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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목포간 라이딩(세쨋날)-외롭지만 행복했던 라이딩

vyjang2005.06.21 15:42조회 수 2251추천 수 1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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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05년5월25일(수)
* 날씨: 매우 맑음                    * 달린 거리:110km
* 출발 시간: 오전 8시30분         * 목적지 도착 시간: 오후 6시40분
* 라이딩 코스: 부용-김제-화호-고부-줄포-고창-영광


부용중앙교회 임찬규 목사님 댁에서 라이딩 세쨋날의 아침을 맞이했다.
잠자리에서 일어 난 시간은 오전 6시가 좀 지난 시간이었다.
새벽예배를 나가야 했는데 전날 잠자리에 들기전에 주보를 보았더니 새벽4시30분에 모이는 것이었다.
아마 아침 일찍 논밭에 나가시는 분들을 배려한 결과인듯 생각이 되었다.
잠을 푹 자두는 것이 라이딩에 좋을듯 싶어 좀 죄송스럽지만 포기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는 기상을 해서 세면을 한 후에 바로 예배당에 나가서 개인기도 시간을 갖었다.
예배당은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마루바닥에 신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어릴적 추억이 새록새록 떠 오르게 했고 아침 햇살이 창을 삐집고 들어와
예배당에 비춰 주는데 그 분위기가 바다지기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개인기도를 마치고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 보았다.
전날 저녁에 교회로 들어 오면서는 마을이 좀 오래된 주택으로 구성된듯 생각을 했는데
막상 돌아 보니 새로 지은 주택들이 제법 자리를 하고 있어서 기존 건물들과는 덜 어울리지만
앞으로 마을이 많이 변화가 이루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 보니 목사님의 말대로 포도밭이 많이 눈에 띄였다.
'부용포도'가 제법 이름이 알려진 것이라는 목사님의 말대로
이곳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중에 하나일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용리의 아침. 포도밭이 곳곳에 넓직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 분들의 주 소득원이다>


임찬규 목사님 내외분과 풍성한 식탁으로 아침식사를 함께하고 짐을 챙기고
썬크림으로 온몸을 무장한후 교회를 나선것이 오전 8시30분 경이었다.
목사님 내외분의 따듯한 배웅과 기도를 받고 세쨋날 라이딩을 시작을 했다.
잠을 잘 잔 덕분인지 몸이 아주 가볍게 느껴지고 묵직했던 다리의 느낌도 말끔이 사라진듯 했다.

동네를 가로질러 20여분쯤 페달을 밟아서 김제로 향하는 큰 도로에 들어서려는데
임찬규 목사님이 자동차를 타고 쫓아 오셨다.
무슨일인가 궁금해서 자전거를 세웠더니 파우다를 넣은 분통을 챙기지 못했는데
그것을 갖고 급하게 쫓아 오신 것이었다.
파우다는 자전거와 접촉이 많은 엉덩이 부분에 바르기 위해서 준비한 것인데
아침에 샤워 후에 사용을 하고는 욕실에 그냥 두고 온것을 갖고 오신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김제시로 향하는 도로는 매우 넓고 차량의 통행도 많지가 았았다.
상쾌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페달링을 하는데 하루의 라이딩이 좋을것이라는 예상이 되어진다.
온도는 전날과 비슷하게 더위가 느껴졌지만 그래도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지 기분이 상당이 좋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제 시청에 도착을 했는데 인천에 계신 목사님 한분이 전화를 주었다.
격려의 전화였는데 힘이 나는듯 했다.
이런 격려의 전화는 이날 부산,목포,서울,광주등에서 끊임없이 걸려왔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전화 통화를 한 후 김제 시청앞에서 지금까지 타고오던 23번 국도에서 29번 국도로 바꾸어 타기 시작을 했다.
죽산을 거쳐 부안으로 가려던 원래 계획을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최봉수 목사님의 고향인
'화호'를 둘러 가기 위해서 변경한 이유때문이다.

화호를 향해서 라이딩을 해 나가던 중 호남평야의 대명사격인 김제 만경평야 중심으로 들어 가게 되었다.
미국이나 중국 등의 큰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들에서야 흔한 이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지평선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땅이 이곳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도 서쪽이나 북쪽으로는 막힘없는 들판이 정말 놀랍게도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김제지역은 해발 50m 미만의 구릉 몇 개를 제외하면 동진강과 원평천,
만경강 주변이 온통 드넓은 들로 이루어진 호남평야의 중심지다.
그 중에서도 만경평야는 북쪽의 만경강과 남쪽 동진강 사이의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들판지역을 일컫는 이름으로 땅 전체의 50%이상이 논이라고 한다.

"김제 만경평야,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밋돌’이라고 불리는 김제 만경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호남평야의 안에서도 김제 만경벌은 특히나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여서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는 곳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만경평야에 대한 묘사다.
'징게멩게 외에밋돌'이라는 표현에서 '외에밋돌'이라는 말은
'너른 들' 즉 평야를 일컫는 말로 곧 '김제 만경 너른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호남제일, 아니 대한민국 제일의 곡창지대다.
그래서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시절,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에 눈독을 들인
일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의 잔혹한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땅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들이 넓어 일찍이 삼한 시절부터 벼농사가 발달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큰 농사용 저수지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그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이 바로 '벽골제'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700년 전에 축조됐다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저수지로 알려진
벽골제 주변은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의 광활한 황금 들판과 함께 풍요로움을 선사해 주는 곳이었다.


<벽골제의 모습. 박물관도 있고 아름다운 정원과 조상들의 농경생활 모습을 알게 해 주는 여러 시설들이 있다>

호남 평야의 한복판인 김제 땅은 과거 서울로 올려보내는 세미(稅米)가 가장 많았던
곡창 중의 곡창이니 벽골제의 존재 자체는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지금은 서편 둑과 수문으로 쓰였던 흔적 몇 군데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오로지 이 저수지에 기대어 목을 축였을 너른 들판은 역시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 주는 이 고장의 상징이다.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있는 저수지 둑 주변으로 벽골제 전시관과 볏짚 공예품을 전시한 야외 뜰이 있다.
그리고, 처음 축조될 당시의 애틋한 전설을 말해 주는 단야각과 함께
수차, 용두레 같은 벼농사에 관련된 체험 시설과 그네와 널뛰기 등의
전통 민속놀이를 위한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것이 눈에 띄었는데
이곳 저곳에 손님 맞을 준비를 잘 해 놓은 곳이었다.
벽골제는 고대 우리 나라의 농경 문화를 보여 주는 역사 유적이라기도 했지만
체험 활동을 곁들일 수 있는 종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 한듯 했다.



<벽골제 안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 물속에 또 하나의 세계가 보인다>

<月村立石. 매년 정월 보름이면 이곳에서는 남녀 두편으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이때 여자가 이기면 풍년이 든다는 믿음들이 있었다.
그리고 줄다리기에 사용한 동아줄은 마을사람들이 입석에 감아두고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동아줄에 손을 대면 큰 흉년이 온다는 믿음이 있어서 아무도 만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제 시내에서 화호로 달리다가 왼편으로 세워져 있는 벽골제,
벽골제라는 이름이 너무나 유명하였기 때문에 높직한 댐을 연상했었는데
의외로 나지막한 둑과 수문 터가 조금은 실망스럽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 벽골제의 물을 이용하여 드넓은 만경평야에서
벼농사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오늘날의 다목적 댐이나 토목기술에 비할 것은 아니나
당시의 사회상을 미루어 생각하면 물을 이용하는 지혜나 토목공사의 규모면에서 슬기로운 대역사였음이 짐작된다.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니 날아갈 듯 서있는 2층 누각이 눈길을 끄는데 바로 단야루다.
단야루 외에도 단야각, 단야로 등 단야에 관한 전설이 곳곳에 즐비하여 흥미를 끌었다.
유적지는 공원처럼 아름다운 모습이다.
곳곳에 옛 농촌 모습이 재현되어 있고 1970년대까지 우리 농촌에서 많이 사용하였던
무자위와 맞두레 등이 예쁘게 꾸며진 연못가에 설치되어
농촌 출신의 관광객들에게 향수를 자아내고 있었다.
우도농악 전수관에서는 우리 전통의 농악 그 중에서도 정읍, 이리, 부안, 김제 등의 농악으로
대표되는 우도농악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수리 민속 유물 전시관은 우리 농경문화의 기원에서부터
수리(水利)의 역사와 각종 수리시설을 엿볼 수 있게 하였으며
용두레질 하는 농부상은 처음 보는 사람도 물을 어떻게 퍼 올렸는지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생거라는 수문. 여러개의 수문중 남아있는 두개중 하나이다>

<지금의 벽골제 모습. 일제가 저수지의 벽을 헐어서 논으로 사용케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커다란 하천처럼 느껴진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벽골제에 자리한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비와
길 건너편에 새로 조성되어 있는 그의 아리랑문학관이었다.
대하소설 아리랑의 첫 무대가 이 김제 만경평야를 중심으로
민초들에 대한 일제의 수탈과 압제가 전개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무대를 문학작품 속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 현장으로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벽골제 안에 세워진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문학비.
길건너에 아리랑 문학관이 있는데 이곳에 세워진것이 좀 의아했다>

폐교된 초등학교 터에 자리 잡은 이곳에는 작가 조정래 선생이 소설 <아리랑>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사용했던 원고지, 취재 노트와 필기구는 물론
모자, 등산화, 여권 등이 가지런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인 박물관에서 느끼지 못했던 다양함과 신선함이 담긴 매력적인 공간이다.

이웃해 있는 벽골제에 들러 황금빛 들판의 지평선이 안겨 주는 풍요로움을 가슴에 담았다면,
이곳에서는 지금으로부터 한세기 전 무능한 조정과 일제의 수탈로 인해
처절한 삶을 살아가야 했던 민초들의 한(恨)을 되새기며 숙연해집니다.

곡창이었기에 일제에 의한 수탈의 마수가 가장 먼저 뻗쳐
농토 대부분을 그들에게 빼앗겼으며, 이곳에 뿌리박고 살아 왔던
수많은 김제의 백성들은 고향을 등진 채 만주로, 연해주로 떠나야 했던
뼈아픈 역사를 소설의 흔적을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리랑문학관은 벽골제와 황금빛 들판이 주는 풍요로움에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김제 땅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게 바라보고 느끼게 해준다.
벽골제를 찾아 왔다면 이곳을 빠뜨리고 지나쳐서는 안 될듯 싶다.


<황금빛 보리밭을 배경으로 세워진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 전경>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 전경>



<조정래의 아리랑이 얼마나 대작이며 많은 수고가 들어 같는가를 보여주는 사진.
여러해 걸쳐 쓴 친필 원고 앞에 손주와 함게 선 조정래선생>


<아리랑 문학관 안에 세워진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 기념탑'>

뿐만아니라 이곳에는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 기념탑'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해신'이라는 인기 드라마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청해진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탑이 이곳에....

장보고의 죽음과 함께 청해진은 철저하게 혁파당하기 시작한다.
필사적 저항이 있긴 했지만 장보고라는 기둥을 잃은 그의 심복들
대부분은 당으로,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난다.
문성왕이 장보고가 암살당한지 5년이 지난 851년에야 청해진 폐쇄를 선언한 걸로 미뤄봐서
청해진 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청해진이 완전 제압당하고 남겨진 이들은 민중과 졸병들이었다.
이들은 청해진 폐쇄와 함께 내륙의 평야지로 강제 이주 당한다.
그곳이 지금의 전북 김제다. 그들은 그곳 벽골제 수축현장에 강제로 투입됐다.
그리고 이곳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노역에 시달리다가 생을 마감했는데
이들을 추모하고 기념하고자 김제시가 2002년 8월에 이곳에 건립한 것이다.

벽골제와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을 둘러 보느라고 1시간 가량을 소비했지만
이번 수원, 목포간 라이딩 구간중 가장 감명이 깊었던 장소들이었다.
이곳을 나와 '화호'를 향해 다시 페달을 밟아 나갔다.

벽골제와 조정래선생의 아리랑 기념관을 둘러  본 다음의 목적지는 '화호'였다.
미국의 아틀란타에서 목회하시는 최봉수 목사님의 고향인데 원래 코스를 변경해서 두르게 된 곳으로
나 자신도 목사님이 30년 가깝게 가 보질 못한 고향을 대신 둘러 보고
그 내용을 전한다는 것에 약간의 흥분이 되는 것이 느껴졌다.

'화호'는 벽골제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김제 평야를 20여분 정도 포장된 도로를  달려가니 인상고등학교 교문이 바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화호중고등학교로 불려졌던 학교이다.
그런데 시골의 고등학교 답지않게 교문은 대학교 같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목사님의 부친이 오래전에 이곳에서 서무과장으로 수고를 하신 학교이다.
반가운 마음에 교문안으로 자전거를 몰아 들어 갔다.
일단의 남녀 학생들이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앞을 지나간다.
그들은 라이딩 복장에 얼굴은 검은 마스크로 온통 가린 내 모습이 생경스러운지 자꾸 쳐다본다.
교정의 잘 꾸며진 정원에서 마음껏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봐서 고3들 처럼 보였다




인상고등학교 정문.


졸업사진을 찍고있는 학생들. 정말 좋은 시절인데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인상중고등학교 전경.



목사님네 가족을 기억하고 안내해 주신 할머니들.
붉은 티셔츠의 할머니가 직접 안내를 해 주셨다.



최봉수 목사님의 생가.



사진의 가운데 큰 창고 옆에 최 목사님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는데 나무에 가려서 보이질 않는다.


학교 전경이 잘 나올듯한 곳에서 교정의 모습을 담았다.
최목사님에게 보내 줄 사진들이다.
이리 저리 카메라 방향을 돌리며 앵글을 맞추는데 선생님인듯한 분이  다가와서는 사연을 묻는다.
자초지정을 이야기 하고는 '당산'의 일본식 가옥이 있는 곳을 물으니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신다.
다시 자전거를 몰아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한 당산으로 향하는데 주변에 일본식 가옥이 많이 눈에 보인다.
최 봉수목사님도 저런 집들 가운데 한 곳에서 생활을 하셨겠다는 생각에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당산에 오르니 동네 전체가 한눈에 들어 온다.
아마 동네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가 될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으로
큰 아람드리 나무들이 여러 그루있어서 그늘을 제공해 주고
간단한 운동도 할수 있도록 배드민턴 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침 그늘 한켠에 연세가 제법 들어 보이시는 할머니들이 모여 앉으셔서 대화를 나누시다가
낯선 이방인이 다가오니까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 주신다.
최목사님의 부친 존함을 말씀드리고 찾아 온 사정을 전했더니 얼굴들이 더욱 환해 지신다.
목사님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목사님의 형제들을 모두 기억하고 계신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여러가지 칭찬들을 하신다.
"그 엄마가 아주 예뻤는데...". "아버지의 성품이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아주 잘 생겼었는데 딸이 미국에 있다고 하더니 막내가 목사가 되었구나!!"

그중에 한 할머니가 목사님이 사시던 집으로 안내를 자청하셨다.
당산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바로 나온 목사님의 생가는
전에는 일본식 집이었는데 이제는 한옥으로 개조가 되어 있어 옛모습을 찾기는 쉽지않고
마당에는 자그마한 화단이 만들어 져서 꽃들로 그득하게 채워져 있었다.
아쉽게도 주인은 집에 계시지 않아 볼수가 없었다.
아마 일을 하기 위해 나가신듯 했다.

최 목사님이 살던 동네를 살펴보고 나니 시간이 상당히 많이 지체가 되었다.
특히 벽골제, 아리랑 기념관등을 돌아 보느라고 오전 시간이 거의 지난 셈이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영광까지 갈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페달에 힘을 가했다.
정말 누구와도 대화 한마디도 나눌 수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전날 처럼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않았다.
거의 평지인 도로 덕분도 있고 몸도 어느정도 라이딩에 적응이 되었기 때문일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베냥속에 있는 물백으로 부터 스포츠 음료를 공급받으니 몸의 피로도 빠르게 회복되는듯 했다.
특히 미리 냉장고에서 얼렸다가 마시니 하루종일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추길수 있었던것이 더 좋았다.
다만 엉덩이의 아픔은 별로 느낄수가 없었는데 손바닥의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 졌다.
달리면서 손의 위치를 바꿔보기도 하고 쥐었다가 펴 보기도 하지만
손바닥의 아픔과 저림 현상은 가셔지지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강도는 더해 갔다.
그래도 감당할만 했다.



라이딩중에 가장 반갑게 느껴지는 이정표.
고창으로 가는 중간에 고부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지명중에 이름과 비슷한 지역이....


오후 1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에 '고부'에 도착을 했다.
김제의 평야 지대 전체가 그렇지만 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지여서 그런지
동학혁명의 선봉장이었던 전봉준 장군의 흔적들이 너무 많았다.
동학혁명은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지역의 동학접주(東學接主) 전봉준(全琫準)이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의하고자 이 지역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켰던 농민 운동이다.

고부 향교 앞 나무 그늘에 앉아서 쪼코렛과 과자로 점심을 대신하며 스포츠 음료로 목을 축이는데
근로자 복장을 한 젊은이 두 사람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가와서 말을 건다.
자전거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도 하고 장거리 라이딩에 대해서 무척이나 무러워하는 눈치이다.
자신들도 언젠가는 시간이 되느대로 도전해 보겠단다.
그러면서 목포까지의 여러 길을 안내해 주는데 순박한 청년들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나중에는 이곳 냉면이 맞있다며 소개해 줄테니까 먹고 가라고 권하기도 했는데
청년들이 지름길을 알려줘서 710번 지방도로를 이용해서 줄포로 가려던 계획을 변경했다.
그리고 지도에 잘 표시되지 않은 군도로를 이용해서 소성으로 가고
이곳에서 다시 22번 국도를 만나 양계를 거쳐 흥덕을 통과해서 고창으로 향했다.
이 도로가 오전 시간에 구경으로 인해 지체된 시간을 절약하는데 무척이나 보탬이 되었다.

고창으로 향하는 라이딩은 전날에 비해 무척이나 수월했다.
길도 오르막이 그리 많지가 않았고 도로에 차들의 통행도 한산해서 위험도 느끼수 없었다.
다만 지나치는 사람들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한낮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모습을 볼수가 없는 것이....
어쩌면 점점 비어가는 시골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길 양편에는 보리들이 익어가고 담배농사와 인삼밭
그리고 양파와 마늘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풍성하게 보였지만 이를 다를 사람들은.....


인삼밭. 전에는 특정 지역에서 특정 농산물이 생산되는것으로 알았는데
이제는 농업 기술의 발달로 전국 어느 곳에서나 기후에 지장만 없으면 재배가 가능해진듯 싶다.


고창으로 향하는 길에 핸드폰이 그 몸을 흔들어 댄다.
받아 보니 부평에 살고있는 죽마고우였다.
현재의 상황을 묻고는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란다.
차를 갖고 늑달같이 내려 오겠다고.
고마운 친구이다. 아마 마음으로는 함께 라이딩에 참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마음으로만 함께 한 친구이다.
친구의 전화를 받으니 더욱 다리에 힘이.....

어렵지 않게 고창에 오후 3시경 도착을 했다.
이곳은 여러가지로 유명한 곳인데 우선은 고인돌 군락지를 돌아 보려고 방향을 잡았다.
고창 읍에서 서쪽으로 20여분 달려가니
얼마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군락지에 도착을 할수 있었다.
수학여행을 온 여고생들의 재잘거림이 군락지안에 그득하다.
주변이 한창 정비, 복원중이라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아름다운 주변 환경과 생각보다 많은 고인돌들로 인해서
앞으로 중요 문화제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게 될듯 보였다.

고창군에 분포되어진 고인돌의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상태인데
2,000여기 이상이 분포되어 진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고창군이 고인돌이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으로 생각이 되어지고
특히 군내에 죽림리, 상갑리 일대가 가장 밀집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는 다른 지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찾아 보기 어려운 현상으로
이곳의 고인돌은 무덤방이 지상에 있는 탁자식과 지상 석곽형 고인돌,
무덤방이 지하에 있는 바둑판식과 개석식 고인돌등 다양한 형식으로 분포 되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할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곳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 고인돌 군락지.
고인돌마다 번호가 매개져 있는데 여러곳에 아주 넓게 그리고 많은 숫자가 분포되어있다.




고인돌 군락지 앞에서 한컷. 전날보다 얼굴에 기운이 넘친다.


고인돌 군락지 인근에 위치한 전봉준 장군의 생가도 찾았다.
그런데 본채와 건너채 두동만 지어져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그득해서 생각보다는 실망스러웠다.
사정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아마 전봉준 장군의 생가라고 주장하는 곳이 서너지역 되는데
이곳은 세번째로 제기된 곳이라 우선 순위에서 미리는 바람에 고창군으로 부터 지원을 받을수가 없었고
이로 인해서 개인이 관리하는 장소로 전락이 되어 버린듯 했다.
문이 잠긴 매점을 겸한 전봉준 장군의 개인 전시장 입구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그려져 달린 그의 초상화가 왠지 을씨년 스럽게 느껴졌다.


생가 옆에 자리한 개인이 운영하는 전봉준 장군 전시실.
그러나 문은 닫혀있었고 그의 초상화만 생가와 방문자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고창군으로 부터 직접 지원을 받지 못해서 인지 을씨년 스럽기만해 실망감을 준 전봉준 생가.
두채의 건물만이 잡초가 우거진 채 방치되어 있는듯 보였다.


다시 고창읍으로 나왔다.
비상 식량인 연양갱과 과자등을 구입하고 여러 생각을 하다가 도로 한가운데서 보기좋게 '자빠링'.
마침 귀가하는 중고등학생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른쪽 무릎 아래에서 피가 나오고 손바닥은 장갑을 끼었더니
그나마 상처는 없었지만 통증이 크게 느껴졌다.
오른쪽 손바닥은 라이딩 이후 느껴지던 통증과 함께  이후에 시커먼 멍으로 자리를 잡았다.
넘어졌어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마침 근처에 있는 자전거 샾이 있어서 들어가서 아픈 몸을 달래며 자전거를 정비했다.
고창에는 청보리밭이 유명한데 사진으로만 보던 이곳을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읍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고 영광까지 가야하는 일정때문에 아쉬게 접어야 했다.

라이딩 세쨋날은 오후에 해가 구름에 가려서 날씨도 덥지않고 컨디션도 아주 좋았다.
다만 손바닥의 통증이 점점 더해지는것 외에는.....
특히 여러 의미있는 장소들을 둘러보며 라이딩을 할수 있었던 것이
장거리 라이딩에 대한 의미와 자신을 새롭게 돌아 보게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고창을 출발한 이후부터는 정말 혼자였다.
묵시적인 후원자들은 많이 있었다.
라이딩 도중에 걸려오는 전화들과 문자들 그리고 묵묵하게 응원을 보내주는 후원자들.
그러나 홀로된 상태로 외로운 길을 가야만 했다. 내 자신과 싸우면서……
특히 고창을 지난 다음부터는 길은 아주 넓게 잘 닦여져 있는데 오가는 차량마져 뜸해 보인다.
어느 구간은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처럼 적막하게 느껴진 구간들도 있었다.
"혹시 나만 남고 모두 휴거가 되었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면서 미소를 지어 보기도 했다.


(전에 호남지방을 다녀 볼때와는 달리 이제는 도로들이 잘 닦여져 있는데 통행하는 차량들이 많지않다.
그만큼 산업이나 생활면에서 아직 낙후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런 도로들은 라이딩족을 아주 외롭게 만드는 구간이었다)



어느 때는 기운이 쫙 빠진다. 나를 바라 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지치게 할때도 있었다.
갑자기 페달이 무거워 지고 자전거는 힘겹게 용트림을 한다.
“아! 앞으로 남은 길이 많은데…… 이를 어쩐다.”
그래도  어거적 거리며 앞으로 나간다.
어느때는 앞으로 다가오는 언덕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아득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곳이다.
어떻게 저 긴 언덕과 싸움을 벌이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이내 고개 넘어에 있는 긴 내리막을 연상하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 본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이라는 말을 되 뇌이며 스스로를 다그쳐 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까지 달려 온 길이 상당하고
남은 길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  다시 힘을내게 한다.
어느때는 특히 고개 정상을 향해 숨이 턱에 차며 힘들게  오를때는
설사 내가 여기서 중단한다고 해서 나의 이 라이딩을 폄하 할 사람이 있겠는가?
또 나 혼자인데 적당히 지나가는 차량의 도움을 받아 간다고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에게 협상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완주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힘이 들어도 넘자는 결론이 내려지는 일이 많다.

그렇게 여러 생각속에서 전라남도 경계에 서게 되었다.
영광군 대마면이었다.
고창을 출발해서 1시간 30여분이 넘은 시간이었고 오후 6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이었다.
사진을 한장 기념으로 남기고 아내에게 이 사실을 전화로 알렸다.
건강과 안전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한다.
어울리지 않는 나이에 어울리지않는 일(?)을 감행하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일것이다.
오늘의 목적지인 영광이 가까워졌다는 사실때문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서둘러 영광 읍내로 향한다.



(이번 라이딩중 마지막으로 넘는 도 경계선. 아주 신이 나게 만드는 간판들이다.)

그런데 읍내로 들어가는 마지막 언덕을 오르는데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현기증이 느껴진다.
점심을 먹지않고 라이딩을 한 영향일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전거를 도로 옆에 세우고 베낭을 풀렀다.
연양갱과 자유시대를 연거푸 먹으며 지친 몸을 추스려 본다.
약간의 허기가 느껴졌지만 영광에 들어가서 저녁식사를 할 요량으로
행동식을 몇 개 주워 먹고 영광을 향해 출발한다.
영광 가까이에 도달 해 갈때 근육의 피로도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얼마간 페달 질 한 후 영광 시가지에 들어서게 되었다.
스물스물 밀려오는 어둠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시각이었다.

굴비의 고장 영광이라서 그런지 상점앞에 매달아 놓은 굴비 두름이 많이 보인다.
저녁 식사를 해결할 식당을 찾는데 친구 목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안부를 나누고 수요 예배를 드릴 교회를 소개 받았다.
저녁 식사를 급하게 하고는 좀 야시시한 라이딩 복장으로 '영광대교회'를 찾아갔다.
이미 예배가 시작이 되어 막 설교를 하려고 하는 시간이었다.
좀 야시시한 복장을 보고 로비에 앉아서 안내를 하던 분들의 표정이.....
무시하고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맨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부목사가 설교를 하는 모양인데 예배당도 대단히 크고 예배에 참여한 사람도 수백명으로 보여진다.
영광에서 가장 큰 교회라고 하는데 실내도 아주 잘 꾸며지고 모든 시설이 훌륭했다.



(상점의 문지방에 달려있는 굴비들도 그 얼굴 표정이 제각각이다)


(영광대교회의 수요예배 모습. 작은 도시 치고는 교회 규모가 대단했다)


예배를 마치고는 숙소를 정해야 했다.
전날까지는 지인들이 도움을 받았는데 영광에서는 도움을 받을곳이 없었다.
생각해 낸 숙소가 찜질방.
지나가는 택시기사에게 물어 보았더니 찜질방은 유일하게 한곳만 있다는 것이다.
수도권에는 흔하디 흔한것이 찜질방인데......
택시 기사가 알려준대로 찾아가 보니 금액이 5,000원이라는데 자전거를 맡아 줄순 없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 나올수 밖에.....



(라이딩 세쨋날을 동침한 애마. 거울속에 누가......??)


다음날 마실 스포츠 음료를 한통 구이한 후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한 커다란 모텔을 찾아 들어갔다.
계산을 하고 자전거 보관을 부탁하니 방으로 갖고 들어 가란다.
아마 나그네가 혼자 외롭게 밤을 지내게 될 것을 생각한 것일까?
애마와 동침을 하게 된것이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몸을 담갔다.
지난 3일간의 피로가 풀리는듯 했다.

계산해보니 오늘 하루 달린 거리가 110km였다.

p.s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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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글 잘읽었습니다..제가 나서 자란곳을 지나시면서 느낀 생각들이 저보다 더 생생하고 감동적이군요..이번 주말엔 고향에 내려가서 그동안 스쳐 지나쳤던 고향의 모습을 천천히 음미해봐야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빕니다..
용용아빠
2024.06.17 조회 71
tre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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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ke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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