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을 빠져 나와 오솔길로 나오자 멀리서 서회장의 호각소리가 들려 `여기여~`라고 외치며 녀석들의 발길질로 뒷드레일러가 휜 잔차를 끌고 큰 길쪽으로 더 나가 `그 놈들에게 디카를 빼앗겼다.`라며 일행과 합세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쳐다 보기가 민망했던지 외면하는 듯했다.
일행들은 처음에는 어제처럼 러시아 젊은이들과 어울려 술이라도 한잔 하는 것으로 생각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한 마음이 들어 호각만 불어대고 있었다는 것인데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 동안 마음 고생을 꾀 한 눈치들.
한국에서라면 핸드폰으로 경찰이라도 불렀겠지만 이 외딴 곳이고 외진 곳에서, 말도 안 통하고 보면 어떤 대책이 있을 수가 없었고 경찰은 평소에도 구경조차 어려웠다.
큰 길가의 버스 정류장으로 나와 차분하게 피해상황을 점검해보니 디카외에도 멜빵에 메달아 둔 디카 케이스도 없어지고 어깨에 줄곧 메고 있던 베낭도 반쯤 열려 있었으며 베낭 작은 주머니에 넣어둔 군용 나침판(자작나무 숲속에 갈때를 대비해 가져온것)과 아이들을 만나면 나눠주려고 가져온 껌 몇 통이 없어 졌고 지갑의 달러등의 현금, 여권, 신분증, 귀로의 항공권등이 물에 좀 젖어 있을 뿐.
상처로는 오른쪽 눈밑의 광대뼈 부위는 조금 부어 있고 왼쪽 눈밑은 벌써 새까맣게 멍이 들어 있었다.
김총무는 나도 비상약으로 베낭속에 넣고 왔고 또 출국전 강의때도 지참을 권한, 우황청심환 한 알을 가져와 권하기에 `그 것까지 먹을 정도는 아니다.`며 거절하자 옆에서 서회장이 `놀랐을 테니 먹어두라.`며 다시 권해 입에 넣었다.
옷들은 잔차 복이어서 이미 쉽게 말라 가고 있었지만 신발이 젖어 휴지로 대충 닦고 시그마님이 빌려 준 양말로 바꿔 신었고 눈밑의 멍든 부위는 고글을 쓰니 가려졌다.
깃대봉만 남았을 뿐 미니 태극기도 없어 진 잔차는 뒷드레일러가 뒷바퀴 스포크에 닿는 소리를 내고 있어 손으로 좀 펴기는 했으나 라이딩은 할수가 없었다.
폭행은 이미 당한 만치 다시 또 폭행을 하겠느냐는 생각도 들어 잃어 버린 사진 1백여장에 미련이 남아 일행에게 잔차를 맡겨 놓고 다시 가서 메모리라도 되받아 나올까하는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일행에게 또 부담을 안겨 주기도 그렇고 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그만하기 다행이라는 눈치들이었고 나로서는 큰 액땜을 한 걸로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10년전 쯤 견지낚시에 심취해 있을때 이른 새벽에 강원도 치악산 골짜기로 낚시를 하러 가서 39센치짜리 송어를 잡고 돌아오다가 졸음 운전으로 큰 나무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를 내면서 순간적으로 졸도까지 했다가 멀쩡하게 살아 난 일도 있는 나로서는 또 한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셈이라면 친구들로 부터 `꾀 오래 장수할 스타일.`이라는 말을 또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 때문에 모두가 잔차를 끌고 강 상류의 바이칼 호텔로 가기로 하고 차도를 따라 가다가 허름한 자동차 정비업소를 발견, 대충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는 수리를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50대후반의 한 기술자가 나타나 뒷드레일러를 손으로 바로 잡아 우선 탈수 있게 해줘 1백루불(4천원 상당)을 사례했다.
잔차가 웬만큼 구르자 박수를 치기도 한 여성들과 함께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가기로 해 다시 그 고물차들이 사정없이 뿜어대는 매연을 마시며 다리를 건너고 차도를 달려 숙소 부근의 단골이 된, 그 빵집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고는 일찍 숙소로 돌아와 젖은 옷을 세탁하며 휴식을 취했다.
이날 점심을 먹을때 김총무는 위문품이라며 러시아산 담배 한 갑과 작은 보트카 한병을 사 와서 건네 줬는데 이 때 서회장등 넷이가 오늘 사건은 함구하자는데 합의를 했다.
저녁을 숙소에서 우리끼리 해결하고는 산책길에 나서자는 제의에 두차례나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그냥 쉬고 싶다는 시그마님을 남겨둔채 4명이 걸어서 낮에 갔던 상가로 가서 음료수등을 사왔는데 서회장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는 나를 가리키며 `생각보다 심각한것 같다. 시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라며 여성들에게 은근히 겁을 주기도 한다.
또 이날 밤늦게는 순환열차를 타고 돌아 온 베낭팀과의 합동 모임을 우리 숙소 3층 마루에서 가졌을때는 평상시용 선그래스를 끼고 참여해 출국 전까지 정보 교환차 개인 메일과 여행사의 게시판을 통해 교류가 있었던 20대와 30대의 젊은 여성등과 담소도 나누며 술잔도 받아 마셨다.
마지막 날인 16일 매연도 지겹고 해서 우리팀도 10만원의 대절료를 내고 잔차와 함께 승합차에 올라 베낭팀의 승합차를 따라 이날의 원래 라이딩 목적지였기도 했던, 이르크추크의 동북쪽 방향인 알흔 섬가는 길로 70키로쯤 달리면 나오는 불리아트 자치구를 찾기로 했다.
승합차는 공항을 지나 한 동안 달리더니 갑자기 전방에 초원의 광활한 대 평원이 등장해 당장 잔차를 끌어 내려서 타고 싶은 충동이 용 솟음쳤고 다시 한번 잔차로 알흔 섬을 가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언젠가는 최소한 보름정도의 여정으로 알흔 섬으로의 라이딩을 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인생은 짧은데 가야 할곳은 너무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지기도 한다.
화장을 고치겠다는 여성도 있고 해서 중간에 도로가에 잠시 차를 세웠는데 베낭팀 한 남자분이 도로가 풀밭에서 쉽게 대마초를 찾아내서 모두에게 알려 준다.
다시 달리는데 이윽고 마을이 나타나고 입구에 마상의 젊은 징기스칸 동상이 보인다.
그리고 마치 우리의 시골 면소재지 비슷한 크기의 한적한 동네로 들어가 차에서 내려보니 해바라기씨등을 파는 행상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호주머니속에 남은 동전 2루불을 꺼내 해바라기씨를 사 씹으며 더 안 동네로 가보니 시장이 나오고 입구에 버터와 치즈, 양젖등의 식품 행상들이 열을 짓고 앉아 있다.
패트병에 담은 양젖이 꼭 막걸리처럼 보여 갑자기 막걸리 생각이 간절해진다.
결국 김총무에게 제의, 8년전인가 몽골 여행때 그렇게 맛이 좋았던, 그 양젖 한 통을 사게 해 얼마뒤에 도착한 바이칼 호텔앞 강변 공원에서 역시 여성들이 준비해온 우리 숙소의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을 때 물대신 구수한 이 양젖을 마셔댔다.
호텔이 눈앞에 보이니 다른 여행자들을 위해서라도 어제 사건의 피해 신고라도 해 놔야 할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 호텔 데스크에게 이 사건에 대한 상담을 요청했더니 2층 식당 주인인 고려인을 소개해 줘 함께 대책을 상의 했는데 경찰에 정식 신고를 할 경우 역시 출국이 연기될 가능성이 커다는 결론이어서 포기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은 이미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인종 테러 방지를 위한 주의 당부>
최초 흑인을 대상으로 발생하다가 최근에는 흑인은 물론 아시아계등 유색인종을 대상으로 가해지고 있다.- 대한민국 교민들의 유의 사항 및 최근 피해사례 -이하생략
(계속)
<위는 식당가에서 만난, 록키 마운틴을 타는 젊은 러시안 MTB바이커와 고글로 상처를 감춘 채 찍은 기념 사진이고 아래는 알흔 섬으로 가는 대평원 초원 길이다.>
필자의 홈피는,
http://home.megapass.co.kr/~bae106/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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