재빨리 반바지, 반팔로 갈아입었습니다. 뭐, 여성용과 달라서 남자 거는 자세히 안 보면 팬틴지 짧은 반바진지 구별이 안되거든요. 더군다나 요즘 것은 색상도 화려해서… 하여튼 훨 낫더군요.
>
>어, 단풍이 올해는 별론가 할 정도로 풍경은 그저 그랬고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도로에서의 지루하기만 한 시간들이 흐르더니, 갑자기 구멍난 구름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며 세상이 음습하고 칙칙한 고행길에서 따뜻하고 명랑한 소풍날 아침같은 풍경으로 바뀌더군요. 다시 힘이 솟습니다. 아자자자잣!
>
>고갯마루에서 계속 사과와 귤로 영양보충을 하고, 점심은 좀 느지막히 조칩령 임도로 갈라지는 삼거리 휴게소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시골답게 찌게도 밥도 엄청 나옵니다. 거기다 맛까지… 황홀했어요. 잘 만든 김치찌개의 비결은 어디서 나오는지? 조미료인가? 김치와 돼지고기의 적절한 배합인가? 난 알고 싶당…
>
>엉덩이가 찢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픔이 심해 자전거를 끌다 타다 반복하며 가다보니 길 왼쪽으로 “미천골 휴양림” 표지가 나오며 그 옆으로 근사한 계곡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오후 2시 30분, 어차피 오늘 중으로 구룡령을 넘을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한 번 구경이나 갈까 하는 기분에 길을 꺾어 내려갔습니다. 1km쯤 비포장 오르막을 가다보니 관리사무소가 나오는데, 그 놈 참 멋있는 곳에 지었군 싶더군요. 엄청 큰 계곡 건너편으로 무시무시한 절벽이 압도하듯이 쭉 솟아있고, 온갖 종류의 나무들이 제각기 화사한 가을의 자태를 발하는..
>“방갈로 있어요? ”
>“딱 하나 남았는데요”
>“얼만데요?”
>“이만 천원요. 비수기라서 30% D.C 한 거예요. 근데 한번 티켓 끊으시면 환불은 절대 안돼요”
>“방좀 미리 볼 수 없어요? ”
>“그러셔도 되는데, 방은 여기서 6km쯤 떨어져 있거든요. 차로 한 20분 걸리니까 (쓱 훑어보며) 아저씨는 한시간? 한시간 반? 쯤…”
>“ …… ”
>사람 때가 타지 않은 호젓한 분위기, 거기다가 사람들이 많이 왔다니까 저녁에 예전 산장에서 처럼 같이 놀러 온 아가씨들하고… 흐흐흥!
>‘어머, 아저씨 자전거 타고 오신 거예요? 너무 멋있어요! 어, 그러고 보니 아저씨 김석훈 닮았네? 어쩜…’
>‘얘, 무슨 김석훈이야, 내가 보니 딱 감우성이네 뭐’
>‘아저씨, 혼자 왔죠? 우리하고 즐겁게 뭐뭐뭐뭐 하며 놀아요, 예?’
>
>“주세요”
>“환불은 절대 안돼요”
>
>완죤히 돌무데기와 구덩이 밭에다 꼬불꼬불 돌아가며 올라가는 길을 타다 끌다 하며 올라갔죠. 정말 아름답더군요. 정말. 빨리 올라가서 이 지겨운 자전거 벗어놓고 계곡물에 발이나 담그고 있어야지 하는 조급함도 내 눈을 풍경으로부터 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 고고함, 사람의 냄새가 사라진 정갈함, 오후의 안온한 햇살까지…
>
>드디어 방갈로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만쉐! 어쩜, 집들이 뭐 이래? 길 옆 산비탈에 군데군데 자그맣고 귀여운 돌집들이 각각의 명찰을 달고 서 있더군요. “잣나무집, 참나무집, 늘참나무집,…” 깊은 산중임을 실감하리만치 사방이 괴괴하고 고요해 조금 무서운 기분마저 들더군요. 4-5인용 방갈로 8개가 한쪽에 (그나마)모여 있고, 큼직한 콘도형 방갈로 두채가 오른쪽에, 관리사무소 겸 전시실이 그 옆에 있는데, 아무도 없더군요.
>“이씨이, 매점도 없네. X됐다. XX!”
>정말 X됐습니다. 취사도구도 없고, 배낭엔 사과 한쪽, 귤 두개밖에 없는데…
>올라오느라 벌써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나구.
>첫번째 중요한 선택의 순간.
>개기다가 옆 집 사람들한테 빈대를 붙을까 6km를 내려가서 다시 5km를 더 가서 밥이든 뭐든 사가지고 다시 5km 도로와 6km 산길을 올라올 것인가. 체력은 이미 맛 간 상태.
>‘에이, 시간도 많은데 쉬엄쉬엄 갔다오자!’ 아! 그대 호연지기여!
> 무식함이여!
>일단 보일러를 켜고, 집게벌레 종류의 벌레들이 잔뜩 기어다니는 방을 쓸고 닦고, 배낭을 풀어 어지러 놓고 남은 음식을 쓱싹한 다음, 담배 한대 멋들어지게 핀 잘생긴 청년,
>다시 내려갔습니다.
>
>오프로드 downhill 정말 환상이더군요. 막 죽여요 죽여. 계곡으로 떨어지는 절벽을 바로 옆에 두고, 산길을 무모하리만치 쏘아대는 그 기분! 무수한 구덩이와 돌밭을 요리조리 비켜가며 그 충격에 자전거와 온 몸이 춤을 춥니다. 청량음료 선전 중에 이런 대사가 있죠,
>“쏜다 쏴!”
>그리고 또 나는 보았습니다. 내가 스쳐 지나갔던 많은 등산객들의 얼굴에 비친 경이와 부러움의 눈빛. 오, 청년의 맛이여! 향기여! 네가 진정한 청년의 표상이로구나!
>그러나 다운힐을 목숨을 걸고 즐기는 통에 어깨와 손목이 다 나가버리더군요. 도저히 도로를 타고 더 갈 자신이 없어 관리소 아래 매점에서 카스타드와 영영갱, 핫 브레이크만 사서 다시 올라왔습니다.
>묻지 마이소, 돌아오는 그 길이 얼마나 힘겨웠는지는.
>
>다시 방갈로에 도착하니 해는 뉘엿뉘엿, 다섯시 반. 뉘엿뉘엿 이란 말을 쓰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네요. 언젠가 여자친구하고 시내 모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약속시간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즈음”이라고 정한 적이 있었죠. 너무 멋있죠…완죤히 시인이야…
>
>만진창이가 된 몸을 질질 끌며 자전거를 방안에 집어 넣고, 세면장의 시린 계곡물에 세수를 하고, 방갈로 앞 계단에서 담배를 맛깔스럽게 피웠습니다. 차가 한 대 올라와서 애들 몇 아저씨 아줌마가 내렸습니다. 한참을 두리번 거리더니 나한테 묻더군요. “학생, 여기 관리사무소가 어디예요? 열쇠를 받아야 하는데..” “ 열쇠 주는 곳은 6km 밑에 있어요” “아이, 어떡해 당신이 좀 갔다와”
>그네들은 그래도 나처럼 자전거를 끌고 오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
>지은 지가 얼마 안된 방갈로라 그런지, 귀뚜라미 보일러 끝내주게 잘 돌아가더군요. 그 뜨거운 방바닥에 요를 이중으로 깔고 바로 뻗어부렀습니다.
>
>벌떡 일어나보니 온 바깥세상은 암전. 밤 아홉시 반. 세시간을 내리 자버렸습니다. 에고고, 쑤시지 않은 곳이 없네요. 문을 열고 나가보니 방갈로들 중에 불이 들어온 집이 몇 집 안되더군요. 나중에 안 얘긴데, 예약해 놓고 처음오는 사람들 중에 반 이상이 와보고 무서워서 그대로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몇 개 안되는 방갈로가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듬성듬성 기슭마다 흩어져 있는 모양새가 꼭 무덤 같더군요. 그러나 이런 호젓함에 이골이 난 여행 전문가 청년은 별로 두렵지 않았습니다. 밤공기는 매서웠지만 차갑고 아름다웠고, 외로운 나의 방은 딱딱하게 굳은 근육들을 싸안히 풀어주기에 충분할 만큼 이글이글 타오르고, 나는 이런 풍경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
>출발하기 전 날 배낭을 싸면서 굉장히 고민했지요. 무게를 최대한 줄이면서도 혹 있을지 모를 외로운 밤을 같이 할 놈들로 뭘 들고 갈지. 예전 전라도에 열흘간 도보로 여행다닐 땐 책을 여섯권이나 들고가는 바람에 정작 저녁에는 피곤에 절어 읽지도 못하고 멍하니 잠만 자다 온 적도 있었죠. 책꽂이에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 황지우씨의 시집을 하나 골라 넣었습니다.
>그러나 여행기간 내내 결국 한 줄도 읽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저녁에는 피곤에 절어 자느라 읽을 시간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혼자 하는 여행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종종 불안감과 연결되고, 스케줄의 자유로움은 오히려 조급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2박 3일, 몇박 며칠의 일정으로 호기있게 출발한 여행 첫날 밤, 쓸쓸함과 낯설음에 겨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던 적도 여러 번 있었죠.
>벌써 12년째네요.
>언젠가 이런 여행에 정말 익숙해지고 수양을 쌓아 진정한 여행의 느긋함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
>밤이 늦으면 산 위의 짐승들이 따뜻한 방갈로 주변으로 모여드는지, 지붕이고 벽이고 온동네가 소란스럽습니다. 퍼덕거리고, 부시럭거리고, 뭘 막 긁기도 하고. 도데체 지금 이런 소리를 내는 놈은 어떻게 생겼을까 라는 생각은 금물. 굉장히 무서워지거든요. 도저히 문을 열고 내다 보진 못하구.
>박쥐인가? 토끼? 다람쥐? 오소리? 도둑?
>이런 상상을 하다 소년은 잠이 들었습니다.
>깊은 밤입니다.
>
>둘째날
>
>삐삐의 빽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 보니 김 서린 창문 밖으로 이른 아침이 비칩니다. 구수한 방바닥에 몸을 더 지지고 싶어 이리뒹굴 저리뒹굴, 어깨와 엉덩이 통증은 여전하지만 몸은 한결 낫습니다. 쥐며느리처럼 몸을 웅크렸다가 쫙 뻗으면 뻐근한 온 몸의 근육들이 싸안히 저려오는 기분좋은 이 느낌.
>
>겹겹이 둘러친 산과 산들이 도로에 드리우는 기다란 그림자에 한번 들어가면 자전거 페달을 가지끈 힘차게 돌려도 다시 빛의 세계로 나오는 데 한참이 걸립니다.
>
>도로변 휴게소에 들러 라면을 사 먹었습니다. 보자마자 눈이 번쩍 뜨이는 아라따운 아주머니가 끓여준 파가 송송 잘게 썰려 들어간 따뜻한 국물을 마셨습니다. 역시 라면에는 파가 꼭 들어가야 함다!
>
>에, 그러니까 구룡령으로 가던 길을 도로 돌아나와 10km쯤 가다보면 서림삼거리가 나오고요, 거기서 왼쪽 급경사 비포장 고갯길로 방향을 틀면 내린천 탐승의 길목이 되는 현리 면소재지로 가는 험하고 조용한 32km 비포장 임도입니다. 제가 지금 넘어가야 하는 길이기도 하구요
>
>제가 가지고 갔던 시집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던 봄밤이었다”
>사직공원에 벗꽃이 핀 밤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건데,
>너무 멋있죠?
>또 이건,
>“이혼한 아내를 결국엔, 찾아가는 사내처럼
>동숭동에 갔다”
>고통과 그리움이 함께 묻어있는 추억서린 곳을 찾아가는 감회를 이렇게 절묘하게 비유할 수 있을까요?
>
>일년에 서너번씩 혼자 여행을 갑니다.
>가까이 들여다 보면 항상 초조하고, 멀리서 바라보면 지루한 그런 일상을 잘도 살다, 갑자기
>훌쩍 사라지고픈 마음이 울컥 솟습니다.
>인적끊긴 산을 오르거나 혹 누군가 짧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열병처럼 외로움에 스스로를 던지고
>차마 온전히 던지지는 못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머릴 감고 나서 아, 내가 덜 행궜나 하는 기분처럼
>더욱 더 엉키고 찝찝한 마음.
>
>조칩령은 현리로 가는 산길에 있는 작지만 험한 고개입니다. jeep으로도 조심하지 않으면 큰 코 다칠 수 있는 길이라, 이쪽 동네에서 저쪽 동네로 넘어가는 최단거리 코스지만 가다 한번씩 지나가는 jeep빼곤 그저 조용한 고개일 뿐이죠. 나같이 걸어가는 사람이 없는지 길 내내 휴지 하나 찾기 힘들더군요. 보통 임도는 산길을 빙빙 돌면서 경사를 줄이며 나 있게 되는데, 이 길을 독특하게 거의 직선으로 고개 정상까지 뻗어 있습니다. 3년 전 설악산을 당일치기로 등반한 이래 이처럼 육체적인 한계에 부딪혀 본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가끔씩 지나가던 차 운전수들이 한결같은 표정을 짓더군요. ‘사서 욕 본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이런 느낌을 느껴 보았을까요?
>숨을 헐떡이며 나무 그늘에 몸을 뉘이고 있을 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하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온 몸과 머리를 맑게 도려내는 듯한 그런 느낌을.
>그 Cool 한 느낌.
>
>참, 하늘이 얼마나 맑았는지 아세요?
>
>아홉시 반에 고개를 오르기 시작해, 두시간여만에 고개 정상에 섰습니다. 야, 호, 하니까 거짓말 좀 보태서 한 1분동안 메아리가 울려 퍼지더군요. 이제부터 어제 미천골에서 배운 짜릿한 Downhill 복습시간입니다. 내리막길도 장난이 아니더군요. 조금만 앞으로 고개를 숙여도 그냥 자전거가 뒤집어 질 것 같은 깎아지른 듯한 내리막길. 지금도 그 길을 생각하면 가슴을 슬어내리게 됩니다.
>
>고개를 오르며 엄청난 체력을 소모한 지라, 하산길에선 오로지 한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맛 난 것 실컷 먹을테야!’
>실제로 점심을 먹게 된 건 그로부터도 한시간 반 후. 점봉산산초갈비 (진짜)원조집에서 돼지갈비 2인분을 먹어치웠습니다.
>
>현리에 도착하니 오후 세시 반. 어제부터 시작해서 대략 열 여섯시간쯤 자전거를 끌고 탄 셈이더군요. 무심코 안장에 손을 얹었다가 데이는 줄 알았습니다. 꼭 보일러 연통 만진 기분이더군요.
>
>자전거를 접어서 인제행 버스를 탔습니다. 체력과 엉덩이만 살아 있었으면 인제까지도 자전거로 주파할려고 했었는데, 버스를 타면서 길을 살펴보니 버스를 선택한 것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 호기를 더 부렸다면, 아마 중간쯤 가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에 절망해 절벽에 꽃잎처럼 몸을 던졌을 지도 모릅니다.
>
>그 뒤로는 특별한 사건사고가 없었습니다.
>인제에 가서 여러 시장상인들의 의견을 들어 시설이 가장 훌륭한 모텔에 짐을 풀고, 낮에 다짐한 대로 ‘맛 난 것 실컷’ 사 가지고 들어와 아귀처럼 먹어치우고, 뜨거운 욕조에 잠시 담궜다가 때도 겸사겸사 밀고, 주인 아주머니가 빌려 준 에로 비디오 멍하니 보다 배가 고파져 나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들어와 TV를 멍하니 보다 쓰러져 잤습니다. 그 중간에 약국에 가서 파스를 사와 어깨 허리 다리 해서 여섯장을 붙인 것도 있습니다.
>
>
>같이 여행을 다시 오자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혼자 오게 되어 굉장히 섭섭하고 미안하네요. 하지만 혼자하는 여행이 늘 그랬듯 전반적으로 매우 심심하고 외로운 여행이었습니다. 위안 삼으시길.
>
>기행문을 쓰는 3일 동안 개인적으로 큰 사건을 겪는 바람에 사실 충실하게 쓰기가 힘들었음을 변명삼아 사족 달아 봅니다.
>
>상현, 현미, 수현
>
>항상 행복하길
>빕니다.
>
>----------------------------------------------------------------
>후기 : 미천골은 7km 정도의 짧은 코스지만 주변의 풍광이 모든 걸 보상 하고도 남음이 있읍니다. 임도가 아닌, 정말 산길을 달리는 느낌이 납니다. 방갈로 지역에서 더 이상 올라가진 않았는데, 산길이 계속 위로 나있으므로 좀 더 길게 탈 수도 있을 겁니다. 경사도 아주 심하진 않아서 와일드 바이크 여러분들 수준이면 끌고 가는 일은 별로 없으리라...
>
>조칩령은 살인적인 고개입니다. 길이 산허리를 빙빙 돌아가고 뭐 그런 거 없읍니다. 거의 무조건 고개 정상을 향해 직선을 꽂습니다. 그냥 걸어가는 것도 발이 미끄러질 정도니, 임도라는 말이 무색합니다. 대신, 정상에서 현리쪽으로 내려가는 반 비포장 반 포장 길이 시골 정취를 마음껏 느낄수 있는, 숨막힐 정도로 아름답고 조용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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