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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퀴로 땅끝까지...

햇병아리2005.07.17 21:02조회 수 2580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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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남해 거제에서 진도까지 4박 5일간 홀로 라이딩 후깁니다
전문으로 글쓰는 사람도 아니고 그때 그때 감정의 기복에 따라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적었습니다.
탓하지 마시고 재미로 읽어주시길...



두 바퀴로 땅 끝까지

   어디까지 가든 힘이 다하면 그곳이 내가 머물 곳, 아직 힘이 남아 있다면 그냥 지나칠 도시일 뿐!  떠날 수 있는 나는 지금 자유인이다.

첫째 날(2005. 6. 15 : 수요일)

   며칠 전부터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내일은 제발 틀려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새벽 6시! 그런 내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날씨는 잔뜩 찌푸리고 있지만 다행히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는다.  때 이르게 아침을 먹는 나를 아내와 아이들이 말없이 바라본다. 밥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준비물 목록을 점검하곤 흠칫 베란다에 세워진 자전거에 시선이 머문다. ‘주인을 잘못 만난게지...’  조금은 어색한 작별인사를 건네고는 현관문을 나선다. ‘누군가 동행이라도 있었으면...’ 그런 내 마음을 벌써 알고나 있었을까.  조금은 뭔지 모를 어떤 두려움이 동행을 자처하고 따라 나선다. 그래! 너마저 없다면 이 여행이 또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8시 시외버스터미널!
자전거를 화물칸에 집어넣고 이틀 전 예매한 진주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근심어린 눈으로 차창 밖 찌푸린 날씨를 확인하며 내가 가야할 긴 여정의 끈과 매듭들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거제-통영-삼천포-남해-광양-순천-보성-장흥-강진-해남-땅끝-진도... 남해바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예상거리 600km!

  여행의 즐거움은 여행 자체보다 떠나기 전 어디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 계획을 세우는 것이 더 큰 설레임인지 모른다. 그리고 돌아와 이렇게 곱씹어 보는 되새김질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지난해 백두대간을 넘나들며 겪었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올해는 한 달 전부터 많은 준비를 했다. 남해안 지역의 관광안내책자며... 인터넷 자전거동호회에 길 안내 등 도움을 요청하고... 국도 노선별 거리표를 환산하여 하루 동안 가야할 거리며, 어디서 숙박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특히, 작년처럼 무작정 달리기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여행!!  그런 치밀한 계획이 그나마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반감시켜주지 않았을까?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스스로 결정하고, 또 그 결정에 따라 가야할 여정의 끈을 길게 늘여 놓고... 더구나 그 끈이 언제든지 풀어 버릴 수 있는 느슨한 끈이라면 더 즐거운 여행이 아닐까. 아무튼 지금 나는 그 끈에 첫 자락을 잡고 있다.

  진주에 도착하니 11시! 다행히 아직 비는 뿌리지 않고 있지만 예사롭지 않다.  오후에 만나기로한 거제도 동호회원으로부터 실시간으로 날아오는 현지 기상상황도 별로 좋지 않다. 잠깐 진주성에 들러 촉석루라도 둘러보고 싶었지만 자전거 입장불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통영 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통영에 도착하니 2시!!
드디어 자전거 복장으로 갈아입고 첫 폐달질을 시작한다. 거제대교를 지나 신현읍을 얼마 남기지 않고 긴 오르막이 앞을 가로 막는다. 아흑! 섬에서 이런 빡센 오르막을 만나다니...!  신현읍까지 20여km를 달려 동호회원과 만난다. 생면부지 낯선 사람과의 첫 만남!  처음의 서먹서먹함도 자전거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금방 친근감으로 바뀐다.  
  포로수용소공원에 들러 기념촬영을 하고 셋이서 해안 일주 라이딩을 시작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가는 날이 장날이었는지 회원 한분이 펑크다. 어쩔 수 없이 돌아서고 나머지 한분과 학동 몽돌해수욕장을 향해 섬 중앙을 관통한다. 헉헉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긴 고갯마루를 오르자 탁 트인 바다가 나를 맞이한다. 한달음에 달려가니 해변이 자갈투성이로 이채롭다.  
  『몽돌』이라는 말이 남해 어딘가 지명인줄 알았던 나는 ‘바닷가에 동글동글 검은 돌을 나타내는 일반명사’라는 말을 듣고 괜히 뻘쭘해진다. 그러니까 몽돌해수욕장은  모래 대신 몽돌이 깔린 해수욕장이란다.  해변에서 잠시 기념촬영을 하고 일정상 금방 헤어져야 할 시간! 두 사람과의 인연을 그렇게 끝내기엔 너무 아쉬움이 컸던 때문일까 당초 통영에서 일박하려던 계획을 수정, 저녁에 거제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진다.
  이제 해안선을 따라 본격적인 홀로 라이딩을 시작한다. 얼마를 달리자 해금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절경이랄까 비경이랄까. 아! 또다시 절감하는 내가 알고 있는 형용사의 부족함이여!  바닷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 자전거 여행의 최대 불청객이라면 역시 맞바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속도가 중요하지 않다. 해안선을 따라 바다와 함께 하는 라이딩이 여유마저 느껴진다. 이런 여유를 찾아 나는 여기까지 달려 온 것일까. 다시 거제로 돌아오니 벌써 어둑어둑 해진다. 회원들과 다시 만나 저녁식사를 나누며 자전거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들... 언제 갚을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 호의를 염치없이 너무 많이 받는다.  앞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채무를 상환하는 것이다.  
   거제는 낮과 밤이 완벽하게 변신하는 두 얼굴의 도시 같다. 저녁이 되면 일시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홀로 배회하며 느끼는 독특한 풍물들!  자꾸 낯선 남도의 사투리와 억양이 귀에 거슬린다. 고막을 울려 뇌에 전달되지 못하고 귀 바퀴 밑에 뚝뚝 떨어져 버린 언어의 조각들!! 그런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천천히 음미하는 것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도 잠시!!!  자꾸만 내일의 일정이 나를 숙소로 밀어 넣는다.  

* 여정 : 통영 - 거제대교 - 신현읍 - 학동몽돌해수욕장 - 해금강 - 신현읍
* 라이딩 거리 및 순라이딩 시간 : 108.6km  3시간 47분

둘째 날(2005. 6. 16 : 목요일)

  새벽 06:00
알람에 도움 없이도 눈이 떠진다. 평상시 맞춰져 있는 라이프 싸이클이 그대로 적용 됐다면 어제는 별로 무리하지 않은 일정을 소화한 셈이다. 아침이 찾아오면 전날 켜켜이 쌓여 있을지도 모를 피로들을 이불 개듯 걷어붙이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를 나설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불안한 마음에 창밖을 살펴보니 비는 내리지 않고 있다. 어차피 날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자전거 여행의 한계! 나보다 더 간절히 비를 바라는 누군가가 있다면 비는 내릴 것이고... 아직은 내 바람이 더 간절한가 보다.
  오늘은 삼천포에서 동호회원을 만나 길 안내를 받기로 했다. 그리고 광양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 그 곳에서 일박할 예정이다. 통영에서 고성까지는 4차선 국도가 잘 뚫려 있지만 교통량이 많고 갓길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길은 어떻게든 피하는 게 상책이다. 고성까지 시외버스로 이동, 고성에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삼천포로 향한다. 한 시간 이상을 달리자 상족암 군립공원이 나타난다. 해안가에 공룡 발자국 화석 몇 개 있는 것을 공원으로 잘 단장해 놨다. 역시 공룡은 어린아이들과 어울리는 컨셉인가 보다. 올망졸망 몰려다니는 유치원생들!  공룡보다 내 복장이 더 신기한 듯 쳐다본다.  
  공원을 한바퀴 둘러보고 삼천포에서 동호회원과 만나 점심식사며 자전거 이야기들 그리고 기념촬영!  자전거를 같이 하는 한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만 또 생면부지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의 호의를 냉큼 받아 버린다.
   오전에 너무 시간을 지체 했다. 광양까지 갈 것을 생각하니 몸보다 마음이 더 서두른다. 삼천포대교를 지나고 창선대교를 건너 남해 섬에 들어선다. 남해 보리암을 들르면 한 시간이상 돌아가는 길이지만 그래도 핸들을 돌린다. 몇 주전 보리암에 다녀온 동호회원에 의하면 가파른 오르막만 4km가 넘는다는데... 가끔 햇살이 반짝이고 날씨가 조금 따갑게 느껴진다. 각오를 새롭게 하고 물통을 채우고는 곧바로 콘크리트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처음 시작부터 오르막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곧장 뻗어 있는 오르막이 자꾸만 업 힐 의지를 꺾으려 한다. 기어비는 금방 1:2까지 떨어지고 바닥만 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른다. 고개가 나를 위해 내려와 주리도 없고 어차피 이렇게 내가 올라가야 하는 것을... 벌써 웃옷은 땀으로 축축 늘어지고 고개를 들 때마다 이마엔 보석 같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가끔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들려오는 응원소리가 그나마 나를 위로한다. 물통도 어느새 바닥이 드러나고 오르고야 말리라던 의지가 모무함이 아닐까 의문을 가질 즈음 멀리 정상이 보인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본다. 뚝뚝 떨어져 산산이 부서진 보석 같은 땀방울들이 내가 지나온 바퀴자국을 대신한다. 어느새 햇살은 간데없고 주위는 자욱한 안개로 가득하다. 신비감마저 느껴진다. 만약 하늘로 오르는 길이 있다면 아무래도 이런 길이겠지...  아! 지금 여기가 별유천지 비인간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혼자 여행 하면 외롭지 않냐 그리고 무슨 재미냐... 그런 물음은 언어의 혼용에서 온 오해가 아닐까? 여행과 놀러가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 물론 놀러간다는 의미에서 혼자는 외롭고 재미없는 고행일지 모른다. 그리고 자기 동력만으로 목적지까지 이동해야 하는 자전거여행이라면 더욱 힘든 고역일 것이다. 그러나 놀러간다는 의미가 아닌 다른 무엇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치가 있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닐까.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중에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내 의지대로 하루를 마감할 수 있는 날이 과연 며칠이나 될까?  먼 훗날 돌이켜 생각할 때 젊은 날 열정을 쏟아 부은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없었다면 또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나를 떠날 수 있게 했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한 나의 일상 탈출은 계속 되지 않을까.

   애초부터 나에게 그런 행운은 없었던 것일까. 보리암 절경을 자욱한 안개에 묻어두고 하산을 서두른다. 얼마를 내려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햇살마저 눈부시다. 어느새 바위산의 말끔한 자태를 드러내고, 밑에서 올려다본 보리암은 하얀 솜사탕에 머리를 박고 있다.
   벌써 4시!  남해읍을 지나 남해대교까지 거의 레이싱 모드로 달린다. 홀로 레이싱은 언제나 고달프다.  보리암을 오르며 너무 무리한 탓일까.  아니면 레이싱 모드의 부담 때문일까. 서서히 엉덩이가 아파온다. 경상과 전라의 경계 섬진강을 앞에 두고 속도가 뚝 떨어진다. 속도계를 보니 그렇게 달려온 거리가 130km! 또 얼마를 달려 친구와 통화하니 밤 11시 퇴근이란다. 친구 녀석이 미리 잡아 놓은 모텔에 짐을 풀고는 그냥 쓰러져 버린다.

* 여정 : 고성 - 삼천포 - 보리암 - 남해읍 - 광양
* 라이딩 거리 및 순 라이딩 시간: 138.6km  5시간 27분

세째 날(2005. 6. 17 : 금요일)

  아침 9시!!
무엇에 놀란 듯 눈을 뜨니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하다. 아직도 술기운에 어질어질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지난 밤 네가 한일을 나는 알고 있다’는 듯 현장은 잘도 보존되어 있다.  볼링 핀처럼 여기 저기 널려 있는 맥주병이며 잡동사니들...  간밤에 악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1시 넘어 친구 녀석의  전화를 받고 나가 시작된 술자리는 몇 번을 거쳐 모텔까지 이어지고... 어릴 적 옛이야기며 살아가는 이야기들... 점점 약해지는 통제력과 무감각하게 흐르는 시간들... 어느새 창밖으로 훤히 먼동이 터온다. 이 여행을 여기서 끝낼 작정이 아니라면 난 지금 자야 한다. 그러나 녀석은 아예 시간의 흐름조차 귀찮은지 커튼을 쳐버린다. 더 이상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매일 울리는 6시 알람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게 아닌데... 어떻게 떠나온 여행인데...  녀석도 이제 내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때문일까 더 이상 만류하지 않는다. 그렇게 침대에 쓰러진 기억만이 아련하다.  

  9시! 아직 늦지는 않았다. 일단 떠나야 한다. 파김치처럼 늘어져 있는 녀석에게 메모 몇 자 남기고 모텔을 빠져나온다. 가까운 해장국집에서 술로 꽉 차 있을 위장 속으로 모래알 같은 밥알들을 밀어 넣는다. 이런 몸 상태로 계속 강행을 해야 하는지 자꾸 회의적인 자문만 쏟아진다.  다시 돌아가 그대로 침대에 눕고 싶다. 그러나 한번 시작하면 그대로 빠져버리는 속물근성이 또 나를 자전거에 오르게 한다.
  몸이 피곤하니 속도가 나지 않는다. 큰 오르막은 없지만 자전거를 탄다는 자체가 지금은 고역이다. 광양읍과 순천에서 동호회원과 잠깐 만나기로 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귀찮다.  문자로 사정상 만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게 됐다는 말을 남기고 순천을 지나 낙안읍성으로 향한다. 그렇게 달려온 거리가 50km를 넘어설 즈음! 쏟아지는 졸음에 도저히 더 이상 폐달질이 안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다.  어느 이름 없는 쉼터에 눕자 나락의 늪으로 빠져든다.

    추락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오르려는 욕망은 커져만 가는 것일까. 그리고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할 때 다시 시작이 보이는 것일까.  2년전 양쪽 무릎수술! 걷기조차 힘든 스스로를 인정해야 하는 암담함! 그리고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으로부터 격리!  숨 가쁘게 지나온 지난날들이 왜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던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왜 그땐 그렇게 하찮게 느껴지던지... 그때 그런 암담함이 지금의 이런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욕구를 조금씩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때의 바람이 지금의 믿음으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 이 숨 막히는 공간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무기력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갇혀 있지 않으리.  아무튼 그땐 그랬다.

   찰라의 순간처럼 1시간이 지나가 버린다. 지나치는 차량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다행히 자전거며 배낭은 그대로다.  피곤을 향해 더 가까이 갈수록 휴식의 달콤함은 그 농도가 짙어지는 것일까.  잠깐의 휴식이 또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낸다.  취기도 조금은 가신 듯 한결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긴 고갯마루를 오르자 멀리 낙안읍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낙안 읍성을 들르기 위해 벌교로 향하는 직선거리를 포기하고 찾아 왔건만 조금은 실망스럽다. 큰 볼거리라기보다는 아이들 교육차원에서 한번정도 와볼만 하다. 특히 잘 보존된 초가집에 직접 주민들이 생활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계획대로라면 더 북쪽으로 올라가 송광사를 둘러보고 보성을 거쳐 장흥에서 숙박할 계획이었지만 지금의 몸 상태라면 송광사는 고사하고 장흥까지도 장담할 수 없다. 일단 벌교를 거쳐 보성을 목표로 정하고 자전거에 오른다. 벌교에 몇 년 전에 읽은 “태백산맥”의 소설 속 배경을 실제로 꾸며 놓았다기에 들르려던 계획도 귀찮은 마음에 그냥 지나친다.
  오늘은 햇살이 좀 따갑게 느껴진다. 그리고 어제부터 시작된 엉덩이 통증이 나를 괴롭힌다. 시간이 갈수록 휴식주기가 짧아진다. 내일 땅끝에 입성 하려면 장흥까지 가야하지만 지금은 그런 갈등을 겪을 몸 상태가 아니다. 간밤의 무절제한 폭음으로 인한 어두운 그림자는 해가 질 때까지 걷히지 않고 길게 드리워져 있다. 보성에 도착하니 5시!!!  이 몸으로 달린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금 내게 유일한 의미는 휴식이다.

* 여정 : 광양시 - 광양읍 - 순천 - 낙안읍성 - 벌교 - 보성
* 라이딩거리 및 시간 : 98.56km    4시간 32분


넷째 날(2005. 6. 18 : 토요일)


  아침 7시!!
어제의 힘들었던 기억을 떨쳐버리고 각오를 새롭게 한다. 보성에서 장흥으로 직접 가는 국도가 지름길이지만 보성 녹차 밭을 가기 위해 해안도로로 우회한다. 체력이 많이 회복된 때문일까 녹차 밭까지 20여km를 쉼 없이 달린다. 보성(寶城)을 더 보성답게 하는 것은 녹차 밭이 아닐까. 그러나 그런 명성에 비해 찾아간 녹차 밭은 규모면에서 조금은 실망스럽다.  최소한 몇 만평은 될 것이라는 내 기대가 너무 컸던가.  진입로부터 쭉쭉 뻗은 외래수종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막상 녹차 밭을 찾은 느낌은 겨우 이정도... 얼핏 생각에 녹차 밭보다 쭈쭈 빵빵하게 뻗은 저 이국적인 나무들이 보성 녹차 밭의 명성을 배가시키고 있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장흥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훨씬 더 규모가 큰 녹차 밭엔 그런 나무가 없으니 관광객도 없다.
  장흥을 지나 강진까지 높은 고갯마루 하나 없이 시원스레 뻗은 4차선 도로를 30km/h이상의 속도로 신나게 달린다. 충분한 휴식 때문인지 마음이 급한 때문인지 폐달을 밟는 대로 가속이 붙는다. 이렇게 체력소모 없이 달릴 수 있을 때 거리를 벌어 놔야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진을 조금 지나 18번 국도로 들어설 즈음 그동안 참고 있던 가쁜 숨을 타이어가 한번에 뿜어낸다. 하필 이때 펑크라니...!
  한참을 헤매다 겨우 겨우 수리를 마치고 도로변 기사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남도음식은 바닷가라 그런지 대부분 짠 편이지만 정갈하고 맛있다. 기사식당 백반을 시켰더니 오천 원에 반찬가짓수만 열여덟!  다시 연료탱크와 물통을 채우고 해남을 향한다. 이런 속도라면 해 떨어지기 전에 충분히 땅끝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완도입구 남창에 도착하니 4시!!  완도를 앞에 두고 그냥 지나치기엔 그 유혹이 너무 고혹적이다. 2시간에 완도를 일주할 수 있다면 8시까지 땅끝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도 없으니 더 가보고 싶다. 완도대교를 건너 관광안내소에서 안내책자를 받아들고 방문할 곳을 확인하고... 드라마 해신 때문인지 도로변엔 온통 “해신”이란 글자가 덕지덕지 붙었다. 매스컴의 위력을 실감한다.  
  또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 나를 괴롭힌다. 해안가 맞바람은 내륙의 바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속도라면 2시간 완주는 어림도 없다. 그렇게 맞바람을 안고 가다보니 “해신”촬영 세트장이 나타난다. 옛날 나룻배며 바닷가 거리를 재현한 세트장!  꽤 많은 관광객이 북적거린다. 시간이 자꾸 나를 압박한다. 완도읍까지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맞바람은 어느새 순풍이 되어 나의 등을 밀어준다. 쾌속이다.
  일주를 마치고 처음 출발지 남창에 도착하니 6시 20분!!! 예상보다 20분 늦었다.  땅끝으로 향하는 지방도는 차량도 별로 없고 조금은 고독한 레이스!  앞 뒤 깜빡이만 믿고 밤을 달리기엔 너무 위험하다. 해가 지기 전에 땅끝에 도착해야 하는데 야속하게도 서녘 해는 벌써 멀리 산등성 너머로 가라앉고 만다.  땅끝에 가까워지자 자전거 여행과 도보 여행하는 사람들을 몇 팀 만난다. 나와 비슷한 짓거리를 하는 사람들! 말이 없는 대화를 나누듯 서로 손을 흔든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이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중요할 뿐...  멀리 전망대가 보이고 땅끝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아! 땅의 시작! 희망의 땅끝!』
‘그래!!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구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는 지금까지 달려온 것일까.

* 여정 : 보성 - 녹차밭 - 장흥 - 강진 - 완도 - 땅끝
* 라이딩 거리 및 시간 : 171.9km    7시간 12분


마지막 날(2005. 6. 19 : 일요일)

  마지막은 항상 아쉬움이 남는가 보다. 떠나올 때의 두려움이 어느새 아쉬움으로 변해 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를 생각하니 또 다른 두려움이 다가오는 것은 왤까?  떠나올 때나 지금이나 맘속에 욕망들을 무엇 하나 덜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일상으로 되가져 가기 때문이리라. 조금은 긴장이 풀린 때문인지 아니면 어제 무리한 탓일까. 늦잠에 취하듯 아침을 먹고 짐을 챙긴다. 배낭 무게가 출발할 때보다 많이 줄었지만 더 무겁게 느껴진다. 엉덩이 통증도 한계에 다다른 듯 이제 안장에 오르는 것조차 힘겹다.
  오늘은 진도까지 70km정도를 이동, 진도에서 청주까지 버스로 이동할 예정이다. 진도가 가까워질수록 주위 산이 낮은 언덕으로 변해간다. 특색 없는 도로가 더 지겹게 느껴진다. 가끔 이름 없는 쉼터에서 알량한 사색에 빠져보기도 하며 여행의 끝을 준비한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라 했던가. 이 짓거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진도대교에 도착하니 12시. 대교 아래를 내려다보니 용트림 하듯 휘감고 돌아가는 엄청난 물살이 바다 같지가 않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현기증이 난다. 대교 밑에선 삼겹살 파티가 한창이다. 이런 대교 밑이나 동네 다리 밑이나 다리가 만들어 내는 한국만의 미풍양속이랄까.*^^*  전망대에 올라 멀리 대교를 내려다본다. 그동안 넘나들었던 연륙교들! 거제대교, 삼천포대교, 남해대교, 완도대교, 진도대교! 모두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고 느낌이 다르지만 그중 진도대교가 주위경관이며 웅장함이 가장 맘에 든다.    
  진도읍에 도착하니 3시!  
그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나의 자전거 여행은 진도에서 그렇게 막을 내린다. 여기 남해의 서쪽 끝에서...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땅 끝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듯, 여기가 남해의 서쪽 끝이 아니라 서해의 남쪽 시작이라는 것을...

* 여정 : 땅끝 - 진도대교 - 진도 - (광주) - (청주)
* 라이딩 거리 및 시간 : 76.4km    3시간 22분

  그렇게 훌쩍 떠날 수 있는 내가 부럽다고 한다. 아니 그럴 수 있는 자유가 부럽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이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는 말처럼 자유인이라서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라, 떠나니까 자유인이 되는 건 아닐까.  


○ 출연 : 1967년식 엔진, 자전거, 휴대용펌프, 공구셑, 반장갑, 상의 3, 반쫄바지 3, 윈드자켓, 티셔츠, 반바지, 헬멧, 양말 3, 휴대폰 및  충전기, 칫솔, 반수건, 손수건, 지갑(신분증, 현금카드), 비상금, 필기도구, 고글, 속도계, 심박계, 깜빡이, 물통, 전국지도, 관광안내지도, 클립신발, 두건, 비옷, 배낭, 썬크림, 디카.
○ 라이딩 누적거리 및 실 라이딩 시간 : 594.06km   24시간  20분
○ 총 소요경비 : 285,000원/4박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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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떠날 수 있는 자유...느낄 수 있는 자유...^^
    잘 다녀오심을 축하드립니다...
  • 어떤자가 그럽니다.. 일상을 등지고 일상을 묻고 .. 자유를 향해 떠난다고.. 그는 일상에 대한 생각없이 자유를 즐깁니다... 그 순간... 단 며칠이라해도... 당신은 용감했습니다.
    여행은 혼자이어야 했고, 갈길은 일상으로 부터 먼곳 이었습니다...
    어떤 자는 무기력합니다.. 그 자는 슬퍼했습니다.. 자신은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는 깨달았습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마음으로 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던 것입니다.. 나약 함입니다.. 그것을 이겨낸 자는 .. 맛볼 수 있음에 행복합니다^^~~~
    당신은 행복합니다!!.. 저도 행복해지려 합니다~~!! 같이 행복해 질수 있는 현재이며 다음 .... 또 미래를 기약하며 살아갑시다...

    ps..형편없는 글솜씨이지만 ...제 생각이 이끄는 곳으로.. 전 글을 통해 다녀왔습니다..~~!
    그곳이 어디든.. 전 다녀왔음에 행복합니다...
    서울에 사는 20살 청년입니다... 청년이라 하기 부끄럽네여^^.아직 진정으로 살아본 날이 없기에.. 그것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생각을 통한 도전이란 것이 없었기에..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전 .. 느꼈습니다... 내가 자유를 통한 도전, 도전을 벗삼은 자유를 느껴보지 못한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제가 소유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찾았네여^^..
  • 장하시네요~~~
  • 글 잘 쓰시네요..^^& 서두에는 못쓴다고 했는데..

    투어를 즐기시는분이 한분 또 계시다는 것에 기쁩니다.
  • 글솜씨가 대단하시고,
    이렇게 탐방하면서 잔차여행하는 게 너무 부럽습니다. 언젠가 저도 하렴미다.
  • 헉 하루에 저렇게 170km씩 달리실 수 있다니.. 장하십니다.. 부럽습니다..^^
용용아빠
2024.06.17 조회 64
tre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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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ke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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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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