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그간의 꾸물거리던 날씨 덕분에 밤 10시 30분경에 한강으로 나간다. 기상청 일기 예보를 비웃는 날씨 탓에 자전거를 곁눈질만 했더니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만 같아서 야간한강라이딩을 나선 것이다.
자전거 전후의 안전등과 할로겐 라이트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암사육갑문 부근을 출발한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산책객들과 인라이너들이 보인다. 그들을 이리저리 피해서 평속 25킬로미터 이상으로 질주한다. 할로겐 라이트는 켜지 않은 상태다. 아, 그리고 헬맷 뒷부분에 달린 점멸경고등도 켜주었다는 걸 떠올린다. 아이들이 그 모습이 우주인 복장 같다고 하는 점멸경고등이다.
앞을 가로막는 인라이너들의 수가 많을 때는 가끔 라이트를 켰다 끄면서 광진교와 천호대교 아래를 지나간다.
한강에서의 내 라이딩 스타일은 무엇보다 운동이 목적이기에 땀이 흐를 정도로 달리는 것이어서 일부 유저들의 관광모드 라이딩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다. 도로에는 그리 많지 않은 강수량에도 물이 고여 있어서, 생각보다 배수가 잘 되지 않고 도로에 요철 부위가 제법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호대교 부근으로 다가가자 앞서가는 두 자전거의 속도는 평속 20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느리다. 묵묵히 뒤를 따르며 상황을 보던 나는 "지나가겠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좌측으로 치고 나간다.
속도가 30킬로미터 이상 오른 것 같다. 우측으로 접어들어 제 자리를 잡고 일정한 속도로 달린다. 무릎으로보다는 발목의 유연한 페달링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날벌레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고글에 소리가 나도록 부딪친다. 더러는 입 속으로도 들어와서 본의 아니게 이름 모를 날벌레를 음미해본다. 그 맛이란 말 그대로 벌레 씹은 맛이랄까?
누군가 따라붙는 것 같다. 옆을 흘낏 바라보니 자전거 그림자가 가로등 불빛에 스쳤다가 사라진다. 앞서가려는 게 분명한데 앞에서 달리고 있는 인라이너들과 보행자들 때문에 여의치 않은 것 같다. 그러한 행위가 두 번 반복되고 나는 브레이크를 잡으며 속도를 늦추어 양보를 한다.
생활자전거 한 대가 페달링도 열심히 달려나간다. 방금 내가 추월한 두 자전거 중의 한 대인 생활자전거다. 가끔 느끼는 것이지만 생활자전거 유저들은 MTB를 보면 괜히 호승지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적당한 호승지심은 좋은 것이기는 하다. 사실 그러한 것은 생활의 활력소며 발전의 모체가 되기도 한다. 생활자전거가 MTB보다 느리다는 법도 없고 평지에서는 체력 조건에 따라 더 빠를 수도 있다.
하지만 생활자전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조마조마하다.
자전거란 단순한 호승지심만으로 타는 게 아니다. 특히 복잡한 상황의 도로를 달릴 때는 여러 상황을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정리해야 하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특히 그 순발력에 노련함이 곁들여지면 금상첨화이나, 노련함이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생활자전거의 일반적이고도 단순한 라이딩 스타일로는 그러한 순발력이 쉽게 길러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의 생활자전거는 빠른 속도에 비해, 판단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보통 앞서 가는 보행자가 있을 때는 속도를 늦추며 보행자의 상태를 살펴야 하는데 생활자전거는 그냥 달려나간다. 생활자전거는 보행자가 일직선으로 걸어간다고만 판단한 것 같다. 보행자의 갑작스런 뱡향 전환 등의 돌발 변수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염려가 된다. 어쩌면 생활자전거는 호승지심으로 인해 판단능력이 저하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반사적으로 브레이크 레버에 손가락을 갖다 댄다.
아니나 다를까?
보행자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돌려서 좌측도로에서 우측도로로 접어든다. 동시에 급브레이크음이 파열음처럼 퍼진다. 내 뇌리에서는 사고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간다. 피와 신음, 바닥에 널부러진 자전거와 사람, 이런 게 어지럽게 떠오른다.
사고란 항상 순간적으로 다가온다. 아차, 하는 순간에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섬뜩하게 다가와서 고통과 뼈저린 반성을 안겨준다.
뒤를 따르던 나 역시 버릇처럼 좌우 브레이크를 동시에 잡으며 방향을 전환, 멈칫한 생활자전거와 보행자의 옆으로 빠져나간다.
다행스럽게도 사고는 나지 않았으나 생활자전거는 대단히 놀란 듯, 한 동안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다. 아마도 어디선가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으리라.
동호대교 아래에서 내려 땀을 식히고 음료수를 마신다. 생활자전거의 쓸모없는 호승지심을 잠시 떠올려본다. 가끔 한강을 달리다보면 철없는(?) 생활자전거들의 도전을 심심찮게 받고는 한다. 그들 중의 일부는 산악자전거가 별 거냐? 는 듯한 시기어린 생각을 하는 것도 같다. 물론 그것은 극히 일부 생활자전거 유저들의 생각이겠지만 말이다.
땀을 식히고 간단한 스트레칭 후, 출발지를 향해서 다시 페달링을 한다. 그제서야 예의 생활자전거가 지나간다. 새삼 뒷모습을 살펴보니 제법 복장도 갖추고 나이도 있는 유저다. 왠지 한편으로는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예의 생활자전거가 쓸데없는 호승지심에 빠져서 위험을 자초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면서 페달링을 한다.
인라이너들과 보행자들은 여전하다. 팀을 이루어 질서 있게 달리는 인라이너들은 팔뚝이나 발목에 발광밴드를 달아서 표시를 해주니 다행이다. 맞은편에서 가끔 다가오는 생활자전거들은 대부분 아무런 안전등도 달지 않아서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 이는 당사자 뿐만 아니라 타인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어서, 야간 라이딩을 하는 자전거들은 그 종류를 불문하고 모두 안전등을 부착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귓전으로 스쳐가는 바람소리 때문에 자동차의 소음마저 희미하다. 기분 좋은 시원함이 피부를 뚫고 가슴 속까지 스며드는 듯하다. 다리의 뻐근함이며 가끔 무릎에 걸리는 부하 정도는 참아줄 만하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물비린내마저도 참아줄 만하다.
역시 한강은 서울의 허파였다.
만약 서울에 한강이 없다면...?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해보고는 슬며시 웃는다. 한강이 없는 서울은 생각도 할 수 없고, 만약 한강이 없다면 서울은 급격히 몰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허파가 없는 생명체란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의 자전거도로를 비롯한 공원시설은 대단한 성공작이다. 아직 강남과 강북을 잇는 자전거전용도로가 없고 광나루 종점에서 하남시의 미사리로 넘어갈 수 있는 자전거도로가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하다. 만약 서울시와 하남시의 자전거도로가 연결이 된다면, 양 시(市)는 좋은 시설을 공유할 수 있기에 서로에게는 큰 이득이 될 것이다. 특히 하남시의 경우는 많은 서울 사람들을 손쉽게 미사리의 카페촌 등으로 불러들일 수 있고, 그것은 곧 지방 재정 확충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오랜 세월의 지하세계에 묻혀 있다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하천 하나가 떠오른다.
청계천이다.
나는 청계천 복원에 전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혼탁하고도 복잡하기만한 도심에 맑은 물과 푸른 나무를 끌어들이는 것 하나만으로도 복원 가치는 충분하다. 아쉬움이 있다면 청계천에는 인라인 스케이트는 물론이고 자전거도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 복원된 청계천이 생긴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집안에 근사한 화분 한 개를 새로 들여놓는 것 만큼이나 말이다.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남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내 손가락들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 레버를 향해 다가간다. 아무런 생각 없는 애완견들이 가끔 자전거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역시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은 애완견 주인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애완견은 반드시 끈을 매어 주인이 통제를 해야 하는데도 무방비 상태로 데리고 다닌다.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애완견을 자식처럼 여긴다고 하나, 이러한 어둠 속에서 끈도 묶지 않고 데리고 다니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애완견들은 그 크기가 작기 때문에 야간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가능하면 애완견에도 발광체를 달아주고 적절한 통제를 하는 게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길이다. 주인이 통제하지 못한 애완견으로 인한 사고의 배상책임은 전적으로 주인에게 있다는 점을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어둠 속에서 남녀 한 쌍으로 이루어진 인라이너의 모습이 드러난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인라이너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역시 이번에도 남녀는 손을 나란히 잡은 채, 도로를 달리고 있다. 발광밴드같은 경고등도 부착하지 않았음은 물론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입안이 씁쓸해진다. 초등학교 어린이만도 못한 그들의 매너 없는 행동에는 기가 찬다. 무얼 어쩌자는 건지 한심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사리분별이 있을 만한 성인 남녀가 아닌가?
어둠 속을 아무런 발광체도 없이 초음속 스텔스기처럼 빠르게 질주하는 인라이너도 위험요소로 작용한다. 역시 당사자와 타인을 위해서는 발광체를 반드시 달고 달려야 한다. 스스로는 프로로 자처하기에 사고의 위험은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잠실 지구를 지나간다. 알루미늄 프레임이 속도를 알려주듯이 스피드몬스터처럼 윙윙거린다. 도로 사정이 좋아서 사정없이 밟아댄다. 어둠 탓에 속도계는 보이지 않으나 시속 45킬로미터 이상은 충분히 될 것 같다. 보행자들과 가게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취객(?)을 발견하고 속도를 늦춘다. 그러자 생활자전거인지 MTB인지 판단이 되지 않는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따라붙는다.
동호대교 부근에서의 일도 있고 해서 곧 브레이크를 잡으며 양보를 해준다. 자전거 한 대가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솟구치듯이 지나간다. 하지만 이번에도 곧 날카로운 브레이크음이 들린다. 그가 보행자와 충돌할 뻔한 것이다. 다행히 사고가 나지는 않았고 예의 자전거는 쓰러질 듯이 휘청, 하더니 슬며시 뒤로 빠진다.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광나루 지구의 수영장 부근을 지나 암사육갑문에 다가갈 무렵에 배낭 대신 애용하는 스키용 벨트섹에서 셀룰러폰이 신호음을 낸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이런 시간에까지 나와 통화를 원하는 사람을 생각해서 셀룰러폰을 꺼내든다.
집사람에게서 온 전화다. 주간에는 한강라이딩을 가끔 하지만 야간한강라이딩은 처음인 남편을 걱정하는 음성이 어둠을 뚫고 전해져 온다. 아무런 염려 말라는 말과 함께 집을 향해 출발한다.
속도계의 시계는 아직 5월 18일을 가리키고 있다. 굳이 덧붙이자면 5월 18일 기념 야간라이딩이 된 셈이라고나 할까?
* 이 글은 저 mystman의 허락없이 다른 사이트로 옮겨갈 수 없음을 밝힙니다.
* 늘 라이딩 후기를 읽기만 해서 한 편 올려봅니다. 굳이 후기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으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해서 무심코 넘기기 쉬운 야간한강라이딩 소회를 그대로 적었습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